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옛날의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주 최근의 일도 아닙니다. 때는 숲 속에서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늘어나 열매를 줍는 동물들보다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훌륭하다는 여겨지는 평판이 생겨났고 비버씨가 댐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공터를 크게 늘려 더 많은 동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소리씨는 어째서인지 농사를 짓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가끔 사촌인 비버씨네나 이웃의 곰씨네의 밭에서 도움을 줄 때도 있었지만 한가한 시간에는 강변에 나가서 진흙을 골랐습니다. 아주 이상한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죠.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릇이라고 해도 여러분 집에 있는 그릇들 처럼 편리하고 멋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냥 진흙을 이렇게 저렇게 빚고 말려서 나무 열매 정도 넣어 둘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오소리씨의 사촌인 비버씨는 그런 오소리씨가 맘에 들지 않았답니다. 손재주가 아까웠던거죠.
며칠을 고민하던 비버씨는 그날도 강가에서 진흙을 모아 가던 오소리씨에게 댐을 만드는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네 취미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우리가 하는 일은 밭과 논을 늘리는 훌륭한 일이야. 오소리씨는 고개를 끄덕이죠. 비버는 오소리씨의 유일한 사촌이었고 훌륭한 비버가 하는 말이니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아직 그릇의 훌륭함을 모르고 있어. 내가 장돌뱅이 개미햝이가 보여준 것 같은 흰 그릇을 만들어내면 알아줄지도 몰라.

오소리씨는 여름 동안 비버가 댐을 만드는 일을 열심히 도왔답니다. 비버의 댐은 나날이 갈수록 크고 튼튼해져갔죠. 해가 화창한 날에는 댐의 위쪽 끝에 햇볕이 하얗게 내리쬐어 오소리와 비버는 그 위에 누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마른 여름이었지만 비버의 댐이 모아둔 물 덕분에 어떤 동물도 목이 마르지 않았죠.

눈을 감고 햇볕을 쬐던 오소리씨는 말했습니다. 비버, 나는 잠시 구릉지대에 다녀오려고 해. 나에게 여름 동안의 삯을 계산해주지 않겠어? 비버씨는 깜짝 놀랐죠 가을이 된다고 해서 댐의 공사가 끝나는건 아니었으니까요. 증축이 끝나면 보수공사가 있고 또 비버씨는 자신의 밭도 일구어야 했으니까요. 구릉지대는 왜 다녀오려는거야? 라고 묻자 오소리씨는 거기 좋은 흙이 있대 그 흙만 있으면 흰 그릇을 잔뜩 만들 수 있다던데. 라고 말했죠. 비버씨는 또 그릇 얘기냐 하고 한숨을 쉬었지만 오소리씨에게 나무 열매를 잔뜩 주었죠.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와. 내년 봄이 되면 새끼 동물들이 늘어날거고 숲에는 공터가 더 필요해.

비버씨는 그렇게 혼자서 오소리씨를 기다렸어요. 겨울은 금방 왔어요. 해가 길어지고 숲의 어떤 넓은 공터에도 겨울의 긴 햇볕과 그림자가 늘어져 동물들은 어떤 계절보다 더 게으르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냈죠. 비버씨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댐의 위를 돌아다녔습니다. 오소리씨와 같이 쉬던 댐의 끝에 다다르면 코를 킁킁 거리며 먼 곳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구릉은 멀고 이미 겨울이 되었으니 겨울이 지나고 오는 게 좋겠군. 비버씨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었습니다. 그 해의 봄은 유독 영원처럼 긴 봄이었지요.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죠. 봄이 왔으니 천천히 출발하면 여름에는 도착하겠어. 비버씨는 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뽑았어요. 동물들이 찾아와 새끼들이 태어났으니 공터를 더 늘려야 한다고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죠. 오소리가 감독을 해줬으면 편할텐데...

그 영원 같던 봄은 아주 길게, 그리고 빠르게 사라졌고 금세 여름이 되었어요. 그 해 여름엔 비가 많이 오지도 적게 오지도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열심히 일했죠. 이제 비버와 오소리 둘이서 만들던 시절보다 댐은 훨씬 훌륭해지고 튼튼해졌어요. 다른 숲의 동물들이 기웃거리며 찾아와 댐을 구경했죠.
곰은 나무등걸에 앉아 바람을 쐬다 비버씨 네 댐은 우리 숲의 자랑이야 고마워 라고 감사를 표합니다. 비버씨는 머리를 긁적였어요. 오소리가 있었으면 더 좋은 댐을 만들수 있었을거야. 이런건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 가을이 되었어요. 이제 올때가 되었어 하지만 너무 늦군 오소리. 공사 현장에서 밥을 먹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비버씨는 고개를 들어서 사방을 보았죠. 하지만 이웃집의 너구리씨나 여우씨인 경우가 많았죠. 곰씨는 커다래서 아무리 몰라도 곰씨를 오소리씨로 착각할 일은 없었어요. 비버씨는 좀 퉁명스러워졌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군. 이라는 말이 비버씨의 말버릇이 되었습니다. 동물들은 때때로 그게 자기들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서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또 가을이 지났습니다. 겨울도 또 지나갔죠. 그 해 겨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버씨의 말버릇은 변함이 없었지만 동물들은 그가 누굴 기다리는지 잘 몰랐어요. 숲의 시간은 빨리 지나가니까 몇몇 젊은 동물들은 오소리씨가 누군지도 몰랐죠. 그런 젊은 동물들이 보기에 비버씨는 숲에서 제일 훌륭한 동물이었고, 무서운 동물이었죠.

