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쉽게 빌어서는 안된다.
문제는 항상 그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졌을 때 일어난다. 우리는 우리가 빈 소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 수 가 없고 그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나는 아버지의 서가를 물려받았다. 이제 그 중에서 내 손에 남아있는 것은 한 권도 없지만 주로 독일문학(그 유명한 마인 캄프트도 있었다)과 20년치의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그리고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공책들이 아버지 서가의 주요 구성요소 였다. 아버지가 내 앞에서 뭔가를 읽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지만 끊임없이 뭔가를 읽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하게 알 고 있었다. 당대에 유행하는 책은 거진 읽는 것 같았고 개중에는 아직 도입 초기이던 웹에서 유행하던 소설까지도 있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기 전부터 아버지의 책은 내 책이나 다름없었기에 뭐가 그렇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후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한국판 발행을 멈출 때 까지 계속해서 정기구독을 했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역시 아버지가, 그리고 아버지의 서가가 나에게 남긴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할아버지의 서가는 작았다. 방 반 정도의 크기였던 서가는 할아버지가 이사를 갈 수록, 그리고 나이가 드실 수록 줄어들어서 나중에는 책장 하나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그렇게 서가가 작아졌을 때도 버리지 못했던 것은 평양계 실향민들을 위한 잡지들. 다른 것들은 말년의 취미셨던 어학 책들이 다수. 때때로 책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할아버지의 친구들이 낸 회고록이었다. 그 세대의 교양있는 노인들이라면 누구나 회고록을 내고 싶어했는데, 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정치적인 격동들과 고도의 경제성장들을 겪은 세대이다보니. 스스로의 인생이 어떤 기록물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강한확신을 가지시는것이 보통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군인이었던 적이, 아니 정확히는 20년이 넘도록 군인을 했다는 것을 안 것도 내가 성인이 된 후였는데. 어린 내가 할아버지에게 매달려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면 할아버지는 곤란하다는 듯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동화를 들려준다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어린시절의, 고향의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다.

누군가에게는 의외의 사실이었나보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2016년에 돌아가셨다)에야 오랫동안 일기를 써오셨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나는 그걸 읽어보기는 커녕 존재조차도 최근에 알게 되었지만 일기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 분은 그런 세대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 것은 할아버지가 귀여워하셨던 친척고모로 간만에 수도권에 올라오실 일이 있어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뜬금없이 이야기가 나왔다. 네 할아버지가 백인 여자랑 연애했다는거 아나? 아뇨 전혀 몰랐는데,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분이 아니셨잖아요. 나도 몰랐다. 근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그 분 일기를 봤다 아이가. 거기에 금발의 백인 여자랑 찐하게 연애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는데…그게 또 얼마나 문학적이고 참신하던지 이런 양반이었나 싶어서 내 깜짝 놀랐다.

금발의 벽안. 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에 짚히는게 있는 것이 그게 정말로 벌어진 일이라면 아마 할아버지가 30대때 펜타곤에 파견나가있을 때의 일 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미 결혼을 해서 아버지는 물론 작은 아버지도 있을 때 쯤의 일이 아닌가 근데 그런 시기에 연애를 했다면 그냥 불륜이잖아 싶어서 화제를 돌리려던 차. 친척 고모는 웃으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일기장에 뭐라고 써있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셨다. 뭐가 도대체 참신하단 말인가, 그냥 진부하고 천박한 표현이라 나는 머릿 속으로 항상 내 앞에선 점잖은 노인인 할아버지를 떠올리고는 음 그 이야기인 재미있지만 더 듣고 싶진 않아요 라고 말했다. 그래 일기장은 남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 일기장이 같이 있었을 할아버지의 서가에 대한 이야기는 묻지 못했다.

외할아버지의 서가는 원래 서재라고 하기도 부족했고 집의 부지 안에 책만 넣어두는 건물을 세우셨었다고 한다. (그게 사실 서재의 정확한 정의인가.)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사업을 그만 두고 서울의 빌라에서 살고 계셨던 외할아버지의 문간방. 책으로 가득했던 그 방이다. 책으로 가득했다고 말하는 것도 면구한 것이 외할아버지의 집은 거실도 다른 방들도 책으로 가득차 있었고 책이 없는 것은 화장실과 침실 뿐이었다. 하지만 책 외에는 어떠한 기능도 없던 문간방을 나는 멋대로 서재라고 불렀는데. 서재의 가장 큰 책장은 내 지정석 같은 곳이라 외할아버지 댁을 가게 되면 항상 그 주변을 얼쩡거리며 책 등에 써있는 제목들을 읽어보곤 했다.

외할아버지의 소장 도서들은 분별있게 모여있던 것이 아니었고 영문과 일본어, 한자와 한글을 섞어서 쓰던 분 답게 책들도 마구잡이로 섞여있었는데. 그 제각각인 책들을 제목이라도 전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자손 중에서는 그나마 나 뿐이라 나는 항상 외할아버지의 서재를 물려받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외할아버지로부터 그 책들을 물려받고 싶었다. 군사학과 건축학. 미술과 문학. 특히 일문학에는 조예가 깊어 다수의 일본 작가들과 교류도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꽤 많은 수의 초판본과 희귀본. 더불어 여러나라의 작가들과 교류한 흔적-서간문들도-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가쪽 친척들과의 교류도 일시적으로 끊었던 나는. 그 책들이 어디로 갔을지 몇 년 동안 계속해서 궁금해하고 아쉬워했다. 이혼을 해 가정사정이 어려워진 작은 딸과 그 아들은 외조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가엽기 때문에 거두신거겠지만 역시나 귀찮고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 분이 돌아가시도록 나는 내가 그 분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가 없었고 최소한 외할아버지 생전의 본인과 가장 가까운 물건, 그 분의 책들을 그 분의 뜻에 따라 물려받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무엇도 아닌 외할아버지의 말과 글이야 말로 본질의 그 분과 가장 가까운 것이기에…

또 몇년이 지난 후 이모와 화해를 하고 한가로이 잡담을 하던 날. 이모에게 외할아버지의 서재에 대해서 묻자 전쟁과 그 후의 기록도 있고 결국 국방 대학에 전부 기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할아버지 뿐만이 아니다 외할아버지 또한 군문에 오랫동안 계셨다.) 아니 일본문학관련 초판본도 다수이고 희귀본도 꽤나 있을텐데 그걸 통채로 기증했어요? 이모는 그런거 몰랐지 그러면 네가 기증하기 전에 추려내지 그랬니. 하고 여상하게 대답하는 이모의 모습에 나는 할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거기 외할아버지 일기장이 있어서 그걸 국방대학에 기증하는 전날 밤까지 읽고 그랬거든. 거기에 말년의 외할아버지 기록도 있는데 말년에는 네 이야기가 그렇게 많더라 ㅇㅇ이랑 다음주 점심. ㅇㅇ이랑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뭐 그런 내용 말야. 그야 말년에는 외할아버지랑 제일 자주 만난 사람이 이모랑 저니까 그렇겠죠. 라고 대답을 하면서 나는 내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것을 깨달았다. 서운했을거야 너 회사 들어간 다음에는 자주 안 찾아왔잖아. 매달 일본에 갈 때 마다 단무지나 먹을거 잔뜩 사서 어머니 편으로 외할아버지한테 보냈는데요. 그런 것보다 얼굴 보는게 훨씬 좋지 당연한 걸 모르니 너는.

내 집의 서재에는 아직 풀지 못한 짐들이 쌓여있다. 그 중에서는 다른 사람이 내 집에 놓고 간 책들이 있다. 책들이 있다고 하기엔 너무나 가벼운 표현인 것 같다. 무게로 따지면 100킬로그램은 가뿐히 넘을 책 무더기가 있다. 나는 이걸 버리려고도 주인에게 돌려주려고도 했지만 어떻게 된 것이 모두 실패했고. 결국 나는 어떤 사람의 인생의 일부 분량 정도는 될 듯한 책 더미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혹시 누군가의 일부라도- 그 사람의 서가를- 가지고 싶어하던 내 소원이 삐뚤어지게 이루어진 결과인걸까 싶었지. 우리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조절 할 수 없다. 그것이 소원의 정의이기도 하다.

금요일엔 새로 산 책장이 온다. 그러면 그 중 한 책장에 이 책들을 다시 꽂아놔야겠다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들었다. 박스에 책을 둔 채로 방치하면 책은 곰팡이가 피고 냄새가 나게 된다. 이 책들을 펴서 읽을 일은 없겠지만 그 책등을 살피며 제목을 읽어보는 것 정도는 나에게도 허락된 일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뜻하지 않게 책을 맡게된…솔직히 말하자면 뒤에 남겨진 사람의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26년 1월의 글이다.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다. 인테리어가 끝날 때 까지 임시로 살고 있는거니까 3주 정도만 살면 되는 곳인데 요즘 날씨가 너무 추운지 그냥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예를 들자면 이 오피스텔 건물에는 스타벅스가 있는데 여긴 전에 만났던 분과 처음으로 갔었던 카페다. 왜 그랬었는지 아구찜을 먹고선 스벅에 가 그 분이 만났던 예전 남자친구들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철벽을 치려고 그런 얘길했던게 아닌가 싶지만. 나는 그 때 이미 그 분이 마냥 좋기만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도 즐겁기만 했다.
매일 내 방으로 들어가기 전 스벅에 들러서 커피라도 하나 살까 생각을 하다 그 분이 내게 해줬던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거기에 만족해서 방에 그대로 들어간다.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항상 이야기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바란다 나는 그럼 그대로 만족해서 몇 년이나 당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잠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묵고 있는 방은 계산해보면 하루 5만6천원 정도의 풀옵션이다. 노력하면 대여섯 걸음 정도는 걸을 수 있는 크기인데도 샤워부스가 딸린 화장실이 있고 세탁기와 조리도구, 세미싱글 정도 되는 침대가 딸려있다. 작은 냉장고도 텔레비젼도 있으니까 뭐 사는데 부족한 것은 없는 셈이다. 부족한게 있다면 상당히 건조하고 죽도록 춥고 새벽2, 3시쯤 깨서 귀를 기울여 보면 희미하게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나고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는 것 정도이다. 회사에서 걸어서 30분 밖에 걸리지 않는 것 까지 생각하면 이 한심천만한 가성비가 거슬리지 않는 한 4년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층마다 25개의 방이 있는데도 여기서 산지 1주일이 넘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층에서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한 적은 딱 한 번 뿐이다. 친구는 역 앞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는건 기본적으로 범죄자들 뿐이야 라고 편견 가득한 얘길 하며 오며가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목을 유심히 보라고 했지만. 애초에 누굴 마주치질 않으니까 그런 기회는 없는 셈이다. 어째서 이렇게 까지 누굴 마주치지 않는 걸까 중정을 가진 ㅁ자모양의 건물이라서 그런걸까. 이 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나오는걸 보고는 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반댓쪽으로 빙그르르 돌고 있는걸까.

눈이 오는 어느 날 중정을 바라보고 있으니 세상이 끝나버린 걸 눈치채지 못하고 눈치 없이 혼자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중정으로 난 창을 통해서 아랫층도 볼 수 있었지만 내가 내려다 볼 수 있는 약 200개 쯤 되는 문 중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았고 10개 가까운 복도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사이 2주 아니 3주가 거의 지나가고 있다. 나는 늦든 빠르든 결국 이곳을 떠나게 된다. 그러니 좀 더 감상에 젖어보자면. 이사를 간다는 것은 연애가 끝나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어느 쪽이 다른 한 쪽의 메타포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사를 나왔던 곳에 우연히라도 오게 되면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거의 그대로 있지만 이상하게도 낯선 기분이 들고, 더 이상 이 곳에 속해있지 않다는 기분이 강하게 든다. 그리고 거기 남아있는 것들은 내가 떠났는데도 불구하고 망하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일도 없이 그냥 예전처럼 살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떠나온 곳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던 것이다. 미련가득히 중얼거려본다 그렇게까지나 저는 아무 것도 아니었나요 대답해보세요 영통구여. 내가 8년이나 살았던 곳이여.

