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0] 7년 후, 교토_1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강한 햇볕을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싫어해서 그늘지고 사람이 없는 곳을 좋아한다. 시끄럽지 않은 곳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하는 걸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좋아한다. 시끄러운 곳에 가서 햇볕을 쬐는 건 어떨까? 라고 말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이 짖궂은 농담을 하면 어떻게 받아야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시끄럽고 사람이 많으며 햇볕이 내리쬐는 곳 중에 내가 좋아하는 곳이 있다. 나는 교토를 좋아한다. 출장을 포함하면 10번도 넘게 갔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싱가폴이나 도쿄는 출장을 포함하면 각 30...50...100번쯤 갔다...)
왜 교토를 좋아하느냐고 하면. 거기 보다 자체 컨텐츠가 넘쳐나서 아무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아무 곳에나 갈 수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혼자 일주일을 있는다고 하고 친구들은 만나지 않는다고 하면 4일 쯤 후부터 도대체 뭘 해야하나 고민해야하지만 교토는 그렇지 않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나는 한달 정도는 매일 매일 다른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어서 말해두지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 거의 모든 교토 여행은 혼자서 하는 여행이었다. 오사카나 다른 곳에 숙소를 두고 누군가와 같이 교토를 들린 적이야 많다. (특히 출장이 그렇다. 별로 되지 않는 예산으로 교토에 숙소를 잡긴 쉽지 않다.) 다만 교토는 정말로 좋아하는 곳이라서 혼자서 가기에 거부감이 없어서 가야겠다 생각이 들면 그 누구와도 조정을 하지 않고 슥 다녀오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농담처럼, 난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교토를 같이 가자고 하니까 내가 교토에 같이 가자고 하면 조심해 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니 언젠가 교토에 같이 가자는 말은 수 없이 듣고 또 하고 다녔지만(하하 흘리기 대장) 정말로 교토에 같이 가자고 말을 한 적은 딱 한 번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요 얼마 전에 7년만에 오사카와 교토에 다녀왔다.
아주 오랫동안 교토를 다녀오지 않은 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해외여행을 몇년 동안이나 가지 않은 탓도 있었고. 해외여행을 계획 할 만큼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교토에 다녀온 것은 2017년 늦여름-가을 쯤이었다. 7년이나 되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왜 그 동안 교토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다. 몇 년을 그냥 꿈처럼 보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쓴 웃음이 났다.
이 여행의 여행기는 아직도 쓸 생각이 없다. 하지만 7년 만의 교토에 대해서는 뭔가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글을 쓰고 있다. 정말로 여행기를 쓰게 된다면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나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
이 여행에선 어떤 음악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 여행기와는 다르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게 없다.
하지만 절대로 쓰지 않으려고 생각해놓고 마음을 바꿔 이 글을 쓰기로 했을 때, 그리고 또 쓰는 동안 들었던 음악은 다음과 같다.
- Laufey, <Where or When>
노래 제목이 이 블로그의 이름과 같다. 핀란드의 싱어송라이터 Laufey의 최신곡으로. 원래 클래식을 했던 사람(첼리스트였다고 한다)이 도대체 어떤 계기로 재즈풍의 싱어송 라이터가 된건지 궁금해진다. Be witched 앨범도 훌륭했는데.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딱 하나를 고르자면 이 곡이다. 이 글의 주제를 Where or When으로 정하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 박영미,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
도입부부터 가사까지 이 노래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바다의 노래이다. 예전, 누군가가 나에게 이 노래의 가사를 리퍼런스로 편지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대체로 타인에 무심한 편이다.
- 이현우, <마취(Unquantize mix)>
나는 사실 노래 부를 때 목소리가 이현우씨와 똑같다. 물론 노래는 형편없이 못 부르지만 이현우씨 노래를 듣고 있다보면 내가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곡 하나를 몹시 좋아하는데. 국내서비스에서만 곡이 올라와있기 때문에 몇년에 한번 멜론에 가입하고 질릴 때 까지 들은 다음 서비스를 해지하길 반복한다. 07년도의 앨범인 Heart Blossom의 완성도 또한 말이 안될 정도로 높다.
다음에 나오는 장소들의 순서는 내가 24년 2월에 방문했던 장소의 순서가 아니다. 심지어 이번 여행에서 방문하지 않았던 곳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을 뿐이다.
<아라시야마, 아다시노넨부츠지あだし野念仏寺>
교토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아라시야마를 간다는 얘기를 할 때 마다 나는 질색한다. 우웩 그냥 관광지잖아요 거길 도대체 왜 가는거에요. 카페 간다고요? 치쿠린? 그거 대나무 숲 별로 길지도 않아요. 곰세마리 동요를 다 부르기도 전에 끝난다구요. 이렇게까지 말해도 그래도 아라시야마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보통 추천한 것은 아다시노넨부츠지あだし野念仏寺였다. 아라시야마 남쪽에 진짜로 대단한 신사랑 절이 있는데요. 아 나를 믿고 예약을 아 제발...! 이렇게 비는데도 왜 사람들은 내가 추천하는 곳을 안 가는 걸까 툴툴 하면서.
