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하는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외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난 날. 

커다란 키에 양복과 목도리, 지팡이를 한 외할아버지는 턱을 굳히고 주변을 쳐다보았다. 


두번째로 만난 날 누워있던 어머니는 아버지, 아이들을 봐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눈썹을 찌푸리셨던 걸로 기억한다. 

외할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쳐다보고 장갑을 벗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에게는 총명하고 씩씩하구나. 

나에게는... 너는 새끼여우 같구나. 라고 하셨다. 새끼여우. 

누나는 그날 외할아버지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서 네 기억이 잘못된거라고 말했다.




17년 1월 5일은 외조부의 3주기이다.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항상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탄다고 하셨지만 

오늘 외할아버지를 만난다면 그 누구보다 수다쟁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몇 번이나 외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3주기가 다 된 지금까지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겠다. 


입 밖에 내지 않은 사실들이라도 그것이 잊혀지진 않듯이 감정이나 기억들이 스러지지 않고 신발 속의 모래처럼 남겨져 있듯이. 

나는 이 마음이 완전히 가시는 일 없이 그대로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원히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사람은 이미 가버렸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감정이 남기고 간 것들이 계속해서 움직여간다.


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2015년 9월 나는 교토에 여행을 갔었다. 

그 당시 나온 아이폰을 사러 간거였고 교토에 갔던 것은 일종의 벽에 도배할 때 쓰는 덧붙임 종이 같은 거였는데. 

생각보다 예약한 아이폰을 빨리 구매 할 수 있어서 오사카에서 교토에 도착하자 오후 한 가운데 쯤이었다.


내가 왜 굳이 니죠 성을 가려고 했는지, 교토역에서 내리자 별로 고민도 없이 캐리어를 질질 끌며 니죠 성에 갔다.


처음 가는 곳이었는데도 니죠 성에 가자 익숙하게 여기가 어떤 곳인지가 떠올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헤이안쿄의 궁궐이었던 니죠 성은, 그 후로 계속된 증축과 개축을 겪었으며 니죠의 어전과 그 정원은 우아하다. 

병사들을 막기 위해 축조된 벽과 해자, 그리고 연못들. 총을 쏠 수 있는 각도를 생각하여 꺾여진 길들.

끊임없이 니죠 성에 대한 것들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성을 관람하는 것이 다 끝나고 성 앞의 벤치에 앉자.

나는 그제서야 나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외할아버지였다.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일본의 정경을 사랑하셨기에 분기에 한 번은 일본에 다녀오셨다.

자주 어떤 곳이 아름다운지를 설명하셨다. 즐거운 듯이 예전의 일들을 얘기해주셨다.

크게 앓으셔서 더 이상 해외를 가지 못하게 되시고 나서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일본 출장에 다녀올 때 마다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먹거리들을 사서 보내드렸다.


할아버지가 조금 나으시면 제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에 며칠 다녀올게요.

어머니나 이모가 같이 가면 오히려 불편해 하실테니까. 어떠세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마음에 안드는게 있을 때면 그러시던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먼 곳을 쳐다보셨다.


니죠 성에서 가라스의 길을 건너 로쿠도인으로 가는 사거리. 나는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이제야 왔네요. 이제야 이해했어요.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반팔의 소년이던 외할아버지가 앉아 책을 읽던 곳.



나는 외할아버지가 얘기했던 정경을 근거로 4개 정도 후보지를 구글 맵에서 찾아냈다.

물이 흐르다 느려지고, 굽이 치고. 다리가 멀리 보이며 기온의 한참 남쪽. 강변으로 내려가는 경삿길.

밤이 되면 금방 까맣게 되었지만, 경삿길 부근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해가 질 때 까지-하고 말씀하셨다.

오래 찾을 것도 없었다. 북쪽에서 부터 차례대로 후보지를 가보다 세번째 쯤 나는 여기가 외할아버지가 있던 곳이란 걸 알았다.

반팔의 소년이 밤이 올 때 까지 산시로를 읽다가 일어서던 곳. 이제는 찻길이 생겨서 조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모가와의 강변에서 조용히, 서른도 넘었으면서 새끼 여우처럼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뭐라도 해라. 돈을 벌어. 버러지처럼 살지 말아라. TV를 트시더니- 봐라 저기 자막 나오는 거

보험쟁이든 외판원이든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것이 아니냐. 제 밥값을 못하면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어.