이 글의 제목이 Flight to Denmark인 이유는 듀크 조던의 앨범을 들으며 겨울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찰리 파커와도 같이 연주했다)였지만 뉴욕에서는 전문적인 피아노 연주자 잡을 잡지 못해서인지 사정이 어려웠던 탓인지 택시드라이버로 투잡을 뛰던 듀크 조던은 70년대 유럽의 재즈 유행에 힘입어 덴마크에 초청되어 가서 여러 연주를 했고 이 멋진 앨범을 냈다. 이 앨범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넘버는 Everything happens to me 인데 아니 이게 … 이 곡(듀크 조던 앨범에 있는)이 그 곡(쳇 베이커의 보컬로 유명한)이라고?? 하고 생각하며 러닝을 했다. 들을 때 마다 거기서 울지 말고 이 근처로 와서 이 연주를 들으며 울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대단한 연주이다. 그리고 그는 이 앨범의 대성공을 계기로 미국을 떠나 덴마크로 완전히 이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죽는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뭐 그런 쓸쓸함에 대한 것이다.

듀크 조던과는 다르게 내가 덴마크에 가게 된다면 그 여행기의 제목은 <덴마크는 감옥이다>라고 짓고 누군가가 댓글로 “그렇다면 이 세상도 온통 감옥이겠지요”라고 말하는 것을 기다릴 생각이다. 누군가 정말 그렇게 댓글을 달면 낄낄 웃고는 포스팅을 지우겠지. 나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오직 한 사람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이해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글을 읽고 있지 않을테지. 단 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으로 과분하다. 하지만 나는 오래 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사람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렇게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처럼 살고 있는걸까.

여기서 사는 것도 이제 3,4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곧 내가 산 집으로 이사를 간다.


26년 1월의 글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의미를 둔다. 의미를 갖고 해석하고, 이해하려 들고 현상들을 스스로의 안에 받아들여 영혼에 새기려고 한다. 우리가 현상의 일부 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해석이란 결국 주관의 다른 이름임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허공에 그어진 선이고 바닥을 누르는 압력과 소리이며. 공중을 떠다니는 진동, 전기적인 신호이다. 우리는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현상을 이해했다고 주장하고 예측과 관찰을 통해 해석이 맞았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렇다, 우리에게 있어서 해석은 결국 예측을 위한 도구이다. 예측이 결여된 해석은 결국 망상과 다를바 없다. 우리가 불완전한 언어로 하고 있는 이 모든 소통이 모래 밭 위에 세워진 드높은 탑처럼 언젠가는 무너질 것임을 직감하고 있다면. 당신도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린다.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이 소진 될 때 까지 생산하고 소비해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기 위해 버리고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 것을 사악한 행위의 일종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높은 지대의 땅에 쓰레기장을 만들고 그곳에 가장 비싼 가치 없는 것들을 모아둔 후.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일을 하는 사원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소비라는 이름의 강박을 좀 더 신실한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고. 버리는 것과 사는 것 모두를 삶의 목표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요소이고 기계이다. 거대한 책에 놓여진 점과 같다. 우리가 어느 지면에 찍히든 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이 걷거나 서있다. 세월의 노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 노력은 배신한다, 마음은 가라앉는다. 삶은 흘러간다. 이제까지 어떠한 알려진 사례에서도 시간을 돌릴 수 있었던 경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흘러간 시간과 노력에 대해 동등한 보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한 비슷한, 그러나 절대 동등하지 않은 것들이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적당한 비용과 합리적인 수준의 스트레스를 통해 변환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멋진 피아노 연주 솜씨, 월급, 반짝거리는 자동차, 무릎부상, 소꿉친구와의 돌이킬 수 없는 헤어짐, 매미껍질, 바닷가에서 주운 매끈한 유리조각, 긴 머리카락. 우리가 지불해야하는 것은 우리의 가능성 뿐이지만 우리가 가진 전부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의 총합이라는 이야기이다.



25년 12월의 글이다.


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달이다. (내 다른 것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까지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렇게나 오래 있게 되었다.

나는 항상 그렇다. 어느날 운명의 어쩌고에 휘말려서는 뜻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그게 그리 억울하진 않다.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 휘말려들어간 삶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충분히 강하다는 증거다. 자신의 운을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집은 수원시 어딘가에 있는 아파트다. 2000년대 언제 쯤에 만들어진 정말 흔한 구조의 아파트. 적당히 낡고 멀리서는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들은 늙고 커다랗다. 내가 <집>이라고 생각할만한 요소를 여러개 갖췄다.

내가 회사에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면접을 제외하고는 수원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을 때. 당시 수원에서 살고 있던 아버지가 난데없이 나를 수원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그 때 당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나를 불러 차를 끓여주었는데, 그 때의 아버지의 집도 꼭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처럼 생겼다. 흔한 구조이긴 하다. 하지만 역시 음 아무래도 그렇다. 주변의 풍경도 단지의 모습도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나는 아버지에게 그 때 사시던 집이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냐고 확인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 아버지와 나는 그런 부자관계이다.)

그저 꿈에서 보았던 어떤 장면처럼 세피아 필터의 갈색 풍광을 기억하듯, 아버지도 나와 비슷한 곳을 <집>으로 골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날 있었던 일을 하나 더 얘기해보겠다. 아버지는 인생 전체에 걸쳐서 아버지다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은 사람이지만(아버지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날엔 무슨 변덕인지 아버지 다운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운전석에 앉아서는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지금 한다는 듯이 어렵게 어렵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라.”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러니까 취업이 결정되었고 게다가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나는 이제와서 그런 얘길 하는 아버지가 너무 어이없어서 하는 얘길 가만히 듣고만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평소처럼 그럴 듯한 달변으로 하고 싶은 걸 하고 살 때의 장점을 설명하려고 들었다.

조금 짜증이 났었기도 했고, 때마침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하고 취업을 결정했던 스물 몇살의 나는 “제가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물론 아버지는 나의 그런 의견에 대해서 여러가지 반박과 후려치기를 하긴 했다. 아버지다운 이야기를 하는 유효기간이 끝나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부모이든지 간에 인생에 한 번 쯤은 자기 자식에게 하고 싶은걸 했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변덕을 부리게 되나보다. 단지 아버지는 그걸 자기 자식에게 직접 말로 할 정도로 의욕이 있는 사나이였다.

실은 아까 글의 앞에는 운명의 노예로 살았던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어느 정도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았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입시를 결정했고(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가족은 한 명도 부르지 않은채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만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하고 싶었던 일보다 해야할 일을 하며 살아가기로 선택 한 것도 내 뜻이었다.

여러분에게 자세히 설명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을 포기한 대신 온갖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야할 것을 해야한다는 핑계로 해야하는 것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의 진실이며 내 비겁한 삶의 내력이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이란 결국 열심히 발버둥친 결과 아버지의 안티테제가 되는 것 뿐일지도 모르겠다. 이것 또한 내가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겠지.

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김에 집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자. 이사가 결정되고 11월부터 나는 매일 짐을 치웠다. 우습게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요즘 짐이 꽤 많이 줄어들어서 깔끔한 상태가 되었다. 아니 꽤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다소 과장이다.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를 대량으로 사들였고 그 박스에 매일 같이 물건들을 집어넣고 쌓아두고 있다.

아니 이사를 나갈때가 되서야 집이 깨끗해지다니 게다가 다음 집으로 이사를 가면 플라스틱 박스에 있었던 것들을 다 풀어버리고 집이 다시 어지럽혀지는 것이 아닌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의 모순이라는 걸까.
알게 뭐야 싶다. 오늘은 12월 4일이고 올 겨울 첫번째 눈이 내리고 있다. 갑자기 하늘을 가득 덮은 까마귀 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 모순된 감정도 마음도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5년 12월의 글이다.

친구들은 별 맥락도 이유도 없이 그럴듯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친구 하나가 13년 간 탄 차를 팔던 날 나에게 지나가는 듯 그렇게 말했다. 정이 든 물건을 보낼 때면 항상 마음이 좋지 않은데, 정작 새 물건이 오게 되면 그 전에 쓰던 물건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이것은 코트를 버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서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나 하자. 누군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의 옷장을 보는 것이 좋다. 예전에는 책장을 보면 된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제는 책장을 집에 두지도 않는 그런 세대가 되었으니 그런 말을 하기도 조심스럽다.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 쉽게 힌트를 주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는 유튜브의 구독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옛날 사람이 되고 있는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해서 높은 확률로 크게 실망하게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옷장은 어떤가. 너무나 토니 타키타니 같은 이야기지만 쌓여있는 옷은 그 어떤 것보다 그 주인과 가깝다. 그 사람의 옷은 그 사람의 실루엣을 구성하고 어떤 사람에게 너무 익숙해진 옷은 얼룩처럼 배어들어 그 사람의 냄새와 색마저도 만들어낸다. 우리는 어린 시절 여러가지 동화를 통해 누군가의 옷차림이 그 사람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는데. 나는 어린시절이 지난 지금에서야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이 말한다, 누군가의 옷장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아주 많은 걸 얘기해 줄 수 있고 어떤 추억의 순간에 입고 있던 옷은 그 시절을 자체가 되기도 한다고.

며칠이나 걸려서 옷을 버렸는데도 아직 옷이 잔뜩 남았다. 다람쥐처럼 모아둔 티셔츠가 산더미 같다. 깃이 바랜 셔츠도 다 갖다버렸는데도 아직도 남은 셔츠가 있다. 오랫동안 안 입은 바지를 입었는데 의외로 잘 맞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버리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주머니에서 나온 영수증에는 2014년이라고 써있었다. 10년은 안 입은 바지면 버려도 되지 싶어서 미련을 주지 않고 버렸다. 회사원 치고 정장을 입질 않아 옷장에 정장이 너무 많다. 속이 상할 지경이다. 이건 한창 영국 패션에 빠져있을 때 산 코트, 코트, 니트, 니트 니트, 니트… 이건 출장용으로 산 검은 바지, 검은 바지 또 검은 바지. 바보 같다. 10년 전 쯤 나는 같은 디자인의 옷을 사는게 쑥스러웠는지 입지도 않을 핑크색 옷도 구색을 맞춰서 사두었다. 이런 것은 전부 버려여한다. 색을 다양하게 입어 보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기 전의 나는 사서 10년 간 입지 않을 옷을 다양하게도 샀다. 그리고 좀처럼 버리지도 못한다.

옷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물에도 감정을 이입하는 사람이라, 옷 한 벌을 버리면서도 그 옷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들이 가득하다. 이 옷을 살 때는 어떤 일이 있었고 이 옷을 입고는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너무나 많은 것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서 양 팔이 너덜너덜해진 파란색 후드 집업 자켓은 사촌형들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그를 따라 미국을 자주 드나들던 이모가 사다준 것이다. 그 때도 굉장히 좋아하면서 옷을 받았지만 해외에 나갔을 때 부피가 큰 물건을 사와서 선물로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지금에서는 이모에게 감사해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물론 그 옷을 지금도 가지고 있고 때때로 입기 까지 하는걸 안다면 이모는 구질구질하다며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화들짝 놀라시겠지만 어쩌겠나. 그 옷은 내가 대학시절 제일 많이 입었던 두 벌의 파란색 후드티 중 하나다.

대학시절의 나는 파란색 후드티를 얼마나 많이 입었던지 그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죄 파란색 후드티를 입고 있다. 대학생 남자아이 특유의 어색하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프레임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면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문과대학 건물 7층의 학과 부실 앞의 창가에 서서 언제나처럼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쳐다보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찍힌 사진인데. 역시나 파란색 후드티를 입고 있으며 더러운 색의 염색 머리에 야간 알바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나머지 얼굴이 엉망인, 도저히 잘 찍혔다고 볼 수 없는 사진인데 그 사진의 나는 카메라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평면적으로 못생긴 옆얼굴에 한 번도 제대로 크게 뜬 적이 없는 눈. 턱은 우울하게 길다. 그렇게 멍청하고 우울한, 고집이 쎄서 세상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살아보려고 노력하던 나와 내 후드티의 시대이다.