아다시노넨부츠지는 아라시야마에서는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산길을 조심해서 올라가면 있는 절인데. 그 기원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200년 전의 절로 내가 아는 한 교토에서 가장 성지에 가까운 장소 중 하나이다. 그곳은 일본 절 고유의 요소인 경내의 묘지와 죽은 이들의 공양에 특화되어 있이며. 돌로 된 지장 보살과 나무로 된 묘표가 가득차 있는 고요한 장소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곳을 찾았을 때 자전거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했지만 그곳에 있던 것은 몰래 졸고 있던 입장소의 직원과 아기 지장보살 앞에 나란히 서서 말도 없이 조용히 울고 있던 젊은 부부 밖에 없었다. 나는 묘지에 가득한 나무 묘표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망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묘표는 흔들리며 서로 부딪혀 소리를 냈다.
아직도 아다시노넨부츠지 뒷 뜰의 죽림에서 녹음한 대나무가 스치는 소리 파일을 가지고 있다. 울고 있던 젊은 부부가 자리를 떠나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기다리느라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편지를 반장 정도 쓸 수 있는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산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사람 하나 없는 작은 식당에서 두부요리를 먹었다. 왜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아참 여기 산길이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났다. 오히려 예전에 봤던 것보다 아라시야마는 사람이 더 많아져서 찻길과 인도가 구분이 안 갈 정도가 되었다.
아니 슬슬 여기에 별거 뭐 없다는거 알잖아 라고 투덜투덜 거리며 길가에서 유명하다는 두부 요리를 먹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카페에 들어가 커피도 마셨다. 역시 온 김에 치쿠린을 가볼 까 하고 곰세마리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지만 있다면 대나무 숲은 순식간에 생겨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라시야마의 치쿠린은 무책임한 국가의 정부 부채처럼 엄청나게 늘어있었다. 30분쯤 걸었는데 대나무 숲은 끝나는 일이 없이 다른 대나무 숲으로 이어져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이어 나갔고 중국인 한국인 인도네시아인 하여튼 온갖 외국인들은 그 분위기에 빠져들었는지 다들 싱글벙글 웃으면서 치쿠린에 대 만족해 하고 있었다. (물론 고갯길이라 그걸로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나는 여기 대나무 숲 아니었는데. 여기도 아니었는데 하면서 시끄럽게 투덜거렸다.)
나는 평소에 치쿠린이 고작 뒤뜰 정도 수준이라고 욕하고 다닌것이 면구스러워서 그 뭐냐 내가 아라시야마를 처음 온 것은 2012-3년이었거든 어쩌고 하면서 변명을 했다.
역시 이러면 너무 부끄러우니 아다시노넨부츠지를 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길을 찾는데 분명 방향은 맞는데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잘 포장된 길에 예전에 가파른 고갯길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양쪽에 새로 조성된 주택가와 (이미 한 번 유행을 타고 다시 사라져버린 듯한 느낌의) 카페와 양식집이 있었다. 어째서지 싶어서 일단 한참을 걸어서 아다시노넨부츠지에 도착하니. 유튜버 한 명이 택시를 타고 절에 들어가고 있었고. 서양 청년들 4,5명이 동양문화의 심취해서 묘지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라고 외국인인 건 다를바 없지만 왠지 젠체하며 확인해보니. 입장료가 500엔이었다. 여기가 500엔이라고? 팜플렛도 있어? 하고 생각은 했지만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절은 그대로지만 왠지 팻말이 많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대나무 숲은 그냥 고갯길의 뒷 뜰 같았다. 내가 느꼈던 외로움과 신비로움은 도대체 어디 간거야 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잔뜩 늘어놓았다.
돌아오는 길에 안되겠다 싶어서 길거리의 킷사텐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궁금해서 사장님께 아니 여기 언제부터 이렇게 도로가 포장이 된거에요? 라고 하더니 이해를 못하셨다. 여기 원래 산길이었잖아요. 라고 재차 묻자. 아니 손님 진짜 여기 오랜만에 오셨나 보다 이거 한 십년 되었어요. 라고 말해서 아라시야마가 너무 싫어서 이 곳에 온지 정말 10년이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두부를 먹었던 가게를 검색해보니 어떤 사이트에서 별점이 4.0을 넘는 무시무시한 유명 맛집이 되어있었다.