할애비는... 할애비는 늙었어. 외손자가 제 몫을 할 때 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을 자신이 없어.
너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돼. 뭐라도 해라 뭐라도 제발.

혹은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큰 손자를 자주 그리워하셨다.

서울대 병원에 큰 병환으로 입원하고 계실때 병실을 지키다 이모와 교대하는 나에게 들리란 듯이 외손자는 어쩔수 없군. 이라고 중얼거리셨다.

친손주들은 영화에 음악을 공부하는데 그건 뭐라도 제대로 하는거에요 이모? 네가 참아. 너한테 투정부리시는거야 알면서.

외할아버지가 첫번째 쓰러지셨던 날. 나는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로 차를 돌려서 댁으로 갔다. 외할아버지는 낭패해하셨다. 

일어설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어. 걷지 못하는 짐승은 죽는거다.

이모와 외삼촌과 어머니와 내가 외할아버지의 옆에 있었다.

할애비는...이제 다 틀린 것 같다.

괜찮을겁니다. 외할아버님. 이라고 말하자 외할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외할아버지 댁에 있을 때의 내 자리 - 외할아버지의 애장서들을 모아둔 책장 옆 -에 서서 나는 외할아버지을 보았다. 

그래요? 외손자니까요?

일주일 후 두번째 쓰러지셨고 ICU에 들어가셨다.

1월 4일은 토요일이었지만 나는 회사일이 있어서 하루 종일 다른 곳에 있었다.

팀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장례 지원을 하는 일이었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외할아버지 많이 아프셔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일원동에서 흑석동의 병원 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
그리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 

나는 강남역에서 멈춰섰다. 외할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가실 분이 아냐. 그렇다고 해도 기다려주실거야. 

한시간이 넘게 강남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은 아무 나쁜일도 일어나지 않을걸 믿는다는 듯

(외할아버지가 나를 버리고 먼저 갈 일이 없을 거라는 듯이)

ICU의 면회시간이 끝날때 쯤,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 할아버지는요? 응 괜찮아 많이 나아지셨어 하고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내일 일요일이니까 내일 면회시간에 올게요. 응 그래 고마워.

어머니와 나는 병원 주차장에서 한참을 그냥 앉아있었다. 너무 늦게와서 죄송해요. 아니야, 회사일 하고 있었잖아.


1월 5일. 나는 버스를 타고 종로에 도착했다.

아이패드 케이스를 사고. 커피를 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딴 짓을 하고도 어쩔수 없이 외할아버지가 누워 계신 병원에 왔다. 

혜화동의 병원으로 정오 쯤에 옮겨지셨다. 나는 이모가 울면서 건 전화에 잠에서 깨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나는 세 명의 친손자와 네 명의 외손자 중 하나였다.

당신이 가장 사랑한 친손자는 외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서울의 집을 물려받았고 

외할아버지의 책장들을 물려받고 싶었던 나는 친척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던 나는 이제 이걸로 됐어요. 

하고 한 마디를 하고 식장을 나가 집으로 갔다. 

나는 당신의 시신도 묫자리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려주실거죠 외할아버지. 제가 갈 때 까지요. 

제가 할아버지를 뵈러 갈 때 까지 그대로 있어주실거죠?


입으로 내지 않은 진실이라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내가 왜 외조부 댁 바로 옆의 대학에 갔는지, 의미없이 특차로 그 과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할 사람이 물어보지 않았다.

네가 대학에 들어갔으니 이제 한 달에 한 번 할애비와 점심을 먹자구나. 괜찮겠느냐.

네 외할아버님. 

하지만 제가 왜 이 학교에 갔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물어보시지 않으시네요. 당신은 몇년 후에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십니다. 

뭐가 미안하세요. 하나도 안 미안해요. 할아버지 저한테 미안한거 하나도 없어요. 안 미안해 할아버지 그런 말 하지마.