또 한 번의 봄이 지나고 그리고 어느날 여름.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날. 비버가 댐의 꼭대기에서 저 멀리 숲의 저쪽을 보고 있던 날. 오소리씨가 돌아왔어요. 흰 흙을 잔뜩 지고 그리고, 아기 오소리를 데리고 있었어요. 열매처럼 작고 아름다운 아이였죠.
오소리씨가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사촌인 비버씨였습니다. 비버씨 내 딸이야.
비버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군. 그래서 늦은거냐. 하고 생각을 했죠.
오소리씨가 원래 살던 동굴을 청소하는 동안 오소리씨의 작은 아이를 풀숲에 눕혀놓고 비버씨는 묵묵히 나무 뿌리를 갉으며 중얼 거렸죠. 이제 돌아왔으니 내 일을 도와줄수 있겠지

하지만 오소리씨는 돌아오고서도 비버씨를 돕지 않았어요. 그 댐은 이제 너와 내가 만들던 댐이 아냐 아주 훌륭해졌어. 하고 말하고 오소리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릇을 빚었고 딸을 키웠죠. 오소리씨는 정말 좋은 엄마였어요.비버씨는 댐의 높은 곳에서 나무를 갉다가 오소리씨가 딸과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버씨는 이제 더 이상 너무 늦는군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주 과묵해졌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오소리씨가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나 겨울이 가기 전의 어느 날, 오소리씨는 숲속의 동물들을 모아서 이제까지 만들어온 자기의 그릇을 보여주었답니다. 사촌인 비버씨, 친했던 곰씨, 이야기꾼 여우씨 등 많은 동물들이 모였죠. 정말 많은 그릇이 있었죠 나무 열매를 올려놓는 접시와 항아리. 빗살무니와 발바닥무늬 그릇. 오소리씨는 자랑스럽게 자기 그릇들을 소개했죠. 마음껏 가져가세요. 곡식을 넣는데도 쓸수 있을거에요. 이제까지 숲속에서는 곡식을 그냥 동굴에 쌓아뒀었거든요. 이제는 동굴 바닥에 두다 물에 젖는 일도 없을 거에요. 초대된 동물들은 오소리씨의 그릇을 구경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죠. 과연, 이런걸 하고 있었구나. 다들 웃는 얼굴로 오소리씨를 칭찬하고 오소리씨의 딸에게 너희 엄마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 하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죠.

그런데 그 때 오소리씨의 초대에 제일 먼저 나타나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던 비버씨가 갑자기 일어나 퉁명스럽게 소리쳤습니다. 말도 안돼 이런건 게으름뱅이의 취미일 뿐이야.
오소리씨는 당황해서 비버를 쳐다보았습니다. 비버 무슨 일이야.
우리가 매년 만들어내는 곡식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작은 그릇에 곡식을 채운다는거지? 나무 열매나 몇개씩 따먹고 배를 주리던 시절에나 어울리는 재주야. 우리가 털이 없어 앞발이 부드러운 인간도 아니고 이런 흙투성이 물건이 필요할리가 없잖아.
비버씨는 다른 동물들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시간 낭비 했군. 성실한 숲속 동물들의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너는 어떻게 된거 아냐? 이런 걸 만들 시간에 댐에 나와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줄테니까. 동굴을 나가버리는 비버씨의 뒤를 웅성거리면서도 많은 동물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오소리씨는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은 오소리씨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연중에 농사를 짓는 동물이 훌륭해.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비버씨는 댐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 제일 훌륭했어요. 오소리씨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훌륭해 똑똑해 잘났어. 나는 상대도 안되지. 하지만 나는 그릇을 만들고 싶어. 
오소리씨는 낮에는 열매를 줍고 밤에는 그릇을 만들었어요. 동굴 가득 그릇이 쌓여갔어요. 가끔 개미핥기 장돌뱅이가 와서 그릇을 사주기도 했어요. 숲에서 만든것치고 훌륭해. 근데 여기선 아무도 안 쓰는거야?
충분히 훌륭하지 않아서 그래. 하고 오소리씨는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소리씨는 자기가 훌륭한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비버씨가 자길 인정해주지 않는거라고 생각했어요. 딸이 자라 스스로 땅을 파고 열매를 따올 수 있게 되자 오소리씨는 더욱 많은 시간을 그릇을 만드는데 쏟았습니다. 비버씨가 더 훌륭해 지는 동안 말이죠 결국 주변 숲 전체를 통틀어서도 제일 근면하고 훌륭한 동물이 되었죠.

