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미망이다. 라고 하셨다. 나는 스승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며 가만히 스승의 게송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장작에 불이 붙어 타오른다고 하여, 장작을 원망할 것인가 불을 원망할 것인가. 100년을 살지 못함을 분히 여길 것이라면 태어남을 분히 여기기도 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너는 파도에 쓸려 나가면서도 바다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히 여길 것인가. 겉 그림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를 내가 아까는 앉고 방금은 누웠으니 다음은 앉고 그 뒤엔 눕겠구나 하였다. 그러자 속 그림자가 말하기를 내가 아까는 앉고 방금은 누웠으니 다음은 서도록 해야겠다. 그렇다면 너에게 묻겠다 너는 일어서겠느냐 앉겠느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식은 찻잔에 찻물을 더 했다. 물이 섞여 찻잎이 빙그르르 돌았다. 스승과 나는 찻잎이 도는 것을 보았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렸다 오전의 까마귀는 길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스승은 더 이상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스승이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몇년에 걸친 가뭄을 겨우 나고 살림이 힘들어진 암자에 살던 승려 하나가 어찌어찌 풀칠이라도 하려 나무열매라도 남은 것이 없을까 산등성이를 헤매고 있었다. 한 때는 열 댓 명은 머물던 규모가 작지 않았던 암자는 어느새 동문인 두 승려 밖에 남지 않았고 서로 도와가며 공부를 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 해의 가뭄은 혹독하여 그것도 올해가 끝으로 보였다. 둘 중에 넉살이 더 좋은 동문은 저잣거리로 탁발을 나섰고 융통성이 없는 승려는 산을 뒤지고 다녔다.

가뭄은 사람이 사는 곳에도 가혹하였지만 산에도 가혹하였다. 연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겨우겨우 떨어진 도토리를 모았으나 수확이 좋진 않았다. 태반이 썪었고 알이 작은 것들만 겨우 모아 그릇에 두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평소에는 갈일이 없던 산 속 까지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볼이 홀쭉한 승려는 너무 멀리까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길거리로 탁발을 나간 동문에게 아무 것도 내어오지 못할 것이 더 두려웠다. 승려는 더…더 깊은 산 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승려 자신은 모르고 있었으나, 그는 이미 짐승들의 영역에 들어서 있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랑이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검은 짐승 하나가 풀 섶에서 몸을 일으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승려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몇 줌의 도토리가 모여있는 나무 그릇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짐승은 파란 안광으로 승려를, 그리고 그가 쥐고 있는 나무그릇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윽고 들짐승 특유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냈다. 승려는 오금이 저려와 주저 앉고 말았다. 나는 죽는구나 이렇게 잡아먹히는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연실 외우며 양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짐승은 승려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다만 그를 그대로 둔 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수풀을 지나 저 편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뒤를 돌아 승려를 돌아보더니 아주 낮은, 사람이 중얼거리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사라져버렸다. 승려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어째서 이 혹독한 가뭄에 호랑이인지 늑대인지 모를 짐승이 자기를 잡아먹지 않고 살려두었는지 알수가 없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겨우겨우 끌고 숫제 기어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암자까지 겨우 도망쳐온 승려는, 그제서야 겨우겨우 모은 도토리와 나무그릇을 놓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굶주림은 호랑이보다 무서웠다. 차마 동문이 탁발해온 낱알을 염치없이 얻어먹을 수가 없어서 승려는 다음날 그 알량한 도토리라도 되찾으려 호랑이를 만난 곳으로 돌아갔다. 산 속으로 산 속으로.
그러나 분명 호랑이를 만났던 그 자리로 가도 도토리는 커녕 나무그릇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승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방을 뒤졌다. 호랑이가 어제도 나를 해치지 않았으니 오늘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믿으며 연신 불호를 외웠다. 그러다 짐승을 만났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석굴 하나를 발견하였다.

석굴은. 산등성이 수풀을 넘어 비탈길을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석벽에 있었다. 입구가 어른 하나가 겨우 들어갈만한 작았으나. 기이하게도 누군가가 오래전에 서툰 솜씨로 만든듯한 석불하나가 -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작은 바위로 알 것 같은 모습으로 - 놓여있었다. 승려는 호기심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산 속 깊은 곳에 수도승이 거처로 쓸 듯한 작은 암굴이 있을까. 이렇게 입구가 좁으니 어제의 커다란 호랑이가 쫓아오면 도망칠 곳으로 쓸만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암굴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석굴 안은 아주 작은 방 하나 정도의 크기였다. 역시나 누군가가 - 수도승일것이다 - 생활을 하였던 곳인지 오래된 세간이 놓여있었고 한 쪽엔 깎다가 말았는지 아니면 그걸로 끝이었는지 나무불상들이 여섯개 놓여있었고. 벽 한 쪽에는 돌로 된 앉은뱅이 탁상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그 위에는 승려가 어제 잃어버렸던 나무그릇이 놓여있었다. 쌀이 반쯤 차있는 채로.

승려는 짐승을 만났을 때 보다도 더 크게 놀랐다. 이 가뭄에 어디에서 쌀이 나서 여기 버려진 암굴에 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분명 이 나무그릇은 내가 어제 잃어버린 것인데 누가 이걸 여기에 가져다 두었단 말인가. 승려는 쌀이 담긴 그릇을 덜덜 떨며 만졌다. 이 쌀이 있다면 탁발을 하러 간 동문도 나도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이 쌀이 누군가 - 이 암굴에서 살고 있는 - 의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고민은 길었지만 승려는 결국 나무그릇에 든 쌀을 들고 도망치듯 암자로 돌아갔다.

탁발을 끝내고 돌아온 승려의 동문은, 승려가 끓여내온 쌀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암자의 사정을 뻔히 아는 그로서는 이런 하얀 쌀이 나올 곳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문은 분명 이 쌀이 떳떳하지 못한 곳에서 나온 것이라고 직감하였으나. 밥에는 죄가 없었다. 두 승려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너무 오랜만의 밥이었다.

배를 채운 동문은 승려에게 그제서야 슬쩍 물었다. 자네 이 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승려는 처음에는 말해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재촉에 승려는 결국 산 속에서 호랑이 - 짐승 - 를 만난 것과 석굴을 하나 발견 한 것. 그리고 거기에 쌀이 있었다는 것을 실토하고 말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동문은 승려를 탓할 수가 없어서 그런일이 있었나 그랬나. 하고 연신 소용도 없는 탄성을 질렀다.

다음날 동문은 승려를 재촉하여 쌀이 있었던 석굴로 같이 가보기로 하였다. 승려는 쌀을 훔쳤다는 죄책감에 가고 싶지 않았으나. 동문은 내심 거기에 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 승려는 산 속을 다시 들어가 비탈길 언저리에 숨겨진 석굴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두 승려는 돌 탁상 위에 또 쌀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보게 자네 내가 뭐라고 했는가. 동문은 탄성을 질렀다. 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승려는 당황하였다. 어제 분명 그릇에 있는 쌀을 다 털어서 가져오지 않았는가. 여기에 있는 쌀은 뭐란 말인가. 멍하니 있던 승려는 동문의 재촉에 정신을 차렸다. 둘은 구멍투성이의 가사를 소중히 오므려 쌀을 주워담았다. 쌀은 딱 두 사람이 하루를 먹을만한 양이었다.

그 쌀로 만든 밥을 먹던 동문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라고 불리웠지 않은가. 이 쌀은 분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우리를 위해 부처님이 내리신 쌀일 것이야. 그런가. 승려는 이틀 연속으로 벌어진 행운을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부처님이 내리신 쌀이라고 하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이 가뭄에도 불구하고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문은 탁발을 다니느라 자주 저자로 내려갔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오직 용맹하게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내일도 석굴에 가보지 않겠는가? 동문이 권하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나 그 다음날에도 또 쌀이 있었다. 나무그릇을 챙겨온 두 승려는 하나에는 쌓여있는 쌀을 담았고 다른 하나는 쌀이 있던 돌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상하게도 또 쌀이 있을거란 확신히 있었던 것이다. 승려는 석굴 안 나무 불상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동문은 석굴 앞 석불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둘은 절을 하고 또 절을 하였다. 이 후 둘은 매일매일 찾아왔지만. 쌀은 매일매일 쌓여있었다. 두 승려는 매일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탁발을 가는 일도 도토리를 줏으러 가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저자에는 결국 암자의 승려 둘이 굶어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매번 탁발을 돌며 이삭 부스러기를 받아가던 승려가 얼굴을 비추지 않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를 불쌍하게 생각한건지 아니면 주인이 없어진 암자를 차지하러 한 건지 떠돌이 승려 하나가 산 속의 암자를 찾아온다. 물론 두 동문 승려는 굶어죽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가뭄 중에 그렇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훤한 신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떠돌이 승려는 깜짝놀랐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저자에 소문이 좋지 아니하여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라고 말하자 어허 그렇습니다. 라고 두 승려는 미심쩍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두 승려는 아침에 받아온 두 사람 분의 쌀을 나눠 세 사람 분의 쌀죽을 만들어 떠돌이 승려와 나눠 먹었다. 양은 적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쌀이라 떠돌이 승려는 허겁지겁 자기 몫을 먹고 곧 암자를 떠났다. 두 분이 무사하다는 것을 전하겠습니다, 라며. 그리고 다음날 평소처럼 암굴로 가 쌀을 받아온 두 승려는 쌀이 두 사람 분보다 더 많은 세 사람 분의 쌀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로다. 떠나기는 하였으나 어제 세 사람이 암자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세 사람 분의 쌀을 주셨구나. 한 승려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승려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어제 쌀죽을 나눠준 떠돌이 승려의 눈치가 보통이 아닌 걸로 보였소. 분명 우리가 굶어죽었으면 암자를 차지할 생각으로 온 듯 한데… 다른 승려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멀쩡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되는 것 아니겠소. 아니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것이 문제이죠. 심지어 쌀죽까지 나눠주었으니 무슨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소? 이번 한 번만 찾아오는 것이 아닐 것 같아서 불안하오. 두 승려는 생각했다. 이것이 부처님의 은혜라면 몇 명의 승려 정도야 더 먹이는 것이 일은 아니지만, 만약에 이것이 정해져 있는거라면? 우리도 쌀을 못 먹게 되는 것이 아닌가? 둘은 불안하게 서로를 쳐다본다.

그 뒤로 지난번의 떠돌이 승려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두명이, 때로는 세명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두 승려는 불안해져 쌀을 남겨보려고도 하였으나. 여러번 시도한 결과 암자에 쌀이 남아있으면 그만큼 다음날의 쌀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손님이 찾아왔을때에도 쌀을 전부 쓰지 않으면 암자의 두 승려도 굶게 된다. 차라리 다음날 그들이 돌아갔을 때 사람 수만큼 많아진 쌀을 써서 배불리 먹는 것이 낫겠다. 그런 마음으로 암자의 두 승려는 대접을 소홀히하지 않았다.

그러나 떠돌이 승려들은 어느날부터인가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핑계를 댔지만 결국은 식사가 나오니 이 곳에 있겠다 이거였다. 겨울만 이곳에서 보내겠다는 자도 있었으나 자기 집처럼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대로 머무리는 자도 있었다. 그런 떠돌이들이 하나씩 늘어나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그 수가 도합 다섯. 두 승려는 그 숫자에 돌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까지 합치면 일곱 명의 승려가 석굴의 쌀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굴 안에 있는 나무 불상이 여섯 위, 돌 불상이 한 위 이 또한 일곱이라는 사실을 그 때 두 승련는 눈치 채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받아오는 쌀도 자연스럽게 일곱사람 분으로 늘었지만 어딜 봐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두 그릇은 될 듯한 쌀을 매일매일 어디선가 받아오니 누가 이걸 모르는척 하겠는가. 산속으로 사라지는 두 승려를 몰래 따라오려고 하는 승려까지 있었다. 비밀이 지켜지긴 어렵다. 두 승려는 그런 생각을 하였고 결국 결심했다.

두 승려는 다른 다섯 명의 승려를 암자의 가장 큰 방에 모았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하였다.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도를 정진하기 위해 매일매일 관세음보살에서 온 힘을 다해 기도를 드리던 날 밤. 산신의 사자가 암자에 찾아온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호랑이는 사람처럼 말을 하며 두 승려에게 너희의 정성이 갸륵하여 이 가뭄을 이겨낼 방도를 하나 내었으니 나를 따라오라, 라고 하였고 두 승려는 휘엉청 밝은 달 아래 호랑이를 따라 걸었고. 신비한 석굴을 하나 발견하였다고. 이름하여 쌀이 나오는 굴이라 하여 미혈굴.

다섯명의 승려들은 얼이 빠진 표정을 하였다. 쌀이 나오는 굴이라니 그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두 명의 승려는 자못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호랑이는 말하였다. 이 쌀은 부처님의 영험하신 은혜를 받아 산신의 허락으로 너에게 주는 것이니, 오직 불도에 그 뜻이 있고 용맹정진하기 위한 자들만을 위한 쌀이다. 삿된 자들에게는 단 한 톨의 쌀도 허락해서는 안되며 너희에게 암자에 있는 사람수만큼의 쌀을 줄터이니 너희는 그것을 먹고 불도에 정진하라. 다만 이 굴의 위치는 어떤 자에게도 비밀이며 의문을 표해서는 아니된다.

