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The thing speaks for itself.” 영미법에서 말하는 과실추정의 법칙을 의미한다. 잘 모르는 분야지만 아는 선에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직접 증거가 없이도 피고의 과실이 있었다고 추론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피고의 완전한 통제와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사고여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 동안의 내 삶에 뭔가 달라진게 있다면 그걸 정리해서 말해보겠지만 그럴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어딘가 멈춰져 있는 작은 세계에서 똑같은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뭘 했었지, 뭘 읽었지, 어딜 갔었더라. 어떤 생각을 했었더라.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시간을 보냈고 어느새 또 가을이 왔다. 나는 가을바람이 부는 게 믿겨지지 않아서 매일 아침 출근을 반팔에 반바지로 하다가 얼어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몇 달 전에는 인턴 한 명이 우리 부서에 배치되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나이차이도 한참 나고 중간관리자인 내가 인턴의 멘토로 임명이 되었다. 부담스럽고 귀찮고 피곤했지만 재미있었다. 키가 크고 근육질에 선한 얼굴의 인턴은 한국의 부모님 열 명 중 아홉 명은 제발 이 청년이 우리 아들이었으면 하고 생각 할 정도로 잘 큰 청년이었다.
우리 회사는 나름 이름있는 기업인데도 우리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인턴청년과 대화를 하고 난 뒤면 나에게 인턴은 여긴 안 들어오겠다. (우리 회사 들어오기엔) 너무 인재잖아 안 그래?라고 물어보곤 했다. 나는 뭐라고 얘기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볼 때 마다 전혀 다른 대답을 했는데 그러게요. 아니에요 알고 보면 성격 이상해요. 중소기업 살린다고 생각하고 우리쪽에 오지 않을까요. 맞아요 인턴십 끝나면 우리 회사 쪽으로는 돌아보지도 말라고 했어요 등등 나도 내가 무슨 얘길 했는지 까먹을 정도로 많은 대답을 했고 또 그 대답들을 인턴 청년에게 전부 말해줬다. 인턴은 내가 또 무슨 대답을 했는지 재미있어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인턴청년에게 얘길 한다면 되도록 솔직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회사의 문제점이 뭔지 네가 하고 싶은 커리어에 대해서 보강할 점이 뭔지. 20대 남자로 사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하면 안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내 조언이 완벽한 정답은 아니겠지만 가능한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답을 말해주곤 했다. 대체로 잔소리였고 잔소리가 아닌 말들은 거의 농담이었다. 예를 들어서 20대 남자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농담이었다. 농담이 아닌 말은 이거 하나 정도였다. 남자는 다소 손해를 보면서 사는 편이 딱 좋다. 의외로 인턴청년은 그게 맞는 것 같다고 공감해주었다.
인턴십이 끝나고 인턴이 퇴근을 할 때. 나는 배웅을 가지 않았다. 전날 이미 너 없어지면 심심해지겠다 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그렇다. 그런 말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별인사다. 인턴청년은 인턴십 초기에 이미 본인이 하고 싶은 커리어에 대해서 나에게 얘길 한 적이 있다. 그 커리어를 생각하면 아마 그가 우리 회사에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 우리 회사 정식 입사 하면… 네, 정식 입사 하면요. 그 때부터는 성경에 나오는 당나귀처럼 부려먹을거니까 잘 생각해. 왜 하필 당나귀 비유를 그렇게 쓰시는거에요?
이 정도가 인턴과 내가 나눈 정식 입사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였다.