오소리씨가 흰 흙을 가지러 구릉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황야의 문턱에서 쓰러졌을때도 비버씨는 댐을 짓고 있었죠. 소식을 들은 오소리씨의 딸이 오소리씨의 뼈를 오소리씨가 마지막으로 만든 그릇에 담아돌아왔죠.
뚜껑이 있는 항아리였어요 아주 특이한 작품이었죠. 그리고 작은 오소리씨는 이제 오소리씨와 완전히 똑같이 닮아 꼭 오소리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비버씨는 바쁜 일과 중에 부러 동굴에 찾아와 작은 오소리씨에게 말했어요. 알다시피 너희 엄마와 나는 사촌이다. 하지만 너희 엄마는 훌륭한 손재주를 썩혔어. 더 건실한 일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야.
작은 오소리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비버씨는 앞발을 핥다가 말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너의 친척이다 일자리가 필요하면 언제라도 찾아와라. 하지만 작은 오소리씨는 비버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대신 그 많던 그릇을 숲 속의 동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죠. 나눠주고 남은 것들은 모두 팔렸습니다.
장돌뱅이가 와서 며칠에 걸쳐서 실고 갔죠. 남은 것은 엄마 오소리씨의 뼈가 든 뚜껑이 달린 항아리 뿐이었어요. 작은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들진 않았어요. 하지만 댐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미도 독수리도 느티나무도 알듯이 그 해 정말로 큰 홍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손을 쓸수 없었죠. 비가 열흘 밤낮 동안 내렸어요. 해가 지나 더 크고 훌륭해졌던 비버씨의 댐이...결국엔 무너졌죠. 곡식 창고가 물이 잠겼어요. 숲의 반이, 아니 숲의 전부가 물에 잠겼죠 아무 것도 젖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파종을 위해 남겨놓은 것들도 모두 물이 묻어 썩기 시작했어요. 동물들은 아직 젖지 않은 나무 위에 올라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닷새가 지난 후였죠.

강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댐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개척한 공터는 대부분 다시 물에 잠겼고 숲은 아주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죠. 적어도 동물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모든 동물들. 살아남은 동물들이 겨우 해가 난 숲의 공터에 모였어요. 먹을수 있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파종할 씨앗에 물이 찬게 문제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습니다.

내가...인간 마을에 가서 씨앗을 구해오겠다. 곰씨가 입을 열자 모두 반대합니다. 여우씨가 말합니다. 무모한 짓 하지마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라. 털이 없어서 우릴 질투해 가죽을 벗기려고 드는 놈들이라고.
비버씨는 가슴이 타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다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인간 마을에 가야하는건 나야. 내 댐이 무너져서 이렇게 된거야. 내가 꼭 씨앗을 구해오겠어. 아직도 숲의 가장 훌륭한 동물이었던 비버씨가 그렇게 얘기하자 동물들은 모두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 망설였습니다.

그 때 풀 숲에서 작은 오소리씨가 나타났습니다. 뚜껑달린 항아리를 안은채로 작은 오소리씨도 물에 휩쓸렸었는지 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로 말했습니다. 씨앗을 구하러 가실 필요 없어요. 비가 오기 전에 제가 준비해둔게 있어요.작은 오소리씨는 뚜껑을 열어, 비버씨 앞의 겨우 마르기 시작한 땅에 항아리 살짝 기울입니다.
너..어머니의 뼈를...하고 놀란 비버씨 앞에 떨어진건

씨앗들이었습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숲에 비가 심상치 않게 오자 어머니 대신 씨앗을 넣어둔 것 입니다. 오소리씨의 뼈는 비에 씻겨 나갔지만 타타탁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젖지 않은 씨앗들이 공터에 떨어집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분명 어머니도 이걸 바라셨을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버씨는, 비버씨는 가만히 씨앗을 봅니다.

내가 그 얘기를 들은 것은 어느 무당벌레로부터이다.


나는 가끔 공원에 나가 사람이 잘 찾아오지 않는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 하는데, 이 무당벌레는 신기하게도 풀이나 꽃 위에 앉지 않고 내 옷깃에 가만히 앉아서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성격이 급한 작은 벌레 답지 않게 한참이나 그림을 보고 있던 무당벌레는 풀쩍 날아올라 내 손과 연습장 위로 한바퀴를 돌더니 내 연습장 위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인간은 이런거 좋아해? 
 이런거?
 응, 그림 말야. 그림이라고 부르지?
 응, 나는 좋아해. 너는 좋아하니?


무당벌레는 대답을 하지 않고 파르르 하고 날아 연습장의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말했다.
나 말야 전에 그림이랑 얘기한 적이 있거든.
그러니까 무당벌레가 해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림은 처음에는 동그라미였대.
 동그라미?
 응, 동그라미. 동그라미에 눈이 이렇게 두개가 찍히고 그 아래엔 날개같은 모양의 금이 그어져 있었대.
 그거 웃는 얼굴이라고 하는거야.
 웃는얼굴? 그래 처음에는 웃는 얼굴이었다고 해.