두 벌의 후드티 중에 (내가 샀던) MLB의 후드티는 색이 바래 파란 색인지도 모르겠을 때 쯤 의류 수거함에 넣었다. 기분 상으로는 가연성 폐기물로 분류해서 깨끗하게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저런 옷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옷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내 어떤 시절과 작별하는 듯한 남자들 특유의 한심한 감상에 젖어들어서 버릴 수가 없었다.(의류수거함에 넣는건 왠지 감상을 줄여준다. 재활용의 가능성 때문인가보다)

그래, 당신의 말이 맞다. 과거의 내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현재의 나다. 내가 입었던 옷도 읽었던 책도 아무런 의미는 없다. 옷은 그냥 옷이기에 - 내가 죽고 나서 입고 갈 수도 없으니 옷에는 실용적인 가치 밖에 없는 것이 맞다. 다 늘어지고 찢어지고 오염되어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옷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거기에는 그저 내 미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변명을 해보자 미련만이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대학시절 사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너절한 옷 중에는 합성섬유로 만든 갈색 코트가 있다. 그냥 긴 자켓이라고 해야할까 하여튼 어떤 시대에도 유행한 적이 없을 것 같은 주머니가 많은 코트이다. 하루 종일 알바를 하던 시절, 주머니가 많고 싸고 튼튼할 것 같다는 순전히 실용적인 면만 보고 산 옷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옷의 많은 수가 같은 이유로 구매한 옷이다.)
나는 그걸 또다른 가죽이라도 된 양, 두 세개의 계절은 그 옷을 걸치고 다녔는데. 때때로 잠이 부족하면 그 코트를 뒤집어 쓰고 중앙도서관 2층 가운데 통로의 커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에서 자곤 했었다. 외풍이 심하게 불어 중간-기말고사 기간이 아닌 시기에는 텅텅 비어 있어 죄책감없이 엎드려서 잘 수 있었던 곳이었다. (내 친구 하나는 거기서 항상 무협지를 읽곤 했다. 도대체 왜냐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였을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날도 코트를 뒤집어 쓰고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옆에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는 기척이 들어 잠이 깨었다. 나는 엎드린 채로 코트를 뒤집어 쓴 - 잠에서 깬 자세 그대로 다시 잠을 자려고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옆의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읊고 있던 외국어로 된 시가 들려왔다. 시를 읊고 있는 것은 분명 몸이 작고 얼굴은 더 작은 얇고 가벼운 사람이었다. 나즈막한 목소리가 읊고 있던 외국어의 시는… 아니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그건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니까. 어쨌든 시를 읊고 있던 목소리는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건 그 때 까지 몇 번이나 다툼과 화해를 반복한 후배였다. 그 당시는 학기 말 쯤 하찮은 이유로 - 대단한 이유로 싸우는 일은 없었다 - 싸우고 서로 말을 하지 않았던 시기인데 나는 왜 얘가 여기서 과제를 하고 있지 -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후배와 나는 같은 과고. 나는 시를 외우는게 과제라고 생각했다- 하는 생각과 함께 혹시 내가 코라도 골고 있던 것이 아닌가가 걱정이 되어 자고 있던게 나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대로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하며 그 아이가 시를 읊는 것을 듣고 있었다.

후배의 친구가, 그렇다고 해도 그 쪽도 역시 같은 후배였지만 하여튼 소란스럽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인듯 했다. 후배의 친구는 야 가자, 라고 말하면서 시를 읊고 있던 후배에게 물었다.
엎드려있는 사람 누구야? 이거 ㅇㅇ선배- 내 얘기다-야? 시를 읊던 후배는 대답했다. 아니, 아까 얼굴 봤는데 같은 코트 입은 다른 사람이더라. 그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ㅇㅇ선배 그 코트 진짜 하나도 안 어울리고 좀 바보같지 않니?

후배는 일어나면서 자는 척 하고 있는 나를 슬쩍 발로 찼다. 그리고는 친구와 같이 작고 마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새가 날아가며 내는 듯한 웃음 소리를 내며 가버렸는데 그건 아마. 선배 용서해줄게 정도의 제스쳐가 아니었나 싶다.

그 후배는 그 뒤로 몇 년 간 나와 혐관에 가깝게 서로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싸우는 것은 쌍방이었지만 화해는 보통 후배가 먼저 청해왔다. 그리고는 또 평소처럼 싸우고 나서 그 시기가 길어지나 생각했을 때 쯤. 나에게는 말도 없이 영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뒤로 들은 소식은 없다. 몇 가지 소문은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단지 그 애가 그렇게 싫어하던 코트는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미련일 뿐이다. 모든 타자는 잔혹하다. 그들은 미련하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후회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인 것 같다. 모두가 삶의 무게를 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언젠가는 바닥으로 떨어질 무거운 돌을 굴려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은 나 뿐인 것 같다. 내 세계를 기억하는 것이 나 뿐이고 이 미련많은 세상을 만든 것 또한 나다.

나는 정리하다 만 책장을 본다. 책장에는 내 책들과 내 것이 아닌 책들이 꽂혀있다. 내 것이 아닌 쪽은 책을 둘 곳이 없는 사람을 위해 맡은 것이다. 소설과 교양서가 섞여있는 내 책들과 건축서적과 철학서가 섞여있는 내 것이 아닌 책들은…예전에는 비슷한 결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책을 200권 쯤 버리고 남아있는 책들을 보니 내 것이 아닌 것들은 쉽게 분리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달랐다.

책을 정리하기 위해 내 것이 아닌 책들을 여러개의 박스에 넣고 무게를 가늠해보니 물경 여자 어른 한 명의 몸무게 정도는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 책들의 주인은 자기 책들이 나에게 있다는게 별로 불편하지 않은 듯 하다. 아니 책이 나에게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다.

나는 이 책들을 언젠가는 버려야 한다. 책 사이에 끼어져 있는 연습장과 쓰다 만 노트들, 문장들과 사진. 누군가는 몽땅 내어버렸다고 생각할 그런 것들도 모두 함께. 그러나 내가 정말 그걸 할 수 있을 지는 다른 문제이다. 어른의 문제란 항상 그런 식이다. 해야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르다.

ㅁㅁ가 오빠 코트 바보 같대여. 라고 하길래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나도 알아 제기랄. 이라고 했을 것 같다.

그 때의 나라면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연필 깎이를 샀다. 마지막으로 병원을 간 날이었다. 친절한 사람이 수고하셨다고 말해주었고 나는 감사하다고 하고 병원을 나왔다. 처음 다친 날 부터 8개월이 걸렸다.
연필 깎이는 다소 비싼 철제로 된 물건이다. 한 손 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인데 연필을 꽂고는 연필이나 연필 깍이 둘 중 하나를 돌리면 연필이 깎인다. 이제 한국에서는 연필을 좀처럼 생산하지 않는가보다 문방구에 갔지만 스태들러만 꽂혀있길래 두 자루를 샀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 스태들러와 블랙윙(따로 인터넷 주문했다)을 사각사각 깎고 있으니 기분이 차분해졌다. 일부러 연필로 글을 써본다.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요 몇 달 동안 글을 쓰려고/쓰지않으려고 노력했다. 작년부터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심리상태에서 블로그 포스팅만 60편이 넘는 글을 썼다. 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다른 사람에게 솔직한 생각은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혼자가 된 나는 그 누구에게도 생각하는 걸 말 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글을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던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시기 내 블로그 글은 공개 일기나 다름없어졌기 때문에 때문에 그리 솔직하지도 정밀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몇 편의 단편 소설 쪽이 훨씬 솔직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 예전의 일기, 아니 블로그 글을 읽고 있으면 그 글을 읽고 있었을 때의 감정과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서툴고 어쩔 줄 모르고 화를 내고 그리워 할 뿐인 그 때의 나를 읽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순간의 자신을 어느 틈새에 밀어넣어두는 것과 비슷하다. 많지 않은 정보량으로 쓰여져 있다고 해도 나 자신 만은 틈새에서 글을 뽑아내어 그 글을 쓸 때의 나를 높은 해상도로 떠올 릴 수 있다. 다름 아닌 그 글을 쓴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글들은 인력이 되어 모든 것의 반댓편으로 추락하고 있는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아직도 말이다.

이렇게도 말 할 수 있다. 글이 쌓여간다는 것은 수많은 시점의 내가 생겨난다는 의미이다. 25년 8월의 글을 쓰던 나는 25년 9월의 글을 쓰던 나와 다르고 그렇게 쌓여나간 글들은 서로 조금씩 다른 모습의 나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아무리 그 간격이 짧다고 해도 말이다. 어제의 나와 그저께의 나는 그 사이에 놓여진 글을 쓰는 행위 자체로 인해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긴다. 글을 쓰면 쓸 수록 나는 서로의 나로부터 멀어져간다. 나는 그렇게 글을 쓰는 것으로 멀리 돌아서 한 여름의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체중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천천히 줄어들어 이십대 언젠가의 체중이 되었다. 일을 너무 많이 하고(그래봤자 일주일에 50시간 정도이긴 하다) 스스로를 위해 하는 것은 하루에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의 러닝 밖에 없다. 이름만 나열해도 오래된 종이와 플라스틱, 그리고 고무의 냄새가 나는 재즈 연주자들의 음악만 죽어라고 듣는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나는 일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알던 나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몇 년간 쌓아온 것들을 모두 버리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자. 버려야 할 것에 어떤 가치도 두지 않고 한없이 가벼운 것인양 날려보내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연휴의 어느 날 전에 살던 동네에 갔다. 이사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어디든 좋으니 고양이를 키울 수 있을만한 작고 오래된 아파트를 한 채 살 생각이었다. 지금의 동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영화관과 도서관이 있었던 장소에 살다가 어느새 양 쪽이 다 없어진 동네에서 사는 것은 생각보다 짜증이 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한 하찮은 이유를 들어서라도 이 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전에 살던 동네는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보다 낡고, 비가 오고 있었다. 내가 그 동네에 이사를 갔던 것은 그 당시 만나던 애인과 사는 곳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를 갔다고 해도 애인의 집과 걸어서 30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으니 이걸 근처로 이사 갔다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지만. 돈도 없고 경험도 없었던 나에게는 나름 최선을 다 한 선택이었다. 그 애인과 헤어지는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나에게 금세 질려했고 티가 나게 바람을 피기 시작했으며 몇 번 나를 차고 다시 연락해오는 걸 반복했다.

나는 헤어진 뒤에도 그 곳에 계속 살았다. 대략 몇 년 정도는 더 거기서 그렇게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동네에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뒀던 그 동네의 아파트가 팔렸기 때문인데(하하) 아파트가 팔릴 때 쯤, 이사를 한다면 그 때 새로 사귄 애인의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간 것이다. 줏대가 없이 애인 찾아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 고작 두 번 그랬을 뿐이다.

나는 이 동네를 좋아했다. 평일에 뒤늦게 일어나 눈을 뜨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고 걸어서 천천히 큰 길로 나오면 맛있는 냉면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느리게 걷는 노인들이거나 낯선 곳으로 공부를 하러 온 외국인들이 많았다. 퇴근하는 길에는 멋진 트랙이 있는 스포츠 센터가 있었고 기가 막힌 만두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도서관과 영화관이 있다는 얘길 위에서 했지만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온갖 쓰레기 같은 영화를 마음 껏 보았고 돈과 공간을 걱정할 필요 없이 그 누구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책들만 골라서 읽었다. 나는 그 동네에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 동네에 단 한 명의 친구도 마음을 둘 아무 것도 없다. 강을 따라 남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계속해서 걸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애인과 같이 보냈던 짧은 시간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혼자서 그 동네를 돌아다녔던 일들이다. 아무도 없는 곳을 뛰고 아무도 없는 곳을 걸었다. 나는 지독할 정도로 혼자였다.


전에 살던 동네는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보다 낡고,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 동네의 공인중개사에 들어가 이 곳에서 집을 하나 사고 싶다고 말했다.
나 스스로를 메어 둘 곳을 찾지 못해. 나는 내가 변치 않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멀리 석양이 보이는 하늘 저 쪽 까지 뻗어있는 나무들을 떠올린다. 한 나무의 꼭대기에서 부터 다른 꼭대기로 이어져있는 구불구불하고 삐죽빼죽한 선을. 그리고 그 너머에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떠올린다.

그래 내가 살고 싶어하는 곳에는 항상 오래된 나무들이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을 그런 나무들말이다.

