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려고 계단을 내려오니 하늘이 검푸른 색이었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먼 곳을 쳐다보고 생각을 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여기에 쓰지 않기로 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입 밖에 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잊어버릴 그런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코트에 한쪽 팔은 끼워넣고 다른 쪽은 어깨에 걸친 채로 집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겨울이 나를 따라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봄이 왔지만,
나는 아직도 내 어딘가가 결락된 것처럼 느껴진다.
오랑캐 땅은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아.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 동방규(東方虬), <소군원(昭君怨)>
몸도, 마음도 어딘가 깨져서는 원래의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그릇처럼 되었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게 되었고 어깨 위로 올리지 못하는 왼팔은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되새기게 한다. 나아지겠지, 나아져야지 하고 생각하며 한달 남짓 재활을 받고 나서야 어깨의 고통이 좀 가시고 서툰 동작이나마 하게 되었다. 언제까지 재활 치료를 해야할까요 몇주 정도 걸릴 것 같나요. 라고 묻자 다소 심술궂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재활치료사는 몇 주요? 몇 달이 아니고요? 라고 말하더니 곧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지금 잘 낫고 계세요. 그래도 두달은 더 하셔야 할 것 같네요. 라고 말한다. 어깨 언저리까지 팔을 힘들게 들어올리며 나는 땀투성이가 된다. 이 쉬운 동작이 이렇게 어려우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재활치료사는 어색하게 동의한다 근육이 작은 부분이라 그래요 잘 되실거에요.
달리기를 다시 시작한지는 아직 한달이 되지 않았다. 러닝을 다시 할 때는 달릴 때 마다 어깨가 찌르는 것 처럼 아파서 어깨를 고정하고 지탱하는 서포터를 차고 달렸다.
재활치료사가 어깨가 아픈걸 참고 일상생활을 하지 않으시면 낫는게 늦어져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몇주는 더 서포터를 한 채로 달렸을텐데. 며칠 고통을 참으며 달리자 팔의 아픔은 의외로 금방 나아졌다. 속도는…형편 없다. 달리는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겨우겨우 달리는 척을 한다고 밖에 말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달리고 있을 때는 즐겁다. 온전히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기 위해 노래도 듣지 않고 달릴 때가 있다. 발구름, 팔의 각도, 호흡의 깊이. 모두 자연스럽게 되는 것들인데 때때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집중하면 각 행동을 취한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배우는 사람처럼 말이다.
집안 꼴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그나마 집을 좀 청소했다. 몇박스나 되는 짐을 빼냈는데도 내 집은 엉망이다. 오히려 더 엉망이 된 것 같다. 모든 것이 모든 방향을 향해 쌓여있고,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더 이상 혼란이 더해지지 않도록, 꼭 머릿 속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먼지라도 치우는 것 뿐이다. 이 짐 어딘가 안 쪽 구석에 정말로 중요한게 있는거겠지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보려고 노력한다. 내심, 이제 이 집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라고 생각한다. 뭐 하나라도 남겨놓을 걸 그랬지 하고 후회한다.
중요한 것은, 쪼개진 마음을 다시 고치는 일이다. 나는 운동을 하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고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쪼개진 마음도, 박살나서 가루처럼 된 일상도 나아지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물론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나의 편식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편식 습관은 당근이나 오이를 골라먹는 어린아이 같은 귀여운 습관이 아니라. 질리도록, 계속해서 한가지 음식을 먹는 습관이다.
물론 그 음식이 없으면 굶는다거나 하는 팬더같은 습성도 아니다. 누군가 뭐라도 주면 아무거나 먹는다. 다만, 내가 뭔가를 선택해야할 때. 혼자서 뭘 먹어야할 때. 나는 항상 같은 음식을 고른다. 그렇게 되었다.
누군가는 두부를 왜 그렇게 많이 먹어요 두부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나빠요, 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쁜 것은 두부가 아니다. 나에게 정말 해로운 것은 같은 음식을 계속해서 먹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매일 아침 회사에서 똑같은 메뉴 - 삶은 계란과 고구마, 그리고 커피 - 를 받아와 13개월째 먹고 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결정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뭔가를 결정해버리면 시간이 지나가고, 모든 지금이 결국 과거가 되는 걸 피하고 싶은 것처럼 구는 것 같다.
요즘 먹는 것은 딸기이다. 매일 저녁 딸기 500그램을 먹고 배가 고프면 컵라면 같은걸 하나 더 해서 먹는다. 먹는걸 잊어버리면 또 빠르게 살이 빠진다. 빠르게 찌는 것도 빠르게 빠지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라서 나는 꾸역꾸역 뭔가를 먹는다. 내가 뭘 먹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곧 딸기철이 끝나서 딸기 편식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는 점이다. 불행인 것은 내가 또 다른 매일매일 먹을 음식을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편식을 그만 둘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아지겠지. 나는 매트 위에 누워 왼쪽 팔을 브이자 모양으로 펴면서 생각한다. 이 바보 같은 동작들도 수천번을 반복하면 능숙해질거고. 팔이 더 이상 아파지지 않을 순간이 오겠지.
부러진 마음도, 쪼개진 생각들도.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텅빈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6월에는 홋카이도에 간다. 몇년 만인지도 모르겠다. 6년 정도 되었으려나.
오랜만에 홋카이도의 지도를 보니. 그 커다란 습원이 떠올랐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곳에서 불던 바람과 벌레, 새의 소리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던 그 새하얀 모래구릉. 여우가 만들어낸 구멍. 물가 근처에 모여들던 이름 모를 새들. 덤불 사이를 빠르게 날아 가버리던 그 작은 새들. 바다 저 멀리 종을 모를 고래가 꼬리 지느러미를 내리치던 모습.
무엇보다 아무도 없었던 그 순간들.
나는 그 아무 도 없었던 그 순간들이 너무 그립다가도, 이 부서진 마음으로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25년 4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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