 
입으로 내지 않은 감정이라고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야 말로 내 어린시절을 지켜준 내 진짜 아버지이며 당신이야 말로 내 이상의 "신사"라고. 

결국 나의 마음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 가끔 외할아버지의 책장에 대한 꿈을 꾼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란 것이 시간이나 공간 같은 보통은 넘어서지 못하는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억이나 감정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이 찌꺼기가 아니라 어떤 씨앗이 혹은 복수의 평면에 작용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몹시도 후회하는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대해 몹시도 부정적이다. 가모가와의 강변은 여우를 묻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16년 12월 30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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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룁니다.
노츠케 반도 네이쳐센터 I상.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저는 6월에 노츠케 반도를 방문하였던 한국인 K라고 합니다. 지금쯤 노츠케 반도는 여름을 맞이해서 더욱 아름다워졌겠군요. 꽃들이 피어나고 더 많은 새들이 반도를 찾아왔겠죠.

저는 홋카이도 여행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어느덧 몇개월이 지났지만 노츠케 반도를 방문하였던 일은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I상의 친절하신 가이드에 노츠케 반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봤던 추억은, 이번 홋카이도 여행의 가장 소중한 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노츠케 반도를 다시 한 번 가게 된다면 모래밭도, 바람도, 거품처럼 날리던 바다도 그대로 일까요. I상께서는 시간이 지나면 사구도 사라지고, 숲도 사라져서 이 곳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거라고 말하셨었지만,

저는, 어째서인지 노츠케 반도의 모습이 변할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어떤 세상의 끝이라는 개념의 하나로서, 모습을 바꾸더라도, 위치를 바꾸더라도 영원히 이 별 어디엔가 노츠케 반도의 풍경이 남아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만큼 그 곳은 아름다웠습니다. 다시 뵙기를 기대하며.

16년 8월.


(추신)
I상,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떠올리지 않았던 것들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 하고 자아란 것은, 파도 위를 표박하는 물거품 같은 것이겠지요.
어떤 중요한 기억만이 사람의 깊숙한 곳에 남아 그 사람을 규정하고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는데 저는 아무래도 얕은 바다에서 튀기던 물거품과 황량한 사구 위에 불던 바람소리를 깊숙히 간직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날 아침 어항에서 배를 탈 때부터 바다를 달려 사구 위에 도착한 일을 시간 순서대로, 아니 그 시간 그대로를 기억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듭니다.

과연, 싶을 정도로 홋카이도의 바다는 추웠습니다. 6월 인데도 불구하고 귀가 얼어붙을 것 같고 뺨이 덜덜 떨려오더군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가져온 후드티 두개를 겹쳐서 입어야 했을 정도였어요. 꼬락서니가 굉장히 우습게 되었는데. 웃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무시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얕은 바다라 그런지 물거품이 튀어오르고 소음이 심해 한참 해주시던 설명은 제대로 듣기가 힘들었습니다. 시레토코 곶에서 밀려나온 흙들이 모여서 사구가 만들어졌고 매년 조금씩 스러져서 앞으로 백년 쯤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실 상 지금의 노츠케 반도는 사라진다고 하셨던가요.

실제 제가 노츠케 반도를 보았을때의 감상은 그런 불안정한 지형이라기 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육로로 본섬과도 이어져있고 네이쳐 센터나 등대, 산이 보이지 않게 사바나처럼 넓은 공터(물론 진짜 사바나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넓겠죠) 철새들이 도래하는 습지가 있는 땅이니 그리 쉽게 이 곳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100년은 긴 시간입니다. 100년 뒤에 제가 살아있기나 혹은 제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애닳은 마음이 들은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처럼, 생명처럼 반도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세상의 어느 누가 강의 사라짐을, 산의 사라짐을 걱정할 까요. 누구의 평생 동안 그걸 목격할 날이 있을까요. 오직 사람의 힘으로, 때때로 하늘의 힘으로 땅이 패이고 무너져 다른 풍경이 되는 것을 보는 일이 있을 뿐 일텐데. 저는 모래 사구의 소멸에 마음을 쓰고 맙니다.

