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4] Waltz for nobody
바닥에 고무공을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색의 공이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넓은 바닥 위에 고무공을 던진다면, 그 공은 탄성에 의해 튀기기를 반복하다가. 점점 그 튀는 높이가 낮아지고. 어느 순간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는 그 굴러가는 공을 보면서 그 공이 어디까지 굴러가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날이 덥다. 금세 시원해질 것 처럼 매일매일 선선해지더니 그랬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덥다.
오늘은 뭐라도 해야했기에 연두색 티셔츠에 갈색 반바지를 입고 장을 보러 나갔다. 아주 느릿하게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바닥을 밟고 다시 뗄 때 마다 웃기는 소리가 난다. 밟지 좀 마, 안 그래도 참고 있으니까- 라는 의미의 행성의 투덜거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햇볕이 쎄다면 바닥은 금방 마를거야.
촤악, 촤악 소리를 내며 걷고 있으니까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요즘은 로드 러닝을 주로 한다. 아침엔 슬로우버피 3세트를 하고 어깨 스트레칭과 무릎 강화 운동 양쪽 3세트씩을 하고 출근한다. 러닝은 저녁 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이 하진 않는다. 나는 뛰는 걸 굉장히 좋아해서 쓸데없이 무리를 하고는 하는데. 20대때 다친 왼쪽 무릎과 발목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이번에는 무리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가볍게 시속 7-8킬로미터로 3킬로미터 정도를 뛴다. 원래는 시속 10-11킬로미터 정도로 30분을 달리는게 내 운동 루틴이었지만. 체중은 늘고 근육은 줄어들은 지금 - 공평하게도 그렇게 되었다 - 그렇게 뛰면 반드시 다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안 그래도 지난주 주말 조금 신나길래 토일 연속으로 6킬로미터를 달렸더니 왼쪽 무릎이 묘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무릎이란 무리를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강화가 되지만 무리를 하면 바로 탈이 나는 신비로운 곳이라서 바로 고무밴드를 사서 레그 익스텐션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달리던 러닝도 하루 건너로 인터벌을 주었다.
로드러닝보다는 트레드밀에서 러닝하는게 무릎에는 더 안전한데. 나는 트레드밀이 너무 싫다. 트랙 러닝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진짜로 달려서 세상의 어느 곳에서 다른 어느 곳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러닝의 재미인 것 같다. 설령 그게 실제로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그냥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나의 로드러닝은 크게 특이할 것은 없는데.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몸을 풀다가 현관문을 나가면 냅다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속 7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거니까 절대로 빠르지 않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동네의 거리를 달리다가 아파트 단지의 커브가 있으면 틀고, 횡단보도가 때마침 파란불이 되면 길을 건넌다. 아니 왜? 이유는 없다. 정해진 코스도 없고 이정도 뛰면 된다- 정도로 정해둔게 있긴 하지만 어차피 동네는 동네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고 해봤자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앞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물론 길치 이슈는 있다. 나는 남해보타락산 관세음보살도 구해내지 못할 정도로 길치라서 신나게 뛰다 보면 여기가 어디지 하는 생각이 들게 길을 잃는데. 로드러닝을 할 때는 애플워치와 에어팟만 가지고 길을 나서기 때문에 - 그 외엔 수상할 정도로 짧은 반바지를 입은 중년 남성 정도죠 - 어차피 길도 찾을 수 없다. 그냥 내가 너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가길 간절히 기도하며 일단 신나게 달리는 것이다. 여러분 저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신이 납니다. 강도들 도둑들 소매치기 놈들아 너희가 나에게서 가져갈 것은 반바지 뿐이다. 아니 애플워치는 가져가시면 안됩니다 제 달리기 이력이 입력되어 있다구요.
어차피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뛰어나갈 체력은 없다. 삼십분 정도 연속으로 달리면 숨을 너무 심하게 쉬어 등이 아프기 시작하고. 심박수 평균 150을 넘어가는 페이스로 달리기 때문에 유산소 운동이 아니라 무산소 운동이 된지 오래이다. 오래 달리면 온 몸이 아프다. 고통스럽다. 땀이 범벅이 되고 코와 입 동시로 숨을 쉬다 보니 목이 갈라진 소리가 난다. 그런데도 왜 로드러닝이 즐겁냐고 하면. 나도 이유는 모른다. 상대가 없이 하는 섹스랑 비슷한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인류에게는 상대가 없는 성행위에 자위라는 적당한 이름을 붙여두긴 했는데. 무의미하고 가학적이고 육체를 소진한다는 점에서 로드러닝은 정말 그 뭐시기 그런 훌륭한 활동이다.
