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별 맥락도 이유도 없이 그럴듯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친구 하나가 13년 간 탄 차를 팔던 날 나에게 지나가는 듯 그렇게 말했다. 정이 든 물건을 보낼 때면 항상 마음이 좋지 않은데, 정작 새 물건이 오게 되면 그 전에 쓰던 물건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이것은 코트를 버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서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나 하자. 누군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의 옷장을 보는 것이 좋다. 예전에는 책장을 보면 된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제는 책장을 집에 두지도 않는 그런 세대가 되었으니 그런 말을 하기도 조심스럽다.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 쉽게 힌트를 주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는 유튜브의 구독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옛날 사람이 되고 있는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해서 높은 확률로 크게 실망하게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옷장은 어떤가. 너무나 토니 타키타니 같은 이야기지만 쌓여있는 옷은 그 어떤 것보다 그 주인과 가깝다. 그 사람의 옷은 그 사람의 실루엣을 구성하고 어떤 사람에게 너무 익숙해진 옷은 얼룩처럼 배어들어 그 사람의 냄새와 색마저도 만들어낸다. 우리는 어린 시절 여러가지 동화를 통해 누군가의 옷차림이 그 사람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는데. 나는 어린시절이 지난 지금에서야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이 말한다, 누군가의 옷장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아주 많은 걸 얘기해 줄 수 있고 어떤 추억의 순간에 입고 있던 옷은 그 시절을 자체가 되기도 한다고.

며칠이나 걸려서 옷을 버렸는데도 아직 옷이 잔뜩 남았다. 다람쥐처럼 모아둔 티셔츠가 산더미 같다. 깃이 바랜 셔츠도 다 갖다버렸는데도 아직도 남은 셔츠가 있다. 오랫동안 안 입은 바지를 입었는데 의외로 잘 맞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버리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주머니에서 나온 영수증에는 2014년이라고 써있었다. 10년은 안 입은 바지면 버려도 되지 싶어서 미련을 주지 않고 버렸다. 회사원 치고 정장을 입질 않아 옷장에 정장이 너무 많다. 속이 상할 지경이다. 이건 한창 영국 패션에 빠져있을 때 산 코트, 코트, 니트, 니트 니트, 니트… 이건 출장용으로 산 검은 바지, 검은 바지 또 검은 바지. 바보 같다. 10년 전 쯤 나는 같은 디자인의 옷을 사는게 쑥스러웠는지 입지도 않을 핑크색 옷도 구색을 맞춰서 사두었다. 이런 것은 전부 버려여한다. 색을 다양하게 입어 보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기 전의 나는 사서 10년 간 입지 않을 옷을 다양하게도 샀다. 그리고 좀처럼 버리지도 못한다.

옷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물에도 감정을 이입하는 사람이라, 옷 한 벌을 버리면서도 그 옷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들이 가득하다. 이 옷을 살 때는 어떤 일이 있었고 이 옷을 입고는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너무나 많은 것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서 양 팔이 너덜너덜해진 파란색 후드 집업 자켓은 사촌형들이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그를 따라 미국을 자주 드나들던 이모가 사다준 것이다. 그 때도 굉장히 좋아하면서 옷을 받았지만 해외에 나갔을 때 부피가 큰 물건을 사와서 선물로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지금에서는 이모에게 감사해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물론 그 옷을 지금도 가지고 있고 때때로 입기 까지 하는걸 안다면 이모는 구질구질하다며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화들짝 놀라시겠지만 어쩌겠나. 그 옷은 내가 대학시절 제일 많이 입었던 두 벌의 파란색 후드티 중 하나다.

대학시절의 나는 파란색 후드티를 얼마나 많이 입었던지 그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죄 파란색 후드티를 입고 있다. 대학생 남자아이 특유의 어색하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프레임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면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문과대학 건물 7층의 학과 부실 앞의 창가에 서서 언제나처럼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쳐다보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찍힌 사진인데. 역시나 파란색 후드티를 입고 있으며 더러운 색의 염색 머리에 야간 알바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나머지 얼굴이 엉망인, 도저히 잘 찍혔다고 볼 수 없는 사진인데 그 사진의 나는 카메라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평면적으로 못생긴 옆얼굴에 한 번도 제대로 크게 뜬 적이 없는 눈. 턱은 우울하게 길다. 그렇게 멍청하고 우울한, 고집이 쎄서 세상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살아보려고 노력하던 나와 내 후드티의 시대이다.

두 벌의 후드티 중에 (내가 샀던) MLB의 후드티는 색이 바래 파란 색인지도 모르겠을 때 쯤 의류 수거함에 넣었다. 기분 상으로는 가연성 폐기물로 분류해서 깨끗하게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저런 옷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옷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내 어떤 시절과 작별하는 듯한 남자들 특유의 한심한 감상에 젖어들어서 버릴 수가 없었다.(의류수거함에 넣는건 왠지 감상을 줄여준다. 재활용의 가능성 때문인가보다)