그 그림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깨달은 건 어느 작은 여자아이의 손바닥 안이었다고 한다.
열이 나서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아이는 아빠를 붙잡고 보채고 있었다.
어쩌지, 아빠 잠시 다녀오면 안될까? 하고 아빠는 여자아이를 달래보았지만 아이는 무엇보다 무서워서.
모르는 사람만 잔뜩 있는 병원에 혼자 있는게 무서워서 아빠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자 아빠는 품 속에서 펜을 꺼내서.아이의 오른 손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점을 두개. 그리고 웃는 얼굴. 작은 아이 손 안에 그려진 작은 웃는 얼굴.
 아빠 이게 뭐야?
 친구야.
 친구?
 응 아빠 다녀올 동안 친구랑 같이 있어 정말로 금방 다녀올게.
아이는 아빠를 쳐다보고 손바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빠는 꼭 가야하나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는 웃는지 우는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녀올게. 하고 뛰어나갔다.
손바닥 안의 "친구"는 웃고 있었다.
그 때 까지 그림은 오직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소녀가 그림에게 귓속말을 했다. 안녕, 나는 네 친구야. 너도 내 친구니?
그림은 배시시 하고 웃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 곁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열이 내린채 자고 있었다.
정말로 착한 아이에요. 하고 누군가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자는 아이 옆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아이는 자고 있었지만, 웃는 얼굴 그림은 아빠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빠는 그 다음부터 아이가 떼를 쓰거나, 착한일을 하거나, 혼자 있게 되거나 하면 손바닥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처음엔 그냥 동그라미에 웃는 얼굴이었던 그림은, 언제부터인가 코와 귀가 생기고 머리카락이 생겼다.
아이의 손바닥은 금방 커졌고, 때로는 손등, 때로는 팔뚝에 여자아이를 그려줬다.
 이건 내 친구야.
 네 친구?
 응 내 친구야.
아이는 그림이 지워지니까 손을 씻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설득했다. 네 친구는 어디 다른 곳에 가는게 아냐.
네가 손을 씻어서 지워지면 네 방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그림을 그리면 손으로 옮겨오는거야. 라고 말했다.
응, 그렇구나. 내가 안 보고 있어도 나랑 같이 있는거구나.
그래서 그림은 그 날부터 정말로 아이의 방에서 아이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배시시 웃음만 짓고 있다가 토라지거나 크게 웃을수 있게 되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는 그림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나 손이랑 발이 있으면 걸어다니고 싶어.
지금은 데굴데굴 굴러가기만 하니까?
응 지금은 데굴데굴 굴러가기만 하니까. 이곳저곳 다니려면 굴러가기만 해서는 안되잖아.
아이는 아빠에게 손이랑 발도 그려줘. 라고 말했다.
아빠가 처음으로 그린 손이랑 발은 정말 형편없었다.
아빠, 이런 손이랑 발은 얼음이 가득한 하얀 바다나 연기가 나는 산에 갈수 없어.
인도에 있는 왕비를 사랑한 왕이 세운 성에도 갈수 없고 말야.
맞아,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던 것 처럼 말야.
아니 도대체 저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걸까, 하고 아빠는 쓴웃음을 짓고 그날부터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아니 그 뒤로도 한참을 서툴렀지만 곧 아이만은 잘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그 모습을 아이의 손바닥에 그려주었다.
 이건 네 친구지?
 응 내 친구야. 아빠가 없을 때도 항상 나랑 같이 있어줘.
아빠는 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아이는 아빠와 공원에 가는 걸 좋아했다. 동물원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코끼리였다. 기린을 무서워했는데 한 번 기린 우리에 가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빠, 밥을 먹을 때는 식탁을 예쁘게 정리해야해. 하고 작은 식탁보를 깔아 밥과 반찬을 엉망으로 올려놓았다.
아빠는 잘했다고 상으로 공주 옷을 입은 친구를 그려주었다. 머리 위에는 별이, 옷에는 꽃이 달려있었다.
아빠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달려와서 아빠의 다리를 안았다.
이야기 해줘. 엄지 동자 얘기가 좋겠어. 하고 맘대로 이야기를 정했다.
그림과 아이는 자리에 누워 아빠의 엄지 동자 얘기를 들었다.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습니다.
엄지 동자 얘기인데 왜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나와? 하고 그림이 묻자
쉿. 우선 잘 들어봐. 하고 아이가 아니 소녀가 말했다.


소녀는 자주 아팠지만 달리기를 좋아했습니다. 큰 소리로 웃으면서 달리고
학교에서 받은 과제 책을 빽빽하게 채우는 걸 좋아했습니다. 하고 소녀가 스스로 말했다.
가지런히 정리하면 좋아. 재미있어. 하고 그림은 따라 말했다.
둘은 좋은 친구였다.
소녀가 학교에 가게 되자 그림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아빠는 자주 소녀의 손에 그림을 그렸다.
아빠는 예전보다 더 바빴고 소녀가 혼자 있는 시간은 그림이 혼자있는 시간만큼 많았으니까.
멜빵 바지, 좋아하는 꽃무늬 원피스, 소녀가 좋아하는 피리를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소녀가 학교에서 피리를 불 때는 그림도 집에서 피리를 불었다. 
어느날 소녀는 볼이 빨갛게 되서 집으로 들어와 이거봐 이 가수 정말 멋있어! 하고 처음 듣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끝내준다.
 끝내주지?
소녀와 그림은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고 춤을 추다 지치면 책을 읽었다.
그렇게 백년을 소녀와 그림은 친구로 보냈다. 정말 백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소녀가 그림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 백년 동안 친구하자. 그러니까 아마 둘은 백년 동안 친구로 지냈을게 틀림없었다.


