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책_(괴담 등 단편)

[20240802] Dearest you

Masked 2024. 8. 2. 14:39

 
[나는 집의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있다.
이하의 이야기는 단 한 줄의 진실도 없다고 쓰려다가 관둔다. 지금 쓰는 이야기는 한 남자가 더위에 정신이 나가 망상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이마가 녹아버리 것 같은 여름이다. 남자는 땀을 흘리며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 햇볕이 얼마나 쎈지 그 얼굴에는 그늘 하나 보이지 않는다. 풀밭에 발목이 쓸리고 땅을 밟는 감촉은 점점 남자를 땅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남자는 걸어갈수록 탈수증을 일으켜 정신을 잃어간다. 더위에 익어가는 남자는 망상을 보고 환청을 듣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음 같았다. 잘 들리지도 않던 소리는 점점 더 확실한 형태와 무게를 가지고 들려오기 시작한다. 남자는 환청이 명확해지는 걸 그대로 둔다. 그러다 말겠지. 남자에겐 다음 장소로 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환청이 명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환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씨 ■■씨 내 말 들려요?
 
남자는 땀에 축축해진 목을 움츠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목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다시 고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지마요. 뒤돌아 보면 내가 거기에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잖아요.
 
남자는 뒤돌아보는 자세 그대로 멈춰서서 소름이 끼치는 걸 느낀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뒤를 돌아보는 선택이 있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는다. 눈썹 위에 맺혀있는 땀을 닦고는 그대로 가던 길을 다시 걸어간다.
 
웃는 소리가 들린다.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목소리는 남자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미 몇 년 전에 만났었던 연인의 목소리이다. 햇수를 세보니 만났던 때로부터 5년 아니 6년은 된 것 같다.
 
응? 뭐라고요 6년이나 되었다고요? 목소리가 물어본다.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세봐요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못 들었어요.

망상은, 그러니까 목소리는 그의 생각에 끼어들어 물어본다.

세상에 그럼 님 도대체 몇 살이에요? 진짜 완전히 아저씨인거 아니에요?

목소리는 호들갑을 떨다가 더 큰일이 났다는 듯이 말한다.

그럼 나는 몇살이지? 이봐요 ■ ■ 씨 내 나이 기억하죠? 그런거 절대로 까먹는 사람 아니잖아요 저 지금 몇 살이에요?
 
남자는 무시하려던 것은 잊어버리고 목소리에 신경을 쏟는다. 어차피 어떤 생각을 하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목소리가 듣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지. 그는 목소리의 주인의 나이를 생각하려다가 그만둔다.
 
[나는 쓴다.]
[네가 나랑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부탁한게 그거였잖아. 네 이야기를 어디에도 쓰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 누구도 내가 쓴 네 이야기를 읽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러니까 네가 정말로 누군지 특정 할 수 있는 얘기는 쓰지 않을거야.]
[나는 그렇게 한 문단을 쓰고는 끄적거리다가 물을 삼킨다. 이렇게 물을 마시면 목이 아플텐데.]
 
목소리는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너 그거 제대로 안 지켰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약속이라고 일단 지키려고 하네?”
[나는 삼킨 물에 사레가 들어 콜록 거린다.]
 
남자는 생각한다. 내가 듣는 네 목소리는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의 목소리처럼 들려. 그러니까 26살...27살이겠지. 남자는 목소리가 빙그레 웃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 ■ 이 이 더운 날 뭘 하고 있었지? 하고 목소리가 물어본다.

물어보고는 목소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까부터 이름을 불러보려고 하고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이름을 제대로 말 할 수 없는거 보니 지금 하고 있는 것의 룰은 그건가? 우리 서로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말하지 않으면서 대화를 나누는거? 왜냐하면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했던 부탁이 내 이야기를 어디에도 쓰지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남자는 너는 내 망상일 뿐인데도 항상 나보다 머리가 좋네. 하고 생각하고. 목소리는 또 웃는다.