배를 타고 도착한 반도를 보는 순간, 저는 바로 이 곳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하하 하고 웃었을 때, (분명, 와아 저 사람 미친 사람인가봐 하고 생각했을게 틀림없을텐데도) I상은 제 쪽을 안 쳐다보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기가 차서 웃은게 아니라 이 곳이 마음에 들어서 웃고 말았습니다. 언덕이나 산 처럼 높은 곳이 없이 높은 곳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2,3미터 정도의 평탄하게 넓은 땅. 바람이 멈출 곳이 없고 물이 고일 곳이 없이 황량하고 아름다운 땅. 이 곳에 발을 디뎠을 때의 감상은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약간의 흙 위에 바람을 이기고 자라난 풀들, 진흙을 밟지 않도록 해변에 놓여진 잔교를 건너자.

바람이, 바람이,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아무 것도 거칠 곳이 없는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흡사 바다 위를 걸어서 건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물 그림자도 없이 해변, 아니 해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물거품 부서지는 흙과 바다의 경계에서 공기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엔 새가 많아요. 알고 계시나요? 하며 준비해온 쌍안경을 건내주셔서 바라보니 두루미가 있습니다.
몇 쌍 정도 두루미가 여기에 와 있어요. 오늘은 짝궁이랑 떨어져서 혼자 먹이를 찾으러 나왔나 보네요.
다른 동물들은 뭐가 있죠? 새 말고? 여우요. 여우. 네 홋카이도에는 여우가 많으니까요. 모르긴 몰라도 개보다 여우가 많을 걸요.
그냥 길에서 지나가다가 아 여우다 하고 보는 일도 많고. 아 여우다 할 정도로 여우가 많다구요. 그냥 마을에서도?
물론 삿포로 같은 도시는 다르겠지만, 여긴 시골이니까요.

그리고 급작스럽지만, 여길 찾는 분들의 반은 이걸 보러 오시는거죠. 라며 잔교 위를 걸어 I상은 해변가 위에서 말라버린 숲으로 갑니다. 분명 에전에는 잡목림이었을 곳이, 지형의 변화로 그대로 말라 죽어가며 소금끼 짙은 바람에 하얗게 말라서 남아있습니다.

분명 지형이 변화함에 따라 전에는 그나마 비옥한 흙이 있었던 곳 위에 짠물이 들어온 것이겠지요. 짠물이 올라와 땅은 갯벌이 되었고 어느새 주변은 바다로 둘러싸였습니다. 나무들은 금세 죽었고 썩어가고 무너져가며 하얀 풍경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더 울창하고 잔목들이 많았지만 점점 규모가 작아져가고 있어요. 이 마른 숲도 사라지고 있는거죠. 새로 잔목이 생겨날리 없으니까.
10년 전에는 훨씬 많았나요? 그렇죠 10년 전에는 정말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어요. 그래서 유명해졌고 사람들이 많이 왔었죠. 어때요 맘에 드시나요? 아주 맘에 듭니다.

갯벌을 지나면 좀 더 풀 숲이 우거진 곳이 나오고 잡목림이 있습니다. 본토에는 고산에만 나는 여러가지 꽃들이 여기엔 그냥 피어있어요.
춥기 때문에? 춥기 때문이죠. 봐요 고토리에요, 일본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새에요. 보이나요?

넓게 펼쳐진 풀 숲에는 일부러 뿌려놓은 것보다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또 죽어가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풀 숲 너머 네이쳐 센터 건너편에는 홋카이도 본섬과 맞 닿지 않은 거친 바다가 있었습니다. 깊고 푸르고 검은 바다.

노츠케 반도를 넘어서면 쿠니시리가 있죠.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는 섬? 네 북방영토. 저 쪽엔 고래가 굉장히 많아서 반도의 등대에서 보면 가끔 고래가 보여요. 아 진짜? 엄청나게 빠르게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사진은 아직까지 한 장도 못 찍었는데 한 번 보면 엄청나게 감동하게 되죠.
많이 보셨어요? 많이 보지만 볼 때 마다 감동해요. 고래니까요. 고래니까 그렇죠.

등대 밑 모래 밭에서는 뭐지 하고 발을 굴러보다, 여우가 뚫어놓은 굴에 발이 빠져 신발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내며 걸어가자 초원 저 멀리 외딴 오두막이 보였습니다.