두 명의 승려는 그리고 이렇게 말을 끝마쳤다. 비밀을 지키지 않는 자나 미혈굴의 위치를 캐려고 하는 자는 내가 직접 와서 벌할 것이다. 짐짓 엄숙한 그 끝맺음을 듣고 다섯 명의 승려는 그것이 말이 되느냐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두 승려가 어딘가에서 쌀을 가지고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들 모두는 그 둘이 가져오는 쌀로 연명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다섯 명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복된 일이요 복된 일이요. 부처님의 신령스러운 영험으로 벌어진 일이니 우리는 더욱 감사히 여기고 불도를 정진하여야 하겠소. 그러자 다른 승려들이 모두 입을 모아서 동의를 표했다. 그 뒤로 다른 승려들은 모두 두 승려가 어디서 쌀을 가지고 오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지 아니하였고 일곱 명의 승려는 길고 긴 가뭄을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날 쌀의 양이 줄어들기 전까지는.

쌀이 조금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칠분의 일이 줄어들어. 평소의 칠분의 육이 되었다. 밥을 하고 난 뒤에는 똑같이 칠등분을 하였기 때문에 모두의 밥은 정확하게 칠분의 일이 줄어들어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변화에 대해서 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두 승려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한 승려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뻔뻔하게 빌붙어있는 다섯 승려들을 내보내기 위해서 양을 줄인 것이 아닐까. 칠분의 일이 줄어든 정도로야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다섯 승려들은 빌붙어 사는 몸. 눈치를 채게 되면 불편해져서 암자를 나갈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좋은 수라고 생각하였다.

다섯 승려 중 누군가는 어떤 놈인지 모르겠으나 쌀을 훔쳤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암자에 있는 사람수와 쌀의 양을 고려하여 미혈굴에서 쌀이 나온다고 하나 만약 쌀을 훔쳐서 암자 밖에 숨겨둔다면? 일곱명이 아주 살짝만 굶주리겠지만 한 사람 분의 쌀은 확실히 확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쌀을 훔친 놈은 미혈굴의 위치를 아는 저 두 명의 중놈 중 하나의 짓이다.

일곱명의 승려는 모두 생각하였다. 지금은 일단 참는다. 아직까지는 무엇을 할만한 때가 아니다. 그리고 서로 밥의 양이 줄어든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쌀이 더욱 줄어드는데는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칠분의 일이 더 줄어들어. 원래의 칠분의 오가 되었다. 밥을 하게 되니 양이 궁색하여 일곱의 승려가 모여서 식사를 하는 시간은 짧아졌다. 애초에 대화를 나누고 뭐고 할 것도 아니었으나 최소한 안부나 감사 인사 정도는 있었으나 밥이 줄어드니 다들 입에 밥을 넣기에 바빠진 것이다.

두 승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요새 묘하게 쌀의 양이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이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수행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되오. 우리가 더욱 열심히 정진하면 다시 예전처럼 쌀의 양이 늘어날 것이니 힘을 내십시다. 한 승려가 그의 말에 동의하며 오늘부터 관세음보살님께 맹렬히 기도를 드리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확신을 가졌다. 쌀을 빼돌리고 있는게 네놈이구나.
다른 승려는 또 생각하였다. 이런 식으로 쌀의 양을 줄이면 우리 다섯 중 하나라도 암자에서 도망치칠거라고 생각한게로구나. 참 아둔하고 어리석은 놈들이구나. 우리 다섯은 단 한 명도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미혈굴의 위치를 알게 되기만 하면. 너희 두놈들은 우리에게 암자에서 내쫓지 말아달라고 빌어야 할 것이다.

칠분의 사. 그리고 칠분의 삼. 쌀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칠분의 이.
처음 두 승려가 가지고 왔었던 쌀과 완전히 같은 양이 되었다. 밥을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적은 양이라서 이제는 쌀죽을 쑤어서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이제는 식사 공양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너무나 적은 양이라서 소중히 먹느라 그런 것이다.

다섯 명의 승려 중 하나는 생각했다. 저 두 놈들이 정말 철면피 같구나 우리 다섯명 분의 쌀을 꼬박꼬박 가져와 암자 밖 어딘가에 숨겼겠지. 중놈 주제에 욕심이 많아서 저런 짓을 하는구나.
다섯 명의 승려 중 또 다른 하나는 생각했다. 처음엔 저 두 승려가 수상했으나 이제는 이상하다. 우리를 내쫓으려고 한다면 이렇게 몇주 동안이나 쌀죽을 먹으면서 고생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 다섯 중 하나가 미혈굴의 위치를 알아내어…다섯명 분의 쌀을 빼돌리고 두 사람 분의 쌀만 남긴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 다섯명이 포기하고 이 암자를 떠나면 저 두 승려를 제압하고 미혈굴의 쌀을 독차지할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나를 제외한…최소한 세명이 여기에 작당을 했다는 얘기이다.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두 명의 승려 중 하나는 식사 공양이 끝나고 몰래 다섯 명의 승려 중 몇 명이 눈 빛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마음에 걸려서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가보니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다섯 승려를 볼 수 있었다. 옳커니 저 염치 없는 자들이 드디어 이 암자를 떠날 생각을 하는구나. 애초에 둘이 먹던 쌀을 일곱이 나눠먹으니 이렇게 배가 고픈거지. 어째서 쌀이 두 사람 분으로 줄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섯이 떠나면 둘이 먹기에는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한 승려는 며칠이나 쌀죽만 먹어 배가 고픈 중에서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인기척에 잠에서 깬 승려는 쉬잇…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뭔가가 휘둘러지는 소리와 머리에 뭔가가 와서 부딪히는 걸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승려는 동앗줄에 묶여있엇고. 다섯 승려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떤이는 몽둥이를, 어떤 이는 날붙이를 들었다. 다섯 승려는 먹지 못하여 바싹 말라 눈만 번뜩이고 있어 분위기가 흉흉하였다. 쉽게 일이 끝나지 않을 성 싶었다. 과연…그들이 며칠 전부터 몰래 나누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는가. 두 승려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몹시 후회했다. 다섯 승려는 일단 그들을 묶었으나 무엇을 할지는 명확하게 정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두 승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 밤 중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이오.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하니 동앗줄을 풀고 서로 대화로 풀어보지 않겠소? 다른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 같은 불제자가 아니오 몇 달 간 같은 암자에서 생활하였는데 대화로 풀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소? 그러나 다섯 승려는 그들을 풀어줄 생각은 없는 듯 하였다.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대화를 하더니 그 중 하나가 두 승려에게 물었다. 미혈굴, 그 위치가 어디오?

두 승려 중 하나가 나섰다. 지난번에 우리가 했던 말을 못 들었소. 미혈굴을 위치를 발설하면 산주인이 와서 필히 물어죽인다고 말하였소. 다섯 승려 중 하나가 피식 웃더니 몽둥이를 들어 바닥을 내리치고 말하였다. 헛소리는 그만하지 그 산주인은 불도를 정진하는 동도들끼리 쌀을 나눠먹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너희 두 놈 중 하나가 농간을 부려서 쌀의 양을 줄여서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 말을 듣자 두 승려 중 하나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동문이 실제로 그렇게 해서 다섯 승려를 내쫓으려고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승려는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농간을 부리다니 오히려 농간을 부리는 것은 당신들 중 하나가 아니오. 우리가 항상 날이 밝은 다음 쌀을 가지러 간다는 것을 알고 앞 질러서 쌀을 훔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우리 둘은 오직 동도들의 편의를 위하여 처음부터 숨김없이 쌀을 나눴는데 이제서 당신들을 내쫓으려고 쌀을 숨겼다니 그것이 말이 된다는 소리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뒤에 서서 듣고 있던 한 승려가 분을 못 이겨 뛰쳐나오더니 몽둥이를 휘둘렀다. 네 이놈 말이라고 잘하는구나 네놈들이 알량한 쌀을 나눠주면서 얼마나 우리를 내려다 봤는지 모를지 아느냐. 분통이 터져서 참을수가 없구나. 몽둥이를 휘두른 승려는 씩씩대며 분을 참을 수가 없는지 발을 구르고 성을 내다 문득 주변의 시선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무슨일인가. 그가 휘두른 몽둥이에 묶여있던 승려 하나의 머리가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경악하는 승려도 있었고 얼굴이 파래진 승려도 있었다. 묶여있던 승려는 맞아서 쓰러진 승려의 곁으로 기어가 자네 괜찮은가 정신을 차리게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덧없이도 쓰러진 승려는 눈이 반쯤 뒤집어져 살아날 방도는 없어 보였다…맞은 위치가 안 좋은 탓이었으리라.

다섯 승려 중 하나가 다시 나섰다. 쓰러진 자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너 까지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대범하고 침착하여 승려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는 묶여있던 승려를 억지로 일으켜 쓰러진 승려에게서 떨어트리고는 말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미혈굴로 안내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네 명이 자네를 어떻게 할지 나도 말릴 수가 없다.

한 명의 묶인 승려와 다섯 명의 무기를 든 승려들은 산길을 걸어갔다. 아직 한 밤 중이라 걸음을 걷기에 불편하다. 몽둥이 하나에 묻은 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 한 명의 묶인 승려는 반쯤 실성하여 걸음은 걷지만 헛소리를 중얼 거린다. 늙은 수행승이 숨긴 쌀이 어떻고. 석굴 구멍이 어떻고 하는 헛소리이다.
다섯 명의 승려는 몹시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원래 암자에 살던 두 명의 승려가 그냥 불쌍한 멍청이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쌀을 빼돌린건 누구인가. 그들 다섯 명 중 하나가 틀림없다.
그 중에 하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아까 대범하게 나서서 큰 소리를 치던 놈이 쌀을 빼돌려서 숨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 놈이 죽었으니 숨겨둔 쌀을 찾는 건 다 글른 일이 되었다. 산 어딘가에 숨겼겠지만 찾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승려는 피가 묻은 몽둥이를 보면서 묘하게 흥분하여 자신이 한 일을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놈은 너무 건방졌어. 그리고 분명 저 놈도 건방지겠지. 아니 우리 다섯 명 중에서도 건방진 놈이 있지. 그건 바로 저놈이다. 하고 침착한 승려의 뒷통수를 노려본다.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저 놈에게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버르장머리를 가르칠 기회를 노릴때 풀 숲 저 멀리.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주인이다. 침착한 승려가 중얼거리면서 허리에 찬 날 붙이를 꺼내서 양손에 꼭 쥐었다. 호랑이라면 순식간에 그들 말라깽이 중들 여섯 명 정도야 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호랑이라면 여섯이나 되는 숫자 그리고 쇠붙이까지 가지고 있는 무리를 습격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한 명 정도는 물려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내가 될 순 없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침착한 승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묶인 승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풀 숲으로 달려나갔다. 산주인님 산주인님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호랑이는 분명 아닌 어떤 짐승의 포효가 밤하늘로 울려퍼졌다.

도망가버린 묶인 승려를 쫓을 것인지. 아니면 풀 숲에서 달려나오는 저 검은 짐승을 대비할 것인지. 그 잠시의 망설임 사이. 다섯명의 승려가 발톱에 갈가리 찢기고 갈려 나갔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에 도착하였다. 짐승은 여기까진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에 미쳐서 반쯤 실성한 마음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산길을 무리하여 걸었다. 발도 손도 피투성이이다. 얼굴도 피투성이이다. 누가 흘린 피인지는 모른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로 기듯이 들어가 그리고…평소에 쌀이 놓여있던 돌걸상 앞으로 기듯이 가 벽에 입을 가까이 가져간다. 벽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이 있다.

미혈굴에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모를 구멍이다. 묶인 승려는 미혈굴의 그 구멍에 입을 갖다대고 중얼거린다. 오늘은 오늘은 한 명이오. 나 한 명.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그러나 구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묶인 승려는 숫제 애걸 하면서 말한다 나 혼자란 말이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당신이 신불의 사도라면 충분히 나를 살리고도 남지 않소. 그러나 구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묶인 승려는 굴 안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길고 긴 꼬챙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언제부터 이런것이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은 지워졌다.
그는 꼬챙이를 들고는 자못 분개하여 말했다. 나를 살려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 쪽에도 생각은 있다. 그리고는 꼬챙이를 들어서 벽의 구멍을 향해 힘껏 찔렀다.

