[20240725] (누구도) 스스로를 구하진 못한다.
당신이 바다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 하는게 나을 것 같네요.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결정론자입니다. 운명론자라고 하는 편이 낫겠네요. 왜냐하면 저는 아주 유치하고 자기 위주인 방식으로 운명론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자신이 운명론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주 어릴 때였습니다. 기도를 하면 누군가가 저에게 맘에 드는 장난감을 사줄거라고 믿을 때였으니까요. 저는 어린만큼 사물을 그렇게 주의깊게 보지 않았고 생각을 여러 번 하지도 않았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쉽게 바뀌나요.) 그 나이 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어 여러가지를 세상과 어른들에게 기대하곤 했는데 그만큼 간절했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어쩌구 로봇 자동차를 받게 해주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해하게 해주세요, 오늘은 맞지 않게 해주세요, 어른들이 저에게 친절하게 해주세요 같은 것들 말입니다. 바라는 것이 많은 만큼 실망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실망했던 날. 혼자 흙투성이가 되어서 놀이터에 앉아서 울던 날. 저는 제가 바랐기 때문에 그 일들이 일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것들을 기대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머릿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 어떤 훌륭하고 강력한 존재가 그걸 엿듣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버린다고. 누구에게도 그런 생각을 말할 순 없었지만 어린 저는 한동안 그 생각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심부름을 할 때 계산대 앞에 서서 돈 계산을 겨우 겨우 할 정도의 나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피했습니다. 작은 행운이라도 있길 기대하면서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생각을 다짐처럼 계속했습니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무엇일까요? 핏줄이라든가 태어날 때의 별의 위치라든가. 하여튼 그런 것 일까요? 스무살이 좀 지나서 저는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라고.
그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누군가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거나. 우리의 노력이나 성품이 곧 운명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저는 아주 오랫 동안 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우리의 운명이 곧 우리 자신이라는 저의 말이 맞다면. 저는 제 운명을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있었던 셈이겠습니다.
당신은 어떠셨습니까? 운명을 믿으시나요? 아니면 별로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사람들은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고 주변에 사람들이 친절해서 무슨 일이든 잘 풀린다고 말하더라고요. 또 어떤 사람은 자기에겐 행복 같은 게 사치이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선 안된다는 사람도 있었고요. 어느 쪽이든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나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간에.
가끔, 운명 같은게 어디있어? 운명은 내 스스로 개척하는거지 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틀렸다는 얘길 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그냥,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가끔 불안해 질 때가 있지 않나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 보다는 누구든 거대한 손이 당신을 조종하여 앞으로 당신에게 닥칠 불행을 피하게 해주고 앞으로 가게 하고 있다고 믿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하지 않나요?
운명의 진실이 어떻든 간에 삶은 여간 잔혹한게 아니고 그걸 받아들이며 계속 살아가기란 쉽지 않잖습니까.
저에게 일어났던 운명론적 이상한 일들을 몇 개 더 말해볼까요? 저는 이상하게 말입니다. 연애를 하던 도중에 이성과 단 둘이서 술을 마시게 되면 1,2주 내로 스마트폰이 박살나곤 했습니다. 처음엔 친구들과 하던 그냥 농담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진짜로 그렇게 되어서 휴대폰을 소중히 다루게 되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한 네 번 정도 연속으로 (그들끼리)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는 농담이었는데 두 번 정도 연속으로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던 이후로 세번째 상대에게 혹시 고등학교 ㅇㅇ인가요? 라고 물어보고 난 뒤로는 농담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저희 동네 고등학교냐고요? 아뇨 전혀 아니었어요.
저는 그래서 그런 묘한 징크스를 깨주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당신은 저의 징크스를 깨주었어요!”라고 고백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 무슨 로맨틱 코미디 같은 상황이래요)
항상 여자친구 혈액형은 B형이었던 저한테(네 진짜 이해 할 수 없죠?) 어느날 데이트 상대가 저는 AB형인데 왜 그런걸 물어보는거죠? 장기라도 빼가려고 그러시나요 라고 말 할 때 저는 정말 진심으로 활짝 웃었답니다. 당신 장기는 필요 없어요 저는 A형이거든요. AB형은 A형한테 수혈도 못한다니까.
그 외에도 저는 온갖 징크스와 운명론에 대한 이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제 약점이니까.