그렇다면 트레드밀에서 달리는 쪽이 훨씬 훌륭한 활동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텐데. 아니 트레드밀 러닝은 진짜로 아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짓이고. 영국 공상과학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트레드밀은 시급 9,860원을 챙겨주는 노동으로서 나라에서 보상해줘야만 할만한 활동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트레드밀로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트에 갔다. 사람이 많기도 하지. 뭘 특별히 사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배추 두 포기를 사니까 의욕이 사라졌다. 나는 알배추를 좋아하는데. 그냥 잡곡밥이랑 쌈장 정도가 있으면 그걸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농촌의 촌로 같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진짜로 그걸로 매일매일 먹는건 아니니까. 그냥 귀찮을 때 그렇게 먹는다는 뜻이다. 또 묘한 자책감이 들어서 깻잎도 사고 훈제연어와 중량이 그럭저럭 많지 않아 보이는 호주산 쇠고기도 샀다.
가족 단위로 모여있는 곳에 유일하게(정말 유일하게) 혼자 와 있으니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내 쪽을 향해 환하게 웃길래 옆을 돌아보니 무릎 높이 정도의 아이 하나가 꺄르르 웃으면서 뛰어가는게 보였다. 흑백 영화겠지. 파란색 원피스와 검은색 원피스는 구분이 가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또 유니클로를 들렀다. 먹을 것이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며, 집 근처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유니클로 정도 밖에 없다. 먹을 것은 사두면 썩는다 얼마전에도 포도를 잔뜩 버렸다. 샤인머스캣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살려면 부피가 작아야 하는데 필기구는 좀처럼 쓰질 않는다. 책은 이미 너무 많이 샀다. 읽는 것보다 사는게 더 쉬운 물건이라니 이번 연휴 동안 도대체 몇 권을 읽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집 근처에 백화점이 있었던 시기에는 아무 이유없이 백화점에 갔더랬다. 그 덕분에 단칸방 자취 생활을 오래동안 벗어나질 못했다.
어머니는 내 나이에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서 방에 쌓아두는 취미가 있으셨다. 대단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커트러리라든가 그런 것들. 굳이 살 필요가 없는 것들이 할인을 나쁘지 않게 한다 싶으면 일단 사서 가져다 놓으셨다. 이걸 왜 사는거에요 라고 하면 너나 너희 누나가 결혼할 때 주려고 라고 말했는데. 내심 이런 잡동사니를 나한테 떠넘기려고?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취를 하려고 집을 나갈 때도 어머니가 주는 잡동사니를 다 그대로 집에 두고 도망쳤다.
어머니가 마음이 공허하여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자식이었고 어머니 마음의 공허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도 내가 먹지도 않을 음식들을 사고 읽지도 않을 책을 사며 입지도 않을 옷을 사고 있는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 어머니 차라리 그냥 비싼 물건들을 하나씩 사는게 어떠세요. 이런거 하나도 필요 없잖아요 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좀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어머니는 마음이 약하고 때때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잘 살아계신다. 그러나 왠지 과거형으로 쓰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두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의 일종의 안티테제 같은 존재인데. 나는 내 안에서 어머니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 할 때 마다 징그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또 내심 안심하기도 한다. 그 안심이란 결국 내가 아버지의 클론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오는 안심이긴 하다.
유니클로에서 산 건 속옷과 후드티였다. 내 나름의 합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소모품이고 필요한 것이고 말야. 집에 가득 쌓여있는 언젠가는 버려야할 옷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을 해보기로 한다. 집에 정리 해야할 옷들과 책들이 가득하다.
내 옷도 내 책도 아닌데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걸 정리하지 못하면 난 영원히 쓰레기더미에서 살아야 할텐데. 아직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용기라기 보다 의욕에 가까운 것이다.
고무공을 바닥에 쎄게 던지면 공은 크게 튀어오르지만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고, 튀어오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바닥을 구르게 된다.
어떤 생각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인생이 그러는 것처럼.
모든 운동은 크게 튀어오르는 것 같다가도 결국 바닥을 구르고, 또 어떤 한 지점에서 멈춘다.
당신과 나는 공이 언젠가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어떤 때는 그 공이 어디에서 언제 멈출지도 거의 정확하게 맞춘다. 그것은 공을 여러번 튀겨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그 공이 영원히 튀어 어딘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까지 올라가고 보이지 않을 천상에 다다를 것을 바라기 때문에 오히려 거꾸로 그 공이 어디서 멈출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나는 그냥 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삶에 대한 용기 그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그것은 결국 어떤 운동이다. 비가역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무의미에 대한 저항.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은 세상의 작은 어떤 곳에서 다른 어떤 작은 곳에 도달하는 것 뿐이다.
나는 내가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두렵다. 저 별로 멀지 않게 보이는 그곳.
내가 그 지점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 또한 두렵다.
24년 9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