다섯 명의 승려 중에 도망 친 것은 하나 뿐이었다. 손가락을 세개나 잃었다. 발톱에 당하여 어깨죽지에서는 피가 흘렸다. 하지만 짐승이 다른 승려들을 물어뜯느라 정신이 팔려있을때 그는 묶인 승려가 도망친 곳을 향해 달려갔다. 미혈굴 까지는 짐승이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거 말고는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상태로는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다. 과연. 미혈굴은 가까이 가지 않으면 좀처럼 알 수 없는 석벽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상처입은 승려는 미혈굴로 걸어들어갔다. 미혈굴에는 묶인 승려가 있었다. 그는 꼬챙이를 들고 실성한 채로 주저앉아있었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경련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제 정신을 다시 차릴 것 같지 않았다. 다친 승려는 미혈굴을 자세히 보았는데 한 쪽 구석에는 오래전 입적한 승려들의 사체처럼 보이는 것들이 여섯구 놓여있었다. 그리고 항상 쌀이 놓여있다는 돌로 된 걸상에는 쌀이 아니라 피가 흘려있었는데. 잘 보아하니 피는 묶인 승려가 흘린 것이 아니라 벽에 있는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다친 승려는 직감하였다 미혈굴에서 쌀이 나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멀리 짐승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와 승려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스승께서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하시고는. 불편한 손이 아니라 온전한 손으로 찻잔을 잡아 찻물을 천천히 삼키셨다. 완전히 식어있는 찻물을 삼키는 소리는 컸다. 나도 스승도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은 해가 지고 있는 산너머를 살피시고는 이윽고 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나에게 물었다. 무엇을 여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나의 기색을 살피더니 다시 물었다. 너는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었느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스승에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산을 내려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24년 8월의 글이다.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한가지 이야기의 두가지 측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자춘전(杜子春傳)은 당나라 때 이복언(李復言)이 편찬한 <속현괴록(續玄怪錄)>의 명나라 시대 판본에 실려있다. 그 원본은 대당서역기에 실려있는 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자춘 전의 원본에 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선 원본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북주, 수 연간의 사람인 두자춘은 본디 세가의 자식으로 부유하게 자랐지만 가문의 재산을 탕진하여 빈곤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어느날 정말 우연히 노인 하나를 마주쳤는데 노인은 자춘을 어떻게 여겼는지 갑자기 그를 도와주며 친척도 주지 않을 큰 돈을 무상으로 그에게 줍니다. 자춘은 그에게 크게 감사하며 앞으로 착실하게 살리라 다짐하였지만 그것은 몇년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금세 재산을 탕진하였고 상심해있던 그에게 노인이 또 다시 나타나 아까보다 더 큰 재산을 내려주며 이 재산으로 잘 살아보라고 말합니다. 자춘 또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해하지만 첫번째보다 더 큰 재산도 몇년이 걸리지 않아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하고 상심해있던 자춘의 앞에 노인은 다시 한 번 나타나 그에게 이번엔 더 큰 재산을 줄텐데 이 재산을 가지고도 탕진하면 너는 평생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을 것이야.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두자춘전은 실수를 반복하는 주인공과 그를 도와주는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몹시 매력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읽었을 때 두자춘이 어떤 실패를 하고 어떤 반성을 하게 될까 기대하게 되는 법인데...의외로 두자춘은 여기서 실패하지 않는다.
 
몇 번의 재산의 탕진 끝에 교훈을 얻은 자춘은, 이번에 얻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재산을 자선을 위해 사용한다. 전화에 상처입은 지방을 재건하고 사람들을 구한다. 몇년 후에 자선을 행하고 있는 자춘을 만난 노인은. 그의 삶에 기뻐하면서 이제 살만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자춘은 노인을 향해 감사하면서 이제 속세의 삶은 누릴대로 누렸기 때문에 노인과 같은 신선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과연 노인은 신선이 맞았고 자춘을 자신이 살고 있는 화산에 데려가 신비로운 선술-연단술-을 행하는데 자춘에게 신신당부 하기를. 절대 입을 열어 말하지 말라. 그렇다면 너는 어떠한 해도 입지 않고 끝까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 나는 선단을 얻으며 너는 나와 같은 신선이 되리라. 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자춘은...생각도 해본 적 없는 신비로운 환상을 보게됩니다...
 
그러니까 두자춘의 세번의 기회는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길고 긴 프롤로그다. 그리고 내가 이 시점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일본의 소설가 아쿠다카와 류노스케가 지은 두자춘 전이다.
1920년 아쿠다카와는 잡지 <붉은 새>에 두자춘전을 발표하는데. 동화를 염두에 둔 구성과 그 내용으로 원래의 두자춘전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어떤 이야기냐면 앞부분은 완전히 같다. 
 
두자춘은 명가의 자식이나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아 요행만을 노리는데 어느날 신비로운 노인을 만나서 그에게 세 번의 기회를 얻고. 그에게 감사해하지만 자신도 신선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노인은 그를 제자로 삼기로 하고 아미산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아미산에 도착하자 노인은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한다면서. 대신 내가 없는 동안 너는 온갖 유혹과 사술에 시달릴 수 있으니 내가 없는 동안 너는 어떠한 일이 닥쳐도 한 마디도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받습니다.
 
노인을 기다리던 자춘이 본 것은 과연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그를 위협하더니 그 뒤에는 짐승들이 그를 위협합니다. 온갖 자연현상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금빛 옷을 입은 장군이 그에게 너는 누구냐 왜 여기에 있느냐고 위협을 합니다. 그래도 말을 하지 않자 수천 수만의 군병들이 그를 위협합니다. 입을 벌리라! 말하라 네가 누군지! 왜 여기로 왔는지! 하지만 자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금빛 옷을 입은 장군은 자춘의 목을 한 칼에 날려버리고 맙니다.
 
자춘은 지옥에 끌려갑니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 자춘은 저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자로서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온갖 지옥을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받지만 자춘은 노인의 당부를 생각하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기가 찬 염라대왕은, 한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려 축생도에 떨어져 있던 자춘의 죽은 부모를 데려옵니다. 자춘의 부모는 둘 다 말이 되어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었고 자춘을 알아본 듯 합니다. 지옥의 졸개들은 오직 자춘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자춘의 부모를 가혹하게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자춘은 부모가 고통을 받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며 몇번이나 입을 열까 하다가도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참습니다. 이윽고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우리는 괜찮다. 네가 행복한게 제일이니 네가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면 그대로 다물고 있거라. 라는 어머니의 말이 들렸습니다. 자춘은 참지 못하고 달려가 어머니를 껴안고 어머니라고 부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춘이 깨어난 곳은 처음 노인을 만난 낙양이었습니다. 노인은 어떠냐 이래도 신선이 될 생각이 들더냐 라고 묻습니다. 자춘은 부정합니다. 노인은 오히려 웃으며 네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자 이제 신선도 부자도 되지 못한 너는 무엇이 될 것이냐 라고 묻고. 자춘은 사람답게 정직하게 살겠다고 대답합니다.
...
 
이것이 아쿠다카와 두자춘전. 그의 나이 28세에 지은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원전의 두자춘전은 어떻게 될까? 아쿠다카와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두자춘이 선술에 걸려 환상을 보는 것은 완전히 같다...
 
입을 다물고 있는 자춘을 금빛 옷을 입은 신장은 위협을 가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신장은 어디선가 자춘의 아내를 잡아와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차마 여기에 쓰지 못할 만큼 고문은 가혹합니다. 아내는 자춘에게 빌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춘은 처음과 같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입니다. 아내는 자춘에게 원망의 말을 남기고 죽고. 신장은 지독한 놈이라고 혀를 차더니 자춘의 목을 한 칼에 날려버립니다.
자춘은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곳에서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아 온갖 지옥을 도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산, 화탕, 한빙, 검수, 발설...모든 지옥을 한 번씩 돌고도 자춘은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염라대왕은 격노하여 이 자는 심기가 음한자이니 다음 생에서 여자로 태어나리라 하고 그를 인간계로 쫓아냅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산동성 선부현 왕근의 집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한대로 여자아이로 태어난 두자춘은 어릴때 부터 아무소리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통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벙어리 아이가 태어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벙어리인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미모를 가진 규수로 자라났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이기에 구혼자가 끊이지 않았으나. 아버지 왕근은 그녀가 벙어리라는 이유로 아무 곳에도 시집보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노규라는 진사가 왕씨집 딸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끈질기게 구애를 하여 결국 혼담이 성사되었고. 왕씨집 딸이 벙어리임에도 불구하고 금슬이 매우 좋았습니다. 곧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도 말 한마디 없고 표정도 없는 왕씨에게 노규는 점점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두살이 되던 해 일이 터지고 맙니다. 너는 남편을 공경하지 않느냐, 너는 내 글 솜씨에 존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느냐 하며 화를 내던 노규는...노규는 겨우 두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의 다리를 잡아 돌 위에 집어 던집니다. 원전은 아이의 머리가 깨지고 피가 다섯 걸음을 걸 정도로 흘러나왔다고 말합니다. 왕씨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릅니다.
 
왕씨, 아니 자춘이 깨어나보니 선술은 실패하였고 자춘의 눈 앞에 노인이 서있었습니다. 노인은 그가 칠정인 희노애구오욕(喜怒哀懼惡欲)을 모두 잊었으나. 마지막에 하나 사랑(愛)을 잊지 못하여 선단을 만드는 것도. 신선이 되는 것도 실패하였다며 그를 크게 탓하고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고 두자춘을 남긴 채 떠나갑니다.
 
어떤가? 두자춘전의 원전은 훨씬 잔혹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고 어느쪽 이야기가 더 아름답고 사리에 맞느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아홉은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을 고를 것이다. 
그렇다면 아쿠다카와가 어째서 두자춘전을 이렇게 편집-아니 재창작이다-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텐데 대답은 싱겁다. 애초에 이 작품을 발표한 붉은 새 부터가 어린이를 위한 아동문예집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난세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잔혹한 이야기가 반 이상이다. 거기에 어떠한 신비로운 전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전개와 결말을 바꾸지 않았다면 어린이 잡지에는 실릴 수 없을텐데 도대체 왜 굳이 이야기를 선택해서 각색했는지가 의문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추측 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아쿠다카와의 작품 중에 특별히 뛰어난 작품도 인기 있는 작품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도 아니다.
 
다만 왜 결말을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두자춘이 새 사람으로 바뀌는지에 대해서는 추측 할 수 있는데 그건 아쿠다카와가 어릴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어머니의 발광으로 인해서 외삼촌의 집에서 양자로 키워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양부모를 진짜 부모로 여기고 살아갔다고 하지만. 그가 11살 때 죽은 친 어머니에게서 광기를 물려받은게 아닐까 스스로 평생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가 한살이 되기 전에 큰 누나의 때 어린 죽음으로 광기가 발현된 어머니...그런 그에게 어린 아들이 살해당해 비명을 지르는 젊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1920년 당시 젊은 나이(겨우 스물 여덟살이었다)인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던게 아닐까. 1919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된 그는 자신과 똑같은 젊은이인 두자춘이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는 결말에서 모종의 구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결말을 알고 있다.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은 자춘이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에서 끝나지만. 1921년 아쿠다카와는 신경쇠약을 앓기 시작한다. 위궤양(위궤양은 그의 스승 나쓰메 소세키의 직접적인 사인이기도 했다). 불면증. 매형의 자살로 인한 빚. 그는 겨우 1927년에 자살한다. 두자춘이 새로운 삶을 다짐한지 7년 후의 일인 것이다.
 
나에게 두 개의 두자춘전 중 어느 쪽의 두자춘전이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고민을 하지 않고 원전의 두자춘전이라고 하겠다. 아쿠다카와의 두자춘전은 너무나 아름답니다. 결말은 완벽하고 전개는 매끄럽다. 그러나 원전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고 그냥 어느날 어떤 비렁뱅이의 악몽을 적어놓은 것처럼 두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몹시 진실되다. 그래서 나는 의문을 갖는다.

이것은 두자춘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왕근의 딸에 대한 이야기인가. 살던 곳도 태어난 곳도 몹시 불분명한 두자춘과 다르게 왕근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한 질량을 갖고 있다. 흡사 두자춘이 아니라 왕근의 딸이야 말로 진짜로 있었던 사람인 것 처럼 말이다. 나는 두자춘이 떠난 후 그 세계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가 떠난 후 왕근의 딸은 자식이 죽은 그 세계에 그대로 남아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꿈처럼 스러져 사라지는 걸까.
 
여기 내가 생각한 두자춘전을 하나 더 써서 남긴다. 모든 이야기는 원전과 같다. 단지 마지막 부분이 다르다.
 
술에 취한 노규는 왕씨부인의 아름다운 - 무표정한 - 얼굴을 보면서 소리를 지른다. 옛날 가대부의 아내는 남편을 천하게 여겨 웃지 않았으나 남편이 꿩을 맞추자 마음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고 한다. 나의 글솜씨와 인품은 꿩을 맞추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데 너는 왜 나를 보며 웃지 않는 것인가. 남편이 아내의 존경을 얻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내가 여자에게 바보취급을 받는다면 재산이 무엇이며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보라. 노규는 방 구석에서 불안하게 부모를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장자를 들어 왕씨 부인의 앞에 들이밀었다. 술에 취한 노규는 얼굴이 붉고 그 숨은 거칠다. 왕씨 부인은 아이를 보지도 노규를 보지도 않는다. 흰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눈은 슬프게 가라앉았다. 입이 떨리는 듯 하더니 곧 굳게 닫힌다. 보란 말이다. 노규는 왕씨 부인을 다그친다. 아이를 흔들며 소리 친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운다. 노규가 굳게 잡은 손이 고통스러운 듯이 아이가 몸을 비튼다.
 
노규는 방을 나선다. 문은 연 채로 그대로다. 방 밖에서 불안하게 기다리던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지른다. 마님, 도련님. 도련님이. 다른 하녀 하나가 뛰어와 방 안을 살펴보고 비명을 지른다. 의원을...의원을...하고 말을 더듬으며 기듯이 자리를 떠난다. 노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숫제 도망치는 듯 하다.
 