어부들의 숙소인가요? 새들을 관찰하는 작은 오두막이에요. 안에는 넓은 창을 열고 새들이 쉬는 연못을 볼 수 있습니다.

창문을 단단히 고정하고 자리에 앉아서 새들을 봅니다. I상이 가리키는 새들을 보며 새들의 이름을 따라합니다.
물새들은, 평온하게 앉거나 졸거나 헤엄을 치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하늘로 날아가고 또 그만한 수의 새들이 연못으로 날아옵니다.

영국 사람들이 겨울이 되면 찾아와요. 가끔 태국 사람들이 여름이 되서 찾아올 때도 있죠. 여기서 밖에 볼 수 없는 새들이 몇 종류 있으니까.

저는 연못 수면에 반사되는 햇볕을 망연히 쳐다보았습니다. 천국 그 자체인 것처럼 새들은 조용히 날개를 쉬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모래투성이의 반도를 방문한 이유를 설명드렸던가요.이 곳의 사람들은 이 홋카이도에서도 끝인 이런 곳에 왜 한국인이 혼자 찾아왔는지 궁금해 하더라고요.
하긴, 비행기를 두 번,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배를 타야 하는 곳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도 아닌데 혼자 이런 곳에 오는게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겠군요. 사람들에게는 노츠케 반도를 보기 위해 왔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약간 다릅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살아갈 이유가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량한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을 보려고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해도 존중은 해야하는 법. (일종의 인권 보호인가. 하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저열함에 실소 합니다)

노츠케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 곳을 찾아온 이유를 언어화 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그럴 듯한 말로 설명을 드리자면. 풍경이 아닌 개념에 가까운 것을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땅 끝이나 세상의 종말 같은 거창한 말로 설명하긴 그렇지만, 저 먼 곳에 있는 "피안"을 보고 싶었다고 하는게 비슷하겠군요. 좀 더 평범한 말로 표현해보자면…그렇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가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이름의 고통, 무의미한 삶에 대해 느끼는 고통. 거기엔 해결책도 없고 결론도 나지 않으니 저는 저 멀리를 보고 싶었습니다. 저 멀리에 무엇이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반도를 나오는 길에 I상이 보여주신 숲을 기억합니다.
반도 중심의 마른 숲처럼 흰 색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숲. 지금은 사유지라서 들어갈 순 없고요. 언젠가 저 숲이 점점 가라 앉아서 또다른 세상의 끝 같은 풍경이 되겠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세상의 끝은 사라지지 않고 "이동"할 뿐이구나. 숲이 생명을 다하는 것처럼 끝도 생명을 다하고 또다른 숲이, 세계가 이어지게 되는구나. 하고 납득했습니다.

I상, 이 사구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그 전에 이 말라붙은 숲이 사라지고, 그 전에 "제"가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개념들이 사라지기 전 까지는 제 안의 기억을 할 수 있는 한 소중히 간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그것이 제가 저라는 개념의 종말을 맞이하는 가장 건전한 자세가 되겠지요.

차를 몰고 가다가 아 여우다. 하고 말하시고는 손가락을 해변의 한 점을 가리키셨었죠.
거기에 정말 여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시는거죠? 하고 물어보니 뭐라고 대답하셨더라.
틀림그림 찾기 같은거에요. 라고 하셨었죠. 틀린그림 찾기.

다시 만날 날 까지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친구는 나에게 너무 가까운 이름이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쉽게 친한 척을 하기 힘들게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선배는. 하는 소릴 들었었다. 냉혈인간에 무표정하지. 하는 소리도 들었다. 사실 어디에 가나 항상 저런 소리를 듣는다.
그냥 엄청나게 같이 재미있게 놀고 얘기도 잘 통하고 보기보다 사교적인데 역시 이 사람은 마음을 안 열어. 하는 느낌이 있어요. 라는 소리도 들었다.
마음을 여는게 도대체 뭐야 이 멍청이들, 하고 마음을 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만을 친구들로 사귄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너는 내 친구야. 하고 생각이 되는 사람들말이다.

