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gh as a kite_(여행기)

[20241218] 24년 12월 도쿄_아메카지를 둘러싼 모험

Masked 2024. 12. 18. 00:28

도쿄에 굳이 여행을 갈 필요가 있을까. 출장을 도대체 몇 번을 왔을까. 어림잡아 50번은 넘는다. 예전 여권을 찾아보면 확실히 몇 번 인 지 알 수 있을텐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 출장을 가는 날엔 대체로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다 공항 리무진을 타기 때문에 버스에 타기 전부터 늘어져있다. 짧은 비행인데도 물걸레처럼 피곤해져서 심야의 하네다 공항에 내리면 며칠을 체류하든 기내 사이즈 캐리어에 정확히 맞춘 짐을 끌고는 전철을 타고 시나가와 역에서 내린다. 또 여기구나 하고 다카나와 출구의 엉망인 보도블럭 위에 질질 끌리는 캐리어 소리를 들으며 사쿠라자카를 올라 다카나와 호텔에 들어간다. 오래되고 조용한 호텔이라 직원들도 말이 없다. 데스크 앞에서는 체크인하겠습니다. 라고 짧게 한 마디를 할 뿐이다. 또 오셨군요 라든가 오랜만입니다. 같은 말은 없다.

내가 한창 다닐 때는 15만원 정도면 일박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충동적으로 호텔을 잡으며 보니 조식도 포함하지 않았는데 일박에 25만원이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럼 숙박 예산이 안되잖아 넌 일본 출장 갈 때 뭐 도요코 인 같은데 묵니?하고 묻자 아직도 일본 출장을 가야하는 후배가 표정을 구긴다. 그렇죠 뭐. 시나프리 타워(시나가와 프린스 호텔의 4개 중에서 가장 가격이 싸고, 좁다) 정도는 되긴 해요 엄청 좁아서 그렇지(그렇다 좁다). 전에 일본인 동료 하나가 구겨진 채로 밤을 새며 일만하다 호텔에서 나온 나를 보며 제가 고향에 있을 때 꿈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건 도쿄에 출장을 와서 프린스 호텔에서 묵는거였습니다. 시나프리 호텔 방은 니네 집보다 좁을걸? 하, 저희 집보다 좁은 호텔은 없어요. 후에 그가 자기 집을 찍은 방을 보여주었는데 실제로 호텔보다 좁았다.

맙소사. 도쿄를 여행으로 가다니. 잘 기억나지 않는 기억들을 잘 떠올려보니 서너번 도쿄를 여행으로 온 적이 있긴 하다. 한 번은 좀 긴 여행기를 쓴 적도 있다. 그 때는 그 당시의 여자친구와 사귀기 전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단계였기에. 나는 여행기란 형태로 아주 긴 러브레터를 쓴 것이었다. 어쩜 그럴 수 있냐고? 아니 알게 뭔가 여긴 내 블로그고 내가 맘대로 아무 거나 적는 곳이다. 단지 이 블로그를 읽어주는 독자 여러분에게, 그리고 그 여행기를 읽은 그 당시의 여자친구 후보(대학교 후배였다)에게 아무 설명도 안 했을 뿐이다. 하지만 혹시 그 여행기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그걸 러브레터가 아니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도쿄에 가긴 해야겠군 하는 생각을 한 건. 4월 쯤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여자친구가 있었고(맙소사) 나는 여자친구와 하고 싶은 액티비티를 모아서 리스트해두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에 가을부터 우에노의 서양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모네전에 여자친구를 데려가고 싶었다. 수련 시리즈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얘기 할 필요도 없겠지. 수련을 보여줬을 때 여자친구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나는 처음 수련 시리즈 중 하나를 보았을 때 안절부절 못하며 전시실을 나갔다 들어오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십 년은 지난 일인데도 나는 아직도 그 때의 감정에 대해서 정의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언어로 수련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나는 그 마음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애정 중의 하나라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는데. 늦가을 쯤 여전히 여자친구는 없고. 매달 카드값을 400 쯤 쓰고 있다가 모 항공사의 마일리지가 올해 만료 된다는 것을 깨닫고 별 고민 없이 겨울의 도쿄 비행기를 예매했다. 별로 좋지 않은 시기에 비행기를 예매했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마음에 드는 전시들은 다 끝나거나 신년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쿄에 갈 때면 항상 휴관을 하는 네즈미술관은 이 여행시기에도 휴관이었다. 그래 도쿄에 가도 할 게 없다. 애초에 나는 홍콩이나 교토에 가지고 있는 애틋한 감정이 도쿄에 없다. 그냥 한국에서 가까운 메갈로폴리스 중 한 곳일 뿐이다. 일로나 가던 곳인데 거기를 여행으로 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이왕 이렇게 된거 아메카지를 좀 해볼까 싶었다.

아메카지가 뭐냐면. 아 왠지 이 설명을 하는 것 부터가 좀 수치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 아메리칸 캐쥬얼을 일본인들이 대충 섞어버린 조어로. 실용성을 강조한 미국의 캐쥬얼, 가령 워크 자켓이나 리바이스 진즈 같은 것들을 일본인들이 재해석한 패션을 의미한다. (내 설명이 어딘가는 틀렸을게 뻔하니 제발 다른 곳에서 정확한 정의를 알아봐주기 바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스타일에 꽤 열심이라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한물 간 20년대나 30년대의 청바지들도 일본의 로컬 업체들이 제조설비들을 일본에 수입해와 그 스타일들을 복각해서 판매하고 있어서 이름이 아메리칸 캐쥬얼이지, 실제로는 일본의 스타일이다. 미국의 위세와 문화가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절 세계인들이 접한 최초의 미국 문화, 미국 스타일에 대한 동경이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데.

