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31] 거룩한 땅의 어느 작은
나는 이 글을 7월 말에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 단위로 예약을 걸어서 내가 제 때에 예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글이 올라가도록 해두었다.
당신이 이 글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예약의 연장이 제 때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연장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게 지겨워졌을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사는게 지겨워져서 그만 죽어버렸을 수도 있다.
예전의 작가들은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남겨둔 메모들이 오랜 후에 발견되어 책이 출간되고 그랬으나, 작가는 되지 못할 현대의 우리들은 그저 블로그를 지우지 못하여 그 흔적을 남긴다. 서비스가 상업성을 유지하는 한 우리의 문장은 서버에 남으리. 하여간 누군가 마지막 손질을 하지 못한 글이라니 으휴 완성도가 부족할 것 같다.
이 글 또한 완성도도 몹시 걱정된다.
나는 이 글을 더 손 볼 생각이 없는데다 지금 술을 몹시 많이 마셨고 그것도 운치있게 홀짝홀짝 먹는 것이 아니라 병을 들어서 꿀꺽꿀꺽 마셨다.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왜 글을 쓰겠다고 키보드 앞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쓸지도 모르면서 그냥 한가지 아이디어 - 내가 예약을 갱신하지 않으면 블로그에 그대로 올라갈 글을 쓰자 - 를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유치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 글의 예약을 연장해야할 때 쯤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글의 어디를 고쳐야 할지도 생각날 지 모르지.
게다가 나중에 너희들에게 뭔가 나에 대한 이유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막연한 불안ぼんやりした不安”같은거. 농담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면 넘어가자.
그냥 내가 블로그를 업데이트 하는 걸 잊었을 때의 예비라고 봐달라. 아 이것도 농담이다. 내가 블로그를 그렇게 진지하게 할까? 진짜 진지하게 하려면 내 아이패드의 메모 앱과 스프링 노트들을 털었을 것이다. 내 서재 어디에 놓여있는지도 모를 것들.
아이고 술을 너무 마셔서 슬슬 숨이 막힌다. 빨갛게 올라온 취기가 딸꾹질을 일으킨다. 나는 보통 이렇게 까지 취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은 숨기고 타인에게만 솔직함을 강요하는 것이 나의 나쁜 버릇이긴 하다. 일단 뭐라도 솔직하게 말해보자. 내가 죽기 전 까진 말하지 않을만한 것으로.
나는 지금 서재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내 서재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던가? 쾌적하거나 아늑한 것과는 상관없이 숨이 막히는 공간이다. 나는 혼자 살고 있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런것처럼 거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데 끊임없이 쌓이는 책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서재를 따로 두고 그곳에 컴퓨터를 두고 있다. 효율이나 깔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방에는 책장으로 가득차 있고 거기엔 또 책으로 가득차있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책도 아직 읽지 않았던 책도 대중없이 쌓여있다. 오래된 데스크탑들이 구석에 놓여져 있고 그나마 자주 쓰는 데스크탑 위주로 정리가 되어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냥 모든 것이 모든 것 위에 쌓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뭐 대대로 “나의 방”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서재 쪽이 진짜 내 방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어느 정도 철이 들자. 나는 쓸 수 있는 모든 돈을 써서 책을 샀는데. 책장을 사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책은 계속해서 위로 쌓여만 갔다. 나는 책으로 성을 쌓고 잡지로 해자를 만들어 어린 시절의 나를 보호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였을까.
어른이 된 지금의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여러가지 공포가 있었지만. 당시의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세계가 폐색되어 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끝이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갈 수 있는 곳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이의 공포는 어떤 때는 어른의 공포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솔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아니다 당신은 잘못 생각했다.