왜 자꾸 나한테 머리가 좋다고 하는거야 것보다 머리가 좋다 정도는 말하면 안되는 정보에 포함이 되지 않는거야?
머리가 좋다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나?
머리가 좋았던 여자친구가 한 둘이 아니라서?
애초에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을 좋아해.
내가 특별한게 아니다?
남자는 생각한다. 네가 특별했으면 좋겠어?
목소리는 말한다. 똑바로 말해야지. 너는 지금 망상 중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특별해, 라고 생각하는게 맞아.
 
내가 하고 있는건, 하고 남자는 생각한다.
그냥 세상의 작은 어느 구석에서 다른 구석으로 가는 거야.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지.
목소리는 불만스럽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야구는 그냥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일 뿐인거 아냐?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사람들이 작은 곳에서 다른 작은 곳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숫자가 변하기도 하는 거고.
그래 네 말이 맞아.
뭐 내 말이 맞다고? 그것보다 야구는 어떻게 되었어. 어디가 1위지? 는 몇 위야? ■ ■ 아 나 요즘에도 야구 보니?
 
남자는 생각한다.
네가 야구를 지금도 보고 있는지는 몰라. 네가 지금 어디에 사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후에, 그러고도 몇 번 서로를 길에서 마주쳤지만 그냥 그게 다였어. 너는 항상 네가 좋은 여자친구라고 말했잖아 너는 내 인생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걸로 정말 좋은 여자친구였다는 걸 증명했어.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한다.
어때 너는 내가 아직도 야구를 보고 있을 것 같아?
응 넌 미친놈이고 야구가 없으면 네가 미쳐있는게 야구 때문이 아니란걸 사람들이 알게 되잖아.
그래 우리  이 말이 맞다면 그렇겠지. 아직도 야구를 보고 있을거야 너한테 1위 팀을 물어볼 필요도 없지.
 
남자는 묵묵히 걷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자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땀을 닦고 걷기를 반복 할 뿐. 지겨울 정도로 갈 곳은 아직 멀었고 여름은 덥기만 하다.
 
왜 갑자기 내 생각을 했어?
네 생각을 했다고?
응 네가 내 생각을 했고 내 목소리를 떠올렸기 때문에 지금 내가 네 머릿 속에서 말하는 거잖아.
나는 네 생각을 자주 해
얼마나 자주 하는데? 
예전엔 매일 했지.
매일 했겠지 내가 그냥 the girl next door 처럼 생겨서 그렇지. 예쁘고 귀엽고 하여튼 그러니까.
망상 속인데도 자신감은 여전하구나.
네가 생각하고 있는 나니까 그렇지
내가 네 생각을 자주 한 건 네가 예뻐서가 아냐.
예뻐서가 아니라고??
 
목소리는 자못 이해가 안가는 듯이 분해한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묻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나한테 물어본거지?]
“어 너한테 물어본건데.”
[나는 네가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어.]
“근데 쟤는 왜 저래?”
[쟤는 이야기 안에 있기 때문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너랑 영원히 잡담을 할 수 없는거지. 하고 쓴다.]
 
남자는 생각을 하나 떠올린다.
근데 너 나 좋아하긴 했었니?
목소리는 텀도 없이 빠르게 대답한다. 어어 우리 이 내가 또 엄청 좋아했지.
그럼 사랑하긴 했어?
푸하하하 야 너 뭐 그런걸 물어보십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남자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자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그녀에 대한 생각이 흘러나온다.
그게 진짜 단 한 순간이고. 너와 나의 즐거웠던 때는 다 끝나버렸고 그게 네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짧아서 그렇게 끝났지만. 나는 네가 잠시나마 나를 정말로 사랑했었다고 생각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유를 말하려면 나는 너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해. 내가 나한테 했던 이야기들과 네가 했던 말들을 모조리 끌어올려야 하고 그렇게 끌어올린 말들로 너를 한 번 더 만들어서 물어보면 되지. 너 자신보다 27살의 너에 대해서 잘 아는 건 나니까 널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거야.
그래서 그렇게 했어?

몇번이나 그렇게 했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했지.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그게 되돌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냥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했느냐만을 확인하는 건데도 스스로를 그렇게 불구덩이에 넣고 데굴 데굴 굴린거야?
 