그에 대해서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나”라고 칭하도록 하자. 이 글의 배경 시기는 초여름이다.


할머니를 화장하러 왔다. 화장터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관과 가족들로 가득차 있고 화장은 답답할 정도로 오래 걸린다. 섬뜩할 정도로 젊은 여자의 사진을 든 사람들이 방금 화장터를 떠났다. 나는 화장터 안내 모니터에 뜬 그 이름을 기억해두려다가 일주일도 안되서 그 이름을 잊어버릴 것을 깨닫는다. 세 글자에서 네 글자를 입력하도록 되어 있는 이름 칸을 꽉채우고도 이름을 다 적지 못 한 외국인의 이름도 본다.

나는 옆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는 사촌동생에게 말을 건다.
재미있는거 없니? 재미있는거 없어. 뭐라도 하고 싶은 말은 없니? 하고 싶은 말 없는데.
그제서야 이 사촌동생이 스물 다섯살인걸 떠올린다. 스물 다섯살은 지루하고 따분하다. 스물 다섯살보다 지루한 것은 스물 네 살이고 스물 네 살보다 따분한 것은 스물 세살이다.
너 태어나서 이제까지 뭔가 꾸준히 한거 없니? 화제를 약간 돌려본다. 따분한 스물 다섯살인 사촌동생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한다. 살아있기를 꾸준히 했지. 나는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괜찮은 농담인데 특히 할머니를 화장하러 와서 하기에 아주 적절해. 하고 평한다. 사촌동생은 그 생각까진 못했는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답한다. 할머니는 91년이나 살아있기를 꾸준히 하셨지.
그래 그렇고 말고. 나는 꾸준히 살아있기를 그만둔 할머니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장례식장을 갈 때는 항상 게으름을 부린다. 입관에 맞춰서 장례식장에 가겠다고 연락하고는 정장을 입은 채 회사에 출근했다. 고모가 준비한 상주 정장은 지독하게 못생겨서 다른 친척들과 같이 그런 옷을 입고 한 셋트가 되고 싶지 않았다. 급한 일을 처리 하고 회사를 나왔지만 그게 정말 그렇게 급한 일인지는 나도 의문이었다. 그냥 나는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내 모교 병원의 장례식장이었다. 서울역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회사 사람들에게 조문 답례로 보낼 메일의 문장이었다.

<…9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할머니와 거의 교류를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자상한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성격이 강하고 리더십이 있었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처럼 치매가 오셨고 매년 점점 작아져 가셨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시긴 하였지만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엔 얼굴을 뵙지도 못했습니다. 어차피 저를 보아도 제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병원의 장례식장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곳이다. 외할머니 중 한 분의 장례를 여기서 치뤘다. 그게 아니더라도 학교 앞을 내가 모를리가 없었다. 길을 잃을리도 없으면서 병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장례식에 가기 싫은 것은 둘째치고 나와 성이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장소에 갈 생각을 하니까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초여름의 햇볕에 정장 자켓 목 부분으로 땀이 스며들었다. 후회는 되었지만 펑퍼짐한 디자인의 싸구려 원단의 정장과는 다르게 일부러 맞춘 것처럼 잘 맞는 정장을 입으면 친척들과 다른 사람처럼 구별되어 보일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라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입관시간에 살짝 어긋나게 도착한 나는 유리창 밖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한 무리의 친척들이 입관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속으로 할아버지는 안 오셨네요. 라고 중얼거렸다 내 농담에 관대했던 할아버지가 들었으면 자기 부인의 입관 중이라도 빙글빙글 웃으셨을 것이다. 유리창 너머의 친척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나와 뒷 모습이 닮았고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입관 절차가 끝날 때 쯤에 바로 손 아래의 사촌 동생이 나를 발견했다. 고모는 나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할머니께 인사해, 라고 말하며 내 손을 끌어 관을 만지게 했다. 관은 작았다.

이야 멍청한 뚱보 자식들, 하고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사촌동생들을 하나하나 엉덩이를 발로 차주었다. 내 친가는 여자가 귀한 집안이고 나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막내는 아직 스물다섯살이니까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다. 최근 10킬로이상 살이 빠진데다 원래부터 친가를 통틀어 제일 키가 큰 나는 최근에 살이 빠진 사람 특유의 가학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는 자세로 사촌동생들을 마음 껏 괴롭혔다.

내가 친가 모임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내 연락처를 가진 친척들은 몇 명 없었고 평생 나를 몇 번 보지 못한 사촌 동생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 중 누구보다 친가의 자손처럼 생기고 그 사람들답게 말하는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매주 얼굴을 보는 사람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나는 어색함 없이 사람들과 농담을 하고 인사를 했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았다. 그건 그 모든 사람들이 내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깔깔 웃고 적당한 농담을 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서 인사 했다.

아버지는 나를 멀리서 부르더니 옆에 앉으라고 하더니, 안부나 인사도 없이 살을 좀 더 빼는게 좋지 않겠니 라고 말을 했다. 나는 저항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몇 년만에 만나서 처음 하는 얘기가 살을 빼라는거에요? 아버지는 - 예전과 다르게 날카롭지않고 본인 주장으로는 몹시 둥글둥글해졌다는 - 아니 건강이 걱정되니까 그렇지. 라고 말했다. 다소 짜증이 났었던 나는 아버지의 근황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아버지 외손자는 봤어요? 누나 아들이요.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원래의 모습을 살짝 보여주며 - 말투에 빈정거림이 섞였다는 뜻이다 -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몇 번 우리 동네로 온다고 말을 하더니 한 번도 안 와서 아직 못 봤다. 아버지와 길게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전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가 쪽 친척인 칠촌고모는 내가 인사를 하기 전에 먼저 내 옆에 와서 잘 지냈냐고 동남 방언으로 물어보았다. 장례식 내내 울기는 커녕 우는 척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 때만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모는요! 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고모의 두 딸은 대학을 졸업한지가 오래라며 이번 장례식에 둘 다 데리고 왔다. 둘 다 왜 건축을 전공한거죠? 라고 묻자 우리 집안 사람들은 한 반 절 정도는 건축 전공이야 니가 문과인게 진짜 특이한거지 라고 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친손자들은 다 멍청해서 다들 전공도 별로고 직업도 별론데요. 할머니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라고 하니 칠촌고모는 아이구 빈소에서 못하는 말이 없다 하고 내 볼을 꼬집었다.

한참 손님을 맞다가 문득 저 쪽을 쳐다보니 아버지가 작은 아이 하나를 안아서 무릎 위에 앉혀보고 있었다. 뒤늦게 장례식장에 온 누나의 아들이었다. 무릎 위에 앉거나 소리를 지르며 뛰는 것 정도 할 만한 그 아이는. 얼굴이 하얗고 친척 중 누가 말한 것처럼 누나보다 나를 좀 더 많이 닮았다. 아이는 몇 번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직 말을 하지 못했고 나는 아이에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례를 하는 내내 장례식장에 당신이 오는 상상을 했다. 바싹 말라서 상복을 입고 있는 나를 보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생각했다. 밤이 깊도록 당신은 오지 않았기에 차가 끊기기 직전에야 자리를 나선 나는 혼자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심야 버스에서 내 옆에 앉은 여자아이는 술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 버스가 흔들리자 벌떡 잠에서 깨어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입을 막은 손 옆으로는 거품처럼 토가 흘러나왔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철야를 하기 위해 준비했던 봉지와 수건, 흰 티셔츠를 아이에게 건네 주었다. 아이는 소중하게 안은 프라이탁 가방 위로 토를 흘리다가 내가 준 봉지에 쏟아내듯 술을 토해내고는 내 티셔츠로 입가와 손을 닦았다. 어제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내 가방에 이런게 있을리가 없었겠지, 그리고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 사람 옆에 내가 없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발인하는 날 아침, 고인이 원한 불교예식에 맞게. 아니 이게 정말 불교 예식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평생 다녔던 절의 주지스님은 한참 불경을 외우고 몇차례 씩이나 사람들에게 절을 시키고 나서는 고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명씩 차례대로 인사를 드리라고 말했다. 배례랑은 상관이 없는 그냥 한없이 개인적인 작별인사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훌쩍거리고 슬퍼하는 동안 나는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몹시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교도지만 정말 고인이 원했다면 절 정도야 몇번이라도 해줄 수 있었다만 이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고인에게 하고 싶은 얘길 하라고? 나는 도망치려 들었지만 금세 잡혀들어와 작별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할 말이 없는데 말이다. 빈소에 들어가 영전 앞에 서니 더욱 더 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9년이 지났다. 그 뒤로 모든 걸 놓은 사람처럼 점점 작아지고 쪼그라들어서 내가 알던 할머니의 일부분인 것처럼 보이던 그 노인과 나는 몇년 째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심술궂은 말투도, 번쩍거리던 눈빛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자식이든 손주든 가만두지 않았던 그 성질머리도 없었다. 영정 사진은 할머니가 쪼그라들지 않았던 좀 더 생생하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사진이다. 할머니에 대해서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 하나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순서를 기다려 작별 인사를 나는 빈소를 빠져나와 순간의 변덕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들으셨겠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곧 발인을 할 거고요. 마지막으로 하실 얘기가 있으시면 전해드릴게요. 어머니는 머뭇거렸다. 할머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뭐라고 할 말이 없구나.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끊을게요. 어머니는 전화를 끊는 나에게 급하게 뭐라고 말했다. 사랑한다 어쩌고 하는 얘기였던 것 같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바쁘다. 이제부터 말 그대로 관을 들어야 한다. 화장터에도 가야한다. 화장이 끝난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의 유골함을 모셔야 할 곳에도 가야하고 어떤 친척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어떤 친척들에게는 작별의 인사를 해야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나면 혼자 집에 가서 누워야 한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 할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집에는 돌아가야한다. 어른이 된 손자는 이런 걸 다 해내는 법이다. 회사에 가면 조문에 대한 감사 메일을 써야지. 뭐라고 써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번 조모상에 따스한 마음과 위로 나누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장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말로 하기에 부족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할머니와 저는 똑같은 개띠입니다. 제가 사리 분간을 못하던 시절, 할머니는 당신과 제가 개띠라고 가르쳐주셨는데. 저는 “할머니가 개띠면 저는 강아지띠죠.”라고 어린아이치고도 좀 바보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너무 좋아하셔서, (저야 질색팔색하였지만) 제가 스무살이 훨씬 넘어서도 친구들과 친척 분들에게 종종 이야기하곤 하셨습니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봉안함을 들고 할머니를 모시다가, 제가 할머니 평생 효도라고는 그렇게 딱 두 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진심어린 배려와 위로가 매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에 보답 할 수 있도록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소식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5년 ㅇ월ㅇ일, ㅇㅇㅇ배상>



25년 8월의 글이다.

유카르(아이누어: юкар, 일본어: ユーカラ) 아이누인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서사시. 방언에 따라 투이탁(туитак), 우에페르케(уэпэркэ)라고도 불린다.
주로 신에 다한 이야기인 카무이 유카르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 아이누 유카르로 나뉜다. 홋카이도의 자연현상이나 생태를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려는 것들이 많다.

삿포로 시내, 미술관의 카페에서 모르는 사람과 커피를 마셨다. 20분 남짓 커피를 마시고 프랑스 작가들에 대한 쓸데없는 얘길 했다. 우연히 마주쳐 우연히 커피를 마시게 된 그 사람은. 키가 크고 깊은 눈을 했다.
그 모르는 사람은 자기 카메라에 내가 찍힌 사진을 보여줬다. 파란 모자를 쓴 안경 쓴 사람이 프레임의 끝에 걸려있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뭔가를 보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과 헤어져서 1시간 쯤 걸었을 때야 비로소 그 사람이 보여준 내 사진을 달라고 하는 걸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홋카이도에는 왜 오신 거에요? 라는 그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주가 지난 지금 아직까지도 그 질문에 대해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 때, 되찾고 싶은게 있어서요. 같은 바보 같은 대답은 하지 말 걸 그랬다.