나는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더더욱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끝을 직면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의 방을 찾아왔던 사람이 내 방에 대해서 감옥 같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는 그 편지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인생에 받았던 편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편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면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편지 정도로 중요하다. 그 편지는 멋진 글씨체로 나의 손자에게, 라고 써있다 내가 지구 어디에 있어도 나는 홍식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 편지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감옥과 같은 방의 주인에게, 라고 첫머리를 적었다. 당신은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는지 알 수 있는가? 자세한 편지의 내용은 여기서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로 나를 정의했다는 사실이다. 편지들은 대체로 누군가를 부르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엔 외면 했고 그 뒤엔 몇 번이나 읽었으면서도 결국 그 편지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네 말들이 다 맞다는 사실도, 너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너를 피하기로 했다는 것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답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수년이나 지난 지금. 비열한 변명을 해보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스피노자던가 세네카던가 희망과 공포는 비슷한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애정은 근거없는 희망과 내면의 욕망의 결과인 만큼 그 근원에서부터 공포를 담보한다. 나는 그의 얼굴를 똑바로 볼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짝사랑은 하지 않는거라고 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시간을 들여 답장을 쓰기는 하였다. 우리가 그냥 카페에 앉아서 잠시 농담이나 하는 친구였다면 좋았겠지 어쩌고 너는 나보다 한참 어리고 네 재능은 내 외로움을 구원하는데 쓰기는 너무 반짝거려 어쩌고. 그렇게 쓰고는 바로 찢어버렸다. 너무나 자기애로 가득찬, 그렇다고 솔직하지도 않은 한심한 답장이라서 보내지 않는게 맞았다.
얼마 전 친구는 나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대답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게 잔혹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단지 내가 벽에게서 자기에게로 잠시 눈을 돌려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감옥에 아직까지도 영원처럼 갇혀있는거고. (나는 아주 오랜 후에 그 사람에게 해야했어야 하는 대답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한다. 그건…또 다른 이야기고 속죄에 관한 이야기이다.)
때때로 나의 생명체로서의 수명에 대해서 생각한다. 회사원을 한지 십년이 넘었는데. 앞으로 십 년 더 회사원을 할 수 있을까 싶으면 잘 모르겠다.
이십 년 후는? 내가 보기에 이십 년 후엔 확실히 회사원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 정부 규탄 시위라도 하면 모르겠다.
아니지 지구 온난화로 물 속에 뽀글뽀글 잠겨 있을 가능성이 더 높겠다.
사람들은 어떤 나이가 되면, 그러니까 사회적인 위치가 안정되기 시작하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 같다.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혔다고 힙합전사처럼 투덜거릴 때야 모르겠지만. 십대 이십대때 생각하는 죽음은 사회적인 본인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필사적인 보정작업이라면
먼 훗날 벌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절망의 결과물에 가낍다. 네 여러분은 적응에 실패했습니다.
뭐라도 해보려고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해서 밥벌이를 하기 시작하고 또 그게 그럴 듯 해질 때가 되면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이 직업을 통해서 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보이는 시점이 오는데. 그게 사람을 좀 미치게 만든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놀라울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에서만큼은 굉장히 자신감에 차있고. 주변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니까. 네가 몰랐다면, 단지 그냥 내가 너와는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를 가볍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성장 한계점이 아직 보이지 않고 노력을 하면 할 수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일을 엄청나게 잘하게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이는 더 이상 열 여섯살이 아니어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생리작용 같은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는 일.
그것은 바로 폐색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항상 세상이 내 생각보다 좁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어른이 되면 그 기분이 나아질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시시각각 삶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고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뚜렷해지기 시작할 때 사람은 겁을 먹기 마련이다.
폐색이란 결국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이곳에 갇혀 있다는 감각이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뛰어난 역량과 노력으로 남들보다 더 높은 성과를 발휘한 사람일수록 그 고통은 더 크다. 내가 이걸 죽을 때 까지 해야한다고? 라는 마음과 내가 이걸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서로 싸운다. 내 인생에 다른 길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이제까지 쌓아올린게 아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싸운다. 애초에 정답은 없다. 그냥 여러분은 폐색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머릿속에 갇히고 말았다. 판옵티콘의 완전한 반대니까 뭐라고 불러야 하지? 모노스옵티콘이라도 되나.
이런 폐색에 갇힌 사람들은. 여러가지 행동으로 자신의 폐색을 부정한다. 갑자기 자신의 주변 - 가족과 친구 - 에게 집착하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아이의 성장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20대 시절에 대한 향수인지 갑자기 사랑을 찾겠다고 불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에 더욱 매진하는 사람이야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더 얘기해볼까? 더 큰 가치에 매몰되기 위해서 종교에 빠져들거나 정치와 사상을 통해 본인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도 하고. 그냥 단순히 직업적인 측면에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재테크를 하고 놓쳐버린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운동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요지는 그들 모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폐색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게 쾌락이든, 신앙이든, 관계이든 간에 하여튼. 그들이 진짜로 폐색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는…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아니고 나는 저 방법 중 어떤 것도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는 애초에 폐색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한가지 종류를 말해두는 걸 까먹었다. 그냥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죽음을 선택한 부류들은 확실히 자기 자신의 세상에서 탈출하는데는 성공하였다. 대단한 멍청이들이다.