[나는 쓴다. ]
[그렇게 까지 불구덩이는 아니었어. ]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이 생각한건. 너를 그냥 우연히 만나서 어머 □ □씨 뭐해요 라고 말하고 너도 어머 ■ ■씨 오랜만이에요 라고 말하는거였어. 그러면 나는 오랜만이긴요 엊그제 만났던거 아니에요? 우리 이런데서 만난 것도 웃긴데 저기 가서 커피나 할래요? 하고 걍 아무데나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고 잡담을 하는거지.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항상 했어.]
 
목소리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말한다. “너 안 했잖아.”
남자는 생각한다. 갑자기 안 했다니 무슨 소리야?
목소리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남자에게 계속 말한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불구덩이까지인가?
너를 생각하는 건 불구덩이 같은 일은 아니었어.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응 그렇게 괴롭지 않았어. 네가 나를 떠나고도 네가 해줬던 이야기들이 나를 오랫동안 지탱했었지. 친척집에 갔던 이야기나 노래를 불렀던 이야기. 대학교에서 연애를 했던 이야기. 친구들과 잡담한 이야기. 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 너는 정말 아무생각 없이 했었던 얘기 같은데 그런 것들이 나한테 비어있는 어떤 부분을 채워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느낌이었어.
전 남자친구 얘길 듣는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나보네.
알고 있었거든 네가 나를 정말로 많이 좋아했었다고.
바보 같은 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겠어? 너는 그냥 내가 너를 잠시 만났고 내가 너를 좋아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일 수도 있잖아. 몇년이나 지났다면서. 지금에 와서 지금의 나한테 물어볼수라도 있어? 너는 그냥 처음부터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텐데 이런 생각들이 어떤 도움이 되지?
 
남자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머뭇거린다.
[나는 아무 글도 쓰지 않고 그대로 있는다.]
목소리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더 이상 뭘 써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내가 그만 이 글을 닫고 침대로 가 한숨 자려고 생각하는 순간 기적처럼 남자는 생각한다.]
 
그 뒤로 누군가를 또 만났어.

그리고 그 사람이랑도 끝났어.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나는 내가 텅 빈 것 처럼 느껴져

나한테 영혼이 정말로 있는지 자신이 없어서. 네 생각을 하는거야.
내가 좋은 여자친구였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널 아주 잠시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걸 확신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응 우리가 서로를.
 
남자는 걸어간다.
등과 배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 자국 그대로 회색의 폴로 셔츠가 젖었다. 목소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노래를 귀기울여 듣는다. 남자는 그녀의 노래를 귀기울여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지 해도 그는 항상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깨물고 뽀뽀를 하고 교차로에 멈춰서면 항상 손을 깍지껴서 잡았다. 그녀가 어땠냐하면 질색했다.

어쨌든 처음부터 아주 오래도록 그는 자기가 그녀를 사랑할 것을 알았다. 이름을 알기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다고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즐겁다는 듯이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님 인생에 가장 사랑한 애인 세 명은 누구죠? 이미 몇 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 중에 들어가 있나요?
남자는 너 그런 식으로 결국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는 거잖아. 대답 안 할거야. 라고 생각한다. 
아항. 그러시겠다 그렇구나. 그러면 3등은 아니라는 얘기네. 그럼 내가 2등이에요? 놀랍네 지금 님 머릿속에 있는 저는 아직 27살 아닙니까? 님은 몇살 쯤 됐죠? 37? 41? 43? 그도 아니면 47 정도 되었나요?
남자는 다시 생각한다. 아니라니까 내가 널 마지막으로 만난지 몇년이나 되었는지가 얼마나 중요하지?
중요한건 아니지만 저 님 항상 여자친구 있는거 알거든요. 나이를 알면 저 이후로 여자친구가 몇 명인지 대충 알 수 있죠.
그렇게 막 살지 못했어.
막 살지 못했다구? 그러면 어디 한 번 봅시다. 님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애인이 누구죠 혹시 이름에 □ □ 가 들어가나요?
 
남자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며 말한다. “1등 너 아니거든 이 멍청아."
그는 그녀가 알던 그대로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남자가 돌아본 곳에는 여름 말고 아무도 없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