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책_(쓰려다 만 단편)

[20240818] Feather, Fly like an arrow.

Masked 2024. 8. 18. 03:21

만22살이 되고 2개월 쯤 후였다고 기억한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나는 좋아하던 누나한테 연락이 와서 누나가 살고 있는 동네로 갔다. 피씨방에 있던 그 누나는 어 왔니 잠깐만 하고 게임을 계속했고 나는 3시간 정도를 따로 떨어진 자리에서 게임을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게임이 끝나고 그 누나(누나라고 해도 겨우 만23살이었다)는 나를 동네의 콩나물국밥집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며 누나가 했던 이야기는 두가지이다. 1. 예전에는 네가 편했지만 요즘에 네가 불편하다. 2.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동생으로서 좋아한다.
 
나는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한 입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누나가 하는 얘길 들었다. 그럼 누나랑 나랑 몇년 동안 있었던 일은 뭐였어요? 같은 질문은 하지도 못했다. 지금의 나라면 푸하하 하고 웃고는 아주 웃기고 있구나 하고 말했을텐데 그 때의 나는 22살이 가지고 있을 법한 질문과 대답 밖에 없었다. 누나가 내 친구의 친구(나와 같은 나이였다)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걸 안 건 그 뒤 몇 주가 지난 뒤였다. 누나로서는 그닥 내키지 않는 정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누나는 깨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근데 너 어떻게 집에 갈거야 라고 물어보았다. 지하철은 끊긴지 오래였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목이 메어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아직 차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뒤돌아서 가면서도 누나가 나를 다시 불러주길 기다렸다. 차가 있을 리가 없지. 새벽 2시 쯤이었고 차가 없는 건 누나도 모를리가 없었을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22살이 가지고 있을 법한 생각 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려다가 누나가 불렀다고 술자리도 중간에 취소하고 이렇게 휭하고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멍청하고 싫어서 집에 걸어가기로 했다. 집까지 걸어가면 몇 시간이나 걸릴테고 누나와 거리가 떨어졌다는 실감이 들테니 다시는 이렇게 쉽게 여기까지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5시간이 걸렸다. 지금 다시 지도를 켜서 5시간이나 걸릴건가? 하고 찾아보았는데 역시 22살이나 가질 법한 지혜밖에 없었던 나는 아는 길로 간답시고 학교를 거쳐서 노량진-영등포를 거쳐서 집에 갔기 때문에 5시간이나 걸린거였다. 새벽이 끝나고 있었고 nujabes 앨범을 8번쯤 들었지 않았나 싶다. 졸립고 이상하게 상쾌해서 오전 알바도 취소하고 내내 잤다. 그 뒤로 누나가 몇 번 나를 불렀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19살부터 22살까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였던 누나와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의 내가 평가하기로는 나의 그 비이성적인 믿음 - 걸어서 집에 가느라 몇시간이나 걸린다면 이제 앞으로 이렇게 부른다고 쉽게 가지 않을 거란 생각 -이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원래 그렇다. 비이성적인 믿음이야 말로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법이다.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 그 누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사회화도 덜 되어 있던 야생의 남자애 -내 얘기임- 하나를 잡아다가 밥도 먹이고 칭찬도 하면서 열심히 교육해서 쓸만해졌다 싶었더니 갑자기 자길 좋아한다고 드니까 침팬지 연구를 하는 인류학자에게 어느날 부터 침팬지들이 구애를 하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 누나는 나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애로 키우고 싶었던게 아닐까. 테이블매너나 데이트 하는 방법. 여자가 생각할 법한 좋은 남자가 되는 법을 끊임없이 가르쳤다. 불행히도 나는 친누나도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도 잔소리를 들었기에 교육효과는 두배였다. 어디를 가나 아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지 말랬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래 여자애들을 대했다.
 
나는 그래서 그 나이대에는 또래 여자애들한테 그럭저럭 인기가 좋았는데. 그야 70%이상 집 안과 집 밖에서 계속되었던 사회성 교육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누나는 본인이 그렇게 키워놓고 내가 또래들한테 인기가 있는 걸 티내지 않게 못마땅해했고 인정도 하지 않으려고 들었는데 누나의 가장 친한 후배가 나에게 집착해서 셋이서 만나는게 불가능해졌을 때에도 누나는 나에게 네가 뭐 잘못한거 아니야? 예의범절을 지켜야지 하고 내 탓을 할 정도였다.
 