직접적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나는 요즘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꼭 누군가에게 마음이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파형이 상승하고 또 하강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 죽음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언젠가 주파수가 낮아지고 파형이 잦아들 때 점이 한개의 점으로 수렴하게 되는 바로 그 지점. 그 끝 점에 대해서 생각한다.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돌려도 결국 생각은 다시 돌아와 죽음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정말 질릴 정도로 지겨운 반복이다. 내가 정말로 죽지 않는 이상은 멈추지 않을 생각인 것처럼 느껴진다. 제기랄.
나는 한 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한 번에 보고 수많은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면 당신도 놀랄 것이다.
하지만 웃으며 농담을 하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달리기를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결국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구르는 돌과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 같이. 모든 하찮은 존재들의 기도같이.
나는 가끔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마다 나의 상상력이 빈약한 것에 진절머리를 낸다. 가끔 앞일에 대해서 뭐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면 문득 답을 말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저 사람들은 그냥 여러분보다 상상력이 빈약해서 가장 일어날 법한 일을 말하는거랍니다.
빈약한 상상력으로 노력해보자.
그러니까 내 삶은 아무 것도 없어.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사랑해야하는 사람도 없어. 근데 내가 왜 10년, 20년을 더 살아야하지? 하고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짜증을 내며 그래도 좀 만 더 살아봐 라고 말했다.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 더, 그게 나에게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
나는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때면 무언가를 내 인생에 삭제하는 것으로 삶을 유지해나갔다.
만약에 이 글이 내 블로그의 마지막 글이 된다면. 그건 내가 그냥 이 블로그를 버렸다는 뜻이다.
혹은 블로그가 아니라 글 쓰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거나.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겠지.
어느 쪽이든 당신과 나 둘 모두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당신을 정말로 소중히 여긴다는 고백이고 나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만약에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그것은 내 실수이다.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언젠가 아무 것도 없는 습지에 간 적이 있다. 흰색의 바람이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고 녹색의 풀들이 서로에게 부딪혀 엄청난 소리를 냈다. 마귀와 악령들이 공중에서 난폭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고 새들이 새된 소리로 날아다니며 그들을 비웃는 268제곱킬로미터의 녹색 땅에서 나는 정말로 몇 없는 두 발로 걷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불어와 난폭하게 떨어져내려오는 그 무엇에 나의 일부는 불려 날아올라 굉음과 밝은 빛 아래에서 영원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는 나는 나의 이름을 한 어떤 일부이다. 나의 일부는 영원히 바람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그런 내가 어떤 애정이나 행복을 갈구하는 것이 마땅한 일 일까? 그냥 웃기는 얘기이다.
나는 자격이 없는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영혼도 없다. 나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 폐색되어 있다.
나는 이미 몇번을 죽었다. 결국 여기에 있는 글들은 대체로 나의 헛된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아마도 실패했다. 하지만 바란다. 누군가는 실패하지 않기를. 당신을 봄을 만난 것처럼 사랑해주길.
처음에는 이 글을 7월에 썼다고 말했지만. 글의 예약 기간을 연장하며 글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7월에 쓴 글 위에 8월에 쓴 레이어가 올라와앉았고 지금은 9월이다. 처음 글을 썼을 때처럼 술을 마시고 있다. (외할아버지를 조문하러 갔을때 받았던 죽은 사람들을 위한 소주이다.)
지금은 더 이상 뭔가를 더해서 쓸 생각은 들지 않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샐린저의 어쩌고 라는 소설이다)중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글의 예약을 다시 연장해둔다.
가능하다면 당신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정확히는 이 글이 오직 스스로를 위한 글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인용문은 이렇다.
“시모어는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이 결국 ‘거룩한 땅’의 어느 작은 곳에서 그 다음의 작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그는 절대 틀리지 않는 것일까? 이제 자러 가자. 빨리. 빨리 그리고 천천히.”
저 책의 주인공은 간절하게 자신의 형 시모어가 자살한 곳인 307호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주와 샐린저와 우리들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래 어떤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라틴어 경구였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빨리. 빨리 그리고 천천히 Festina Lente 혹은 급할 수록 돌아가라. 우습다. 결국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만이 307호에 당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니.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이 폐색에서 탈출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가? 누군가 내가 갇혀있는 머릿속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아가게끔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없는 다른 곳으로?
지루해졌다. 이제 그만 자러 가자.
24년 7월부터 여름 동안에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