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책_(괴담 등 단편)

[20240726] 누구도 (우리를) 구하진 못한다.

Masked 2024. 7. 26. 23:12

(아래의 이야기에는 어떠한 진실도 없다. 진실이 있다면 아버지의 음악 취향 정도이다.)
 


...이런거 물어보는게 너무 쓰레기 같은 질문이지만 우리가 어떤 사이였지?
 
그러니까, 대단한건 아니고. 스마트폰에서 뭔가를 검색하려고 찾다가 우연히 네가 보냈던 문자가 검색에 걸렸어. "ㅖ"인지 "ㅕ"인지 하여튼 모음만 저렇게 쓰는 일은 별로 없잖아. 그래서 네 문자가 나왔어. 너 이상한 오타를 냈더라. 하여간 네가 저 문자를 보낸지 진짜 몇 년이나 지났더라.
번호는 있는데 이름은 지우지 않았고 문자를 주고 받은걸 보니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네가 누군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 이름을 지운 걸 보니 그렇게 좋은 형태로 관계가 끝이 난 건 아니었겠지만 굳이 문자를 지우지 않은 걸 보면 널 완전히 잘라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근데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두 세번 읽어보았지만 하나도 기억이 안나. 이제 몇년이나 지난 일이니까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만. 문자 타래를 지우려고 하다 보니까 네가 누군지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진>
같이 찍은 사진이 있으려나. 문자를 주고 받은 날 기준으로 앞 뒤 한 달 두 달 정도를 천천히 찾아보자 네가 있을수도 있어. 최소한 너랑 같이 있을 때 찍은 밥 사진이라도 있겠지. 너도 알지만 나는 사진을 좀처럼 지우질 않아. 사진이 없으면 어떤 일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게 되니까. 그거 알고 있어? 꿈은 보통 그냥 머릿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나쁜 꿈을 꾸더라도 그걸 말로 하거나 글로 쓰는 등 적극적으로 기록하려는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머리 속에만 담아두고 있으면 금방 잊어버린다고 하더라. 나는 그래서 너무 괴로운 꿈을 꾸게 되면 그걸 잊어버리도록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있어. 잠깐만 내가 너한테 이 얘길 했던가?
 
아 사진. 사진 얘길 하고 있었지. 나는 진짜 사진을 지우는게 힘들어. 사진을 지우면 진짜로 그 시간이 지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래서 내가 아주 싫어하는 기억들에 대해서는 일부러 사진을 더 지우는 적도 있지. 예를 들어 바람을 하도 피우던 여자친구 같은거 있잖아. 사진은 싸그리 지워버렸거든 그래서 몇년이 지나버린 다음에는 걔와 했었던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어딜 갔었는지 뭘 먹었는지 그런게 다 흐릿하고 사진 속에는, 예를 들어 수족관 앞에서 바다거북 흉내를 내고 있는 내 사진은 아주 어색하게 혼자 찍혀있지. 그 앞 뒤엔 무슨 일을 한건지 아무 것도 찍혀있지 않아. 아주 잘라내버린 것처럼.
 
너랑 사진을 찾다 보니까. 지금은 해외로 아주 가버린 친구와 찍었던 사진을 찾았다. 정확히는 그 친구를 찍은게 아니라 그 친구와 마지막으로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광고판을 찍은 사진이야. 웃기지만 그 광고판 사진을 보니까 그날 친구랑 무슨 얘길 했는지 내가 얼마나 걔를 좋아했는지가 다 기억나네. 의외라고? 나도 사람을 좋아하긴 해.
근데 너랑 찍은 사진은 없다. 사진을 찍지 않은걸까 아니면 네가 정말 싫어서 찍힌 사진을 모두 지운 걸까.
 
<음악>
뭔가 기록이 있다면 그냥 사소한 실마리만 있으면 네 이름이 떠오를 것 같아서. 그 당시 들었던 음악을 좀 찾아보고 있어. 알고 있지 않았어? 그 때만 해도 나 음악평론 블로그(가명으로)하고 있었을 때니까. 그 블로그 인기도 하나도 없었고 날려버린지 오래지만 그래도 트위터도 그렇고 여기저기에 계속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는 적어두었거든. 아마 그 때 쯤에도 어딘가 전세계 적으로 아무런 흥행 돌풍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힙합 레이블이나 락 밴드 음악이나 듣고 있었을거야.
그걸 들으면 네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까? 나 네 동생 이름도 완전히 까먹었거든. 네가 누군지도 잊어버렸으니 네 동생 이름이 기억날 리가 없지.
 
하여간 음악은 참 편리하지 않아? 그 때 듣던 노래를 들으면 그 때가 생각나잖아. 사람들이 그래서 유행가를 듣는지도 모르지. 나는 비틀즈를 들으면 항상 어릴 때가 기억나. 주말이면 아버지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곤 했는데 (대부분 할아버지 댁이었지) 아버지 취향이 모차르트 좋아하고 팝송만 듣고 그런 묘하게 속물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반쯤 잠이 들어서 꾸벅꾸벅 졸면서 비틀즈를 들었던 기억이 되게 많거든. 아버지의 비틀즈 앨범은 본인이 맘대로 편집한 본인만의 베스트 앨범이라서 비틀즈의 어떤 앨범을 들어도 조금씩은 아버지의 차를 타고 가던 그 밤의 생각이 나. 그래 너한테 이 얘기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한테 비틀즈 뭐 좋아하냐고 물어봤던가? 그래 그 때 처음 LHCB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페니레인 얘기도 한 것 같은데...그건 MMT거든. 근데 나 그 때 아직 20대였는데 왜 비틀즈 같은 얘길 했지.
 