바닥에 엎드린 왕씨 부인은 아이를 안고 있다. 흰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검은 머리는 더욱 검어졌다. 커다랗고 촉촉한 눈은 더욱 커다랗고 촉촉해졌다. 입은 굳게 다물고 울음을 참는다. 어매, 어매요. 어매요...중얼거리는 소리가 난다. 왕씨 부인의 목소리는 아니다. 작고 붉어진 것이 어머니를 부른다. 왕씨 부인은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는다. 다만 피가 흘러나오는 곳을 손으로 부여잡고 피를 막는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
 
왕씨 부인은 괜찮아 엄마가 여기있어 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왕씨 부인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은 아주 어릴 적 병약하여 항상 아버지에게 안겨있던 그녀에게 아버지 왕근이 그녀를 달래며 해주었던 어떤 이야기이다. 이야기에서는 두자춘이라는 건달이 있었는데 그는 재산을 탕진하고도 기회를 얻어 신선이 될 수 있는 시험을 보게 된다. 거기서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면 신선이 되게 해준다는 스승의 말을 신의를 다해 지켜 신선이 된다. 그리고 모든 자신의 잘못과 고통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왕씨 부인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까 궁금해한다. 아이는 이제 말을 하지 않고 자꾸 축 늘어진다. 의원은 아직도 오지 않는다.
 
왕씨 부인은 아이를 꼭 껴안고 울음을 속으로 삼키다가 방 한 쪽 구석에 서있는 당신을 발견한다. 당신은 이곳에 어울리는 복장이 아니다. 왕씨 부인은 당신이 신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신의를 지키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신선. 희노애구구욕의 칠정을 모두 잊은 자신에게 사랑마저 잊었는지 확인하러 온 신선. 그리고 이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도. 혼자 몸으로 병약한 딸을 키우느라 모든 자산을 탕진한채 늙어버린 아버지도. 바닥에 가득 흘러가는 자신의 눈물과 아이의 피도. 그래서 정신이 나가버린 눈으로 당신을 쳐다본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당신은 왕씨 부인에게 무슨 말을 할지.
 
24년 8월의 글이다…
 
 
.....왕씨 부인은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운다. 노규는 그 날로 나서서 큰 길로 도망치다 달리는 말에 치어 죽었다. 의원이 제 때에 당도한 덕에 아이는 순조롭게 회복한다. 말이 늦되는 것은 아닌지 걸음이 느린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걱정하였지만 왕씨 부인은 서툰 발음으로 괜찮아요 그래도 고맙기만 해요. 라고 말한다. 아이는 이제 왕씨 부인을 보고 곧잘 웃는다. 왕씨 부인 또한 아이를 보며 웃는다.

아버지인 왕근은 가끔 왕씨 부인을 찾아온다. 아버지는 늙었지만 아직 정정하다. 가끔 왕씨 부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왕씨 부인은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버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왕근은 알 수 있었다. 왕근은 마음 속 깊이 천지신명과 신선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왕씨 부인이 그 뒤로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신선이나 다름없는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그녀가 불행해지는 곳으로는 갈 수 없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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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사진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찌푸린듯 웃는 듯 저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다. 흰 옷을 입고 바싹 말라서는 머리 끝이 부드럽게 말려있다. 이 사람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떠오른다. 떠오른 사람은 친구일 때도 있고 후배 일 때도 있다. 광고를 멍하니 오래 쳐다본다. 요즘 나는 자주 이런다.
 
이제는 죽은 캐나다 문학 평론가 노스럽 프라이의 얘기를 잠시 해보자. 이제는 내용도 가물가물한 책 <비평의 해부>와 <구원의 신화>에서 그는 원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신화적 이야기의 요소는 그 이야기 안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형으로서 전유되고 또 유비되어 다른 상징에 사용되고, 그렇게 변형된 신화의 원형은 현대의 서사에서도 발견된다...정도의 이야기이다.

신화나 문학에 익숙한 몹쓸 인간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뭣하러 저렇게 설명하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좀 더 설명을 해보자.
 
현대의 탐정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인 싸움도 잘하고 고독한 탐정은 아무런 댓가 없이 약자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데 이런 영웅의 이미지는 캔터베리 이야기 등 중세의 낭만시 영역에서 왕과 기독교에 충성하고 약자를 위해 댓가 없이 싸우는 용감한 기사의 이미지에서 시작했으며. 이 용감한 기사의 이야기가 시작한 원형은 술자리에서의 약속을 위해서 메두사를 해치우기 위한 여행을 떠난 페르세우스이다.

이처럼 모든 이야기에는 원형이 존재한다. 우리가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원형의 변주일 뿐이다. 설명하고나니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누구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자주 듣는다.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 외가 어른의 장례식장에서 그냥 정문에 서있을 뿐인데. 생전 만나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명 씩 ㅇㅇㅇ님 장례식장이 몇 호실인가요? ㅇㅇㅇ회장님은 와 계시나요 하고 물어보기에 신기해서 어 혹시 제가 누군지 알고 여쭤보시는 건가요? 라고 물어보니까 우아한 숙녀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 쪽 집안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생기셨는걸요 라고 대답해주셨다.

물론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얼굴이 닮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완전히 남남인 누군가가 있는데. 나를 보고 그 누군가를, 혹은 그 누군가를 보고 나를 떠올리는 일, 말하자면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누가 우리를 보고 있을 때 우리의 무엇을 보는지 이해할 수 없긴 하다만.
 
어느날의 일이다. 온수역 1호선 플랫폼의 상행선 중간 쯤 벤치가 놓여져 있는 곳에 서있는데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좀처럼 전화를 하는 후배가 아니어서 이동하는 중이었지만 일단 전화를 받았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신상 얘기를 주고 받더니 후배는 갑자기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응. 되게 똑똑한 척을 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에요. 응. 그러고는 후배는 머뭇거리더니 말한다 선배를 되게 많이 닮았어요.
 
내가 평범하게 생겨서 나랑 자기 아는 사람 누구 닮았다는 얘기 많이 듣는데 실제로는 안 닮았을걸?
아니 진짜 많이 닮았어요. 그리고 되게 좋은 회사 다녀요. ㅇㅇㅇㅇㅇ이에요.
오 좋은 회사다 나는 면접도 못 본 회사인데 능력있는 사람인가 보지.
선배도 좋은 회사 다니잖아요.
아니요 선배는 그냥 공장 다닙니다.
 
이미 약속은 늦었다. 그런데 후배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아직 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그런 이유없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다.) 
 
근데 얘기하는 것만 들어보면 진짜 비호감에 잘난척만 엄청 하는 사람인데 너랑 친해?
네 저랑 많이 친해요. 연락도 자주 하구요.
나랑 닮았다는 것 빼고는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말야.
괜찮은 사람이에요. 여자친구도 되게 예뻐요. 선배랑 닮은게 오히려 단점이죠. 
 
후배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 시점에서 그래 나 약속 있어서 이제 그만 끊어야겠다 또 연락하자. 라고 말해야한다는 걸 알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머릿 속에 떠오른 여러가지 말 중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람 좋아한거니?
 
후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거 알아요 선배는 진짜 잔인해요.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그 후배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 물어보니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어느 한가한 날의 변덕으로 SNS를 뒤져 뭘 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머리가 하얗게 된 남자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귀여웠다.
...
 
형은 항상 내 여자친구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놀린다. 그렇게 10년 쯤 놀리기에 과학적인 접근법을 써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 어 뭐였지 맞다 공부를 잘함. 그리고 성실함. 가장 중요한 웃는 얼굴이 예쁨. 이라고 메모지에 쓰고는 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길 수 밖에 없어.
내가 안경을 쓴 사람을 좋아하는게 아냐 공부를 잘 하려면 안경을 쓰기 마련이고 (여기서부터 NG였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바싹 마르고 타질않아서 얼굴이 하얗게 된다고. 라고 말했더니 형은 웃는 얼굴이 예쁨 부분을 가리키고는 그냥 앞니가 큰 사람을 좋아하는거겠지.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니 맞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요새, 아니 요 몇년 동안 내 삶이 어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누군가를 볼 때 마다 누군가를 떠올린다. 웃는 얼굴이 겹쳐 보이고 예전에 들었던 말투를 들으면 속으로 깜짝 놀라 놓고는 다른 곳을 쳐다봐 표정을 감춘다.

나는 이 규칙성이 너무나 기묘하게 느껴져서 어느날 정리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머릿 속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를 선으로 이어보았다. 이 사람은 이 사람과 닮았어. 이 사람은 이 사람을 떠올리게 해. 그렇게 한참을 머릿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머릿 속이 더 복잡해진다. 
모든 관계선을 지우고는 처음부터 다시 긋는다. 이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있었어 이 비슷한 일이 다른 사람과 있었지. 그리고 이 사람과 이야기하다보면 저 사람을 떠올리게 돼. 

그렇게 계속해서 줄을 잇다가 어떤 생각에 다다르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계속해서 생각한다. 이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었기 때문에 후회했어. 그래서 저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사죄인지 아니면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 것인지 헷깔리기 시작했다.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전에 알았던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한다고? 왜 그런 짓을 하지?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두개의 점을 연결하는 것 뿐이야.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나는 단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 사람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지금을 후회하고 있을 뿐이란걸 깨닫는다.
 
언젠가 어느날 누군가를 만났다. 검은 셔츠를 입고 바싹 말라서 덩치가 작은 남자아이, 혹은 작은 새처럼 보였다. 나는 바람에 꽃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이 사람이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미 가슴이 아려와서 오히려 쾌활하게 웃으며 조금 걸을래? 라고 말했다. 나는 걸어가며 내가 사과를 해야할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더 시간이 지난 어느날. 정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서 나는 순수하게 변덕으로 미안해. 하고 사과한다. 너한테 그렇게 하지 말아야했어 라고 말한다. 상대가 놀랐는지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무 동요 없는 문자열이 다음에 커피나 한잔 해요 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제대로 말했는지 아니면 뭔가 실수를 했는지. 이 모든 것이 그냥 이기적인 충동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 그러자 하고 대답할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 그리고 쿳시의 지옥을 생각하자.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가들의 내세는 죽음의 순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은 대심문관의 앞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이 전부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이야 말로 그들의 소설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언젠가 내가 대심문관의 앞에 섰을 때 대심문관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정말로 대심문관 같은 것이 있다면 그는 내 인생에 가장 친밀한 사람일 것이다. 내 인생 전체를 이해하고 판결을 내려 줄 사람 일테니 나의 모든 개인 서사를 꿰뚫을 수 있는 -  그러니까 내가 가진 모든 원형이 합쳐진 그런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볼까? 아니면 내가 이제까지 사랑해온 어떤 원형과는 상관없는 얼굴을 한 채로 나를 쳐다볼까?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무심코 기대한다. 어쩌면 대심문관은 당신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보길 바란 - 그리고 보지 못할 - 당신의 나이 든 모습을 하고 나를 내려보고 있지 않을까? 단정한 이마와 흰 얼굴을 하고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며 지금부터 내가 해야할 일-참회와 고백-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나는 혹시 그 때가 오면 눈물을 제대로 참고 대심문관에게 당신을 만난 지금이 나의 모든 인생 동안 기다려온 단 한 순간이라고 제대로 말 할 수 있을까?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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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의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있다.
이하의 이야기는 단 한 줄의 진실도 없다고 쓰려다가 관둔다. 지금 쓰는 이야기는 한 남자가 더위에 정신이 나가 망상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이마가 녹아버리 것 같은 여름이다. 남자는 땀을 흘리며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 햇볕이 얼마나 쎈지 그 얼굴에는 그늘 하나 보이지 않는다. 풀밭에 발목이 쓸리고 땅을 밟는 감촉은 점점 남자를 땅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남자는 걸어갈수록 탈수증을 일으켜 정신을 잃어간다. 더위에 익어가는 남자는 망상을 보고 환청을 듣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음 같았다. 잘 들리지도 않던 소리는 점점 더 확실한 형태와 무게를 가지고 들려오기 시작한다. 남자는 환청이 명확해지는 걸 그대로 둔다. 그러다 말겠지. 남자에겐 다음 장소로 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환청이 명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환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씨 ■■씨 내 말 들려요?
 
남자는 땀에 축축해진 목을 움츠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목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다시 고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지마요. 뒤돌아 보면 내가 거기에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잖아요.
 
남자는 뒤돌아보는 자세 그대로 멈춰서서 소름이 끼치는 걸 느낀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뒤를 돌아보는 선택이 있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는다. 눈썹 위에 맺혀있는 땀을 닦고는 그대로 가던 길을 다시 걸어간다.
 
웃는 소리가 들린다.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목소리는 남자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미 몇 년 전에 만났었던 연인의 목소리이다. 햇수를 세보니 만났던 때로부터 5년 아니 6년은 된 것 같다.
 
응? 뭐라고요 6년이나 되었다고요? 목소리가 물어본다.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세봐요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못 들었어요.

망상은, 그러니까 목소리는 그의 생각에 끼어들어 물어본다.

세상에 그럼 님 도대체 몇 살이에요? 진짜 완전히 아저씨인거 아니에요?

목소리는 호들갑을 떨다가 더 큰일이 났다는 듯이 말한다.

그럼 나는 몇살이지? 이봐요 ■ ■ 씨 내 나이 기억하죠? 그런거 절대로 까먹는 사람 아니잖아요 저 지금 몇 살이에요?
 
남자는 무시하려던 것은 잊어버리고 목소리에 신경을 쏟는다. 어차피 어떤 생각을 하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목소리가 듣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지. 그는 목소리의 주인의 나이를 생각하려다가 그만둔다.
 