<가라스마, 롯가쿠도六角堂>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날 니조성에 나와 가라스마로 정처없이 걷다가. 제대로 방향을 찾지 못해서 (변명을 하자면 오열을 하며 걷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방향치지만 그렇다고 교토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방향치는 아니다.) 원래 가려던 방향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불쑥 들어간 곳이 이 작고 아름다운 절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죠호지頂法寺의 롯가쿠도六角堂이다. 도심 속의 절이라는 매력적인 모순과 육각형을 한 본당-롯가쿠도-의 모습 때문에 많은 관광 도서에도 소개가 되어 있는 곳이지만 그닥 크지도 볼 것이 많지도 않다. 절에서 보여줄 수 있는 컨텐츠라는게 정해져 있는게 아닌가.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가고 있었던 터라 어디 멀리에 갈 수도 없었고, 눈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이 끔찍해진 상태로 다른 어디 가게에 들어가는 것도 민폐라서 얼굴을 대충 정리하고 (남자가 얼굴을 정리했다는 말은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얘기다) 절의 경내를 구경하는데 육각형을 하고 있는 본당이 제일 아름답긴 하였지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절의 경내에 백조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데 백조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문득 외할아버지가 다시 태어나신다면 저런 커다랗고 무심한 새 같은게 되셨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를 다니는 어머니가 알면 질색을 하시겠지만. 이모는 잘했다고 칭찬을 했을 것이다. 지갑에 들어있던 몇만엔을 통채로 꺼내서 절에 시주를 했다. 내 짧은 일본어로 제대로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의 사람은 외국인인 내가 어떤 이유로 시주하는지 이해한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매번 교토에 들를 때 마다 롯가쿠도에도 들렸다. 내 사정으로는 꽤 고액을 그 곳에 시주하고 항상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빌어달라는 기도를 부탁했다. 그러기 위해서 숙소도 보통 가라스마 부근으로 잡아서 귀찮아서라도 롯가쿠도에 가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들르는 것은 항상 즐거웠다. 과일가게를 들르거나 좁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경양식 집에 들어가 아무 거나 먹다가 저녁이 오기 전에 롯가쿠도를 가면 되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백조를 구경하다가 절의 원무과에 들러서 사정을 설명하고 시주를 할 수 없겠느냐고 물으면 익숙한 듯이 종이를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글을 제대로 못 쓸 정도로 눈이 흐려져서 한참이 걸렸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름을 쓰고 준비한 봉투에 시주를 부탁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조를 구경하는 시간은 더욱 늘었다. 백조들은 항상 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고.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절이 닫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다시 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고 절 뒷 쪽 카페에서 본다면 백조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외조부의 명복을 비는 시주를 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가셨겠지. 이제는 다른 곳에 있으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올해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딱 10년이 되었다. 누군가 백조는 30년을 가까이 산다고 말해주었다. 백조들은 나를 기억 할 까 라는 덧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료안지龍安寺>
인기 없는 여행지가 되었다. 유명한 가레산스이의 바위 정원龍安寺方丈庭園도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버렸다. 바위와 물 그리고 이끼만을 통해서 우주를 표현하려고 한다는 간지나는 설정도 어느새 긴가쿠지를 포함 다른 절들이 따라해서 교토의 절을 구성하는 한가지 필수 요소가 되었다. 다른 절에 비해서 형편없는 접근성과 비싼 입장료. 컨텐츠라고는 가레산스이 말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벚꽃철 처럼 저절로 절이 아름다워지는 시기가 아니면 사람들이 대체로 찾지 않는 곳이 된 듯 하다. 두 번이나 말했지만 사실 예전에 비해서 그렇다는거지 지금도 충분히 찾아오는 사람은 많다.
절이라고 하면 애초에 사상과 미학을 전달하는 일종의 테마 파크 아냐?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그들의 고양된 감정에 맞춰서 돈도 받아내고. 물론 위대한 미술작품 같은게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거고. 정말로 미술작품을 보고 싶으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면 되잖아? 하고 별로 대단치 않은 이론을 힘줘서 얘기해본다. 듣는 사람은 또또 저런다 라는 느낌으로 내가 하는 말을 흘려듣는다.
12년쯤 되었을 것이다. 내가 료안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정말 마음 속 깊이 감동했다. 오사카를 가던 도중에 시간을 내서 교토를 온 거니까 다른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텐데. 나는 가레산스이의 컨셉에 정신적 오열을 하는 중이기 때문에 여행에 왔던 동행을 설득해서 접근성도 나쁜 료안지로 향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절의 경내는 춥고. 전날 크게 싸운 동행과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냥 둘이서 서로 보고 싶은거나 보고 나중에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그건 또 그러고 싶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감동과 더불어 약간의 고집을 더 해서 1시간 정도 료안지에 있었던 것 같다. 바위 정원의 앞에 앉아서 바위의 갯수를 세고 또 세면서 난방이라고 하나도 없는 료안지의 추위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날 대들보에 기대서 정원을 보던 동행인의 사진은 정말 아름다운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을 지워버려서 나에겐 없다. 사진을 지우자. 나는 오랫동안 내가 처음 료안지를 간 것은 혼자서였다고 기억하게 된다.