내가 아메카지에 마음이 들었던 점은 옷이 튼튼하고 엄청나게 실용적이어서 어릴 때 부터 옷의 방어력을 중시한(나의 실친들은 알고 있다. 왜 이런 옷을 샀어 라고 물어보면 주머니가 많아 라든가 튼튼해서 방어력이 좋아 같은 소리를 정말로 한다.) 나에겐 너무나 만족스러운 패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트렌드는 트렌드라 언젠가는 유행의 저 멀리로 사라지겠지만. 뭐 어떤가 튼튼하고 좋은 옷은 10년도 20년도 입는다. 한 번 사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 까지 입는다고 생각하면, 어 아니다 내가 할머니가 될 일은 없지 하여간 요지는 중년의 남자가 트렌드에 좀 벗어나는 옷을 입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일은 없으니. 최근 한국에 아메카지가 각광받고 있는 지금 뻔뻔스럽게 그 트렌드에 올라타서 장비를 갖추겠다 이거다.

회사의 가장 친한 동료 중 하나인 부장님께 도쿄에 좀 다녀오려고요 라고 하자. 부장님은 자연스럽게 도쿄 가서 뭐하려고라고 물어보셨는데. 나는 그만 경솔하게도 아메카지를 좀 하려고요. 라고 대답했다. 내 잊지 않으리다. 내가 가장 친한 사람들 몇 명에게 도쿄 여행의 목적을 아메카지를 하는 것으로 말했더니 가장 심하게 비웃은 사람들이 아래의 사람들이다.

회사 선배이자 친한 선배 ㅅ부장님.
대학교 신입생때부터 내가 꾸준히 귀여워한, 현재 패션 유통사에서 일하는 후배ㅎ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아는 동생ㅇ

셋이 얼마나 비웃었는지 여러분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ㅇ는 안부 전화를 하다가 말이 나왔는데 내가 평소에도 워크자켓 사고 싶당. 어쩌고 했기 때문에 그 날도 자연스럽게 아메카지를 좀 하려고 했더니 며칠 간 우울했다는 것은 거짓말인 듯 껄껄껄 웃기 시작했다. 내가 최대한의 침착함을 모아서 조용히해 개자식아 라고 말했는데도 아니 오빠 돌았냐구 껄껄껄 하며 한 5분은 웃은 것 같았다.

그리고 후배ㅎ는 밥을 먹다가 아메카지를 하려고 라고 하자. 말 없이 크로와상을 뒤적거렸다. 오빠가요? 라고 했던가 니가요?라고 했던가. 충격 때문에 잘 기억이 안난다. 나는 뭐라고 했더라. 왜 나는 안되니? 아뇨 그런건 아니고요. 그리고 크로와상을 계속 뒤적거렸다. 모모타로 진 같은거 있잖아 아 오카야마에 대한 애향심이 솟아나는 바지죠 이러면서 후배는 딴청을 부렸다.

ㅅ부장이 제일 통렬하게 비웃었는데. 부자이자 왜인지 모르게 힙스터 스타일로 옷을 입고 다니는 나의 후배 J얘기를 꺼내며. 카레야 너 아메카지 하면 J된다. 라고 해서 나는 어리둥절해서는 부장님 제가 부장님한테 무슨 실수 했어요? 왜 그런 막말을 하세요? (오해 말기 바란다 나는 후배J과 정말 친하다) 라고 했는데. 부장님은 하여간 그건 진짜 아냐 카레야 도대체 왜 이래 이러고 성의를 담아 조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아메카지라는 말을 입에 담은 것 만으로도 이렇게 가장 친한 사람들 중 일부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내가 무슨 일장기를 온 몸에 두르고 다닌다고 한 것도 아니고 젖꼭지를 드러내고 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나를 비난하고 조롱했으며. 한국의 중년 남성인만큼 멘탈이 더럽게 약한 나는 엉엉 울며 일본 아메카지 브랜드들의 유튜브를 밤에 정독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내가 여행기를 작성하는 이유는 보통 더럽게 한가해서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기는 나의 복수를 담은 슬픔으로 가득찬 이야기이다. 나는 이 글을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작성하고 있다. 기대하기 바란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고 하였으나 나는 빠르고 뜨거운 인스턴트 복수를 원한다.

이것은 아메카지를 둘러싼 모험이다.

이 것도 여행기이기 때문에 일단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써야할텐데. 출발시점에서 나는 윤마치의 앨범 두 개 만을 다운 받았다. 이대로 가다간 12월의 윤마치 0.1% 배지는 내가 딸 것이 틀림없다.

윤마치 - <새벽에게>
윤마치 - Oh, Life 앨범 중 <항복>, <Lovers>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이자.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 말도 안되게 매력적인 이 아티스트는 23년에 발매된 이 두 앨범에서 묘한 시도를 하는데. 이전까지 OST 혹은 아이돌 앨범 B사이드 수록곡처럼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듣기 편안한 음악을 만들더니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음악을 통해 어떤 장면 - 심상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겠다 -을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재주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를 위해 한국어로는 정확하게 맥락이 이어지지 않게 느껴지는 보컬을 선보이는데. 이는 개별 언어에서 단어 의미보다 언어의 음악성이 보여주는 흐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게 아닐까 싶다.

이 여행기를 읽는 동안, 내가 주로 저 음악들을 들으면서 다녔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24년 12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