[나는 쓴다.]
[네가 나랑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부탁한게 그거였잖아. 네 이야기를 어디에도 쓰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 누구도 내가 쓴 네 이야기를 읽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러니까 네가 정말로 누군지 특정 할 수 있는 얘기는 쓰지 않을거야.]
[나는 그렇게 한 문단을 쓰고는 끄적거리다가 물을 삼킨다. 이렇게 물을 마시면 목이 아플텐데.]
 
목소리는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너 그거 제대로 안 지켰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약속이라고 일단 지키려고 하네?”
[나는 삼킨 물에 사레가 들어 콜록 거린다.]
 
남자는 생각한다. 내가 듣는 네 목소리는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의 목소리처럼 들려. 그러니까 26살...27살이겠지. 남자는 목소리가 빙그레 웃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 ■ ■ 이 이 더운 날 뭘 하고 있었지? 하고 목소리가 물어본다.

물어보고는 목소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까부터 이름을 불러보려고 하고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이름을 제대로 말 할 수 없는거 보니 지금 하고 있는 것의 룰은 그건가? 우리 서로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말하지 않으면서 대화를 나누는거? 왜냐하면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했던 부탁이 내 이야기를 어디에도 쓰지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남자는 너는 내 망상일 뿐인데도 항상 나보다 머리가 좋네. 하고 생각하고. 목소리는 또 웃는다.

왜 자꾸 나한테 머리가 좋다고 하는거야 것보다 머리가 좋다 정도는 말하면 안되는 정보에 포함이 되지 않는거야?
머리가 좋다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나?
머리가 좋았던 여자친구가 한 둘이 아니라서?
애초에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을 좋아해.
내가 특별한게 아니다?
남자는 생각한다. 네가 특별했으면 좋겠어?
목소리는 말한다. 똑바로 말해야지. 너는 지금 망상 중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특별해, 라고 생각하는게 맞아.
 
내가 하고 있는건, 하고 남자는 생각한다.
그냥 세상의 작은 어느 구석에서 다른 구석으로 가는 거야.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지.
목소리는 불만스럽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야구는 그냥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일 뿐인거 아냐?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사람들이 작은 곳에서 다른 작은 곳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숫자가 변하기도 하는 거고.
그래 네 말이 맞아.
뭐 내 말이 맞다고? 그것보다 야구는 어떻게 되었어. 어디가 1위지? 는 몇 위야? ■ ■ 아 나 요즘에도 야구 보니?
 
남자는 생각한다.
네가 야구를 지금도 보고 있는지는 몰라. 네가 지금 어디에 사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후에, 그러고도 몇 번 서로를 길에서 마주쳤지만 그냥 그게 다였어. 너는 항상 네가 좋은 여자친구라고 말했잖아 너는 내 인생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걸로 정말 좋은 여자친구였다는 걸 증명했어.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한다.
어때 너는 내가 아직도 야구를 보고 있을 것 같아?
응 넌 미친놈이고 야구가 없으면 네가 미쳐있는게 야구 때문이 아니란걸 사람들이 알게 되잖아.
그래 우리  이 말이 맞다면 그렇겠지. 아직도 야구를 보고 있을거야 너한테 1위 팀을 물어볼 필요도 없지.
 
남자는 묵묵히 걷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자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땀을 닦고 걷기를 반복 할 뿐. 지겨울 정도로 갈 곳은 아직 멀었고 여름은 덥기만 하다.
 
왜 갑자기 내 생각을 했어?
네 생각을 했다고?
응 네가 내 생각을 했고 내 목소리를 떠올렸기 때문에 지금 내가 네 머릿 속에서 말하는 거잖아.
나는 네 생각을 자주 해
얼마나 자주 하는데? 
예전엔 매일 했지.
매일 했겠지 내가 그냥 the girl next door 처럼 생겨서 그렇지. 예쁘고 귀엽고 하여튼 그러니까.
망상 속인데도 자신감은 여전하구나.
네가 생각하고 있는 나니까 그렇지
내가 네 생각을 자주 한 건 네가 예뻐서가 아냐.
예뻐서가 아니라고??
 
목소리는 자못 이해가 안가는 듯이 분해한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묻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나한테 물어본거지?]
“어 너한테 물어본건데.”
[나는 네가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어.]
“근데 쟤는 왜 저래?”
[쟤는 이야기 안에 있기 때문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너랑 영원히 잡담을 할 수 없는거지. 하고 쓴다.]
 
남자는 생각을 하나 떠올린다.
근데 너 나 좋아하긴 했었니?
목소리는 텀도 없이 빠르게 대답한다. 어어 우리 이 내가 또 엄청 좋아했지.
그럼 사랑하긴 했어?
푸하하하 야 너 뭐 그런걸 물어보십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남자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자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그녀에 대한 생각이 흘러나온다.
그게 진짜 단 한 순간이고. 너와 나의 즐거웠던 때는 다 끝나버렸고 그게 네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짧아서 그렇게 끝났지만. 나는 네가 잠시나마 나를 정말로 사랑했었다고 생각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유를 말하려면 나는 너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해. 내가 나한테 했던 이야기들과 네가 했던 말들을 모조리 끌어올려야 하고 그렇게 끌어올린 말들로 너를 한 번 더 만들어서 물어보면 되지. 너 자신보다 27살의 너에 대해서 잘 아는 건 나니까 널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거야.
그래서 그렇게 했어?

몇번이나 그렇게 했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했지.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그게 되돌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냥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했느냐만을 확인하는 건데도 스스로를 그렇게 불구덩이에 넣고 데굴 데굴 굴린거야?
 
[나는 쓴다. ]
[그렇게 까지 불구덩이는 아니었어. ]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이 생각한건. 너를 그냥 우연히 만나서 어머 □ □씨 뭐해요 라고 말하고 너도 어머 ■ ■씨 오랜만이에요 라고 말하는거였어. 그러면 나는 오랜만이긴요 엊그제 만났던거 아니에요? 우리 이런데서 만난 것도 웃긴데 저기 가서 커피나 할래요? 하고 걍 아무데나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고 잡담을 하는거지.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항상 했어.]
 
목소리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말한다. “너 안 했잖아.”
남자는 생각한다. 갑자기 안 했다니 무슨 소리야?
목소리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남자에게 계속 말한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불구덩이까지인가?
너를 생각하는 건 불구덩이 같은 일은 아니었어.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응 그렇게 괴롭지 않았어. 네가 나를 떠나고도 네가 해줬던 이야기들이 나를 오랫동안 지탱했었지. 친척집에 갔던 이야기나 노래를 불렀던 이야기. 대학교에서 연애를 했던 이야기. 친구들과 잡담한 이야기. 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 너는 정말 아무생각 없이 했었던 얘기 같은데 그런 것들이 나한테 비어있는 어떤 부분을 채워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느낌이었어.
전 남자친구 얘길 듣는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나보네.
알고 있었거든 네가 나를 정말로 많이 좋아했었다고.
바보 같은 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겠어? 너는 그냥 내가 너를 잠시 만났고 내가 너를 좋아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일 수도 있잖아. 몇년이나 지났다면서. 지금에 와서 지금의 나한테 물어볼수라도 있어? 너는 그냥 처음부터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텐데 이런 생각들이 어떤 도움이 되지?
 
남자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머뭇거린다.
[나는 아무 글도 쓰지 않고 그대로 있는다.]
목소리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더 이상 뭘 써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내가 그만 이 글을 닫고 침대로 가 한숨 자려고 생각하는 순간 기적처럼 남자는 생각한다.]
 
그 뒤로 누군가를 또 만났어.

그리고 그 사람이랑도 끝났어.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나는 내가 텅 빈 것 처럼 느껴져

나한테 영혼이 정말로 있는지 자신이 없어서. 네 생각을 하는거야.
내가 좋은 여자친구였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널 아주 잠시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걸 확신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응 우리가 서로를.
 
남자는 걸어간다.
등과 배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그 자국 그대로 회색의 폴로 셔츠가 젖었다. 목소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노래를 귀기울여 듣는다. 남자는 그녀의 노래를 귀기울여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지 해도 그는 항상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깨물고 뽀뽀를 하고 교차로에 멈춰서면 항상 손을 깍지껴서 잡았다. 그녀가 어땠냐하면 질색했다.

어쨌든 처음부터 아주 오래도록 그는 자기가 그녀를 사랑할 것을 알았다. 이름을 알기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다고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즐겁다는 듯이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님 인생에 가장 사랑한 애인 세 명은 누구죠? 이미 몇 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 중에 들어가 있나요?
남자는 너 그런 식으로 결국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는 거잖아. 대답 안 할거야. 라고 생각한다. 
아항. 그러시겠다 그렇구나. 그러면 3등은 아니라는 얘기네. 그럼 내가 2등이에요? 놀랍네 지금 님 머릿속에 있는 저는 아직 27살 아닙니까? 님은 몇살 쯤 됐죠? 37? 41? 43? 그도 아니면 47 정도 되었나요?
남자는 다시 생각한다. 아니라니까 내가 널 마지막으로 만난지 몇년이나 되었는지가 얼마나 중요하지?
중요한건 아니지만 저 님 항상 여자친구 있는거 알거든요. 나이를 알면 저 이후로 여자친구가 몇 명인지 대충 알 수 있죠.
그렇게 막 살지 못했어.
막 살지 못했다구? 그러면 어디 한 번 봅시다. 님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애인이 누구죠 혹시 이름에 □ □ 가 들어가나요?
 
남자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며 말한다. “1등 너 아니거든 이 멍청아."
그는 그녀가 알던 그대로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남자가 돌아본 곳에는 여름 말고 아무도 없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아래의 이야기에는 어떠한 진실도 없다. 진실이 있다면 아버지의 음악 취향 정도이다.)
 


...이런거 물어보는게 너무 쓰레기 같은 질문이지만 우리가 어떤 사이였지?
 
그러니까, 대단한건 아니고. 스마트폰에서 뭔가를 검색하려고 찾다가 우연히 네가 보냈던 문자가 검색에 걸렸어. "ㅖ"인지 "ㅕ"인지 하여튼 모음만 저렇게 쓰는 일은 별로 없잖아. 그래서 네 문자가 나왔어. 너 이상한 오타를 냈더라. 하여간 네가 저 문자를 보낸지 진짜 몇 년이나 지났더라.
번호는 있는데 이름은 지우지 않았고 문자를 주고 받은걸 보니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네가 누군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 이름을 지운 걸 보니 그렇게 좋은 형태로 관계가 끝이 난 건 아니었겠지만 굳이 문자를 지우지 않은 걸 보면 널 완전히 잘라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근데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두 세번 읽어보았지만 하나도 기억이 안나. 이제 몇년이나 지난 일이니까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만. 문자 타래를 지우려고 하다 보니까 네가 누군지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진>
같이 찍은 사진이 있으려나. 문자를 주고 받은 날 기준으로 앞 뒤 한 달 두 달 정도를 천천히 찾아보자 네가 있을수도 있어. 최소한 너랑 같이 있을 때 찍은 밥 사진이라도 있겠지. 너도 알지만 나는 사진을 좀처럼 지우질 않아. 사진이 없으면 어떤 일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게 되니까. 그거 알고 있어? 꿈은 보통 그냥 머릿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나쁜 꿈을 꾸더라도 그걸 말로 하거나 글로 쓰는 등 적극적으로 기록하려는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머리 속에만 담아두고 있으면 금방 잊어버린다고 하더라. 나는 그래서 너무 괴로운 꿈을 꾸게 되면 그걸 잊어버리도록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있어. 잠깐만 내가 너한테 이 얘길 했던가?
 
아 사진. 사진 얘길 하고 있었지. 나는 진짜 사진을 지우는게 힘들어. 사진을 지우면 진짜로 그 시간이 지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래서 내가 아주 싫어하는 기억들에 대해서는 일부러 사진을 더 지우는 적도 있지. 예를 들어 바람을 하도 피우던 여자친구 같은거 있잖아. 사진은 싸그리 지워버렸거든 그래서 몇년이 지나버린 다음에는 걔와 했었던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어딜 갔었는지 뭘 먹었는지 그런게 다 흐릿하고 사진 속에는, 예를 들어 수족관 앞에서 바다거북 흉내를 내고 있는 내 사진은 아주 어색하게 혼자 찍혀있지. 그 앞 뒤엔 무슨 일을 한건지 아무 것도 찍혀있지 않아. 아주 잘라내버린 것처럼.
 
너랑 사진을 찾다 보니까. 지금은 해외로 아주 가버린 친구와 찍었던 사진을 찾았다. 정확히는 그 친구를 찍은게 아니라 그 친구와 마지막으로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광고판을 찍은 사진이야. 웃기지만 그 광고판 사진을 보니까 그날 친구랑 무슨 얘길 했는지 내가 얼마나 걔를 좋아했는지가 다 기억나네. 의외라고? 나도 사람을 좋아하긴 해.
근데 너랑 찍은 사진은 없다. 사진을 찍지 않은걸까 아니면 네가 정말 싫어서 찍힌 사진을 모두 지운 걸까.
 