한국에 돌아오니 곧 장마가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벽은 여름이 시작하기 전 겁을 내던 것만큼은 덥지 않았고 비는 땅이나 겨우 적실 정도로만 내렸다. 살의 간격이 좁고 크기가 작은 우산을 위태롭게 받쳐들고 퇴근을 하다가 어디서인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내가 확실히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라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지도의 공백이나 기억의 구멍을 볼 때 처럼 나는 멍하게 그 공간을 쳐다보고 거기에 무엇이 있었을 거란 걸 추측할 뿐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나는 그 말을 속으로 되내였다.

그날 꿈에 눈썹이 붙고 굵은 곱슬머리를 한 장사아치가 탁상 위에 여러개의 안경을 늘어놓고 그 중에 하나를 골라 가지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반짝이는 안경들을 만지다가 그런데 내 안경은 어디갔지? 내가 쓰고 있던 안경 말야. 라고 장사아치에게 물었다. 곱슬머리의 장사아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을 피했다. 나는 뻔뻔스러운 그 얼굴을 보며 화가 나 내 안경을 되돌려달라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 안경을 두는 곳에 가보니 내 안경은 그대로 있었다.

이제부터 쓰는 것은 여행기라고는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자연현상에 대해서 내가 그럴 듯 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유카르, 그러니까 나만의 아이누유카르라고 하겠다.

나는 내가 이걸 왜 쓰는지도 이해할 수 없고, 단지 홋카이도를 여행 중이었던 내가 메모처럼 남긴 손 글씨에 이 세가지에 대해서 글을 써야한다고 적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순서도 진실 여부도 아무 의미가 없다.

<<물의 교회>>
“…동쪽에서 신이 내려왔다. 아오다모 나뭇가지 위에 멈췄다. 바위산 쪽에 그 강한 날개짓 소리를 느꼈다…” 사라시나 겐조, <아이누 신화>, 2000. 중 올빼미 신의 노래

물의 교회chapel on the water라는 이름은 아이러니하다. 굳이 번역을 한다면 물 위의 예배당이라고 번역해야 할텐데 종교의식을 위한 모임 장소인 채플이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비싼 리조트 중 한 곳의 숙박객들과 그 곳에서 결혼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공개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애초에 채플이란 가난한 자와 망토를 나눠입었다는 성 마르티노의 일화 때문에 채플(작은 망토와 어원이 같다)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종교시설이란 모든 사람을 위한 장소다, 라고 사무 노동자 주제에 유사 프롤레타리아적인 투덜거림을 가슴에 간직하고 리조트에 온 이유는. 열에 일곱 정도의 비율로 안도 타다오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인 이 교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씁쓸한 기분이 든다. 나는 딱히 취미도 없으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건축에 집착할 생각인지. 삿포로에서 특급 기차로도 3시간 가량 떨어진 스키 리조트에, 굳이 할 일 도 없는 초여름에 오고야 말았다.

일본에 도착한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외국인(*동물이 포함된 액티비티는 일본 체류 10일이 지나야 가능하다고 한다.) 에 가족도 동반하지 않은 혼자 스키철도 아닌 스키리조트에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별로 없었다. 초여름에 어울리는 비성수기 액티비티들은 모두 4인가족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비용 또한 4인 기준이라 나를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여줄 마음씨 좋은 가족이 있지 않는 한 나는 4인분의 요금을 혼자서 감당해야한다.
또 요금을 감당 할 수 있더라도 대체로 단란한 가족 단위로 설계된 것들이라 독신 남성에게는 권하기가 곤란 한 것들이다.

뭘 어쩌겠는가. 물의 교회에 갔다가. 러닝을 하고, 또 물의 교회에 가고. 다시 러닝을 해야지 하고 농담처럼 생각했다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2박 3일을 보냈다.

그렇게 처음 물의 교회를 참관한 것은 밤이었다. 체류한 3일 내내 비가 내리고 그치길 반복했고, 첫 날 밤에도 비는 내렸다. 야간 참관엔 사람이 무시무시하게 많았다.

다들 어떻게든 이 멋진 건축물과 이 멋진 건축물에 있는 자신의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고, 혼자 온 독신 남성에 의욕도 그리 많지 않은 나는 그런 사람들의 프레임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 어떤 각도로 사진을 찍어도 프레임에 너무 많은 사람이 찍힐 정도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회로 들어왔다. 알고보니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리조트에서 줄 까지 세우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물의 교회에 딸려있는 연못에 비가 오는 광경은 아름다웠지만, 리조트 스탭이 갑자기 멋진 걸 보여주겠다는 듯이 물의 교회 전면의 창을 오픈 했을 때는 실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한 꺼번에 카메라를 열어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나도 견디지 못하고 카메라를 켰다. 디즈니랜드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디즈니랜드랑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결국 첫날은 인파를 견디지 못하고 금세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딱히 할 일도 없기에 물의 교회의 아침 참관시간을 기다려 들어갔다.

홋카이도의 여름 아침은 이르다, 산의 아침은 더욱 이르다. 밤의 참관에 비해 사람은 반의 반의 반도 없었다. 아침 참관은 몇 년 전에 새로 생긴 참관 가능 시간이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사람들이 안다 모른다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아침이기 때문에 사람이 없는거였다. 밤보다는 여유롭게 나는 연못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도문을 외웠다.  조용한 연못 너머의 숲에서 새 소리가 들렸다.

물의 교회는 특이한 위치에 있다. 리조트 안에는 통채로 레스토랑 건물로 쓰이는 건물이 있고, 그 건물의 1층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물의 교회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온다. 레스토랑 건물의 1층, 2층 창가 위치에서는 물의 교회의 후면부를 바라 볼 수 있다. 나는 그곳에 밥을 먹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결혼 예식을 위해 가는 커플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외에 물의 교회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숲을 직접 한 바퀴 돌아본 봐, 최소한 바지가 엉망으로 젖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물의 교회로 갈 수 없다.

물의 교회는 숲과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연못, 그리고 그 연못에 접한 노출콘트리트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에 접근 할 때는 아까 얘기했던 오솔길을 따라 회색의 벽을 지나쳐 입구로 들어가면 된다. 입구로 들어갔을 때 보이는 것은 교회 건물의 정면, 그리고 연못. 그 연못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흰색의 십자가이다. 사람들이 물의 교회 건물을 가장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은 회색의 벽 입구로 들어갈 때 바로 그 순간 뿐이다.

연못의 둘레를 따라 걸어가면 교회 건물로 들어 갈 수 있는데. 교회 건물 위에는 십자가가 겹치듯이 솟아 있고(물론 비는 하나도 막아주지 않는다 대단한 실용성이다) 반나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예배당이다. 예배당은 작다. 50명, 노력하면 80명 정도도 가능할 지 모르겠다. (영 별로로 보이는) 오르간과 성서, 그리고 프로젝터 정도는 있다. 특이한 것은 설교자를 위한 자리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 일반적인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어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정말 어떤 종교적 신념도 없는 사람이다. 굳이 따지자면 선사상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이런 곳에서는 기도를 하기 적절하진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나도 몇 번이고 러닝을 반복했다. 숲 길을 달리고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혼잣말을 계속했다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혹은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날 밤의 물의 교회는 가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나는 이미 물의 교회에 대해서 아무 것도 기대하는 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삼일째는 또 다시 산에 올랐다.
그리고 밥을 먹으며 물의 교회를 바라보다가 결심이 들어서 한 번 더 물의 교회에 들어갔다. 이번 참관에도 사람은 없었다. 나는 뭘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단지 자리에 앉아서 숲의 소리를 들었다.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30분 정도는 충분히 앉아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지도 스마트폰을 켜지도 않았다. 이미 아침부터 산에 오른 나는 구약시대의 석판을 든 전도자 같은 기분이 되어 왕국이 돌아오길 그러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단지 앞을 똑바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주 우연히. 앞서서 온 팀들이 교회를 떠나고 마지막 입장 시간에 맞춰서 다음 팀들이 교회로 걸어오고 있을 때 아주 짧은 5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교회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앉아있을 때가 있었다.

5분 보단 더 길었을지도, 아니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 짧은 시간 동안 산을 스치는 바람이 연못을 쓸어올리며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그 커다랗고 밀도 높은 바람에 물결이 생겨나 연못의 바깥 쪽에서 내가 앉아있는 교회 건물 쪽으로 밀려들어왔다. 모든 숲이 한 꺼번에 말하는 것처럼, 폭풍이 먼 곳에서 불려나올 때 그러는 것처럼 나무가 한 꺼번에 서로 쓸려가며 흔들렸다. 소음이, 바람이 찢겨가는 소리와 돌과 모래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등장 하는 소리처럼 모든게 한 번에 시끄러워졌다 조용해졌다.

교회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산지 이른 아침의 어두운 하늘 저 편, 아무 것도 없는 공중을 쳐다보고는 거기 무언가가 멀리서 날아와 숲의 꼭대기에 바람과 함께 내려 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진 않았지만 굳이 모습을 상상한다면 커다란 새. 영혼으로 만들어져 빛처럼 검고, 사람처럼 울고 사람같은 표정을 하는 그런 새이다. 그 모습이 불길하여 사람들이 근심하고 피하나 내가 몹시 사랑하는 그런 새 말이다. 그 새가 오랜 시간을 기다려 나를 만나기 위해 산과 산으로 이어진 바람 길을 타고 비와 함께 이곳까지 날아왔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나는, 산이 많은 곳에서 태어나 산이 많은 곳에 온 나는.그렇게 교회의 의자에 똑바로 앉아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는 새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끄러운 말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교회에 혼자 있는게 아니었다.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를 나섰다. 그리고 새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어느새 사라져서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리조트에서 해야할 일을 전부 해치우고는 그날 오전 일찍 리조트를 떠났다. 비는 금세 그쳐 내가 리조트를 떠날 때 쯤이면 완전히 맑은 날씨가 되어 있었다.


<<축제의 밤>>

“…나는 시코츠 호수에 사는 한 마리 여우이다. 인간마을에 뭔가 근심거리가 일어나면, 그것을 몰래 알려주고, 힘든일이 생기면 우는 소리로서 어디에서 재앙이 오는지 주의를 주어서, 노인은 그것에 따라 신에게 가호를 바라고 재앙을 피했다…” 사라시나 겐조, <아이누 신화>, 2000. 중 누키베츠 마을의 카무이 유카르

이번 삿포로 체류는 또 삿포로의 소란부시 축제와 일정이 겹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일정이 겹치는 것이 3번째이다. 작년에는 8월에 축제가 있었던 걸 보니 주최 측에서는 한국 정부, 혹은 내 인스타그램을 통해 출국일정을 확인하는 것 같다.

삿포로에 도착한 첫날 호텔 앞 나카지마 공원 공지에서 소년 소녀들이 소란부시를 연습하고 있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나마 여유가 있던(그러니까 사람들이 미어터지지 않았다는뜻이다) 첫날 쇼핑이나 했던 나는 삿포로에서의 체류 일정을 완전히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지방 축제는 대체로 대단하지만 삿포로의 메인 축제 중 하나이기도 한 소란부시 축제는 더 대단하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많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소란부시 동호회 여러분들이 공원에서, 길가에서, 공터에서 춤을 추고 있어서 삿포로 중심가는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었다.

삿포로 체류 둘째 날은 축제의 메인 일정이기도 했다. 새벽4시부터 호텔 근처의 강변을 뛰었는데 그 때 이미 춤을 연습하는 소년소녀들이 있었다 아이고 애기들아. 그 뒤로는 딱히 할 게 없어서 미술관에 갔다가, 바로 근처에 있던 오도리 공원을 포함 삿포로 시내를 가로질러 가며 춤도 구경하고 밥도 먹으려고 했다만 그건 결국 너무 안일한 계획이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삿포로의 여러 축제 중에서도 여름 축제라고 하면 바로 이 소란부시 축제. 오도리 공원을 포함해 삿포로의 메인 스트리트가 사람으로 가득했다. 급하게 연어박물관이니 하수도박물관이니 하는 장소는 어떨까요 하고 트위터에 의견을 물어봤지만 그거야 웃기려고 가는 것이고 그런데를 급하게 간다고 해서 즐거울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몇년 전 홋카이도 다른 곳에서 연어 박물관을 간 적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게 연어 생태관 어쩌고 하는 이름의 장소가 한 두군데가 아니다)

결국 둘 째 날 한 것은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걸어다녔을 뿐이다. 인파에 치어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안고 간 홋카이도 대학마저 대학 자체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그 넓은 캠퍼스 부지의 메인스트리트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을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홋카이도 대학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넓고 (삿포로 캠퍼스는 18제곱킬로미터가 조금 안된다. 마포구보다 조금 작다는 뜻이다…)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마이클 잭슨이 되살아나 삿포로를 방문하는 날 정도 외엔 일어날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홋카이도 대학에 사람이 가득 차는 것은 아주 쉽게 실현되었다. 스즈키노와 삿포로 역 앞과 오도리 공원을 인파로 가득채우고도, 홋카이도 대학마저 할일 없는 사람들로 가득채울 정도로 삿포로는 거대한 도시였다. 애초에 내가 얕본 것은 삿포로 시민들이었다.