아무도 잠을 자지 않는지 시끄러운 밤이 있었다.
학교에 갔었었나, 놀러나간다고 했었나. 그날따라 소녀는 그림과 함께 외출하지 않았다.
아빠가 며칠이나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다.
왜냐하면 정말로 들어올 시간이 훨씬 지나고도 소녀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 집에 전화가 울렸고 어느 샌가 집에 돌아온 아빠가 큰 소리로 통화를 했다. 
아직도 소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림은 소녀의 방 구석에 앉아 소녀를 기다렸다.
초조하게,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소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도 집을 나가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도, 아빠도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림은 소녀의 방에서 데구르르 구르고 엎드려 다리를 흔들고 책 사이에 숨어서 시간을 보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그림은 알수가 없었다. 인형의 머리위에 올라서서 창가까지 올라왔을 때 그림은 창 밖에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아빠! 하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 그림은 깜짝 놀라 입을 막았지만 애초부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창문은 닫혀있었고 그림은 새처럼 작았으니까. 
아빠는 집에 돌아와도 소녀의 방에 들어오진 않았다. 들어올것 처럼 문을 두드렸지만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녀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아빠는 알고 있었다. 아빠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그림은 혼자 시간을 보냈다.


며칠 뒤부터 아빠는 소녀의 방을 찾아왔다. 올 때는 방 문을 두어번 두드리고 조심스럽게 방을 연다음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을 쓸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금방 방을 나가버렸지만 때때로 방의 의자에 앉거나 방 바닥에 앉아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림은 아빠가 방에 들어올 때면 벽에 가만히 서서 그림인척 했다. 그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그림이 잘하는 거였다. 
소녀는 어딜 갔어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빠는 왜 그런 슬픔 얼굴을 하고 있어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빠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집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소녀의 방에선 울지 않았다.
울 것 같은 일그러진 표정이 되면 소녀의 방에서 급히 나갔다. 그 방에서 울면 누군가 자기가 우는 걸 듣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빠가 우는 소리는, 혹은 우는 걸 참는 소리는 소녀의 방에서도 아주 잘 들렸다.
그림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모든 걸 이해했다.


그날, 드물게도 아빠는 소녀의 방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방을 청소하다 피곤해진게 틀림없었다.
전날 밤 그림은 자기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을 집중해서 이상하게 들리지 않도록 소녀의 목소리로 "아빠"라는 말을 해보았다. 아빠. 아빠 일어나봐요.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천천히 움직여 아빠의 위를 비추자 아빠는 햇살보다 더 천천히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아빠 일어났네? 그림은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도 그림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던 아빠는 자리에 일어나 소녀의, 그림의 방을 나가버렸다.


매일 매일 소녀의 방에 찾아와 바닥에 앉아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림은 평소처럼 책 위에 앉아있거나 책상을 뛰어다니다가
아빠가 오면 아빠 안녕? 또 왔네? 하고 인사해주었다.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리에 앉아있다가 30분쯤 그림을 쳐다보다가 방을 나가버렸다. 한 번은 그림은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그 때 나 아팠을 때 말야 아빠가 가버리는거 싫었지만 손에 웃는 얼굴 그려줘서 좋았어. 아빠는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무 말 없이 나가버렸다.
그림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소녀인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날 부터 점점 그림은 소녀의 빈자리에 미끌어내려가듯이 변했다.
아빠는 이제 소녀의 방에 와서 그림을 쳐다보는게 아니었다. 그림을 그렸다. 연습장에 소녀를 그렸다. 하루에 한 장. 어떨때는 세장도 그렸다. 웃는 소녀의 모습 뛰는 소녀의 모습 밥을 먹는 소녀의 모습. 그림은 아빠의 그런 모습을 구경했다.


그림은 점점 색이 진해지고 키가 커졌다. 검은 색과 하얀 색이 아니라 분을 바른 것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볼이 생겼고 갈색의 팔꿈치와 무릎이 생겼다. 목소리는 (시험해보지 않았지만) 분명 먼 곳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를 낼수도 있을 것이다. 창 밖을 날아가는 굴뚝새에게 소녀가 하던 것처럼 "왕!"하고 짧은 소리를 질러도 보았다.


아빠는 점점 색이 흐려져 갔다. 머리 카락은 더 이상 새까맣지 않았다. 목소리는 작아지고 매일매일 마르고 앙상해져갔다.
아빠의 그림에 나오는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아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림은 점점 아빠가 걱정스러워져가기 시작했다. 아빠, 밥은 먹고 있어? 라고 묻자 아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빠 언제까지 이렇게 그림만 그릴거야? 라고 묻자. 아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림은 깨달았다. 내가 있기 때문에 아빠가 저렇게 작아지고 있는거야. 소녀의 방은 이제 소녀를 그린 아빠의 그림으로 가득차서 더 이상 소녀의 방 같지가 않았다.


