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증명_(에세이 등)

[20240908] 쐐기

Masked 2024. 9. 8. 17:28

친구가 얼마 전에 <패스트 라이브즈>를 봤던 얘기를 하며. 가장 맘에 안 들었던 부분이라고 투덜거린건, 극 중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들의 전생 그러니까 패스트 라이브 때문이라고 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냥 취향에 안 맞는 영화를 굳이 본 것이 아니냐고 웃었지만 친구는 그게 몹시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설자楔子라고 부르는 동양 문학의 전통이다.

설자란 무엇인가. 옥스포드 랭귀지 사전에서는 설자를 이렇게 정의 한다.
1. 꺾쇠
2. 문예 작품에서, 어떤 사건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따로 설명하는 절(節)

그러니까 중국의 소설이나 혹은 경극류의 작품에는 앞 부분에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어떠한 주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는데. 현대적인 서사의 관점으로는 왜 이런게 있지? 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서술이나…사실 그 부분은 이야기의 주제와도 관련이 깊으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연결된 인과의 원인 부분에 해당하는데.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등장인물이나 중요 사건의 카르마 자체를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말 할 수록 뜬 구름 잡는 소리인거 같으니까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다.

<홍루몽>은 청나라 때 조설근이 지은 중국 문학사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소설 중의 하나로.
이걸 진짜로 처음부터 다 읽은 사람은 한국인은 나의 이모 밖에 보지 못했으나…설자 개념을 설명하기 좋은 책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사촌 남매들이기도 한 가보옥, 임대옥, 설보차 (한국인 감각으로는 어느 쪽이 남자고 여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텐데 가보옥이 남자이다)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와 공작위를 받은 개국공신 가씨 가문의 몰락과 재흥.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허무함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설자가 되는 부분은 주인공 가보옥과 임대옥의 전생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가보옥은 여와가 하늘을 복구하기 위해 모았던 돌이 오랜시간 동안 자아를 갖게 되어 선술로 인해 인간으로 전생한 것이고. 임대옥은 (가보옥이 되는) 전설의 돌이 인간이 되기 전에 우연한 기회로 물을 주어 살렸던 풀이 은혜를 갚기 위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설보차에겐 이런 대단쓰한 전생의 내용이 없는가? 없다…덕분에 세상은 가보옥-임대옥 커플링을 정설로 여긴다.)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이런 설자는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 홍루몽의 본래 이름은 석두기石頭記로 이 소설은 딱히 배경이 되는 설화가 없이 조설근의 창작 - 실은 작가인 조설근의 자캐가 주인공인 가보옥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돌머리의 이야기라는 석두기라는 제목이 지어진 이유는 조설근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이 소설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 이기 때문에 작가가 이 작품의 설자인 여와의 돌이 전생하는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다.

다르게 설명해보겠다. 주인공 가보옥은 사촌들인 임대옥, 설보차 사이에서 시종 갈등하는데. 몸이 약했던 임대옥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가보옥의 가족들은 결혼상대가 임대옥이라고 가보옥을 속이고 설보차와 결혼을 시키는데. 임대옥은 상심한 나머지 가보옥의 결혼식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너무 과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가? 애초에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가보옥이 여와의 돌이 전생한 존재로서 고귀한 출생이나 어리석음을 설명했으며. 임대옥이 돌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풀에서 전생한 존재로 아름답지만 덧없이 사라질 존재임을 설명했다. 이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전개는 그들의 배경-전생의 삶-을 통해서 설득력을 가지고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설명된다.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적이며 어떠한 것도 독립적인 현상은 없다. 이러한 연기를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현대 이전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우리 현대인에게 뜬금없어 보이는 설자의 존재가 거꾸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패스트라이브스의 이야기를 하자면. 결말에 이르러서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그들이 인생에서 계속 서로 집착하고 잊지 못하고 인생이 겹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전생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와는 관련없이 이 부분이 영화의 앞부분에 삽입되어 있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훌륭한 설자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배경이 앞에 나와있다 : 동아시아 문학 전통의 설자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마지막에 가서 등장한다 : 할리우드 문화 전통의 반전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설자에 대해서 또 그럴듯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어떤 남자가 유명한 호수를 지나치다가 아름다운 두 명의 여인을 본다. 총명하고 부유하기까지 한 두 여인 중 하나는 평범한 서생인 그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 개수작을 부려온다. 남자는 금세 그녀에게 빠져들고 결혼까지 하고 말지만 어느날 흉측한 승려 하나가 나타나더니 이보게, 자네는 큰일났어. 자네가 결혼한 여자는 엄청난 요괴일세. 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쓰면 오오 남자는 죽는건가. 큰일나는건가. 전형적인 요괴이야기겠군. 하겠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는 어떤 판본이든 관계없이 항상 맨 앞에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수련을 거듭해서 쌓은 뱀으로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전따윈 없다.
원래부터 독자도 여자들도 스님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남자만 몰랐다.

다름아닌 이 이야기는 항주 뇌봉탑 설화가 변형된 <백사전>이다. 이 이야기 또한 여러가지 판본이 있지만. 공통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처음부터 둔갑한 뱀이란 정체가 나오고, 영원처럼 천년을 살던 이 뱀은 정말로 그 남자를 사랑하여 같이 살고 싶어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악당은 중간에 나와서 남편에게 그 정체를 아웃팅한 승려이다. 잠깐만 이렇게 쓰니까 되게 현대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하여튼. 백사전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니 굳이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설명하지 않겠다. 홍루몽에 비해 분량도 짧다.

이제 여러분도 이제 설자가 무엇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거이다.

설자를 바이두에서 검색하면. 쐐기가 나온다. 애초에 설자라는 말 자체가 쐐기나 꺾쇠를 의미한다. 나는 쐐기의 사진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부처는 연기를 우리에게 설파했지만. 우리는 인생에 펼쳐지는 고통과 기쁨의 원인을 알 수 없다.
어떠한 이유로 이 마음이 나에게 왔는지 그리고 떠나가지는지도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기계는 적절한 입력값을 넣었을때도 항상 같은 출력값을 내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는 충분히 현명하지 못하여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다른 어떠한 영향을 줄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때때로 내가 당신의 인생에 그저 설자로서 존재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로 적힌 이름. 따로 적힌 말. 아니 이름조차 되지 못하는 배경.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참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설자가 되고, 우리의 현재의 삶은 미래의 설자가 된다.
이 마음조차 또 어떤 설자가 되어 누군가의 서사에 끼어들지, 나는 알 수가 없다.

24년 9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