사람으로 미어터져 걸어다니기도 힘든 홋카이도 대학에서도 도망 나와 하루 종일 도대체 뭘 한거지 하고, 회사원 스러운 반성을 하며 사람으로 가득찬 오도리를 건너. 스즈키노를 가로지르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리가 익숙하여 구글 지도를 열어보니 여기가 2016년 처음으로 소란부시 축제를 봤던 날. 스즈키노에서 징기스칸을 배불리 먹고 가게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던 바로 그 골목이었다.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서 잠시 서서 구경을 하려는데, 잠시만 하려고 하던 것이 좀처럼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마을 단위의 사람들이 아이와 어른이 모여 춤을 추고, 학교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뽐낸다. 깃발을 흔들고 옷자락을 폈다. 지치고 힘들어서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잠시 서서 구경이나 하려던 나는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래의 글은 내가 2016년 10월 10일에 쓴, 16년 6월의 삿포로 여행기 마지막 부분이다.

“…박수를 치고, 다시 춤을 추고. 앉아있다가 일어서고. 여느 꿈처럼 싸구려 전깃불과 스포트 라이트가 사방에 걸려있는데 사람들은 동작을 맞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모두가 자기 멋대로 노래를 부른다…나는 춤을 추지 못하고 공원의 구석에서 낯선 사람들의 춤을 추며 눈물이 가득 고여 밤이 희뿌옇게 사라져가는 것을. 내 마음이 가라 앉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꿈 속에서 춤을 춘다. 가장 멋지게 누가 봐도 감탄할 정도로 춤을 추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나는 춤을 추어야했다. 왜냐하면 내가 울고 있는 사이에 모두들 저렇게 즐겁게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것이 내가 6월의 홋카이도에서 깨달은 마지막의 것. 소음에서 걸어나와 춤을 추겠다는 것. 나의 나라로 돌아가, 당신에게 같이 춤을 추지 않겠냐고 권하는 것. 다시 한 번 더.”

소란부시를 구경하던 나는. 예전에 내가 오래 전에 경험했던 6월이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 때와 똑같이 반쯤 부숴지고 너덜너덜해진 채로 홋카이도에 도착해서, 이동하는 곳마다 글을 쓰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그리고 다시 삿포로에 도착해서 사람들의 축제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 어떤 내가 피할 수 없는 계절적 순환처럼 생각되었다.

축제의 밤은 축제의 밤이고, 춤을 추는 사람은 모두가 변함없이 춤을 추고 있으며. 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해서 헤맨다. 해는 이미 져서 거리에 매어둔 등불이 반짝이는데 너는 혼자 우두커니 서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쳐다보기만 하는구나. 춤을 출 생각은 하지 않고. 춤을 출 생각은 하지 않고.

이 여행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가 지난 번 홋카이도에서 겪었던 일들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내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그 목적이리라.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디로도 가지 못한 나는 축제의 행렬 앞에서 박수를 쳤다. 박수를 치지 않으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의 기도>>

“…이봐요 젊은이 부드러운 살갗이 뒤덮인 언덕 어루만지며 덩굴 숲 해쳐서 계곡의 낮은 곳으로 내려와 줘요…” 사라시나 겐조, <아이누 신화>, 2000. 중 파우치 카무이의 노래

조지프 캠벨의 명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오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가 생각 했을 때 가장 많이 일어날 법 한 오독은 모든 신화와 전설들이 궁극적으로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이 세계가 실은 어떤 한 사람의 머릿 속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오독이다.

그도 그럴 듯이 조지프 캠벨은 이 재미있는 책의 에필로그에 이르러 이런 멋진 문장을 쓴다.
“…세계는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무함마드여, 내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조지프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민음사,467p

그러나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폐색적인 결론이 아니라, 모든 비의와 종교가 하강하여 어떤 신비도 없어진 현대 사회에서도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좀 더 나은, 혹은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 이라고 생각한다. 더 간단하게 얘기해보자면, 이 책을 여기까지 읽었으니 이 책에 실린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착하게 살도록 하자 정도가 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 사람들의 오독에 대해서 얘기해놓고 나만은 오독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이야기들은 당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인 한, 당신은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이다. 하지만 당신의 바깥 - 당신이 관측하지 않는, 그리고 관측 할 일도 없는 곳 -에도 세상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벌어진 일들이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라고 해도 사실 그건 세상이 탄생한 이래로 끝없이 반복된 일들이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일어났을 뿐이다.

여기엔 장점도 있다. 당신은 글로 씌여지고 노래로 불리워진 그 이야기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당신이 보지 않은 곳은 새까만 공백이 아니다 단지 당신은 오래 전에 발명된 무언가를 다시 한 번 발견해 나갈 뿐이다.

세상의 넓음과 우주가 누렇고 까맣다고 주장한 나는 이 시점에서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대대로 남겨진 이야기들이야 말로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증거라고 주장 할 생각이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어떤 이야기도 남겨지고 이어져 당신에까지 전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당신은 내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마음 속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당신이 이 글을 읽고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가라앉히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일까?

도야호를 갈 때는 항상 삿포로에서 버스를 탄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삿포로에서 도야호로 갈 때는 오른 쪽 자리에, 도야호에서 삿포로로 돌아갈 때는 왼쪽 자리에 앉는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앉는다. 그리고 한숨자고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고 그제서야 내가 산이 잘 보이는 쪽으로 앉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버스의 창에 이마를 대고 산을 바라본다. 사다리 꼴 모양의 산은 6월의 여름 볕에도 불구하고 그 꼭대기부터 중턱까지 흰 빛이 보인다. 아직 눈이 녹을 정도로 덥지는 않은 건지. 나는 한 번도 저 산의 눈이 녹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산의 이름은 요테이이고 다이세츠잔 연봉들처럼 다른 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고 평원에 혼자 솟아 올라와있어서 더 외롭고 웅장해보인다. 창에 이마를 너무 오래 대고 있던 나는 나는 멀미를 하면서도 지치지도 않고 산을 바라본다. 도야호에서도 요테이 산을 바라 볼 수 있지만 굳이 버스에서 요테이 산을 바라보는 이유는 …하하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저 산이 보이는 곳에 있는 한 그 산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을 뿐이다.

삿포로에서 도야호 까지 버스로 가면 2시간이 좀 더 걸린다. 가는 길 대부분은 산 길이고 터널이나 고갯길을 지날 때도 있지만 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해도 좋다. 중간 지점 쯤 있는 휴게소에서는 저 멀리 산이 보인다. 여기만큼 산이 잘 보이는 곳이 없을꺼야 하는 생각에 무리해서 사진을 찍어보지만. 산은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온다.

산 근처에는 스키장이, 호텔을 겸한 아케이드가. 그리고 과수원과 목장들이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요테이 산이 가진 압도적인 존재감과 신령함은 녹색처럼 선명하다. 나는 요테이 산 뿐만 아니라 토카치의 평원에서 다이세츠잔 연봉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비에이의 언덕 위에서, 후라노의 농장 사이 샛길에서, 그리고 다이세츠잔 중 하나에 올라가 비를 맞으며 산을 쳐다보았다.

다이세츠잔의 연봉 또한 거대하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그 산을 보는 순간. 대대로 이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이 산들을 향해 기도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신의 존재를 매일 매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을까. 전승에 따른 선악관과 신이 주는 행운과 불행.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별했던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저 산을 넘어간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나는 산을 보며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다고 해도 산의 모습은 쉬이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푸르고, 검고 그리고 희다. 꼭 사람의 마음처럼.

그래서 나는 당신이 여기에 있었으면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내 옆에 있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단지 눈을 감고 산에 대해 생각한다. 정말로 해야할 말을 하고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법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6월의 중순, 여느해보다도 서늘하고 더위가 오지 않은 여름이 되었다. 아직까지 창을 열면 바람이 시원하다.

나는 글을 쓰려다가 홋카이도를 돌아오는 날에 산 헤드폰을 쓰고 소파에 기대 아주 잠시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자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아주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무엇인지도 모를 그게 나에게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말 그것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슬픔과 고통, 혹은 낡고 빛이 바랜 여우의 그림자라고 해도 말이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유카르이다.


25년 6월의 글이다.


그러고보니 도시마다 인기 있는 플레이리스트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거 알고 계십니까? 애플 뮤직 같은 곳에서는 도시 별 핫 플레이 리스트를 공유 하는데 혹시 스포티파이는 더 자세하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홋카이도의 플레이 리스트라고 한다면 나약한 동아시아의 음악 같은건 아니고 컨츄리 음악입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한 70-80년대의 컨츄리 음악이 홋카이도에 딱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실은 이번 6월 여행 중 홋카이도에서 제일 많이 들은 음악은 소란부시라는 민속 춤 공연과 관련된 어레인지 곡들이었습니다. 민속춤? 네 홋카이도 지역의 풍어를 기원하는 전통 춤 같은 것이었는데 몇 번의 공중파에서의 대히트로 어느새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 쓴 홋카이도 여행기 중 하나에도 소란부시 축제에 대해서 자세히 쓴 적이 있는데. 인연도 인연이겠거니와 우연이 겹쳐서 올해의 축제가 제가 삿포로에 있는 기간 중 정확하게 겹쳤습니다. 고생도 좀 있었지만, 몇 년 전에 신상에 일이 있는 상태에서 홋카이도에 왔을 때 야밤의 소란부시 춤을 구경했었던 것처럼 올해도 스즈키노의 사거리에 서서 소란부시를 구경했습니다.


(8) <Don’t you want me baby?> Mandy smith, <Summer of the mirage> Yoshimasa terui & Orika okachi

나는 대체로 계획적으로 게으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계획을 짜지 않았다. 여행 계획을 짠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고 하루에 반 정도는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을 하고 (하하) 있었기 때문에 계획이랍시고 한 달 전 쯤 호텔만 대충 예약해두고 가기 싫어서 투덜거렸다.

가기 3일 전 쯤에 그나마 러닝코스도 보고 잡지를 찾아서 3,40군데 정도 음식점을 구글맵에 무작정 저장해뒀다. 그걸로 여행 계획은 끝이었다. 진짜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리스트하고 우선순위도 적어두고 괜찮아 보이는 동선까지 정리해둔 12월의 도쿄 여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나는 정말로 순조롭게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삿포로에서 이틀째인 토요일은 정말 아무 계획도 세워두지 않았는데, 처음 하려고 생각했었던 청바지 사기는 그 전날 해버렸고 부탁받거나 했던 것들도 대체로 다 해버리니까 할 일이 없었다.

아침에 강변을 10킬로미터 쯤 달리면 좋은 생각이 나겠지 하고 일단 달려봤는데 기분만 상쾌해지고 더 건강해졌을 뿐 좋은 생각이 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것이 홋카이도도립 근대 미술관에 가는 거였다. 숙소에서 가까웠기도 했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뭔가 좋은 생각이 나겠지 하는 멍한 생각이었다.

오픈시간에 맞춰서 근대미술관에 가니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가기 전에도 몰랐고 티켓 줄에 설 때도 몰랐지만 19세기의 우키요에 작가 중 가장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요시카와 쿠니요시의 홋카이도 전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예약까지 하고 온 부지런한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냥 멍한 상태로 가죽점퍼에 까마귀처럼 옷을 입은 키가 큰 대학생 뒤에(어떻게 알았냐면 학생 할인을 받더라) 서서 아니 이거 국뽕 전시(아니 일본이니까 일뽕인가…)아냐 그냥 상설전이나 볼까 하고 투덜거리며 천육백엔이나 하는 티켓을 샀다.