그날은 소녀가 돌아오지 않은 날로부터 1년 정도 지난 날이었다. 아니 2년이 지났을지도 3년이 지났을 지도 몰랐다.
그림은 잘 알 수 없었지만 그 날과 같은 햇볕 냄새가 나는 날이었다. 모두가 행복한 표정으로 거리를 걸어다녔고 풀 냄새가 났다. 그래, 그림은 이제 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팔에 햇볕이 닿으면 따스했다. 머리카락을 입으로 물면 미끌미끌하고도 까끌까끌한 이상한 맛이 났다. 아빠는 소녀가 좋아하는 멋진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그림은 아빠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림은, 아니 소녀는, 아니 아가씨는 창틀에 앉아 뒤를 돌아 소녀의 방을 바라보았다. 방은 그대로였다.
바람이 불고, 무당벌레가 춤을 추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아가씨는 창틀에서 뛰어내렸다.
붕, 하는 소리와 함께 아가씨는 날아올랐다. 얼마나 가볍게 날아올랐던지 지나가던 야구 꼬마가 와, 저 사람봐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야구 꼬마를 빼고 아무도 그녀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무당벌레는 날개를 파르르 떨고 다리를 두어번 사방으로 펴서 사람으로 치자면 아주 시원한 기지개를 폈다.


 ...그래서 그림은 사람이 되었대. 여자아이가 원하던 대로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갖가지 모험도 많이 했더라구. 멋진 남자랑 춤도 추고 토끼처럼 달려보기도 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바다도 보고 
 산도 보고 오래된 성도 보았대.


나는 무당벌레를 바라보았다. 무당벌레는 배가 고파졌는지 고개를 몇번 위아래로 흔들더니 점차 이야기와 나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무당벌레에게 노래하듯 물었다.


 북쪽에 하얀 얼음이 가득한 바다를 보았겠구나. 동쪽에 불이 난 것 처럼 연기가 나는 산을 보았겠구나. 
 왕비를 사랑한 왕이 세운 커다란 성을 보고 말이지. 봄에는 꽃을 보고 가을에는 달을 보고 밤마다 별을 보았겠지.


 그래 맞아 그거였어. 근데 어떻게 알았지? 


무당벌레는 포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올라 진딧물을 먹으러 가버렸다.








2015년 8월 31일, 11시 59분. World's end girlfriend의 앨범 Hurtbreak wonderland를 들으며 쓰다.






: 이제는 없는 사람이다. 그만 그에게 작별을 합시다.



세상은 고통 뿐이고 단 한 순간도 살아있을만한 가치는 없어요.

저는 사실 여러분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답니다. 저는 마음이 있었던 적도 없어요.

저에겐 그냥 슬픔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제 작별인사를 받아주세요.

뒷걸음질쳐 나가는 제 최대한의 우아한 인사를 봐주세요.


자기 발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고. 보기 흉한 꼴로 나뒹굴어져 눈물 범벅이 되어도.

절룩거리며 절룩거리며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사라져도. 끝까지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이윽고 뒤돌아선 그 시점에선 다시는 저를 떠올리지 말아주세요.

이것이 저의 마지막 부탁일 따름입니다.









아래 이야기는 북미와 남미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죽은 배우자를 찾으러 가는 구전이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많은 버전이 있다. 때로는 남편이, 때로는 아내가 죽은 배우자를 찾으러 간다.

 

....

 

그는 위대한 사냥꾼이자 부족에서 제일가는 주술사. 마음 속 깊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네.

 

아내가 죽자 일곱 개의 매듭으로 끈을 묶어 몸에 두르고 그녀의 무덤에서 그녀가 일어나길 기다렸네.

 

이윽고 이틀 밤을 꼬박 새자 무덤이 열리고, 생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녀가 일어나 무덤을 떠났지.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갔지.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는 날씬한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지

 

"나는 이제 죽었고 당신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나를 따라오지 마세요"

 

그녀는 황야를 가로질러 산을 넘었고 강을 건넜어.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갔지.

 

이윽고 며칠 밤을 걸려 저 건너편에 죽은자들의 섬이 보였고 강을 지키는 위대한 자가 그 둘 앞에 나타났어.

 

"산 사람의 냄새가 나는구나. 네 뒤에 있는 저자는 누구냐?"

 

"저 사람은 제 남편입니다" 아내는 위대한 자에게 머리를 숙였어.

 

위대한 자는 그를 쳐다보았지,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어 일곱개의 매듭으로 끈을 묶었기 때문이야.

 

"너는 무엇을 바라고 여기에 왔는가"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어 "저는 제 아내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자가!" 위대한 자는 숲이 떨릴 정도로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지. 하지만 그는 용감했어. 물러서지 않았지.

 

아내는 그의 어깨 끈을 잡았어. 죽은 사람처럼 차갑게 덜덜 떠는 아내의 손을 잡았지.

 

위대한 자는 그들을 보고 깊은 숨을 쉬었어. "그렇다면 너에게 하룻밤을 주겠다. 가라"

 

사냥꾼과 그의 아내는 카누에 몸을 실고 강을 건넜어. 물이 밤처럼 검었지만 두려울게 없었지.

