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려고 계단을 내려오니 하늘이 검푸른 색이었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먼 곳을 쳐다보고 생각을 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여기에 쓰지 않기로 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입 밖에 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잊어버릴 그런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코트에 한쪽 팔은 끼워넣고 다른 쪽은 어깨에 걸친 채로 집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겨울이 나를 따라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봄이 왔지만,
나는 아직도 내 어딘가가 결락된 것처럼 느껴진다.

오랑캐 땅은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아.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 동방규(東方虬), <소군원(昭君怨)>

몸도, 마음도 어딘가 깨져서는 원래의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그릇처럼 되었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게 되었고 어깨 위로 올리지 못하는 왼팔은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되새기게 한다. 나아지겠지, 나아져야지 하고 생각하며 한달 남짓 재활을 받고 나서야 어깨의 고통이 좀 가시고 서툰 동작이나마 하게 되었다. 언제까지 재활 치료를 해야할까요 몇주 정도 걸릴 것 같나요. 라고 묻자 다소 심술궂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재활치료사는 몇 주요? 몇 달이 아니고요? 라고 말하더니 곧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지금 잘 낫고 계세요. 그래도 두달은 더 하셔야 할 것 같네요. 라고 말한다. 어깨 언저리까지 팔을 힘들게 들어올리며 나는 땀투성이가 된다. 이 쉬운 동작이 이렇게 어려우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재활치료사는 어색하게 동의한다 근육이 작은 부분이라 그래요 잘 되실거에요.

달리기를 다시 시작한지는 아직 한달이 되지 않았다. 러닝을 다시 할 때는 달릴 때 마다 어깨가 찌르는 것 처럼 아파서 어깨를 고정하고 지탱하는 서포터를 차고 달렸다.
재활치료사가 어깨가 아픈걸 참고 일상생활을 하지 않으시면 낫는게 늦어져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몇주는 더 서포터를 한 채로 달렸을텐데. 며칠 고통을 참으며 달리자 팔의 아픔은 의외로 금방 나아졌다. 속도는…형편 없다. 달리는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겨우겨우 달리는 척을 한다고 밖에 말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달리고 있을 때는 즐겁다. 온전히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기 위해 노래도 듣지 않고 달릴 때가 있다. 발구름, 팔의 각도, 호흡의 깊이. 모두 자연스럽게 되는 것들인데 때때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집중하면 각 행동을 취한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배우는 사람처럼 말이다.

집안 꼴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그나마 집을 좀 청소했다. 몇박스나 되는 짐을 빼냈는데도 내 집은 엉망이다. 오히려 더 엉망이 된 것 같다. 모든 것이 모든 방향을 향해 쌓여있고,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더 이상 혼란이 더해지지 않도록, 꼭 머릿 속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먼지라도 치우는 것 뿐이다. 이 짐 어딘가 안 쪽 구석에 정말로 중요한게 있는거겠지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보려고 노력한다. 내심, 이제 이 집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라고 생각한다. 뭐 하나라도 남겨놓을 걸 그랬지 하고 후회한다.

중요한 것은, 쪼개진 마음을 다시 고치는 일이다. 나는 운동을 하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고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쪼개진 마음도, 박살나서 가루처럼 된 일상도 나아지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물론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나의 편식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편식 습관은 당근이나 오이를 골라먹는 어린아이 같은 귀여운 습관이 아니라. 질리도록, 계속해서 한가지 음식을 먹는 습관이다.
물론 그 음식이 없으면 굶는다거나 하는 팬더같은 습성도 아니다. 누군가 뭐라도 주면 아무거나 먹는다. 다만, 내가 뭔가를 선택해야할 때. 혼자서 뭘 먹어야할 때. 나는 항상 같은 음식을 고른다. 그렇게 되었다.
누군가는 두부를 왜 그렇게 많이 먹어요 두부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나빠요, 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쁜 것은 두부가 아니다. 나에게 정말 해로운 것은 같은 음식을 계속해서 먹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매일 아침 회사에서 똑같은 메뉴 - 삶은 계란과 고구마, 그리고 커피 - 를 받아와 13개월째 먹고 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결정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뭔가를 결정해버리면 시간이 지나가고, 모든 지금이 결국 과거가 되는 걸 피하고 싶은 것처럼 구는 것 같다.

요즘 먹는 것은 딸기이다. 매일 저녁 딸기 500그램을 먹고 배가 고프면 컵라면 같은걸 하나 더 해서 먹는다. 먹는걸 잊어버리면 또 빠르게 살이 빠진다. 빠르게 찌는 것도 빠르게 빠지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라서 나는 꾸역꾸역 뭔가를 먹는다. 내가 뭘 먹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곧 딸기철이 끝나서 딸기 편식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는 점이다. 불행인 것은 내가 또 다른 매일매일 먹을 음식을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편식을 그만 둘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아지겠지. 나는 매트 위에 누워 왼쪽 팔을 브이자 모양으로 펴면서 생각한다. 이 바보 같은 동작들도 수천번을 반복하면 능숙해질거고. 팔이 더 이상 아파지지 않을 순간이 오겠지.

부러진 마음도, 쪼개진 생각들도.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텅빈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6월에는 홋카이도에 간다. 몇년 만인지도 모르겠다. 6년 정도 되었으려나.