그래, 당신의 말이 맞다. 과거의 내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현재의 나다. 내가 입었던 옷도 읽었던 책도 아무런 의미는 없다. 옷은 그냥 옷이기에 - 내가 죽고 나서 입고 갈 수도 없으니 옷에는 실용적인 가치 밖에 없는 것이 맞다. 다 늘어지고 찢어지고 오염되어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옷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거기에는 그저 내 미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변명을 해보자 미련만이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대학시절 사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너절한 옷 중에는 합성섬유로 만든 갈색 코트가 있다. 그냥 긴 자켓이라고 해야할까 하여튼 어떤 시대에도 유행한 적이 없을 것 같은 주머니가 많은 코트이다. 하루 종일 알바를 하던 시절, 주머니가 많고 싸고 튼튼할 것 같다는 순전히 실용적인 면만 보고 산 옷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옷의 많은 수가 같은 이유로 구매한 옷이다.)
나는 그걸 또다른 가죽이라도 된 양, 두 세개의 계절은 그 옷을 걸치고 다녔는데. 때때로 잠이 부족하면 그 코트를 뒤집어 쓰고 중앙도서관 2층 가운데 통로의 커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에서 자곤 했었다. 외풍이 심하게 불어 중간-기말고사 기간이 아닌 시기에는 텅텅 비어 있어 죄책감없이 엎드려서 잘 수 있었던 곳이었다. (내 친구 하나는 거기서 항상 무협지를 읽곤 했다. 도대체 왜냐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였을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날도 코트를 뒤집어 쓰고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옆에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는 기척이 들어 잠이 깨었다. 나는 엎드린 채로 코트를 뒤집어 쓴 - 잠에서 깬 자세 그대로 다시 잠을 자려고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옆의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읊고 있던 외국어로 된 시가 들려왔다. 시를 읊고 있는 것은 분명 몸이 작고 얼굴은 더 작은 얇고 가벼운 사람이었다. 나즈막한 목소리가 읊고 있던 외국어의 시는… 아니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그건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니까. 어쨌든 시를 읊고 있던 목소리는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건 그 때 까지 몇 번이나 다툼과 화해를 반복한 후배였다. 그 당시는 학기 말 쯤 하찮은 이유로 - 대단한 이유로 싸우는 일은 없었다 - 싸우고 서로 말을 하지 않았던 시기인데 나는 왜 얘가 여기서 과제를 하고 있지 -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후배와 나는 같은 과고. 나는 시를 외우는게 과제라고 생각했다- 하는 생각과 함께 혹시 내가 코라도 골고 있던 것이 아닌가가 걱정이 되어 자고 있던게 나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대로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하며 그 아이가 시를 읊는 것을 듣고 있었다.

후배의 친구가, 그렇다고 해도 그 쪽도 역시 같은 후배였지만 하여튼 소란스럽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인듯 했다. 후배의 친구는 야 가자, 라고 말하면서 시를 읊고 있던 후배에게 물었다.
엎드려있는 사람 누구야? 이거 ㅇㅇ선배- 내 얘기다-야? 시를 읊던 후배는 대답했다. 아니, 아까 얼굴 봤는데 같은 코트 입은 다른 사람이더라. 그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ㅇㅇ선배 그 코트 진짜 하나도 안 어울리고 좀 바보같지 않니?

후배는 일어나면서 자는 척 하고 있는 나를 슬쩍 발로 찼다. 그리고는 친구와 같이 작고 마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새가 날아가며 내는 듯한 웃음 소리를 내며 가버렸는데 그건 아마. 선배 용서해줄게 정도의 제스쳐가 아니었나 싶다.

그 후배는 그 뒤로 몇 년 간 나와 혐관에 가깝게 서로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싸우는 것은 쌍방이었지만 화해는 보통 후배가 먼저 청해왔다. 그리고는 또 평소처럼 싸우고 나서 그 시기가 길어지나 생각했을 때 쯤. 나에게는 말도 없이 영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뒤로 들은 소식은 없다. 몇 가지 소문은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단지 그 애가 그렇게 싫어하던 코트는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미련일 뿐이다. 모든 타자는 잔혹하다. 그들은 미련하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후회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인 것 같다. 모두가 삶의 무게를 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언젠가는 바닥으로 떨어질 무거운 돌을 굴려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은 나 뿐인 것 같다. 내 세계를 기억하는 것이 나 뿐이고 이 미련많은 세상을 만든 것 또한 나다.

나는 정리하다 만 책장을 본다. 책장에는 내 책들과 내 것이 아닌 책들이 꽂혀있다. 내 것이 아닌 쪽은 책을 둘 곳이 없는 사람을 위해 맡은 것이다. 소설과 교양서가 섞여있는 내 책들과 건축서적과 철학서가 섞여있는 내 것이 아닌 책들은…예전에는 비슷한 결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책을 200권 쯤 버리고 남아있는 책들을 보니 내 것이 아닌 것들은 쉽게 분리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달랐다.

책을 정리하기 위해 내 것이 아닌 책들을 여러개의 박스에 넣고 무게를 가늠해보니 물경 여자 어른 한 명의 몸무게 정도는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 책들의 주인은 자기 책들이 나에게 있다는게 별로 불편하지 않은 듯 하다. 아니 책이 나에게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다.

나는 이 책들을 언젠가는 버려야 한다. 책 사이에 끼어져 있는 연습장과 쓰다 만 노트들, 문장들과 사진. 누군가는 몽땅 내어버렸다고 생각할 그런 것들도 모두 함께. 그러나 내가 정말 그걸 할 수 있을 지는 다른 문제이다. 어른의 문제란 항상 그런 식이다. 해야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르다.

ㅁㅁ가 오빠 코트 바보 같대여. 라고 하길래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나도 알아 제기랄. 이라고 했을 것 같다.

그 때의 나라면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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