하여튼 료안지는 나에게도 바위 정원을 제외한다면 그냥 경내가 크기만 할 뿐인 절이 되었다. 나는 내가 료안지에서 했던 말도 거기서 느꼈던 마음들도 자꾸 잊어버린다. 언젠가는 누군가와 같이 간 적이 한 번도 없는 곳으로 기억하고 다시는 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교토를 수없이 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료안지의 차가운 마룻바닥과 정원 앞에서의 어떤 순간이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가모강변>
철이 들고 혼자 살게 된 다음에야 강변 근처에서 살게 되었지만 물 가까이에서 산다는 것은 특별하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바다 근처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한 번도 바다 근처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의 언어로는 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옮길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때 이미 그 사람을 마음 속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곱씹고 곱씹고 곱씹었다.
나는 내가 그 때 했었던 곱씹음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나는 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서 산책하는 거리에 바다가 있는게 어떤 의미인지 내 언어로는 설명 할 수 없다.
나는 가모강을 좋아한다. 강변의 둑길에 그냥 앉아있는 것도 강변을 따라 의미 없이 걸어가는 것도 좋아한다. 시조부터 산조로,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 데마치야나기로 향한다. 가모가와 델타까지는 가봐야 비로소 좀 기분이 풀린다. 교토 시민들이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 모양인지 도시를 종단하는 하천인데도 불구하고 가모강은 깨끗하다. 가장 더울 여름에도 냄새 같은 건 나지 않는다. 물새들이 때때로 날아와 풀 숲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분명 철학적이고 품위있는 행동이겠지. 개구리와 논쟁을 벌이다가 꿀꺽 삼킨다든지.
밤이 되면 강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강을 볼 수 있는 테라스가 갖춰진 술집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들어가 술을 마신다.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각자 뭔가를 쥐고 둔덕에 앉는다. 서로들 적당한 자리를 벌리고 있어서 뭘 하러 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는 때때로 그리고 자주 가모가의 둑길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술을 마시거나 했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져온 맥주 캔을 다 마실 때 까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숙소가 여기서 멀다면 굳이 여기서 그러고 있을 필요는 없을텐데 나는 대체로 가라스마나 기온 근처에서 숙소를 잡았다. 롯가쿠도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7년이 지난 후 가모강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없고 나는 더 이상 이 동네에 숙소를 잡지 않는다.
나는 가모강을 건너다가 문득 네 얼굴을 본다. 이번에도 강변에서 맥주 마실거에요? 아뇨 이번에는 안해도 될 것 같아요. 라고 말한다. 아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다시 네 쪽을 본다. 너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다. 갑작스러운 상실에 나는 정신을 잃을 것 처럼 흔들린다.
모든 것을 후회한다. 내가 했던 말들, 내가 했던 모든 행동을 후회한다.
내가 숨쉬고 내뱉고 있는 모든 호흡을 전부 후회한다. 바다를 갔던 것. 파도를 보며 혼자 등대를 보고 서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편지를 쓴 것을 후회한다. 마음을 열었던 것을 후회한다. 어깨위로 내려 앉은 꽃잎을 주먹에 쥐고 가만히 서있었던 일을 후회한다. 혀 위에 닿은 눈 송이도 무릎 가에 닿던 물결도 후회한다.
빛 때문에 흐트러지는 그림자와 벽 위에 느슨하게 서있는 그림자와. 오후의 온도에 늘어지는 소음과 바깥으로 점점 퍼져가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물드는 색과. 세상 어느 곳에도 없을 것 같던 파란 하늘과. 어떤 때보다도 선명하게 보이던 그 말들을 떠올린다.
웃었던 일들 울었던 일들 화를 냈던 일들. 혼자 생각했던 일들 기다렸던 일들. 그 모든 일들이 처음부터 그리고 다시. 그리고 처음부터. 그리고 다시 떠오르고 또 사라진다. 생을 되감는 것처럼.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해도 목이 쉬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어서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게 ■년 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후회한다.
■■에 대한 글을 쓴 것을. 그리고 참아 내지 ■하고 ■ ■ 에 대한 글을 ■ 것을 후회 ■ 다.
그리고 ■ 는 견디지 못하고 ■을 크게 ■ ■ 소리를 ■ ■ ■ ■ ■ 모든 ■ 들을 ■ ■ ■ .
...
이제 7년 후의 나에 대해서 쓸 차례이다. 잠시만 눈을 감고 쉰다. 이 모든 것은 미친 사람의 말이고 24년 8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