누나는 한 번 그리고 뜬금없이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거 아니니?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그냥 게임을 하듯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할 뿐이고 나도 그런 대상인거잖아. 나는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라고 말했다.

내가 그 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여기에 쓰지 않는다. 제법 대단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그걸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나는 내 대답을 퍽 마음에 들어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앞서서 결말을 먼저 이야기했다. 누나가 나와 데이트 하는 사이가 되는 일은 없었고 (웃기고 있네 그 전에 하던건 데이트가 아니고 뭐냐 진짜 22살, 23살 둘이서 염병 천병 아이구 정말) 사실 그 누나가 하는 말이 맞았다. 연애의 관점에서 나는 그 누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후에 갑자기 깨달은거지만 나를 연애의 상대로 좋아했던 것은 그 누나 쪽이었다.

그 누나도 그 때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야 무엇이 사랑인지 이해하는 법이다. 우리의 관계는 반대로였다. 그 누나가 나를 연애대상으로 생각하고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나는 항상 그랬다. 나는 그 뒤로 오랫동안 거울처럼 누군가가 바라는 것을 되돌려주는 그런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나의 오랜 병이 되었고. 이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누나의 이상적인 연애대상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 후에, 좀 비극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누나를 잃은 나는 좀 더 차갑고 건조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 누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단지, 그 전에는 그 누나가 그걸 바랐기 때문에 친절하고 햇살처럼 밝은 사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와 동갑이었던 남자친구와의 연애는 몇개월 가지 못했다. (그 후에 나를 차고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1개월 길어봤자 3개월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구여친들 중 그 누구도 확인 및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가설로만 남아있다. 쳇)
 
위에서 얘기한 것 처럼 누나는 때때로 나를 찾았고 부르기도 했으며 나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따로 만나는 일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그 뒤로 연애를 쉬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여자친구가 있을 때 여자들이랑 연락하면 안된다고 가르친게 다름아닌 그 누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뒤로 딱 두 번 더 단 둘이서 만났다. 나는 좀 더 건조하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 누나의 이상적인 남자애와는 거리가 멀게 되었고. 누나는 여전히 날씬하고 예뻤다. 두 번 다 술을 마셨다. 

이 시험 합격하면 뽀뽀해준다면서 나 합격했어. 진짜로? 어려운거 아니었어? 어...나는 천재니까...정도로 실없는 이야기나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뽀뽀는 해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게 엄청 짜증나는 걸 보니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대체로 그 누나의 연애 얘기를 들어주고 공통의 지인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누나는 한 번도 내 여자친구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술을 마시던 나는 뜬금없이 누나 첫째는 딸이야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처녀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얘가 라고 말했지만 나는 누나가 결혼하려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누나 이게 누나랑 나랑 만나는 마지막 날이야 라고 말했다. -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누나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쳐다봤다.
 
내가 21살때의 일이다. 어느 역인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우리의 관계에 지치고 실망했던 나는 이제 이 누나랑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어느 역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얼굴을 쳐다보지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이걸로 끝이라는 생각에 안심과 짜증이 뒤섞여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누나는 남자친구와 만나러 가기 위해 역에서 밖으로 나가야 했고 나는 그 때 ...하여간 어딘가로 가는 길이었다. 여기서 - 그 누나가 있는 곳에서 - 벗어나기만 하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누나는 개찰구를 찍고 가는 나를 뛰어서 쫓아오더니 나를 붙잡고는 울기 시작했다. 너 그러면 죽여버릴거야 너 진짜 죽여버릴거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누나는 겨우 22살이었으니까 그럴만했다.) 나는 내가 뭘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살짝 겁을 먹어서는 이 사람이 어떻게 안거지? 하는 생각만 했다.
 
친구의 말로는 나는 가끔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있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누나가 결혼하는 주에는 전화가 와서 받았다. 나 진짜 결혼하기 싫어, 니가 나 어디로 데리고 도망가면 안되니? 라고 말하며 울었다. 나는 통화를 듣고 있다가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 사람은 나의 19살때부터 22살때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의 20살때부터 23살때 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또한 내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우리는 그 뒤로 정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공정하게 말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만난 여자친구는 누나와 같은 나이에 키도 비슷한, 학교도 같았던 사람임을 밝힌다. 3개월을 못가고 헤어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차였다)
 
그리고 그 누나의 첫째는 딸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