<음악>
뭔가 기록이 있다면 그냥 사소한 실마리만 있으면 네 이름이 떠오를 것 같아서. 그 당시 들었던 음악을 좀 찾아보고 있어. 알고 있지 않았어? 그 때만 해도 나 음악평론 블로그(가명으로)하고 있었을 때니까. 그 블로그 인기도 하나도 없었고 날려버린지 오래지만 그래도 트위터도 그렇고 여기저기에 계속 어떤 음악을 듣고 있는지는 적어두었거든. 아마 그 때 쯤에도 어딘가 전세계 적으로 아무런 흥행 돌풍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힙합 레이블이나 락 밴드 음악이나 듣고 있었을거야.
그걸 들으면 네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까? 나 네 동생 이름도 완전히 까먹었거든. 네가 누군지도 잊어버렸으니 네 동생 이름이 기억날 리가 없지.
 
하여간 음악은 참 편리하지 않아? 그 때 듣던 노래를 들으면 그 때가 생각나잖아. 사람들이 그래서 유행가를 듣는지도 모르지. 나는 비틀즈를 들으면 항상 어릴 때가 기억나. 주말이면 아버지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곤 했는데 (대부분 할아버지 댁이었지) 아버지 취향이 모차르트 좋아하고 팝송만 듣고 그런 묘하게 속물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반쯤 잠이 들어서 꾸벅꾸벅 졸면서 비틀즈를 들었던 기억이 되게 많거든. 아버지의 비틀즈 앨범은 본인이 맘대로 편집한 본인만의 베스트 앨범이라서 비틀즈의 어떤 앨범을 들어도 조금씩은 아버지의 차를 타고 가던 그 밤의 생각이 나. 그래 너한테 이 얘기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한테 비틀즈 뭐 좋아하냐고 물어봤던가? 그래 그 때 처음 LHCB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페니레인 얘기도 한 것 같은데...그건 MMT거든. 근데 나 그 때 아직 20대였는데 왜 비틀즈 같은 얘길 했지.
 
아 근데 딱 너랑 연락 할 때 쯤 들었던 노래 확인해보니까 뜬금없이 한국 대중 가요인데? 심지어 리믹스 버전이고 이 가수의 이 리믹스가 실려있는 앨범은...애플뮤직에도 유튜브 뮤직에도 없어. 음 잠깐만 멜론 딱 한 달만 구독할게. 들으면 뭔가 기억이 나지 않을까?
 
<SNS>
아니. 지금 이 노래 일주일째 듣고 있거든. 적어도 백번은 들었을텐데 아무 기억도 안 나는데? 그냥 좋은 노래란 것은 알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음악 취향은 나랑 제일 잘 맞는구나. 나 아직도 네가 누군지 생각이 안나. 이름도 생각이 안나.
이럴 때는 일기장 같은게 있으면 편할텐데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아. 그 뭐냐 일기를 쓰면...나중에 내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었을때 사람들이 그걸 다 읽을거 아냐. 걱정도 팔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진짜로?
 
근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진짜 궁극의 해결책이 있는데. 내 SNS를 검색하는 거야. 그 날짜에 해당 하는 글을 읽다 보면 뭔가 ...힌트라든가...그런게...아니 근데 나 진짜로 SNS는 예전에 엄청 많이 해서 온갖 블로그를 다 했거든.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을 때 마다 하나씩 태워버려서 지금에야 남아있는 계정이 없지만. 웃기게도 카카오스토리에는 내가 좋아한 그림(그것도 순수 회화만)을 간간히 올리다 보니 없애질 않았고. 인스타랑 트위터도 그대로 남아있어. 몇 번이나 없애려고 했는데 안 없애고 그래도 있다고. 너 그 강남에 강남대로 가기 전에 오른 쪽 골목으로 돌면 있는 건물 3층인가 4층에 있는 파스타집 기억나? 엄청 넓고 사람은 별로 없는데 칵테일을 싼 가격에 먹을 수 있어서 나 거기서 술 엄청 마셨는데. 너랑 몇 번 가지 않았나? 가서 술만 엄청 마신 것 같은데. 거기 사진 정도는...어 아냐 나 거기 너무 어두워서 사진 찍는거 포기했었는데. 사진이 없으니 인스타에 뭔가 남아있을리는 없고. 잠깐만 지금 네가 기억날 것 같았는데.
...
아니 모르는척 하는게 아니고 진짜로 기억 못했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당시의 나에게 너는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나봐. 화났어? 근데 내가 정말로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어쩔수 없는거야. SNS를 검색하는건...그만두자 진짜 끝도 없는 일이고. 특히 나 내 텀블러 백업해둔 파일 그거 열면 안돼. 아니 진짜로 거기에 네 이름이랑 내가 찍은 네 포트레이트가 있어도 안 열어볼거야. 진짜 안 열어볼거냐고? 어 없는거 알고 있거든 거기 네 이름은 없어.
 
<이야기하기>
그러니까 나는 이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좀 더 노력을 하면 네가 나에게 했던 말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건 네가 남긴 문자를 볼 때 부터 알고 있었어.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을 것 같은 시간에 보낸 문자라든가. 내가 아무 대중 없이 보낸 문자에 후다닥 보낸 답이라든가. 더럽게 재미없는 얘길 하는데도 웃어준거라든가. 그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너를 내가 통채로 잊어버렸다는게 결국 내가 너에게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걸 알수 있어서. 몇년 아니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갑자기 네가 누군지 궁금해졌어.
다른 무엇보다. 네가 다시 친구를 해달라고 보낸 문자에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할 자격이 없어.
 
너를 만나지 않게 된 후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어. 친구도 많이 생겼고 많이 생긴 만큼 많이 잃었지. 되도 않는 농담을 하면서 살았고 쓰지 않아도 될 글들을 많이도 썼지.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었어 네가 걱정했던거랑 다르게 말야. 왜? 내가 그렇게 세상 끝날까지 사람을 싫어하면서 살 줄 알았어? 
 
너에게 화를 낸 건. 그래 온당하지 못했어. 나는 항상 내가 이성의 화신이라도 되는 듯 굴지만 전혀 그런 사람이 아냐. 형편없는 사람이지. 너에게 그렇게 화를 내선 안되었었는데. 네 상처 받는 얼굴을 봤을 때 그만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 뒤로도 똑같은 실수를 몇번이나 했어. 그게 어떤 위로도 되지 않겠지만.
 
너는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었고. 아마 지금 이 마음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 둘을 구할 수는 없을거야.
...그래도 이 멍청아 내가 널 진짜로 잊어버리기 전에 나한테 뭘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지 그랬어. 나는 아직도 너를 생각하고 있는데 이 밤에 너는 뭘 하고 있냐고.
 
그리고 어쩌지. 나 이제서야 네 이름이 기억났어.
 
24년 7월 26일 비가 오는 날 밤에 쓰는 글이다.

 
오늘 새벽에 꾼 꿈은 정말 가관이었다. 누군가를 만났고 그 사람이 내 입안으로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집어넣어 숨이 막히고 있는데도 꿈 속의 나는 행복해했다. 숨이 막히다 못해서 꿈에서 깬 내가 떠올린 건 입안에 들어오던 머리카락의 감촉과 행복감이었다. 비참한 기분으로(쓰지 않을 뿐이지 나는 그 꿈에서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 안다) 맙소사 도대체 뭐 이런 꿈을 꾸지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 회사일을 대충 정리하고 나간 서울에서 오후 3시 쯤 폭우를 만나 몸이 홀딱 젖었다. 우산을 뚫고 비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나머지 얼굴에 흐르는 빗물에 숨이 막힐 정도가 되자 새벽의 꿈은 예지몽인가봐 하고 훌쩍거릴 수 밖에 없었다. 아 이건 존재론적인 위기야 하고 중얼거리며 우산을 꼭 안고 덕수궁을 지나 시청 쪽으로 걸어가며 문득 생각이 났던 것은 예전에 들었던 이상한 꿈 얘기였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종의 예지몽이었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예지몽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얘기를 해준 것은 내 20대 때의 친구였고. 친구가 꿈 얘기를 해준 건 술집이었다. 나는 맙소사 그 얘기를 들을 무렵 이십대 초반이었고 그 친구는 좀 더 어렸는데. 당시의 나는 풀어두면 안되는 곳인지도 모르고 아무 곳에나 풀어둔 원숭이나 마찬가지여서 못되먹은 소리를 아무한테나 하는 말라깽이였고 친구는 그런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친구도 많으면서) 심심할 때면 굳이 나를 찾곤 했다. 우리는 가끔 술을 같이 마셨고 대체로 제 정신을 잃을 때 까지 술을 마셨는데. 제정신이든 아니든 내가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었다. 친구 쪽이 말도 안되는 수다쟁이였기 때문이다. 혼자서 말할거였으면서 애초에 나를 왜 찾았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그 날에도 같이 KBS일일 드라마가 틀어져있는걸 보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날은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친구가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즘 자주 꾸는 꿈이 있는데... 혹시 꿈 얘기 같은거 하면 싫어해? 아니 상관없어 혹시 재미있는 꿈이야? 아니...재미있는 건 아니고 하고 우물거리던 친구는. 재미있는 꿈이라기 보다 무서운 꿈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건 대체로 좋아하기 때문에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자세를 바로 잡고 술까지 한 병 더 시키고 얘기를 들으려고 했는데. 친구는 쉽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인것처럼 더욱 우물쭈물하더니 이해를 못할 수도 있는데 라고 입을 떼더니 나 요즘 이상한 세상의 꿈을 꿔. 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상하냐면...일단 우리가 살고 있는 보통 세계랑 똑같아 하나도 다를게 없는데 되게 음침하고 별로인 곳이야. 공기도 탁하고 필터라도 낀것처럼 색깔도 우중충해. 나는 거기서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하면서 그냥 여기서처럼 사는데 처음에는 괜찮았거든. 근데 그렇게 거기 꿈을 계속 꾸다가 요즘에야 깨달은게 있는데 거기는 모든 음악이 다 비틀즈 노래야 되게 이상하지?
 
비틀즈? 왜 비틀즈야? 아니 나도 몰라. 꿈이 그렇다니까. 어 그럼 일단 비틀즈 노래가 나와서 소름끼친다고 하는건 세계 칠십억 비틀즈 팬들에게 실례가 되는 말 아니야? 전세계 비틀즈 팬이 칠십억명이나 돼? 하여간 모든 음악이 다 비틀즈야 시계 알람소리도 비틀즈고 지나가다 나오는 음악도 다 비틀즈고. 비틀즈면 좋은거 아냐? 아니 아니라니까 되게 소름끼친다니까 나 꿈에서 공항이랑 묘지도 갔었는데 거기 나오는 음악도 전부 비틀즈였어 너무 이상하지?
 
이상하긴 이상한게 팝송도 잘 안듣는 애의 꿈에 나오는게 비틀즈? 게다가 똑같은 배경의 세계에 대한 꿈을 계속 꾼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데 나도 솔직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은 말이야 하고 고백을 했다. 
 
나는 좀비 때문에 세상이 멸망한 세상에 대한 꿈을 자주 꿔. 그건 뭐야 심지어 자주 꿔? 응 고등학교때부터 꾸준히 꿔왔어 일종의 예지몽이 아닐까 싶어. 고등학교때 꿨던 꿈을 요즘에도 자주 꿔?
친구가 내 꿈에 대해서 - 나는 실제로 좀비 아포칼립스에 대한 꿈을 자주 꾼다. 최근에도 몇번 꿨다 - 그닥 진지하지 못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고 다소 기분이 상했지만. 원숭이만도 못한 전두엽으로 사람 흉내나 내던 이십대 초반의 나도 친구가 자기 꿈에 대해서 진지하게 기분 나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걸 나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마음에 걸려? 응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똑같은 꿈을 너무 자주 꾸니까 싫어. 엄밀히 말하면 똑같은 꿈은 아니라며. 왜 까탈스럽게 말해 내가 그렇게 느낀다구. 항상 똑같은 배경에 똑같은 설정이 있으니까. 라고 설명을 하던 친구는 말을 꺼낼 때 보다 더욱 우물쭈물 거리면서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어보았다.어떻게 생각하냐니? 아니 이런거 잘 알잖아 내가 뭘 해야할까? 하고 말하는 친구 얼굴을 보자 더욱 진지하게 대답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거 주제가 아냐? 주제가? 응 그냥 그 꿈의 주제가가 비틀즈 노래인거 아냐? 너 비틀즈 팬도 아니라서 비틀즈의 안 유명한 노래는 잘 모를텐데 (나는 비틀즈의 팬이다. 제일 좋아하는 앨범은 LHCB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취향이다) 꿈에서 나오는 노래가 다 비틀즈 노래라고 생각하는건 대충 네가 아는 비틀즈 노래랑 비슷하면 다 비틀즈라고 생각해서 그런거 아냐 세상에 얼마나 많은 브리티시 밴드가 있는데 말야. 친구는 납득을 못하겠다는 듯이. 그냥 어어 그런가 라고 불만스럽게 대답을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거 보면 주제가가 있잖아. 그냥 넌 꿈에서 영화에 출연하고 있는거고 그 영화의 세일즈 포인트가 비틀즈 노래를 전면적으로 넣었습니다 뭐 그런거 아냐? 아니 뭐하는 영화인데 비틀즈 노래만 넣는데? 나야 모르지 프로듀서나 감독 하여간 높은 사람들이 비틀즈 팬일거야. 비틀즈 노래를 그렇게 많이 쓰면 저작권이 괜찮아? 아니 돈이 진짜 많이 들지 그래서 실제로는 제작되지 못한 영화인거고 너는 거기에 출연하고 있는거야.
 