전시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티켓팅하면서 투덜거린 것 치고 너무 즐거웠는데 질과 양 모두 풍부하고 징그럽고 웃겨서 대만족 했다 정도?

무엇보다 티켓을 살 때부터 앞에 서있던 대학생을 관찰하는 것도 꽤 재미있었는데 팜플렛에 연필로 뭔가를 열심히 적으며 집중해서 전시를 보다가도 갑자기 순서를 건너 뛰어서 앞으로 가버리거나 하는 걸 반복했다. 그런데도 순서대로 전시를 보던 나와 계속 동선이 겹쳤는데 키는 힐탑재 기준 나보다 약간 작은 정도로 키가 큰데 소심한지 전시를 보고 있는 한 무리의 시니어들만 보면 앞지르지를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도 깜짝 놀란게 삿포로 시민들 특히 시니어분들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시는거지? 몇무리나 되는 시니어분들이 토론을 하며 전시를 보고 계셨다.

결국 키가 엄청 큰 외국인(크왕!)인 내가 염치불구하고 계속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소리합니다 익스큐즈 어스 하면서 시니어 무리들을 뚫고 앞으로 나가기를 반복했는데. 대학생 분은 그 때 마다 내 뒤를 쫓아왔다. 그렇게 전시를 보는 1시간 내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게 편한 걸 알아버린 것이다.

우타가와 전을 다 보기 전에 나는 대학생 분보다 먼저 나가서 상설전을 보러 갔다. 그것도 너무 재미있었다만 시간이 너무 걸린 것 같다. 상설전을 다 보고 카페에서 30분 동안 커피를 마시고 왜 아직도 밥 시간이 아니지 하고 투덜더리면서 뮤지엄샵(너무 좋아한다)을 갔더니 거기에 아까의 대학생 분이 물건을 고르다가 눈이 마주쳐서는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왜 인사를 했냐고 물어보니 저도 모르게요 라고 말하며 웃었다.


(9) <Tears dry tonight> CYRIL, <Wouldn’t change a thing> Kyile Minogue

삿포로 시내에서 들려온 곡이다. 뭘 하고 있었는지 말하기도 민망한게 메인 도로들을 전부 점령하고 있는 축제인파를 피해서 그냥 눈 앞에 보이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파스타를 먹거나 했다. 소란부시 축제에 대해서는 따로 쓸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10) <Peter Gunn Theme> the blues brothers

70년대와 80년대 SNL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코미디언 존 벨루시와 댄 애크로이드가 결성한 2인조 밴드 브루스 브라더스는 뚱뚱보와 말라깽이 조합의 제법 코미디 듀오의 스탠다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애초에 이름도 브룩스 브라더스를 뒤튼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전업 가수들 못지 않아서 결국 빌보드 200에서 1위를 하기에 이르렀는데…블루스와 코미디를 결합한 공연이던 그들의 흥겨움이 장점이 되었고. 아레사 프랭클린이나 레이 찰스 같은 당대 최고 아니 미국대중 음악 역사를 통틀어서도 전설인 인물들과 협업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특징적인 것은 검은 페도라에 검은 수트 그리고 검은 선글라스로 두 콤비는 어떤 유쾌한 공연을 해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영화(아니 SNL캐릭터로 무려 영화를 찍었다는게 그들의 인기를 보여주는 거긴 한데)에서도 마찬가지로 저는 어느날 그 영화를 공중파의 명화 극장 방송에서 보았습니다. SNL이 뭔지로 모를 나이였던 저야 저 사람들이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기에 맥락 있는 유머들은 하나도 이해를 못했지만 엄청나게 재미있어서 언젠가 2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고 합니다. 아 그 시절엔 코미디 영화는 시리즈화 되는 게 할리우드의 룰이었거든요. 물론 속편이 나오긴 하지만 1편이 1980년도에 나온 것에 비해서 1998년에 나왔으니 18년이나 걸린거죠. 블루스 브라더스의 키가 작은 쪽이자 진짜 천재였던 존 벨루시가 33살의 젊은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것이 주된 이유였겠죠. 1편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한 번 보시는 걸 권합니다. 아니 뭐 블루스 브라더스 얘길 한바닥을 했네. 제가 좋아하는 영화라서 그렇습니다.

나카지마 공원 근처에는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 그런 곳으로 삿포로의 중심가에서는 묘하게 벗어나 있어서 손님의 90%는 그 동네 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나카지마 공원 근처라고 해도 7분 가량을 걸어야 한다. 게다가 파는 것은 700엔 가량의 콜드 샌드위치거나 그보다는 살짝 비싼 핫 샌드위치인데 굳이 거길 샌드위치를 먹으러 가야 하는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우연히도 그 샌드위치 가게의 반경…한 2킬로미터 이내에 있다면. 그리고 밥을 먹어야 한다면 충분히 갈 이유가 된다. 사장 내외는 유쾌하며 더하고 덜 것 없는 깔끔한 접객 태도를 보여주며. 가게 내부는 경영자들의 유머감각을 반영해서 깨끗하고 과하지 않은 유머가 있다. (예를 들어서 흑판에 대놓고 빅토리아 케네픽의 책을 인용해 EAT or we both starve 라고 써둔게 웃기다) 그런 가게라 그런지 브루스 브라더스의 OST를 틀어놓아도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하여튼 그런 좋은 가게인데 샌드위치는 어떠냐고? 우리 이모는 이런 샌드위치를 미국맛이라고 좀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빵은 유럽 샌드위치처럼 두껍지 않고 얇지만 안에 들어간 햄은 짜고 감칠맛이 난다.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영화가 재미있었을 때의 기분처럼 씹을 수록 맛이 난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좋아할 맛이다. 다름 아닌 제가 좋아하는 맛이기 때문에 그 가게가 다음에 갈 때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게의 이름은 HASAMIYA라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블루스 브라더스의 곡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아레사 플랭클린이 부른 <think>인데 아니 블루스 브라더스가 이 곡에서 뭘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춤 같은걸 추나.

(11) <Scherzo No.4 en mi Majeur, OP 54> Anne Quefflelec

낙원은 글의 소재가 될 수 없어도 쇠락한 낙원은 글의 소재가 된다. 이 리조트에 처음으로 왔던 때를 기억한다. 뭐가 그렇게 싫었는지 여행 내내 미친 사람처럼 숙소를 계속 바꿨고. 매일 2-3시간을 이동하며 도시에서 도시로 움직였다. 비오는 날에도 걸었고 해가 떠있어도 걸었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갔고 아무도 타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서 하루에 4번 있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여행의 거의 마지막 쯤에 도착한 것이 이 리조트였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이미 이 지역은 쇠락과 회복을 반복하며 정체라고 해야할지 복구라고 해야할지 명확하게 말하기 힘든 그런 상태를 지속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진으로 주변의 농촌과 주택가가 큰 피해를 입고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숫자로 말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이곳은 내가 그 때 까지 본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온천 리조트였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나는 디즈니 랜드라도 온 것 처럼 리조트의 탕을 바꿔가며 목욕을 했다. 그리고 밤에는 불꽃놀이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아쉬워하면서 리조트를 떠나는 걸 반복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걸까. 이번에 이곳을 방문한 것은 4번째 쯤 된다. 몇 년 전 리노베이션을 한다는 홈페이지 공지를 보았다 뭔가가 바뀌어 있겠지 하고 기대했던 것 같다. 좀 다른게 있다면 이전에는 적당한 엔트리 레벨의 룸 플랜으로 왔다면 이번에는 미친 사람처럼 제일 비싼 플랜 중 하나로 왔다. 그래놓고 계속 아 왜 이렇게 비싸지 하고 투덜댔다. 기대를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 일 것이다. 이번 홋카이도 여행 전체에 대해서 놀랍도록 아무 기대도 없었지만 이 리조트에서 쉬는 것만은 기대했다. 매일매일 온천을 하고 10킬로미터씩 뛰고, 라운지에 앉아서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했다.(이걸 쓰는 것도 라운지에서이다. 나는 체크 아웃 후 삿포로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리조트에는 예전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았다. 비성수기인 6월이라고 해도 미어터질 것 같이 붐비던 식사 장소도, 온천에도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2박 이상의 연박을 하는 손님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다들 삿포로에서 출발해 4시에 도착한 후 다음날 10시면 리조트를 떠났다. 어쩌면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이 곳의 비용이 너무 비싸졌고, 비슷한 규모의 리조트들이 새로 몇개나 생겼기 때문에 손님들이 다른 곳으로 나눠진 걸까?

하지만 호수를 도는 유람선에도 산책로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온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그런 곳인게 탄로난 것일까 하고 심술궂은 생각을 한다. 새로운 리조트들이 몇 개 생겨난 만큼 쇠락하여 소멸해가던 호수 근처의 거리들은 예전과 다르게 편의점과 마트가 생겼지만, 이미 배경이 되는 주택가는 소멸해있던 터라 새로운 주택가가 생겨나지는 않은 것 같다. 가게들은 대다수 문을 열지 않았다. 성수기면 다시 여는 걸까, 아니면 완전히 문을 닫은걸까.

혼자 보는 불꽃놀이는 지독하게 재미없었다. 맥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불꽃놀이 배가 호수를 횡단하기도 전에 창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다. 해가 뜰 때 쯤, 이 온천이 자랑하는 옥상의 노천 온천에 가보았을 때. 분명 청소를 끝낸 뒤일 노천 온천 위에 벌레들이 떠있는 걸 보고 쓰게 웃었다. 아니 방 안에 이미 자쿠지가 있는데 여긴 또 왜 와서 이런 걸 보고있는거지. 옥상으로 가는 문에는 얄궂게도 6월 초순부터 벌레들의 대규모 발생이 있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나는 뭘 기대한거지 어떤 맛있는 조식도 이틀을 연속으로 먹으면 질리기 마련인데.

나는 여기의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라운지에는 400몇 년 수령의 나무(어딘가 신사의 신목이었다고 한다. 진짜 무엄한 짓을 하는구나)가 죽으면서 그걸 일부 테이블로 만든 것이 있다. 거기 엎드려서 생각을 해보니 생각이 잘 된다. 나는 너무 고집이 쎄고 좋아하는 것이 하나 생기면 그걸 질릴 때 까지(잘 질리지도 않으면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죠 400년 수령의 신목님?

가끔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어떠냐.
그렇군요 영험하시네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라운지에서는 지겹도록 쇼팽을, 그도 아니면 슈베르트를 튼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질릴 정도였다.(로비에선 바흐를 틀어놓는다. 보통은 반대 아냐?)

(12) <the razors edge> AC/DC, <Can’t happen here> rainbow

리조트에서 삿포로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는 작고, 무릎이나 펼만한 그런 곳이었다. 주로 라이더들이 즐기는 곳인듯 한데 휴게소 밖의 화장실은 고장나서 안의 작은 화장실을 써야했다. 뭐라도 하나 사줘야지 싶어서 가게를 들러봤지만 음료도 자판기나 있어서 구미 하나를 사서 계산을 하려는데 The razors edge가 나왔다. 에이씨디씨네요 라고 말하니까 그 때 까지 너무 과하게 친절하던 (90년대 락가수 머리를 한) 사장님은 아주 흉폭하게 씨익하고 웃으셨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글이 25년6월의 홋카이도 여행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아주 적절한 글인 것 같다.


25년 6월의 글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야 말로 영혼이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증거이다.

2025년 6월에 홋카이도를 다녀왔다. 정확히 나는 이 글을 여행의 6일째 날인 6월 9일 월요일에 온천 리조트의 라운지에서 쓰고 있다. 방금 나와 같이 삿포로에서 출발한 외국인 시니어 커플이 체크아웃 하고 떠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졌는데, 세상 누가 온천 리조트에서 혼자서 2박 3일이나 한단 말인가. 나는 외로워졌고 그럴 때 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러닝…아니 글 쓰기 밖에 없다.

이번 여행은 6년만의 홋카이도이다. 여행을 가기 전, 나는 이제까지의 형태로는 여행기를 쓰지 않을거라고 말했지만 수다쟁이인 나는 당신과 밤을 새고도 남을 정도의 말이 솟아올라 여행에 대해서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감추고 오직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내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내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도록 글을 쓸 생각이다.

