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증명_(에세이 등)

[20240820] (My) 20th Century

Masked 2024. 8. 20. 05:36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겠다. 20세기의 이야기이다.
 
나라고 20세기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20세기의 후반에 태어났고 이제 21세기에 살았던 시간이 더 길어져서 20세기의 일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설령 아니 그렇다고 해도. 사람에겐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어느날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창문 밖의 눈오는 밤을 쳐다본 일. 우리 외엔 아무도 없는 호텔의 옥상에 앉아서 불꽃놀이를 봤던 일. 정글짐의 꼭대기에 앉아있다가 말을 걸었던 일.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더운 여름에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던 일. 아버지가 저 멀리 해변의 트라이포트를 향해서 저건 고래의 뼈야 라고 말해줬던 일 같은거 말이다. 사기꾼 자식 진짜.
 
20세기의 전경이라고 해도 지금과 크게 다를바는 없다. 나는 공업도시에서 자랐다. 어느 정도 공업도시였냐면 아파트를 벗어나면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사는 저층의 주거지들이 있었고 바로 공장단지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를 가려면 공장 단지를 가로질러야 했으니까 말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아이들의 통학이 위험하고 어쩌고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엔 초등학생들의 값이 쌌다. 한 두명 정도 한꺼번에 등교에 늦어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1학년 때 나는 반친구 두명과 놀다가 깜빡 늦어서 30분 정도 늦게 등교했는데 선생님은 우리가 오지 않은 것도 몰랐다)
오히려 내가 1학년일때 고가도로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는데 서럽게 울고 있는 나를 공장 아저씨들이 번쩍 들어서 사무실에 데려가더니 약을 발라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제강제철을 위주로 하는 2차 가공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 가공된 철강제품을 인천의 수출단지로 보내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시꺼멓게 검댕이 묻어서는 옳지 옳지 하며 사내니까 울면 안돼 하며 나를 토닥이고 보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공장을 아주 좋아한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지금과 결정적으로 다른게 있다면,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초등학생들이 정말 값이 싸서 역곡시장에 가면 싱싱한 초등학생 한 명에 오천원 정도했으니까. 어딜 가나 친구들이 많아서 아파트 아무 곳에나 가도 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다치거나 구르거나 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나와 누나가 이유없이 꿀벌을 포충망 가득히 잡아서 가지고 다니다가 포충망이 찢어져서 내가 꿀벌에게 수십군데를 쏘였을 때도 (중간에 좀 다른 얘길 하자면 몇 년 후 소년이 꿀벌에 잔뜩 쏘여서 아나팔락시스 쇼크를 일으켜 죽는 영화가 나왔는데. 어린 나는 와 죽을뻔 한거구나 하고 소름끼쳐했다.) 내 친구가 통학길에 진도잡종인 커다란 개한테 청바지가 찢어지도록 물렸을 때도 어른들은 대단치않게 생각했다.

우리는 어땠는가. 어린애들도 보통 자기의 생명과 안전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한달에 두명 정도는 아파트 정글짐에서 뛰어내리다가 팔을 부러트렸으니까.
 
그렇다면 20세기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생명과 안전보다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건 우리 부천시 소사구만의 가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는 가난과 불화의 상징 부천시에서 자랐다.) 100원짜리 동전이 초등학생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 무슨 동전 몇 닢에 목숨을 파는 용병 같은 소리인가 하드보일드 하구만. 하지만 정말이다. 20세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는 재화들은 대부분 100원 아니면 200원이었고. 500원짜리는 이미 고급의 영역이었다. 
 
여러분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간단히 말해주자면 거의 모든 아이스크림이 200원을 넘지 않았다. 500원을 넘어가는 것은...부의 상징 월드콘 정도였다. 엑셀렌트? 내가 너무 늙어보이지만 엑셀렌트는 내가 이미 좀 자아가 생긴 어린이였을 시절에 번개처럼 등장했다. 황금색 껍질을 가진 그런 비싼 물건은 어른들이 사주지 않으면 절대로 먹지 못하는 고급품 중의 고급품이었다.

우리 동네 태권도 사범님이 어느날 아주 침통한 표정을 하면서 얘들아 100원이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데 왜 뽑기(그 뭐냐 요즘엔 가챠라고 하지)를 하니? 그런 잡동사니를 사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렴. 이라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다. 이는 베트남 전에도 참전하신 진짜 20세기 인간 사범님과 우리 20세기 말의 어린이, 자본주의 악마 졸개들 사이의 차이였는데 우리는 먹을 것보다 재화(아무런 가치가 없더라도)와 도박(가챠는 도박이니까 말이지)에 혼이 나간 말세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말세의 자식을 가졌으면 응당 장난감을 좀 사줘야 했을텐데 부모님은 누나와 나에게 장난감을 그닥 사주지 않았다. 째째하다기 보다 아버지의 월급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쯤 아버지가 집에 가져다 주시는 돈이 80만원이라는 걸 알았는데 한국의 통계청 소비자 물가 지수 화폐가치 계산에 따르면 대략 1990년의 만원은 2020년의 이만육천원이다. 생각해보니 아니 집에 고작 200만원을 가져다 줬단 말인가? 확인해보니 1990년 기준 중위 소득은 92만원인데 명문대를 나와서 당시 모 기업의 이사였던 주제에 겨우 80만원을 받았다는 얘긴데 정말 믿을 수 없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째째해서 나는 장난감이 거의 없었다.
 