친구는 어이가 없어졌는지 그래서 그럼 그게 뭐하는 영화인데? 라고 묻기에. 대만이나 일본에서 만들 것 같은 청춘 로맨스? 라고 다소 자신이 없는 대답을 했다.
 
아니, 잘 들어봐. 영화는 청춘 로맨스 영화야 청춘들이 학교를 배경으로 연애도 하고 중간중간에 춤이랑 노래도 나오는 그런 뮤지컬 요소도 있는. 내용은 전형적으로 미남 미녀들이 서로 만나서 한눈에 반하는 그런 내용인거야. 그런데 앗 이럴수가 영화의 조연이었던 누군가 - 대충 주인공의 반 친구 정도로 하자 수업 장면에서 얼굴이 가끔 등장하는 애 - 가 갑자기 자의식을 갖게 되어서 이게 청춘 로맨스 영화인걸 알아챈거야. 어떻게 알아냈냐면...영화 내내 비틀즈의 커버곡만 나오기 때문에 알아챈거지.
 
그래서. 내가 그 영화의 조연이다? 어 너는 자기의 세계가 영화라는 것을 알아차린 조연이 된 꿈을 꾸고 있는거지.
하필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공은 아까도 말했지만 미남미녀여야 되니까...너 그렇게 말하는거 실례아냐? 친구가 화를 낼 기미가 보여서 재빨리 얘기를 계속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처음에 주인공인 조연은 세상이 영화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해 매일 매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사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데도 눈치를 못 챘지. 그렇게 매일 매일을 보내다가 보니 갑자기! 나오고 있는 모든 노래가 비틀즈란 사실을 깨닫고 이것은 영화다 그것도 엄청 유치한 청춘 로맨스 영화다 라는 걸 깨달은거야.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그만...그 조연이 영화의 실제로 주연이 될 미남미녀에게 반하고 만다! 그래서 자기가 주연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진거야 자기의 메타인지를 통해서!
 
친구는 숫제 포기 했는지. 내 얘기를 대충 들으며 성의 없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그러니까 너는 자기가 주연이 되기 위해서 시도는 해보았으나 보이지 않는 큰 손. 그러니까 영화의 감독이 계속해서 개입해서 스토리가 자기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걸 방해하지. 결국 네가 보는 앞에서 미남미녀 주인공들은 맺어지고 마는데...거기서 커다란 전환이 일어나면서. 너는 제4의 벽을 부수고 촬영장에서 정신을 차리는거야. 현실세계에서 눈을 뜨는데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촬영스텝들이 보이고 신처럼 보이던 감독은 프로듀서에게 굽실거리고 있고. 무엇보다 주인공 미남미녀가 후배 신인 배우라서 너에게 자꾸 잘 보이려고 막 말을 걸고 선배님 촬영 쉬는 날에 뭐하세요? 저희 둘이서 카페 가요 이러면서 너한테 찝쩍거리는거야. 어때?
 
그 부분은 마음에 드는데. 근데 이거 언제까지 말할거야? 결말은 있어? 
그건 아직 생각 못했는데. 다음에 생각 나면 말해줄게. 근데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 꿈도 별거 아닌 걸로 보이지 않아? 
 
친구는 내 말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냥 나를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술이나 마셔. 하고 그날도 제정신을 반 이상 잃어버릴 때 까지 술을 마시고 둘 다 다리가 풀린채로 술집에서 나왔다. 그 날은 꿈에 대한 이야기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종 단 둘이 술을 마실 때면 그래서 그 영화는 어떻게 되는데 하고 뒷 부분의 이야기를 채근했고. 나는 그럴 때 마다 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영화의 스토리를 만들어갔다.
결말 까지 생각해두긴 했지만 결말까지 갈 개연성을 찾지 못해서 중반 이후의 현실세계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때 쯤. 우리 둘 다 다른 목적으로 휴학을 하게 되서 서로 만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친구는 유학준비. 나는 고시준비였다.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그랬던게 아닐까 싶다. 가끔 아직도 그 꿈을 꾸고 있는지가 궁금했긴 했지만 굳이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 꿈에서 이어진 그 가상의 영화 시나리오를 완전히 내 것으로 생각하고는 머리 속에서 가끔 내킬 때면 결말까지 가기 위한 개연성을 찾으려다가 포기하길 반복 했고. 친구가 유학을 가기 전까지 결말을 만들어서 말해줄까 하고 생각만 하고는 유학을 떠나기 전 만나지도 못했다.
 
그 친구는 호주, 미국, 그리고 어딘가 몇개의 나라를 거쳐서 마지막으로 내가 소식을 들은 것은 영국에 있다는 얘기였다. 본인이 나에게 보낸 엽서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그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진 못하지만 대충 이런 식이다.
 
오빠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면 이 엽서를 받을 수 있겠지. 나는 지금 영국에 있어. 종종 오빠 생각을 했는데 이제껏 편지 한 번 보낸 적이 없었네. 하고 건조하게 시작하는 문장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개인적인 근황. 한국에 돌아가면 연락한다는 인사치레. 성의 없는 서명. 말로 한다면 2분이나 걸릴까 싶은 짧은 엽서였다.
 
나는 그 엽서에 답장을 해야지(일단은 해외에서 굳이 생각해서 보내줬다는게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만 하고는-그 쯤 나는 본가에서 독립해 혼자 살기 시작했다. 본가는 그 후 재건축으로 아파트 단지 자체가 없어졌다- 답장을 하는 걸 까먹어 버렸는데. 그 뒤로 친구에게서 받은 연락은 없었다.
 
다만 몇 년이 지나고 또 몇 년이 지난 후 공통의 친구에게서 영국에서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다시 몇 년이 지난 후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죽음과는 관련이 없을 듯한 젊은 나이였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된 일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시간이 상당히 지난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곰곰히 기억을 더듬어 친구의 본가가 어디쯤에 있는지 떠올리긴 했으나. 그래서 내가 어쩌란 말인가.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날 영국의 공항에서 비틀즈의 음악을 공항의 테마곡으로 쓰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답답한 기분이 든 나는 거기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정말 별거 아닌...술자리에서 나눈 꿈 얘기였으니까.
 
결국 나는 본인에게 직접 받은 연락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 엽서 이후로 들은 그 어떤 소식도 없던 걸로 치고 있다. 애초에 잘못한 사람을 이야기하자면 주소가 바뀐 걸 말하지 않은 내 탓이었지만. 아직도 영국 어딘가에서 그 친구가 다음 엽서를 보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마디 말도 듣지 못한채, 아무런 인사도 없이 너를 보내기에 너와 내가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고. 아직 이야기의 결말을 말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24년 7월 비를 몹시 맞은 날의 글이다.
 

오랜만에 재와 불꽃의 꿈을 꾸었다. 너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단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 아래 세상은 모두 재투성이었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 그 목소리를 기억해내려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음을 알았고. 이야기 하나를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야기를 써야만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미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고 최대한 빨리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난 진흙인형처럼 올바른 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영혼(이나 하여간 그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걸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한다는 걸 이해하였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되는 대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대체로 거짓말이고 사실도 아주 작게나마 섞여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당신은 모를 것이다.

1. 24년 7월 20일 비가 적신 것 처럼 내리던 아침
 
덕수궁에서 시청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용무가 있었던 참이다. 아침이 이른 시간이라 연 가게도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젊은 연인 하나가 적당한 아침식사를 먹을 가게를 찾아 다니고 있었고 몇명의 사람들이 작은 모임을 하고 난 뒤였는지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을 스쳐지나가며 슬쩍 바라보다. 그 사람들 하나하나에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증오가 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증오가 아니었다. 눈이 새빨갛게 타고 머리가 하얗게 될 것 같은 비정상적인 증오가 솟아 올라서 나는 이 이해 할 수 없는 감정이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증오가 사라지도록 잠시 멈춰서서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감정이 가라앉았다고 느꼈고.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궁금해질 쯤 덕수궁 길가를 비틀비틀 거리며 걸어가는 남자를 하나 발견했다.
 
남자는 키가 크고 덩치가 컸다. 모자를 쓰고 반바지를 입었는데 무엇을 하다 왔는지 온 몸은 흙투성이고 얼굴은 짐승의 것처럼 보이는 분변과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묻어있다.

남자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비명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의 말인지 천사의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고래고래 외치며 남자는 발을 구르고 옷을 찢고 있었다. 그 남자를 쳐다보는 것은 나와 벽에 기대앉은 곱슬머리의 노숙자 뿐이었긴 하지만 그 남자는 주변에 뭐가 있든지 여가가 어딘지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옷을 찢고 흙을 발라 얼굴에 묻히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말들은 모두 저주였고 증오였다.
 
그 감정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었다. 그는 흙투성이가 되고도 나와 똑같이 생겼고 나는 그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누군가에게 설명을 한다면 … 그는 악마이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를 평생동안 알았다. 그는 내가 어딘가를 가면 따라왔고 내가 방에 들어가면 같이 들어와 한 쪽 구석에 서있는 그런 그림자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때때로 그는 나와는 상관없는 감정에 휩싸여서는 화를 내고 마음 상해하고 사랑하고 또는 슬퍼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내가 봤었던 어떤 때보다도 훨씬 증오에 취해 있었기에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도, 그의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그는 따라오기에 거꾸로 나는 한걸음 떨어져서 그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그의 눈을 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이 나가버린 나와 똑같이 생긴 악마를 지켜보며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밑의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 중 일부이다.
 
2. 마귀가 신발장에서 신발을 세다
 
첫번째 이야기는 신발장의 이야기이다. 어느 남자는 꼭대기에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구석집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혹시 빈집털이가 있을까봐 집의 불을 켜두거나 사람이 많은 척을 하려고 현관 앞에 신발을 가지런히 두지 않고 난잡하게 신발을 흐트러두었다고 한다. 그러면 도둑이 들어와 신발을 보고 식구가 많은 집이라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집에 들어오지 않고 도망가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식이 지나고 청명이 올 때 쯤. 검고 불길한 형상이 며칠 때 집을 맴돈다 싶더니만 어느날 그는 꿈을 꾸었다.
얼굴을 볼 수 없고 희디 흰 손가락만 겨우 보이는 어떤 형상이 현관 앞에 주저 앉아서 어지러히 널려있는 신발들을 짝을 지어 세면서 이것도 네 것, 이것도 네 것, 이것도 네 것이다. 라고 세고 있는 꿈이었다. 그가 꿈에서도 소스라치게 놀라 형상에게 너는 누구냐고 큰 소리를 치니. 형상은 고개를-고개가 있다면 그랬을 것이란 얘기다-돌려 남자를 쳐다보더니 오늘도 혼자로구나. 하고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엿듣던 악마는 그 대목에서 박수를 치며 말했다. 옳지 그렇고 말고 하지만 나였다면 그대로 그 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했을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3. 노인이 호랑이를 길러 산에 풀다
 
봄 가뭄이 심하던 어느 날. 노인이 남쪽 해안을 따라 내려와 외딴 산을 여행하다 어미가 굶어죽었는지 혼자서 배회하던 어린 호랑이를 하나 주웠다. 새끼는 오래 굶었는지 검게 타고 하얗게 말랐으며 앞 발을 쥐면 그대로 뼈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노인은 후환이 될 것을 알면서도 이때 주워가지 않으면 어린 호랑이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거둬. 개와 소의 젖을 구걸하며 길렀다. 어린 호랑이는 노인을 어미처럼 따라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였고 노인은 그 호랑이가 귀찮으면서도 인연을 귀히 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세월이 지나 호랑이에게 이빨이 날카로워지고 기운이 강성해지면 사람의 손에 닿지 않을 깊은 산으로 데려가 풀어주리라 하고 마음 먹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노인에게는 항산이 있어 생활을 하는 데는 어렵지 않고 호랑이는 좀처럼 크지 않아 노인의 재산으로도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호랑이가 좀처럼 크지 않자 노인은 내심 기쁘면서도 사람에게 먹이를 받는 것에 익숙하여 잘 크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호랑이를 3년 쯤 키우자 호랑이는 때때로 멀리 까지 외출을 하기도 하였으며 덩치도 커져 더 이상 노인의 기운으로는 키울 수도 없었으며 심지어 유명해지기 까지 하였다. 
 
어느날 지방의 수령이 나타나. 노인에게 말하길 아직은 호랑이가 사람을 좋아하여 누굴 해치는 일이 없어 내버려두었으나 요전번엔 호랑이에 대해 모르는 이웃고을까지 나타나 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소. 더 이상 호랑이를 키울 수 없다면 차라리 그 호랑이를 잡아 그 비싼 가죽을 내다 파는 것이 어떻겠소?
노인은 수령에게 고개를 깊숙하게 숙이고 대답하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녀석이 기운도 쎄져 이 노인네의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적당한 때를 보아 사냥꾼을 초청해 가죽을 벗기겠습니다. 하고 공손하게 대답을 하였고 수령은 특별히 만족하여 노인의 집을 떠났다.
 
노인은 며칠간의 나들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짐승을 반기고, 아름다운 털을 바라보았다. 햇볕을 쐬어 털은 복슬복슬하게 올라오고 노인이 정성껏 빚어주어 윤기가 났다. 아직 어린 호랑이처럼 작고 날씬하였다. 노인은 고양이처럼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깨어나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노인은 화승총과 식량을 챙겨서 호랑이와 같이 길을 나섰다.
 
