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9] Forest, Gone are the days.
M의 이름에는 어떤 M도 들어가 있지 않다. M을 사랑한 적도 없지만, 첫사랑에 대해서 떠올리면 M이 떠오른다.
M에 대해서 이제 까지 몇 번이나 글을 써보려고 시도해보았는데. 좀 처럼 쉽지 않다. M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M에 대해서 떠올리면 약하게 보이기 싫어하는 그 나이 여자애 특유의 말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너 여고 나왔지? 라고 물어보면 응, 이러거나 어, 라거나 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왜? 문제 있냐? 라고 대답한다. 네가 어떤 개소리를 하려는지 안다는 듯이 말이다. M은 강남에 있는 유명한 사립여고를 나왔다. 여자애들은 귀찮아 라고 말하길래 왜? 라고 물어보니 아니 쓸데없이 꺄꺄 거리고 기회만 있으면 손잡으려고 하고. 가끔 안아달라고 그러고. 라고 하길래 너 고등학교때 숏컷했지? 라고 하니까 어떻게 알았어 2학년때 까진 숏컷이었지 하고 씨익 웃었다.
M은 도대체 뭐랑 닮은걸까 하는 생각을 곰곰히 한 적이 있었다. M은 눈썹이 칠한 것 처럼 두껍다. 눈은 무쌍에 시원한 눈매인데 웃고 있으면 만화에 나오는 눈웃음 처럼 된다. 콧대는 곧고 입은 담배를 필 때가 아니면 꾹 다물고 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곧다. 찰랑거리게 긴 검은 머리를 대충 매만지며 턱을 까딱하며 나를 바라본다. 뭘 쳐다보는데? 라는 뜻이다. 너는 동물을 닮았어. 라고 말하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무슨 동물? 이라고 물어본다. 그 때 나는 머릿 속으로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암사자를 떠올렸지만 19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리를 하면 안된다는 분별 정도는 있어서.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빨이 많고 뾰족한 동물 닮았어 라고 대답한다. 19살인 M은 나에게는 특히 가차가 없어서 너는 해서는 안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라고 말하며 내 이마를 민다.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나면 안된다고들 많이 말하기 전에 M과 나는 인터넷으로 알게 되었다. 수능보기 1개월 전부터 자체 휴식을 한 덕에 여유로웠던 나와 수능 보는 날에 어쩔수 없이 시험은 보러 갔지만 시험 시간 내내 잠만 잔 M은 친구들이 온갖 입시 준비에 바쁜 무렵 인터넷을 해대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채팅과 게시물 기능.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그리기 기능이 있는 커뮤니티였다. 나는 M의 말투가 너무 거칠어서 또래의 남자아이라고 생각했고 M은 내 말투가 너무 점잖아서 또래의 여자아이라고 오해해 우린 금세 친구가 되었다.
내가 수능을 보기 1개월 전부터(그 시절엔 수시가 없었다. 나는 나이가 많다 까불지 마라.) 자체적으로 공부는 안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M은 본인과 비슷한 케이스 (나는 고3 내내 모의고사 전국 5% 이내를 유지했다.) 라고 생각했는지 왠지 이것저것 나에게 장래의 고민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지는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가 되고 싶다는 얘기였다. 도대체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 커뮤니티에 그림 좀 올려보실래요? 라고 하자. M은 처음에 엄청 쑥스러워하면서 지금 PC방에서 하는건데 마우스로는 잘 못 그려요 잠시만요. 하고 후다닥 뭔가를 올려서 보여주었다.
반전은 없이 엄청 이해하지 못할. 형태도 색도 엉망인 그림이 하나 올라왔다. 중학교때 부터 친구들 중에 한 명 씩 있지 않은가? 나는 만화가가 될거야 하고 연습장에 하루 종일 뭘 그리는데 뭘 그리는지는 모르겠고. 뭐 그런 친구들. 딱 그런 그림이 하나 올라왔기에 아 이 친구는(나는 직접 만나게 될 때 까지 M을 계속 동갑인 남자애로 생각했었다) 대학에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등학생의 나 치고는 굉장한 분별력을 발휘해서는. 그림을 몇 개 더 올려주세요. 지금은 진짜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대답했다. 마우스가 진짜 손에 안 익네요 하며 M은 정말 많이 쑥스러워했다.