사실 위에서 얘기한 것들은 모두 이미 깨져버린 운명들이랍니다. 말하고 보니 판타지 소설 같고 멋있네요. 저는 AB형 여자친구도 있었고 O형 여자친구도 있었습니다. 진짜 많이 좋아했어요.
스마트폰이 깨지는 건 지겨워서 연애를 하던 도중에 이성과 단 둘이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건 뭐라고 말하기 그렇네요. 근데 아시잖아요 액정 수리비는 정말 비싸답니다. 테스트해보고 싶지 않아요.
제 첫번째 운명론적 이론은 깨졌냐고요? 그 뭐라고 해야하나. 요즘에도 자주 생각하긴 해요. 기도 같은 거죠. 제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들을 상상하고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대응하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건설적인 것 같죠?
하지만 이제까지 몇 번 제가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들을 생각하고, 또 그게 이루어지는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진짜 운명에 얻어맞은 것처럼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머릿 속으로 나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는 것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릿 속으로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를 행복한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아시잖아요. 저는 정말 오래된 탑처럼 먼지가 되어 무너지고 말겁니다.
얼마 전 저는 혼자 땡볕 아래 공원에 앉아서 아무 생각도 안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말 말도 못하는 시간낭비를 한 셈이었죠. 그것도 섭씨 32도가 넘어가는 폭염 아래에서 말이죠. 그러다가 문득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생각이 미쳤는데.
뭐냐면. 대학교 시절 아직 신촌에 멀티 플렉스가 아닌 극장이 있던 시절에 친구들과 2:2로 데이트를 했던적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진짜 재미로, 순전히 재미로 극장 안에 있던 사주팔자 머신(하하 진짜 20세기 같은 이름이다)에 각각 몇천원씩 넣고 사주 팔자를 보았는데. 다른 친구들은 다 멀쩡하고 평범한(두뇌가 뛰어나고, 관운이 있으며...외모가 뛰어나 결혼운이 있으며...어쩌고) 사주가 나왔는데 이상하게 저만 아주 이상한 사주가 나왔는데 거기 뭐라고 써있었냐면.
"많은 사람을 구하나, 스스로를 구하진 못한다."- 라고 써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엄청 어색해져서 잡담을 하다가 그냥 영화를 보러 들어갔는데. 무슨 영화를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이상한 문구만 기억나지.
그리고 웃기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 군대에 갔을 때 전산실의 친한 선임에게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얘기해줬더니. 얘기를 심각하게 듣고는 잠깐만 기다려봐 그러고는 사주팔자 프로그램(아니 뭐야 그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며 한 번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딱히 안 할 이유는 없었어서 해보았는데 전에 극장에서 했었던 사주랑 전체적으로 하나도 맞는 것은 없었는데. 끄트머리에 비슷한 문장이 있더라고요.
"사람들을 외로움에서 구하나, 스스로를 구하진 못한다."
선임에겐 별 말 하지 않고. 아 지난번이랑 하나도 안 똑같네요. 하고 웃었습니다.
그 뒤로도 사주는 꽤 보았습니다 재미있으니까 장난으로 사주를 본 적도 있고. 전문 역술인에게 돈을 내고 본 적도 있고요. 저는 물을 타고난 사주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제가 전 여자친구와 결혼했다면 멀지 않아 죽었을거라고 하더하고요. 박수를 치며 웃었습니다.
사주 팔자 머신으로 운세를 본 뒤, 그 뒤로 몇년 동안. 아니 십 몇년 동안 저 문구가 생각납니다. 가끔 무슨 문구인지 생각을 해보는 때도 있습니다. 말도 못하는 시간 낭비이죠. 이젠 정말로 저 문구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니까.
그런데 말한 것 처럼 저는 운명론자, 그것도 대단히 어리광쟁이인 운명론자입니다 당신도 익히 알다시피요.
그래서 제 유일한 친구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서, 아니 그렇게까지 오래 시간이 지날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어느날 당신이 바다에 다다르게 되면. 검고 먼 잿빛의 바다와 바다를 따라 끝이 없는 백사장 사이 어딘가에
혼자 앉아있을 저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때 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라면 저를 알아 볼 수 있을테니 잠시만 제 옆에 같이 앉아주세요. 그리고 제 어깨를 두드리고 눈을 바라보며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아무리 먼 훗날이 지나도 제가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도록.
그것이 저의 부탁입니다.
24년 7월 25일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