노인이 원하는 만큼 깊은 산속으로 호랑이를 데리고 갈 시간은 없었다. 며칠을 쉬지도 않고 산길을 걷고 짐승들만 다니는 길을 따라서 산 속 깊이 들어온 노인은, 적당한 공터를 발견하자 적당한 바위에 앉아 숨을 돌리고는 요 며칠 동안 어릴 때와 다름없이 자기를 따르는 호랑이를 향해 화승총을 들어 겨눴다. 차마 머리 가까운 곳은 겨누지도 못 하였다.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산등성이까지 우레와 같은 총 소리가 울렸다.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호랑이는 겁을 먹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소리를 질렀다. 이 정도면 되었지 않느냐 꺼져라 짐승아 이놈아. 네놈을 키우느라 동냥한 젖이 얼마이고 먹인 고기가 얼마인지 아느냐. 충분하고도 남았다. 충분하고도 남았다. 노인은 화승총에 다시 불을 붙이고 이제는 호랑이에 가까운 나무를 겨냥하여 쏘았다.

꺼져라 이놈. 호랑이는 당황하여 꼬리를 말더니 몇번을 맴돌고는 숲 속으로 쌩하니 달아났다고 한다. 노인은 호랑이가 떠난 산 속 공터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리고 갈 때의 배의 시간이 걸려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호랑이는 노인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놈은 오래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물었다 누구의 얘기요? 악마는 당연한걸 묻는다는 듯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조롱했다.
그래서 나는 노인은 기운이 쇠해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였지만. 호랑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하렵니다. 하고 말했다.
 
4. 점쟁이가 미래를 예언하다.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점쟁이가 있었다.
그만해 나는 점쟁이 얘길 좋아하지 않아.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너무 잘난척 하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네 그렇습니까? 이 이야기의 점쟁이는...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라의 대소사를 주무르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한 점쟁이였습니다. 그러나 명성에는 관심이 없고 돈에도 큰 욕심이 없는지 항상 시장 한구석 작은 의자와 책상을 놓고 동전 몇푼을 받으며 점을 쳐주었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무엇을 물어보던 그건 그에게 별로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점쟁이는 때로는 대충 때로는 너무나 자세하게 점을 쳐주었습니다. 꼭 진짜로 앞일을 아는 것처럼 그는 동전 서른닢을 벌면 그날 장사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 지냈습니다. 때때로 오전이 가기 전에 서른닢을 채우고 가판을 접는 일도 있었지만. 서른닢을 벌지 못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은 그가 용한 것을 알았지만 너무나 싼 비용으로 점을 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점을 쳐서 앞날을 알고 위험한 일을 피했던 사람들조차 그의 능력에 대해서 큰 감흥없이 어쩌다 맞춘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죽은 뒤였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마지막 날에도 시장에서 점을 쳐주고 있었는데 서른닢을 다 벌지 않고 가판을 접더니. 주변의 가판에 있는 상인들에게 오늘은 시장 동쪽 묘지 너머 길이 몹시 흉하니 누구도 거기에 와서는 안된다고 당부를 하고 집으로 향했단 말입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그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고 다음 날 시장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참하게 살해된 채로 발견 된 것은 그날 오후 일찍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그가 평소에는 가지도 않았던 시장 동쪽 묘지 너머의 길에서 발견되었는데. 상처를 보나 주변의 흔적으로 보나 그가 우연한 사고로 죽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그 길에서 숨어있던 강도떼를 만났다가 행적이 들킬 것을 우려해서 강도떼에게 살해당 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가 용하다 용하다 하더니 자기 운명도 몰랐구만 하고 비웃었으나. 죽기 전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는 그 길로 가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 했던 일이 알려지자 그가 자기 운명을 정말로 몰랐는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소문이 퍼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애초에 강도떼와 한패였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도성 사람들이 강도떼에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희생을 자처하였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었지? 어느 쪽이었냐고요? 사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어느 쪽인지 모른다는 것 입니다.
점쟁이가 정말로 미래를 보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남겨진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거죠.
일어날 일을 알고 행동하는 모든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문제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아서 그걸 막기 위해 행동하였지만 그 결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이 바뀐다면, 자기가 옳은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하여튼 점쟁이는 사라져버렸고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래를 말해줄 사람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가 정말로 무엇을 봤는지는 그냥 궁금해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너는 꼭 너도 미래를 봤던 것처럼 말하는구나 악마는 이죽거렸다.
 
5. 남자가 그림 속의 여자를 사랑하다.
 
나는 이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아. 왜 그러시죠? 너는 아까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을 뿐이잖아. 나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너는 나고 나는 네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 고 있어.
너는 나의 증오를, 이 답답한 마음을 설명하려고 길고 지겨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뿐이야. 나는 이제 네 얘기가 궁금하지 않아. 
 
6. 마귀가 작별을 고하다
 
흙투성이가 되어 길가에서 소리를 지르다 지쳐 목이 쉬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말을 하던 악마는 이야기를 멈췄다.
이제 진정되었나요?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나요? 하지만 입가가 찢어져 흐르는 피를 혀로 핥던 나는 악마가 하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신음소리와 짐승소리 비슷한 소리를 낼 뿐이었다. 
 
악마는 나를 애처로운 눈-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으로 바라보고는 분변이 묻고 손톱이 조각나 있는 내 손을 꼭 쥐고는 덕수궁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손을 잡았다기 보다 나를 부축해서 걸어간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짐승이나 낼만한 소리를 계속 지르며 그에게 반쯤 기댄채로 비틀거리며 걸었고 하도 긁어 피가 나는 눈가에서는 피 눈물처럼 검은 물이 흘렀다.
 
그..뭐냐 그거 아십니까. 여기 덕수궁의 돌담길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거리를 같이 걸어간 사람들은 헤어지게 된다는 얘기가 있는데. 혹시 그 이야기가 우리 둘한테도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우연히도 바로 지금 궁금해졌습니다. 그니까 조금만 더 이렇게 둘이서 돌담길을 걸어봅시다. 우리가 정말로 헤어질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만약에 그럴 수만 있다면. 서로에게 좀 더 좋은 결과가 아닐까요?

나는 온몸을 비트느라 반쯤 쓰러진 상태로 그에게 기대어 있었지만. 그가 저 얘기를 하는 순간에는 그가 울먹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가 운다니.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 꼭 자기 자신과 작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지 않나?

그는 나를 붙잡았고 나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그와 나는 그렇게 비오는 날 돌담길을 비틀대며 걸어갔다. 한발짝 한발짝.
 
...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끝이다. 
나는 하려던 말도 차오르는 눈물도 참았다. 혼자서 비오는 길을 걸어가다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싯구를 떠올렸다.
 
防有鵲巢 방죽 위에 까치집이 있고 
邛有旨苕 터진 물길에는 맛있고 고운 능초풀 있네 
誰侜予美 누가 어여뿐 내 사람을 꾀어
心焉忉忉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가.
 
24년 7월 21일의 글이다.

하기의 글은 단 한 줄의 진실도 없음을 사전에 공지드리는바 참조 바랍니다.

올해 2월 페낭에 갔었다. 그렇게 안가려고 갖은 수를 다 썼는데 소용이 없었다.
공항에 가니 거래선 구매가 차를 타고 마중을 나와있었다. “로컬 음식점 가려는데 괜찮아?” 괜찮아 나는 로컬을 아주 좋아해. “로컬을 좋아하면 중국어를 좀 배우지 그래” 아냐 정정할게 나는 역시 글로벌이 좋아 맥도날드 스타벅스는 내 인생의 길잡이지. 구매는 희미하게 웃었다.
작은 도시라던 페낭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우리는 정말 길가의 가게에 들어가 중국음식을 먹고 농담을 몇개 하고 음식 사진을 찍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 시간을 조금 넘겼지만 구매는 “늦어도 돼, 너랑 먹고 간다고 했어. 내 보스가 그 대신 너 돌아가기 전에 꼭 인사해야하니까 말 없이 출국하지 말라더라”하고 말했다.
몇개인가 미팅을 하고 비행기 시간에 쫓겨 나가며 나는 구매에게 인사를 했다. K 다음에 또 봐, 5월? 4월? 그 쯤에 또 올게. 구매는 양산을 썼는데도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또 봐”라고 말했다.

커서가 깜빡인다. 사람의 숨소리보다 빠르다. 심장이 뛰는 속도보단 느리다.
나는 메일을 쓴다. 친애하는 K, 당신의 퇴직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작년에 당신이 건강 상의 이유로 잠시 휴직하고 복귀 하셨을 때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퇴직하게 되실 줄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쓴 문장을 다시 읽고, 잠시 생각하고 물을 마시고 다시 메일을 쓴다. 모든 말을 지우고 이렇게 쓴다.
‘친애하는 K, 우리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당신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매 담당자이고 그 회사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저의 파트너였습니다. 당신의 오랜 기간 도움과 서비스에 감사하고 당신이 퇴직 후에도 언제든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진심을 담아’ 나는 메일을 읽고 또 읽는다.

아직 나이가 젊어 내 누나 정도의 나이인 K는 4년 동안 나의 카운터 파트너였다. K는 암 말기로 더 이상 처치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퇴직을 한다고 한다. 그는 퇴직한다고 했던 날보다 4일을 더 출근했지만 나의 메일엔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고 보니 꼭 공중에 돌을 던지는 것 같은 짓을 했다 싶었다. 어떤 곡선도 허공에 남는 일은 없고 다만 말도 하지 못하는 돌만 땅에 떨어진다. 돌을 던진 사람조차 어디론가 가버리면 남는 것은 땅에 떨어진 물질 뿐이다.

작년 A형이 죽었던 월요일의 아침, 나는 A형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몇달이 지난 후에야 그가 내가 전화를 건 걸 알았었는지가 신경쓰였지만 나는 그의 사망시간도 모른다. 멍청한 행사가 있어서 장례식에조차 갈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 전의 금요일 퇴근하는 A형과 같이 있었던 것은 나다. 나는 퇴근하려는 그를 붙잡고 업무 협의를 하고 형의 자리에서 메일을 보내고 담배를 피러 간다는 뒷꽁무니에 인사를 했다. 우리가 친한 사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정말 띄엄띄엄 했고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일 얘기만 했을 뿐이다.

아니 결혼을 했다고? 하고 놀라하자 “너도 참 대단하다 2년이나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결혼했는지도 몰랐냐”라고 누군가 면박을 줬다. 내가 A형에게 아 저 솔직히 결혼하신지 몰랐었어요 라고 하자 그는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가 나와 이야기 할 때 몇 번이나 웃었더라 뭘 좋아했더라 무슨 이야기를 했지. 가족의 이야기를 했던가. 아니 내가 A형과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가 뭐였지. “다다음주 쯤에 H수석 올라오면 치맥 좀 하지”라고 했었나. 뭐였지.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치맥하자고.

메신져 앱에 A형의 이름으로 새로운 친구 추천이 떴다. 모르는 얼굴이다. 나는 아직도 A형의 번호를 지우지 않았기 때문에 형의 번호를 받은 사람이 추천에 뜬 것이다. 프로필을 보니 환하게 웃고 있는 개구쟁이 소년이다. 스마트폰을 산 것이 신이 났는지 친구들의 사진을 많이도 올렸다. 그 프로필을 삭제하려다 그대로 멈춰서서 생각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죽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의 가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형은 아이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사진 속의 개구쟁이가 형의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리도 없지만 형이 모습을 바꿔서 어딘가에 계속 살아있는게 아닐까 사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그 프로필을 지우고 전화번호를 지웠다.

여름, 친구들과 커피를 사러 단지를 가로질러 가는데 멀리 하얗게 햇볕이 비치는 곳에 A형이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가는 걸 보았다. 나는 어이- A책임-하고 그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흰 셔츠를 반팔로 접어 입은 그는 손으로 햇볕을 막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가 A형을 기억해야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다.

구매 K의 후임 L은 좀 서툰사람이라 나에게 전화를 하는 걸 어려워하고, 메일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채로 똑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보내온다. 나는 꼼꼼하지도 살갑지도 않아서 L과 업무 호흡은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고집을 부리며 뭔가를 해달라고 연락을 해왔기에 전화를 하면서 아웃룩을 뒤져 K가 보낸 메일을 찾았다. 이건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네 선임인 K랑 나랑 어떻게 협의 했었는지 메일 히스토리를 줄게. 혹시 나한테 전화연락하는게 부담되면 나만 넣어서 메일 보내도 괜찮아. 네 보스랑 내가 너보다 일 더 오래 했어. L은 어색하게 웃는다. K는 성격은 조용했는데 진짜 좀 까르르 웃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다음주에 다시 연락할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과연 다음주에 연락을 할까. 모르겠다.

나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나의 손자가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많아져서는 나를 추억하는 꿈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 이미 죽어 공기와 먼지가 되어있을 내가 살아있는 것에, 내가 그렇게나 사랑한 나의 아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한참을 앉아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피할 수 없는 끝에 대한 위로란 것은 이렇게 허망하고 갸냘픈 것이다.

나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고 공중의 나는 새를 보살피는 우리의 신을 생각한다. 우리의 신은 지금 어디에 날아오르는 새를 보살피느라 우리를 안아주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그냥 허공에 그려진 곡선일뿐이고, 움직임과 상승 그리고 추락일 뿐이어서 신이 우리를 바라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허공에 선을 긋는다. 언제까지 손을 들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19년 4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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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피의 책이다..
어디를 펼치든 모두 붉다.

<피의 책>, 클라이브 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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