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1] 중력의 연구를 위한 메모
이 글은 2018-20년 사이에 쓴 글이다. 정확하게 언제 썼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여러군데에 글을 남겨두었는데, 이 것은 아이패드에 있었던 글이고 아이패드의 어플은 글의 최초작성을 알려주지 않는다. (갓뎀 애플아이엔씨)
이 글을 읽다보니 내가 아닌 누구를 위로하기 위해 썼던 글인 걸 깨달아. 미완성인 글을 조금 고쳐 블로그에 올린다.
아마 이 글을 받았어야 할 사람에게는 너무나 늦은 메세지 일 것이다.
…
3주 째 일요일 저녁에 카레를 만들고 있다. 커다랗게 자른 감자와 눅진눅진 할 정도로 진한 카레가 먹고 싶어서 계속 카레를 끓이고 있었는데 좀처럼 성공하지 못한 탓도 있다. 재료는 심플하게 감자와 양파, 그리고 때때로 아보카도나 토마토를 넣는다. 쇠고기가 있으면 쇠고기를 넣고 돼지고기가 있으면 돼지고기를 넣는다. 중요한 것은 결국 감자와 양파다.
골든카레 박스 뒷면을 보니 4피스 카레에 물은 1.2리터를 넣어야 한다. 처음엔 좀 진하지 않을까 싶어서 1.4리터를 넣었더니 카레가 무슨 국물처럼 되었다. 울면서 카레를 마시고 다음 주엔 물을 1.2리터를 넣었더니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토마토를 너무 많이 넣었고 감칠맛을 위해 넣은 아보카도가 덜 익었는지 쓴 맛이 났다. 월요일 저녁까지 차갑게 식은 카레를 먹으며 내가 뭘 잘못했지 하고 실패를 곱씹었다.
오늘은 일단 감자를 7개나 깎았다. 양파 커다란 걸 잘라 잘게 자른 후 캬라멜라이즈를 시도했다. 주간에 사둔 쇠고기를 잘게 잘라 갈변하기 시작한 양파와 섞고 볶은 후 커다랗게 자른 감자를 쏟아부었다. 냄비 밑 바닥이 타는 기분이 들어서 앗차 싶길래 물을 0.8리터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치킨 스톡이라도 넣을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보니 갈색에 아주 멋져 보이는 고깃국이 되었다. 역시나 이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형 카레를 넣고 15분 정도 끓이고 15분 정도 숨을 죽였더니 걸죽하고 감자가 커다란, 내가 처음부터 만들고 싶었던 카레가 되었다.
누군가 당신은 혼자 산 지 몇 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카레를 만드는 방법을 모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항상 카레 만드는 방법을 까먹어서 매번 카레를 만들 때 마다 그 방법을 발명해내야한다고 변명 할 생각이다.
그것은 100%의 사실이다. 애초에 나는 카레를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카레를 잘 먹는 사람이다. 어떤 종류의 카레든 상관없다.
몇 년 전인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처음으로 카레를 만들어 본 날, 그걸 먹어본 여자친구는 이거 되게 국 같아 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용기로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와 카레를 만들어 준 걸까. 생각해보니 다른 건 몰라도 예의범절은 올바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 전에는 내가 만드는 카레가 못 먹을, 아니 나나 먹을 음식이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스스로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그걸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로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우주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나는 평범하리만큼 나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일들은 대체로 누군가에게는 몹시 이상하고 끔찍하게 들릴 수 있는 일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에서는 정의롭고 똑똑한, 그리고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온 우주는 그들을 돕고, 모든 노력은 보상 받으며. 마지막에는 행복과 화해가 약속되어 있지만 자아를 깨달을때 쯤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길거리에 마주치는 아무개 하나조차도 그 사람의 우주에서는 주인공이며 그에게는 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우주가 있다.
당신은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주는 나에게 친절하며 나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일들은 다 나의 뜻대로 이루어질거야 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 나름의 우주도 꽤 아름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은가. 나에게 적당히 무관심한 우주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우주의 진짜 얼굴을 바라보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원래 우주는 카레를 제대로 한 번 만들기 위해서도 3주가 넘게 걸리는 그런 귀찮은 곳이다.
나는 별명이 고등학교때부터 카레인 사람이고.진짜 카레 가루를 쓴 것도 아니고 마트에서 편하게 산 고형카레와 정육을 쓴 건데도 말이다.
들어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
길고 긴 카레 만들기의 이야기를 한 것은 내가 이런걸 썼을 때 여기까지 읽어줄 사람은 당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아픔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잘 모른다. 당신의 말을 더 귀기울여 들었다면 좋았을텐데 형편없는 인간인 나는 당신의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흘려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 바빴다.
우리 모두의 인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해야할 말을 올바른 시기에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좀 더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창 밖에서 보이는 탁한 색의 햇볕도, 어느날 문득 발 밑을 보았을 때 줄을 지어 걸어가는 개미들의 앞길을 피해주는 것도, 목이 마른날 마셨던 미지근한 물도. 우리가 마땅히 했어야 했던 인사들도 모두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
작년에 썼던 글 중에 <현대인의 신념구조>와 <사악한 자들의 기도>는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이라고 말하니 좀 우습다. 어떻게 완성해야할지도 알고있었고 얼개도 짜서 기록해두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완성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사람들에게 준 고통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이것저것 메모를 해둔 페이지를 넘겨보며 그래도 작년엔 쓰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올해는 쓰고 싶은 것 마저 없었다.
중력의 연구(1)이라고 써둔 메모에는 내 손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을 향해 낙하한다”
메모를 뒤집어 보아도 중력의 연구(2)는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다. 나는 조금 참담한 기분이 되어 볼펜을 찾아 “중력의 연구(2)”라고 적는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한 후 그 뒤를 이어서 적는다.
중력의 연구(2) “그들은 끌어당기는 힘을 발견했을 뿐, 밀어내는 힘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라고 쓴다.
언젠가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단지 모든 방향으로 낙하하고 있을 뿐이다.
24년 9월에 올린 미완성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