여행기의 주제는 홋카이도 여행 중에 들은 음악이다. 단지 내가 선택해서 들은게 아니라 어딘가 가게에서, 거리에서, 호텔의 라운지에서 들었던 음악들에 대한 리스트이다. 내가 아는 곡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샤잠으로 어떤 노래인지 체크해서 확인했다. 세상에 맙소사 내 목숨은 이제 100년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 음악들이 너무 많다. 음악이나 아티스트에 대해서 뭔가 잘못 쓴 내용이 있다면 양해를 부탁한다. 지적해준다면 진짜 빠른 속도로 수정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왜 이런 형태의 여행기를 쓴냐고 한다면, 때때로 사람은 너무나 하찮은 기억들을 가지고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당신에게도 있지 않은가? 잘 말라있는 차가운 테이블에 손을 올려놓고 누군가의 옆 얼굴을 쳐다보던 기억. 특별한 날도 특별한 장소도 아니었지만 곱슬머리에 북슬북슬해진 머리를 쳐다보며 정작 해야할 말은 잊어버리고 가만히 있었던 때. 어떤 기적같은 일이 벌어져서 그 사람이 당신을 쳐다보며 뭔데요, 라고 말하는 그런 기억들. 그 눈과 콧등.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던 아주 흔하디 흔한 노래 같은 것들. 그런것들이 우리 하찮은 인간들의 영원을 장식하는 법이다.

(1) <Last call>, Logic

이해는 안가지만 홋카이도의 음식점은 음악 선곡이 좋은 가게들이 많다. 특히 카레 가게들의 선곡들은 굉장해서 아니 도대체 어디서 이런 음악을 찾아서 듣는거야 싶을 정도의 곳도 많다. 아니 애초에 홋카이도의 카레 명점의 조건은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짜냐고? 적어도 저에겐 진실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들은 것은 토마무에 있는 라멘 가게 ㄷ이다. 내가 도쿄에서 예전에 자주 가던 라멘 가게는 음악을 아예 틀지 않았고 어떤 가게는 지겹도록 엔카만 틀어댔는데 그건 그 나름대로 스타일이라고 존중 할 수 있었지만. 어떤 가게에서 드래곤애쉬와 엠플로를 틀은 걸 보고 과연 이런 가게가 맛이 있을까 하고 상당히 부당한 판단으로 미안하다고 하고 가게를 그냥 나온 적이 있다.
내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일본에서 라멘이나 카레 가게는 소규모로 가게 주인이 장인정신을 가지고 운영하는 곳이 많은데. 음식 하나에 자기 커리어는 물론 인생을 거는 사람들에게 스타일이 없을 수는 없으며 그런 스타일이 있는 사람들은 음악 선곡 능력 또한 굉장하다. -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되시나요? 네 뭐 별로 근거가 없는 주장이란 것에는 동의합니다.

20대때 이미 빌보드 200안에 들어가고 30살때 랩퍼에서 은퇴한 로직이 유명하지 않다고는 볼 수 없지만 라멘집에서 들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은 안되는 라인업이 아닙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 노래를 틀어둔 가게의 라멘은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습니다. 홋카이도는 원래 재료의 질이 좋아 라멘 맛으로 만날 티격태격 싸우는 중인데 이 가게는 미소도 시오도 맛있었고 들어간 재료들도 성의가 가득했다. 토마무에 가게 되면 들러보기 바란다.

아니 근데 No pressure 앨범 뒤로 은퇴한 것이 아니었는지? 확인해보니 그래놓고 계속 앨범을 내고 있었다고. 하이고. Ultra 85(2024) 앨범의 Deja vu가 아주 쫀득쫀득하니 좋네요. 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두 번째 찾아갔을 때는 Amin의 <redmercedes>가 나오고 있었다. 라멘가게 사장님이 뭘 좋아하는지 진짜 알 것 같았다.

(2) <Mr. Bojangles>, Nitty Gritty Dirt Band

아까 바로 위에서 말했지만, 적어도 홋카이도에서 카레 명점(맛집이란 말로는 부족하다)의 조건은 간지 나는 선곡이다. 내가 홋카이도 하면 운명적으로 떠올리는 노래 중에 하나 <Young and Wild>도 어느날 물에 젖은 타올처럼 지쳐서 들어간 후라노의 카레 집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노래이다. 어두컴컴해서 제대로 된 조명도 없는 카레집에서 먹은 카레가 너무 짙고 맛이 있어서 심정적으로는 거의 오열을 하며 밥을 먹었다.

이 카레 가게도 그 정도 임팩트가 있었다. 토마무의 리조트 안에 있는 가라쿠의 분점(본점은 삿포로의 추오구에 있다 중심가 중에 중심가이다.)이었는데 별 기대를 안하고 야채를 많이 먹고 싶어요 라며 야채카레에 야채토핑만 추가해서 먹었는데 배도 안 고픈 상태였으면서 말 그대로 접시까지 햝아먹고 말았다. 너무 맛이 있어서 계산을 하며 제가 이제까지 먹어본 스프 카레 중에 제일 맛있습니다 라고 하니까 자주 듣는 말인듯 칭찬 고마워요 라고 하고 끝났다. 아니 아니라니까 너희는 정말 홋카이도의 보물이라니까.

하여간 보쟁글스란 이름의 댄서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 이 곡은 빌보드 핫 100에도 들었던 컨츄리 곡으로 원곡은 1960년대에 발매되었지만 니티 그리티 더트 밴드에 의해 포크록 감성을 아주 조금 섞은채로(아니 애초에 블루글래스가 메인인 밴드니까…) 발매되었다. 원곡이 워낙에 명곡이고 아직도 본 밴드의 주요 곡이라고 하면 이 곡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듀크 엘링턴의 보쟁글스랑은 상관이 없다. 가사가 정말로 아름다운데 스프카레를 먹을 때 같이 들어줬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스프카레에 어울리는 노래는 컨츄리 음악이다.

(3) <Follow me>, Yagami junko

내가 토마무에 있었던 리조트 부지에는 몇 개의 브랜드(하지만 모두 호시노 리조트 산하이다)가 같이 있는 구조였는데 그 중 한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셔틀 버스는 도착 시에 똑같은 음악을 크게 틀었다. 그게 바로 이 곡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표곡인 <황혼의 베이시티>같은 건 너무 유명해서 나도 듣는 순간 알았을텐데 팔로우미는 야가미 준코의 노래인지도 몰랐다. 1983년에 발매된 노래를 굳이 트는 건 기사 분이 좋아해서 일까? 토마무 리조트에 있는 동안 비가 오든 말든 고집스럽게 계속 러닝을 했는데 역시 산 속이라 그런지 수도 없이 비가 왔다. 바람막이를 입고 숲 속의 오솔길을 뛰는 동안 저 멀리서 팔로우 미가 들리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여기가 일본은 일본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이 노래를 일부러 트는 건 가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탁이에요 당신, 부드럽게 날 따라와줘요 마음과 발을 멈추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중략) 등 뒤의 구두 소리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어요 부탁이에요 당신 곧바로 나를 따라와줘요 사실은 겁이 많은 제 강한 척을”

달리기를 하다가 노래 듣고 울었다니까 진짜.

(4) <Sour&Sweet>, 뱀뱀

해외에서 한국인인걸 가장 강하게 의식하게 되는 때는 언제인가. 그건 아주 멀리에서 아무리 작은 소리라고 해도 씨발이라는 말이 들려올 때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그 단어만은 언제든, 어디서든, 혹은 소리내어하지 않아도 알아 들을 수 있다. 한국인 여러분 해외 나가서 말 좀 작게 하시고 해외 사람들에게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같은 말 좀 현지어로 하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삿포로 중심가에선 살짝 벗어난 ㅇ라는 카레집에 들어갔을 때 들은 노래이다.
마침 숙소 근처에 일본국내산 청바지를 파는 편집샵이 있었고 그 근처에 카레 명점이 있다고 해서(그렇다 또 카레를 먹으러 갔다.) 들어갔는데, 내가 한국인이란 걸 알고 그러셨는지 아니면 원래 듣고 계셨는지 모르겠는데 뱀뱀의 노래가 나왔다. 뒤이어서 하이키라든가 좀 일본인에겐 마이너한 (25년 현재 일본에서 아이돌의 왕은 트와이스이다. 롱리브더킹) 아이돌 음악이 나왔는데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나는 신상을 털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몸가짐을 정갈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어 가사가 나와서 한국 노래란건 알았지만 뱀뱀의 노래인건 전혀 몰랐다.

내가 시킨 건 스프카레가 아니라 제일 인기가 좋다는 햄버그 카레였는데 한국 아이돌 음악을 들으며 안절 부절 못하고 있다가 영혼 같은 김이 펄펄 올라오는 햄버그 카레를 보자 이것도 역시 접시까지 싹싹 긁어먹고 말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사장님은 재료를 사러 가셨다가 좀 나중에 오셨고 음악을 선곡한 건 가게에 있었던 다른 점원(여성분)이었던 것 같다. 사장님이 60살이 넘으신 것 같은데 뱀뱀 같은 해외 아티스트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면 그것도 나름 몹시 스타일리시한 일이다.

(5) <Mystical Magical>, Benson Boone

한창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이 22살의 젊은 싱어는. 솔직히 말하자면 탑건 매버릭에서 마일스 탤러가 분한 “루스터”랑 스타일링이 똑같아서 혹시 미국에는 저런 스타일을 선호하는 뭔가가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갔던 전 여자친구에게 탑건 매버릭은 친구의 아들을 어떻게 저렇게 해버리려는 중년 게이의 욕망에 대한 영화이고 이런 영화를 18세 이상 관람가로 만들지 않은 것은 영진위의 태업이라고 강하게 주장한 적이 있다. 그날 바로 차이지 않은 게 용하다. (나는 대학생 때 영화 욕을 하다가 여자친구에게 차인 적이 있다. 진짜로)

딴 얘기만 해서 죄송한데. 위에서 쓴 청바지 가게에서 들은 노래다. 요즘 너무 잘 나가는 싱어라서 뭐라고 설명하기도 좀 그런데. 저 곡이 수록된 앨범인 American Heart는 웃통을 벗고 성조기를 들고 있는 벤슨의 모습이 있어서 앨범 아트를 삭제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청바지를 58천엔 어치나 사는 바람에 삼성카드로부터 전화가 왔다. 본인이 사신게 맞냐고. 맞습니다…

(6) <Good luck, babe!>, Chappell roan

그렇게 오래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성장 중인 아티스트인게 도드하진다. 특히 2024년에 발매된 이 트랙은 대단하다. 80-90년대를 재현하겠다는 의지로 신디로퍼나 마돈나가(아니 사실 신디 로퍼만) 걸어온 길을 똑바로 따라가고 있는 채플 론은 스스로가 작곡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본인이 뭘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내가 잘 모르는 영국 어디 쯤 90년대 아티스트인 줄 알았다.

여행 중간, 그리고 지금까지도 허리가 아파서 이 날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뭐라도 먹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간 햄버거 가게에서 들은 노래이다. 구글맵에서 대충 찍어서 갔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가게의 운영은 사장 부부 분이 하고 있었고 가게 안은 동네 사람들의 흔적으로 가득한 로컬 음식점이었다. 사람들은 가게에 킵해놓은 보틀에 아주 웃기는 본인들의 폴라로이드를 붙여놓았고 대충대충 메세지를 적은 포스트잇. 그리고 구글맵의 리뷰에도 동네 사람들의 애정 어린 메세지가 잔뜩 있었다. 로컬 맛집을 찾아다니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그냥 관광객이면 관광객 답게 관광객 음식이나 먹으라고! 하며 심술을 부리고 있기는 하나 이런 로컬 사람들의 애정이 담긴 가게에 가게 되면 아주 잠시나봐 내가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뜨겁다 못해서 김이 펄펄 나는 치즈버거와 사장님이 직접 만들어서 좀 못생긴 피클을 먹고는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계산을 하니. 사장님이 건강 조심해요 라고 생면 부지인 나에게 인사를 해주셨다. 눈물이 많아지는 건 중년의 증거이다. 그렇지 않은가?

25년 6월의 글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