 

죽은 자들의 섬을 건너는 카누에는 죽은자들의 죄가 카누 위에 돌처럼 쌓여 때때로 가라앉지만

 

사냥꾼은 아내의 손을 놓지 않았어. 그는 아무 것도 후회하는 게 없었거든.

 

죽은자들의 섬에 내리자 그들의 친척과 가족들이 그들을 환영했지. 낯선 자들 익숙한 자들 모두 친족이었어.

 

남자들은 함께 사냥을 나갔지. 여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자 모두 볼을 부비며 기뻐했지.

 

밤이 되자 불을 피워놓고 모두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어. 아내도 사냥꾼도 배불리 먹고 큰 소리로 웃었어. 

 

사냥꾼과 아내는 같은 텐트에서 잠을 잤지. 살아있는 사람처럼 따뜻했어. 

 

아침이 되자, 야영지는 온데 간데 없었어. 아내가 아니라 검게 탄 숯이 그의 잠자리 옆에 놓여있었지.

 

위대한 자도, 아내도, 친족들도 아무데도 없었어. 일곱 번의 매듭으로 꼬은 줄도 그들을 돌려놓진 못하였지

 

그가 실수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 단지 그에게 허락되어 있던게 단 하룻 밤이었을 뿐이야.

 

그의 아내가 자신의 인생을 꽉 채워서 살았던 것처럼 말이지. 결국 위대한 사냥꾼도 그걸 이해했어.

 

그는 며칠을 걸려서 갔던 길을 그 배에 배가 되는 시간을 걸려서 돌아왔지.

 

맹세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가 돌아오는 길에 검던 머리는 하얗게 되고 

 

뺨은 화살을 맞은 사슴처럼 패였지. 마을에 돌아온 그는 사람들을 불러 이야기를 시작했지.

 

이 모든 이야기는 위대한 사냥꾼이자, 부족에서 제일 가는 주술사인 그가 아이들에게 남긴 이야기.

 

이야기를 끝낸 그는 몸을 씻기 위해 강가로 향했어. 

 

강변에 선 위대한 전사, 노래를 불렀지 "아이야- 아이야- 내 이야기를 들어라."

 

노래가 끝나자, 독을 품은 작은 뱀이 수풀에서 살그머니 기어나와 그의 발목을 물었지. 그는 그대로 무너졌어. 

 

그는 그렇게 죽었지. 그는 그렇게 아내에게로 다시 돌아갔어.

 

그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았을거야.

 

伯樂 본명은 손양(孫陽). 생몰년 미상.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로을 감정하는 상마가(相馬家)였다. 그 안목이 특출나 여러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사람들은 본명인 손양 대신 백락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화 중 하나인 ‘伯樂相馬(백락상마)’의 백락이 말을 관찰하다 말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나왔다.

목공(穆公)이라는 왕이 백락에게 말했다. “당신도 이제 늙었으니 당신의 자손 중에 명마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하시오.” 백락이 대답했다. “명마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구방고라는 사람이 저보다 더욱 말을 잘 봅니다.” 목공은 구방고로 하여금 명마를 구하게 하였다. 구방고는 천하를 다니다가 돌아와 명마를 구했다고 보고하였다. “어떤 말이오?” 목공이 물었다. “누런빛의 암말입니다.” 목공은 하인으로 하여금 그 말을 살피고 오게 하였다. 하인은 그 말이 검은빛의 수말이라고 보고하였다. 목공은 불쾌하여 백락을 불렀다. “당신이 추천했던 구방고라는 자는 말의 색깔이나 암수조차도 구별 못하니 어찌 된 일이오?” 백락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말하였다. “구방고가 본 것은 말의 내면에 있는 명마의 소질입니다. 그것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므로 겉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구방고는 살펴야 할 것만을 살피고, 살피지 않아도 될 것은 빠뜨린 것입니다.” 목공이 그 말을 직접 길러보니 과연 천하의 명마였다.

...

 

모월 모일.

어머님의 기별을 살피고 밭에 나가 하인들과 기장을 살피었다. 노대가 올해는 비가 잦지도 부족하지도 않아 기장이 잘 자랄 것이 틀림없다고 몇번이나 반복하였다. 오후엔 구방인이 인편이 보낸 편지가 왔다.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 편지를 읽었다. 급히 지필묵을 준비 시켜 몇 줄을 적어 돌려보냈다. 

모월 모일.

낮에 말을 보아달라는 사람이 왔다. 손대인 손대인 하며 내 분에 넘치는 선물을 가져왔기에 선물은 돌려보냈지만 말을 감정해주었다. 나보단 수도의 구방인이 명인이니 다음엔 그를 알아보오 하자. 어찌 천하에 백락선생보다 말을 감식하는데 뛰어난 자가 있겠소 하고 부끄러운 말을 하기에 손사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모월 모일.

기장을 돌보는 중 사람이 왔다. 백락 선생. 하고 부르기에 고개를 숙였는데 구방인이 찾아온 것이라 왈칵 껴안고 구대인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소 하고 물었다. 말없이 웃기만 하여 밤새 술을 기울였다.
내 말을 하나 골라두었다오. 하더니 요 근중에 본 말 중에 제일로 훌륭하니 선생께 보내겠소. 하며 웃었다.