아 근데 딱 너랑 연락 할 때 쯤 들었던 노래 확인해보니까 뜬금없이 한국 대중 가요인데? 심지어 리믹스 버전이고 이 가수의 이 리믹스가 실려있는 앨범은...애플뮤직에도 유튜브 뮤직에도 없어. 음 잠깐만 멜론 딱 한 달만 구독할게. 들으면 뭔가 기억이 나지 않을까?
 
<SNS>
아니. 지금 이 노래 일주일째 듣고 있거든. 적어도 백번은 들었을텐데 아무 기억도 안 나는데? 그냥 좋은 노래란 것은 알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음악 취향은 나랑 제일 잘 맞는구나. 나 아직도 네가 누군지 생각이 안나. 이름도 생각이 안나.
이럴 때는 일기장 같은게 있으면 편할텐데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아. 그 뭐냐 일기를 쓰면...나중에 내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었을때 사람들이 그걸 다 읽을거 아냐. 걱정도 팔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진짜로?
 
근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진짜 궁극의 해결책이 있는데. 내 SNS를 검색하는 거야. 그 날짜에 해당 하는 글을 읽다 보면 뭔가 ...힌트라든가...그런게...아니 근데 나 진짜로 SNS는 예전에 엄청 많이 해서 온갖 블로그를 다 했거든.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을 때 마다 하나씩 태워버려서 지금에야 남아있는 계정이 없지만. 웃기게도 카카오스토리에는 내가 좋아한 그림(그것도 순수 회화만)을 간간히 올리다 보니 없애질 않았고. 인스타랑 트위터도 그대로 남아있어. 몇 번이나 없애려고 했는데 안 없애고 그래도 있다고. 너 그 강남에 강남대로 가기 전에 오른 쪽 골목으로 돌면 있는 건물 3층인가 4층에 있는 파스타집 기억나? 엄청 넓고 사람은 별로 없는데 칵테일을 싼 가격에 먹을 수 있어서 나 거기서 술 엄청 마셨는데. 너랑 몇 번 가지 않았나? 가서 술만 엄청 마신 것 같은데. 거기 사진 정도는...어 아냐 나 거기 너무 어두워서 사진 찍는거 포기했었는데. 사진이 없으니 인스타에 뭔가 남아있을리는 없고. 잠깐만 지금 네가 기억날 것 같았는데.
...
아니 모르는척 하는게 아니고 진짜로 기억 못했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당시의 나에게 너는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나봐. 화났어? 근데 내가 정말로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어쩔수 없는거야. SNS를 검색하는건...그만두자 진짜 끝도 없는 일이고. 특히 나 내 텀블러 백업해둔 파일 그거 열면 안돼. 아니 진짜로 거기에 네 이름이랑 내가 찍은 네 포트레이트가 있어도 안 열어볼거야. 진짜 안 열어볼거냐고? 어 없는거 알고 있거든 거기 네 이름은 없어.
 
<이야기하기>
그러니까 나는 이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좀 더 노력을 하면 네가 나에게 했던 말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건 네가 남긴 문자를 볼 때 부터 알고 있었어.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을 것 같은 시간에 보낸 문자라든가. 내가 아무 대중 없이 보낸 문자에 후다닥 보낸 답이라든가. 더럽게 재미없는 얘길 하는데도 웃어준거라든가. 그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너를 내가 통채로 잊어버렸다는게 결국 내가 너에게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걸 알수 있어서. 몇년 아니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갑자기 네가 누군지 궁금해졌어.
다른 무엇보다. 네가 다시 친구를 해달라고 보낸 문자에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할 자격이 없어.
 
너를 만나지 않게 된 후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어. 친구도 많이 생겼고 많이 생긴 만큼 많이 잃었지. 되도 않는 농담을 하면서 살았고 쓰지 않아도 될 글들을 많이도 썼지.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었어 네가 걱정했던거랑 다르게 말야. 왜? 내가 그렇게 세상 끝날까지 사람을 싫어하면서 살 줄 알았어? 
 
너에게 화를 낸 건. 그래 온당하지 못했어. 나는 항상 내가 이성의 화신이라도 되는 듯 굴지만 전혀 그런 사람이 아냐. 형편없는 사람이지. 너에게 그렇게 화를 내선 안되었었는데. 네 상처 받는 얼굴을 봤을 때 그만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 뒤로도 똑같은 실수를 몇번이나 했어. 그게 어떤 위로도 되지 않겠지만.
 
너는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었고. 아마 지금 이 마음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 둘을 구할 수는 없을거야.
...그래도 이 멍청아 내가 널 진짜로 잊어버리기 전에 나한테 뭘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지 그랬어. 나는 아직도 너를 생각하고 있는데 이 밤에 너는 뭘 하고 있냐고.
 
그리고 어쩌지. 나 이제서야 네 이름이 기억났어.
 
24년 7월 26일 비가 오는 날 밤에 쓰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