직접 얼굴을 보게 되기 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2개월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M도 한가하기 짝이 없었고 M은 경솔하게도 본인이 알바하고 있는 장소를 나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뒷 쪽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길래 갔더니 검은 생머리의 예쁜 여자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 나는 깜짝 놀라. 아 죄송합니다. 하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M은 이 예의없는 새끼야 하고 나를 쫓아와서 삥을 뜯는 깡패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나를 질질 끌고 갔다.
그냥 멀쩡하게 공부로 대학을 갔다는 것 부터 시작해서 내가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재수없는 새끼야. 기만자 새끼야 하고 M은 화를 냈지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M쪽이었는데. 그림을 올린지 3일 정도가 되자 갑자기 아 이제 마우스가 손에 익네 하더니 말도 안되는 뎃생으로 그림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속도였는데 나와 30분쯤 채팅을 하다가 야 다 그렸다 누나 그림에 댓글 달아라 라고 해서 가보면 프로가 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러프를 올려뒀고. 정말로 손이 익지 않았을 뿐이었는지 그림을 올리면 올릴 수록 뎃생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일반 인문계를 나왔을 뿐인 내가 누군가의 진짜 재능을 목격 한다는게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짝이었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주변에서는 우리 둘을 한 쌍인 것처럼 다뤘지만. M은 그 나이대의 여자애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를 더 좋아했고 당시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이성에게 담백했다. 남중에 남고를 나와서 이성이 접근하면 깜짝 깜짝 놀라고 과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웃겼을 수는 있었던 것 같다. 나보다 딱 2개월이 어린 M이 나와 대화할 때의 1인칭은 누나였다. 누나가 말야. 누나 배고프다. 누나 담배피러 간다 따라와라. 나는 그렇게 M의 말이면 고분고분하게 듣곤 했다. 20대 내내 M이 나에에 남긴 영향은 컸다.
예를 들어 몇 년이나 후에 데이트 상대의 학교를 물어보면 이상하게도 M이 다녔던 학교 출신이 엄청 많았는데. 어느날 결국 그 학교 출신의 사람과 사귀게 되어 그 학교를 진짜로 가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친구에게도) M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M이 워낙 학교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처음 가본 곳인데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쯤엔 이미 M과 연락 할 수 있는 채널이 다 끊겨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강남 어딘가 사무실 뒷편 흡연장에서 야 요즘 뭐하냐 하고 서로 배실배실 웃으면서 안부를 나누고 헤어진 것이 다였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M이 나에게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은 18살, 19살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얘기라고는 학교와 가족 그리고 친구 얘기가 다이기 때문이다. M은 항상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지만(이 누나가 너 말고 친구가 없겠냐?) M의 최초의 이성친구였던 나는 M의 그 때 까지 인생을 통채로 알게 되었다. 거꾸로 나는 M에게 내 그 때 까지의 인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딱히 이유는 없었다. 나는 사실 항상 M의 재능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M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더 중요했지 내 얘기를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내가 M을 쳐다보면 M은 항상 재수없어. 내가 그렇게 좋냐? 하고 쳐다보지 말라고 윽박질렀지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일은 없었다.
M에게 6살인가 7살이 많은 남자친구가 생기기 전. 서울 어딘가에 골목을 나와 나란히 걸어가던 M은 뜬금없이 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찐따 답게 어어 뭐야 라는 얼간이 같은 리액션을 했는데. M은 당황하지도 않고 누나 춥다. 라고 하며 내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역에 도착할 때 까지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이라서 정말 추운 날이긴 했고 M은 빰이 얼어서 빨갛게 되어 있었다. 나는 18세 하고도 1개월 쯤. M은 생일이 지나지 않아 17세 하고도 11개월쯤 되었다.
글을 쓰다가 M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한다면 M은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M이라면 아마 시큰둥하게 추워서 손 좀 잡은거 가지고 그렇게 기억씩이나 하고 있는거 보면 넌 달라진게 없다. 라고 할 것이다.
어느날 SNS에서 내가 처음 보는 계정이 나를 차단한 걸 발견했다. 나를 차단한 계정이 한 두개가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기엔 팔로워가 수천명이 넘어가 만명이 다 되어 가는 계정이다. 궁금증이 일어서 구글에서 검색해서 들어가보니 일러스트레이터의 계정이다. 온갖 언어로 계정주의 그림에 대해서 상찬하는 코멘트가 가득하다. 예전에 날 알던 사람인가 싶어서 미디어를 찾아보니 그림이 눈에 익다. 네 그림은 십년이 지나도. 이십년이 지나도 알아 볼 수 있다.
하, 이 새끼. 하고 생각한다. 하여간 나는 아직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24년 8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