싱겁기도 하다 그 친구. 어떤 말이길래 그토록 훌륭하오? 하고 물어보니 밤색의 암말이라오. 하고 대답했다. 새벽이 되자 곧 채비를 하더니 목공이 기다리시는 수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월 모일.

하루 종일 동풍이 불어 바람막이를 세웠다. 백락 선생은 귀하신 몸인데 어찌 이런 일을 직접 하는가? 하고 지나가던 근방의 촌부가 웃으며 묻기에 그러지 마시고 그늘에서 쉬시구랴 하고 술을 꺼내 한 잔을 마시라 하고 주었다.

말을 보는데 최고의 명인은 이제 구방인이라고 할 수 있소. 내 하나 뿐인 벗이라오. 하고 말하자 촌부는 과연 과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구방인이 보냈다는 암말이 도착하질 않았다. 수도에 돌림병이 돈다니 그 탓이 아닌가 싶다.

 

모월 모일.

수도에서 사람이 왔다. 머리에 베 끈을 동여매고 온 그는 곧바로 내 집 앞에 달려와 구방인이 병마로 숨이 경각에 이르렀으니 나를 모시러 왔다고 말했다. 경황이 없이 소매를 묶고 여행 채비를 갖추기도 전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수도에서 와서. 구방인 어르신이 한시라도 빨리 백락 선생을 모시러 오라 하였다고 했다.

동구 밖을 건너자 멀리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이 소매에 검은 천을 묶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망연자실하여 수도까지 다녀오는데 손발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모월 모일.

바람이 차가워지기 전에 보리를 심으려 근방의 사람들과 상의를 하였다. 

목공께서 사람을 보내 이제 말을 알아보려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냐고 전갈을 보내셨다. 이제 저는 말을 찾으러 가기 위해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나이다. 멀리 수도를 향해 절을 드리고 서한을 인편에 전달하였다.


모월 모일.

구방인이 보낸 말이 도착하였다. 구방인은 밤색 암말이라고 하였으나 도착 한 것은 검은색 종마였다. 달리는 모습을 보니 역시나 천하에 다시 없을 명마였다. 잘 자란 보리 밭이 얼마나 푸른지 눈이 시려왔다.

 

 

광대의 모자를 쓴 악마는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또 내기에 졌어."
"또 너에게 속았지."
몇달을 불타던 보리밭은 까맣게 타올라 이제 흔적도 남지 않았고. 악마는 재를 잔뜩 발라 얼굴에 발라 슬픈 얼굴을 만들었다.
"봐,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나는 이제 조금 두려워."
 

이 것은 산이 젊어, 모든 강이 끝없이 땅을 달려도 바다에 닿지 않을 적의 이야기이다.
그 시대에도 인간이 살았던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인간같기도 하고 짐승같기도 한 것들이 있어 (지금에 우리는 그들을 요妖라 칭한다.)
그들이 밤의 주인이었으니 사람들을 해치고 길을 걸어다녔다.
지금의 세상에 그들이 없는 것은 한 행자의 보살행에 의해서라고 하였다.

연유야 지금의 우리들은 알 수 없으나,
한 행자가 불타 앞에서 세상의 모든 악을 물리쳐 사방을 평안하게 하리라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 다짐이 얼마나 강했던지 행자의 눈에는 염마가 깃든 것 같았고 그 걸음걸음은 삭풍과 같아.
그가 불타 앞에 머리를 굽힌 뒤 오십년도 되지 않아 세상의 악과 요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으나 
그 업의 잔혹함에는 보살마저 혀를 찰 정도였다고 한다.
 
 
천축은 그의 공덕이 크나 죄업 또한 깊음을 알아.
나한으로 삼지 않고 다만 후생에 천인의 왕으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 후에 깨달음을 알아, 미래불로 태어나길 바라였다.
하지만 행자는 다만 세상의 평안을 바랐으니
지금 이 자리에 죽어 육신이 먼지처럼 흩어지길 원했다.
 
 
마침내. 대일여래의 광휘가 행자에게 닿자 행자의 미망은 씻겨 나갔으나,
죄가 깊었던 행자의 육신은 그대로 스러져 혼백마저 간 곳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가 처음부터 바란 그대로였다.

...

삼천세계의 불타 중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기에 우리는 그 뒤 행자의 간 곳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야기꾼 중에선 석가가 가섭의 앞에서 꺾어든 꽃이야 말로 그 행자의 후생이라 하는 자도 있어.

여기에 적어두는 바. 분명 행자에게 후생이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렇게 덧없을 것이리라.

이야기꾼 또한 그런 것이다. 스스로의 죄 깊음을 알아
어떤 신의 위업으로도 구원받지 못함을 알고 있으니,
다만 소원으로서 단 한 명에게라도 위로가 되길 바랄 뿐이니.

세상에서 가장 검은 밤만을 골라 걸어갈 뿐이다.
누군가 지나간 뒤에라면 그 밤은 더 이상 가장 어두운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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