또 뭘 했더라. 이제 스마트폰과 전화번호가 생긴 조카에게 동물짤을 종종 보낸다. 조카는 드라마를 아주 좋아하고 동물들보다 자기가 귀엽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나와 언쟁이 가능할 정도로 말이 많이 늘었는데(그렇다 나는 초등학교3학년과 전력을 다해 언쟁을 하는 어른이다.) 지난번엔 본인이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 주인공에 대한 험담을 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울음을 터트리려다가 꾹 참고. 삼촌은 정말 남 험담을 잘하시는 분이군요 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솔직히 조카가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
동물짤을 보내면 조카는 항상 하나도 귀엽지 않다는 대답을 한다. 나는 조카가 무슨 대답을 하든지 말든지 귀여운 동물짤을 찾으면 이거 귀엽다 라면서 짤을 보낸다. 외동으로 자라난 초등학생의 고집은 정말 대단해서. 이상한 억지를 부리며 삼촌의 동물짤들은 별로라는 얘기를 한다. 지난번에 조카의 사진 라이브러리를 뒤져본 결과(공정을 다하기 위해 말해보자면 조카도 항상 내 사진 라이브러리를 뒤진다.) 내가 보낸 동물짤들을 모두 저장해둔 걸 확인하지 못했다면 나도 조카의 태도에 깜빡 속을 뻔했다. 어쩌다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아이로 자라게 되었을까. 곧 뱃속이 시꺼먼 청소년이 되겠지만 뭐 어떠랴 나는 점점 바보가 되어가고 이 아이는 점점 똑똑해질텐데. 내가 아직 이 아이를 놀릴 수 있을 때 온힘을 다해 놀리고 괴롭힐 생각이다.
회사의 후배 중 하나가 업무가 바뀌게 되면서 내가 하는 일과 관련성이 깊어졌는데.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은 쑥스러운지 요 몇 달 간 나에게 연락해오는 일이 잦았다. 생각해보니 매일매일 회사 메신져든 카톡이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락해오고 있었다. 내용은 대체로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 이게 맞는지 조언을 구하는 내용이고 때때로 본인의 분을 못 참고 투덜거리는 내용이었다. 내가 바빴던 나머지 대답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후배의 질문에 대해서는 빠지지 않고 대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누가 회사에서 도움을 청하면 가능한한 들어주려고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후배가 화난 앵무새처럼 투덜거리는게 제법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종일같이 회사일만 생각하다가 회사일이라고 해야할지 사적인 연락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는 연락을 받으면서 기분을 전환했던 것 같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외로운 나머지 누가 한없이 회사일에 가까운 얘기를 하는 것 마저도 반가웠던 것이다. 나는 어느덧 누군가에게 기대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달은 것은 후배와 매일 같이 연락을 해온지 2개월에서 3개월 쯤 되었던 때였다. 나는 사적인 연락과 사적이지 않은 연락의 구분을 못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서(이미 충분히 멍청했던 것 같지만) 때마침 본인이 하는 업무가 안정되어 가던 후배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자 그 뒤로 후배에게 먼저 연락이 오는 일이 없었다. 이미 후배에게 나의 효용은 없어진지 오래였던 것이다.
때때로 잘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잘 하고 있느냐고 연락을 하려다 왠지 그런 질문 자체가 눈치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뒤로 후배로부터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기에 대화도 나누지 않게 되었다. 사람과의 관계란. 사람의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한없이 가늘고 아주 쉽게 끊어진다.
그러고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 후배가 고집을 부려 일이 남았는데도 같이 퇴근을 했었더랬다. 그날의 석양은 여름답지 않게 아주 아름다워 나는 뜬금없이 후배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네가 지금 퇴근하자고 해서 저런 멋진 저녁노을을 볼 수 있었다고. 나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았을까.
얼마 전 혼자 퇴근을 하던 날에도 노을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그날 노을이 아름다웠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다.
이게 올해 봄 이후 가을까지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당신은 알 수 있을까. 지금 날씨에 반바지반팔로 출근하면 얼어죽는다는 것 말고 말이다.
26년 9월의 글이다.
'부재증명_(에세이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0909] Carnassial (0) | 2026.09.09 |
|---|---|
| [20260128] Konoyumegasametara (0) | 2026.01.28 |
| [20260121] 플라이트 투 덴마크 (0) | 2026.01.21 |
| [20251230] 우리는 너무 많이 (0) | 2025.12.30 |
| [20251204] nothing’s gonna change (0) | 2025.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