중학교때부터의 친구 결혼 소식을 들었다.
페북에 그의 이름을 링크한 게시물이 떴기 때문이다. 오랜 연인인 그의 신부가 될 분이 올렸다. 나도 알고 계신 분이기에 "와. 결혼해요? 전혀 몰랐네"하고 댓글을 달았다. 사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둘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을거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분은 당황하셨는지 한참 남았어요 ㅎㅎ 하고 댓글을 다셨다. 정말 매너가 없었지. 그래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연락이 없었다.

서운했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생각보다 친하지 않은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평일 오후에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엄청나게 빈정댔다. 야 아냐 너 해외있더라구 그래서 전화 끊었어. 어이구 그러세요?
아 그래서 응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어이구 그러세요? 내가 그런 소식을 페북으로 들어야겠냐 것도 니 여친 게시물로 어이구.
친구는 변명하기를, 야 네가 보고 싶어서 연락을 하는 건 항상 나였잖아. 하고 말한다.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 몇 명 중에 제일 제정신이 아니고 퉁명스러운 것은 나였다. 그는 그런데 또 결혼한다고 연락하기 겸연쩍더라고. 하고 말했다 야 너 부천 안 오면 내가 니네 동네로 갈게 진짜 미안하다. 응? 연락하면 평일에 시간 좀 내.
물론 그 녀석은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앞둔 신랑이 얼마나 바쁜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니.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걸어와야 하는 서울의 끝은 멀어서 충분히 이것저것 생각해내기에 충분했다. 어쩌지 어머니한테는 뭐라고 인사드리지 걔 누나한테는? 일단 만나면 더럽게 멀다고 한 대 때릴까? 만나면 같이 셀카나 한 장 찍어야지 생각해보니 그 녀석 대학원 조교하던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니까-4년도 더 됐잖아.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름을 도대체 왜 바꿨는지(심지어 바꾼 이름이 촌스러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결혼식의 신랑은 바쁘니까 얘기할 시간은 있겠지. 한 2,3분 정도도 없나.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식 시작 겨우 10분 전이잖아. 제길 이 녀석 때문에 시험까지 취소했는데 축의금을 이렇게 많이 내다니 빅 손해란 느낌인걸...보나마나 그 녀석 친구 중에 내가 제일 멋있을텐데 너무 자리를 빛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결혼식 장에는 사람이 가득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다. 왜 저 녀석 아버지 자리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지. 그냥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신랑석이든 신부석이든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녀석이랑 나는 사람들로 가득찬 자리 구석에서 시시덕거리는 그런 학생이었다. 성적에도 운동에도 취미에도 관심없이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이 즐거워서 몇 안되는 친구들과 함께 바보같은 농담을 하는데 몇년을 보냈다.
오늘은 나랑 같이 구석에 앉을 녀석이 없구나. 신랑이잖아 그 녀석.

축의금을 내고 식장을 둘러보고 아 테이블제잖아 나 간다.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식장을 나왔다. 밖에는 아깐 없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야 뭐냐. 하고 말하고 친구는 평소처럼 뭐냐가 뭐야 꺼져. 하고 말하다가 입을 다문다.

그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때는 아주 옛날이다.

악수를 해본 적도 없는 우리는 아주 어색하게 악수를 하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간다, 하고 가버린다. 야 어디가? 하고 그가 물어보지만 이젠 내가 알던 이름도 아니고 낯선 표정에 낯선 말투의 사람에게,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만나지 않았고 나는 우리 둘 다 알던 오락실의 중학생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 뿐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옛날 우리는 학원도 가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오락실에 모여 오락을 했다.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던 녀석들 뿐이었다. 작은 돈으로 오랫동안 게임을 하기 위해 오락실을 전전하면서 여러가지 게임을 익혔다. 한 명이 돈이 떨어지면 다 같이 나왔다. 매일매일 만나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는 것도 우스웠다. 집까지 가는 길은 길었다. 내일 다시 방과후가 될때 까지 우리는 괴로웠다. 어쩌면 괴로웠던 것은 나 뿐인지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녀석이었으니까 내 외로움에 어울려줬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간다. 하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평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평소처럼, 집까지는 나 혼자 가야한다.

16년 7월 23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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