대체로 가지고 노는 것은 사촌형의 장난감 중 더 이상 갖고 놀지 않는 것인데 나는 어른들이 꼴보기 싫어할만큼 내 장난감들 - 주로 레고였다 - 에 집착했는데. 가장 즐겨했던 것은 매일 5시쯤부터 공영방송에서 하는 만화를 보고는 그 만화의 내용을 내 장난감들로 재현하고 재창작하는 활동이었다.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때는 공영방송 외에는 제대로 된 채널이 없어서 하루 종일 만화만 틀어주는 채널 같은 건 없어서 아침에 만화를 보려면 잘 기다리다가 AFKN의 TV 방송을 봐야했다. 지금은 아날로그 TV송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 같지만. 그 때는 세서미 스트리트나 각종 일본 애니의 영어 더빙 버젼을 오전에 해줬기 때문에 다음 방송이 뭘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멍하니 AFKN을 봤다. 만약에 마징가 같은 것의 더빙 방송이 나오면 대박이었다!
내가 세서미스트리트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면 외국인들은 가만 듣고 있다가 근데 너는 한국인이잖아?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나도 어릴 때 세서미 스트리트를 봤다고. 내 인생에서 가장 영어를 잘했던 건 4세에서 7세까지 였다고. 집에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혼자 영어로 노래부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녔으니까.
 
어느날 나는 환상특급 (이게 뭔지 궁금하다면 트와일라잇 존을 검색해보면 된다)을 보다가 "악당의 최후"라는 제목을 보고는 어머니에게 가서. 엄마 엄마 최후라는 게 무슨 뜻이야?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스튜어디스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도 꽤 잘 했는데 하루 종일 영어를 물어보는 내게 좀 질려서는 뭘 물어보든지 좀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시기였기에 그 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건 죽었다는 뜻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는데 난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죽기를 바라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결말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왈츠를 추듯이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줬으면 한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그 최후라는 말의 무서움을 떠올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나는 때때로 그렇게 아무도 모를 이유로 우는 경우가 많았어서 누구도 나를 달래주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에게도 내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공업도시라고 해도 주변은 전부 산이었다. 그야 여긴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 바다 근처에서 자란 사람이 자기 어릴 때 얘길 해주면 홀린듯이 듣곤 했는데. 아파트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바로 저수지와 논밭. 그리고 과수원이 있었다. 지금 그 곳은 멋진 이름의 수목원이 되었는데 예전 논밭과 과수원이 있던 시절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온실 같은게 생겼잖아요 라고 말하면 우리 때는 비닐 하우스가 있었다구 라며 엣헴거리고 싶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게 지겨워지면 나가서 놀았는데. 내가 좋아하는건 역시 모래 장난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에서는 동네 놀이터의 바닥재를 교체한다면서 투표를 했는데 분명 우리 동에서는 압도적으로 모래를 밀었으나 결과는 합성수지로 결론이 났다. 모래 장난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들 까먹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못 분해했지만. 생각해보면 모래 장난을 하고 온 아이가 얼마나 더럽고 집에 모래를 잔뜩 흘리는지 까먹은 것은 내 쪽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래 장난을 할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다름 아닌 비가 온 직후이다! 그 전 까지 함정이나 파고 탑이나 쌓아올리는게 전부였다면 비가 오면 그 꾸정물로 해자를 가득 채우고 강을 만들어 그 위에 다리를 세우는 것도 할 수 있었는데. 어릴때 부터 건축이라면 이상하게 환장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신나는 이벤트라서 비가 그치기만 하면 집을 뛰쳐나가서 거대한 마을을 축조했다. 크고 멋지게 만들면 만들수록 동네 어린이들이 몰려들어서 나의 거대 마을에 고사리손이라도 보태겠다는 뜻을 표하곤 했는데. 나는 관대한 건설자요 시장이었기 때문에 동전 하나 받지 않고 그들의 참여를 허락했다.
 
시간 제한은 항상 5시였다. 집에 가야할 시간이다. 만화가 할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에 가서 손발을 씻고 혼나지 않으려면 세수도 해야했다. 만화를 보면서 모로 누워있으면 누나가 와서 나 이거봐야해 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만화를 틀었고 그것도 보면서 구석에서 누워있으면 어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불렀다.
 
나는 오늘 반찬이 뭔지 묻지 않는다. 아까부터 갈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24년 8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