오랜만에 홋카이도의 지도를 보니. 그 커다란 습원이 떠올랐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곳에서 불던 바람과 벌레, 새의 소리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던 그 새하얀 모래구릉. 여우가 만들어낸 구멍. 물가 근처에 모여들던 이름 모를 새들. 덤불 사이를 빠르게 날아 가버리던 그 작은 새들. 바다 저 멀리 종을 모를 고래가 꼬리 지느러미를 내리치던 모습.

무엇보다 아무도 없었던 그 순간들.

나는 그 아무 도 없었던 그 순간들이 너무 그립다가도, 이 부서진 마음으로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25년 4월의 글이다.

올해 청명날이 되자, 봄이 찾아온 기분이 들었다.

올 3월엔 계절에 맞지 않는 눈이 몇 차례나 왔고 얇은 봄 자켓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추위에 멋쟁이가 아닌 나는 두터운 겨울 코트를 그대로 입고 회사에 갔었더랬다.
점심을 먹으러 친구와 나가는데 건물 앞 벚꽃에는 이미 꽃이 만개할 듯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이제껏 보지 못한 탓이려나, 봄이 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지냈구나 싶어서 코트 깃을 바르게 펴고 겨울 옷 안에서나마 기지개를 펴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봄이 오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어린 시절 내가 자란 집 옆에는 크고 멋진 백목련이 있어 봄이 오면 항상 누구보다 빨리 그걸 알 수 있었는데, 봄과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만개한 백목련을 볼 때면 봄의 좋은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바닥에 꽃이 떨어져 썩어가는 모습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봄이 오는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묘한 고집은 어릴 때도 그대로여서 딱히 올해가 아니어도 나는 봄 꽃이 피어오를 때 까지도 겨울 옷을 그대로 입으며 다녔고 주변 사람들의 한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봄이 싫은건 아니라고 설명하련다, 굳이 따지자면 겨울을 너무 좋아하는 탓이다.

그렇다고 해도, 겨울이 이렇게 길어질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난 겨울, 여행은 한번 밖에 가지 않았으나. 회사에서는 남에게 말하고 싶지도 않은 피곤한 이슈가 있었고 무엇보다 두번에 걸쳐서 크게 다쳤는데. 어깨도 무릎도 그 재활치료를 아직도 하고 있다. 요는, 멀미가 날 정도 지난 겨울에 여러가지가 많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시위도 있었다. 시위에 나간 날을 세어보니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12월 3일 이후 벌어진 시위에는 바로 참석 할 수 있었지만 여의도에서 광화문으로, 그리고 한남동으로 모이기 시작한 딱 그 시점에 크게 다치기 시작한 탓이다.(다치기 시작했다고 설명 할 수 밖에 없다, 몇 번이나 다쳤기 때문이다.) 재활치료는 둘째 치고 너무 크게 다친 탓에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던게 컸다. 잘 걷지 못하거나 몸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외출을 하겠는가. 다시 시위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3월 중순, 부러진 어깨뼈를 지탱해주던 서포터를 빼고 나서였다.
아직도 일주일에 두 번은 재활치료를 다니고 있고 왼쪽 팔을 내 힘으로 제대로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지만 뭐 어떤가 사람이 시위에 나가서 왼쪽 팔을 들어올릴 일이 얼마나 많다고. 아니 깃발이란게 있긴 하죠 아 근데.

그 동안 초조한 나머지 시사 채널만 그렇게 보다보니, 애초에 이상한 로어나 게임이나 나오던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정치 이야기로 가득차버렸고. 정치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던 회사에서도 짜증나게 구는 사람들에게 나는 부천 사람이라구요 새빨간 빨갱이라는 뜻이니 제 앞에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라고 농담을 반 섞어서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봄이 오지 않았다면 내가 얼마나 회사 사람들에게 패악을 부리고 다녔을지, 나도 알 수 없다.

맘에 드는 자켓을 하나 샀다. 아저씨들이나 좋아할 새파란 자켓이다. 세일도 아니었고 내 평소 옷 가격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게 비싼 옷이었지만 너무 마음에 들어서 3개월 가까이 머릿속 한 구석에 넣고 다니다가 봄도 지나가버리면 영원히 입지 못하게 될 까봐 그냥 샀다. 사자마자 마음에 들어서 며칠이나 그 옷을 입고 다녔다. 아이구 춥다 추워 하며 결국 다시 겨울 코트를 꺼내 입었지만 이제 정말로 봄이 왔으니 일주일에 다섯번은 그 자켓을 입고 다닐 생각이다.

청명 다음날. 하루 종일 비가 올 예정이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주말이다. 몇시간이나 뒤척거리다 잠들었지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파 앞 바닥에 누웠다. 아직도 비가 오는 것 같다.

나는 모로 누워 천천히 눈물을 흘렸다. 봄이 왔다. 아주 길었다.

25년 4월의 글이다.

뭐가 문제였냐고 하면 짜슐랭이었다. 친구J가 오후 내내 짜슐랭을 이렇게 먹으면 맛있다고 단체방에서 얘길 했는데. 그렇게까지 맛이 있진 않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먹고 싶어져서 평소보다 40분 이상 일찍 퇴근했다.
걸어갈 때 잠시 블로그를 읽긴 했지만 내 블로그에 내가 썼던 내용에 뭔가 이상한게 없는지 확인 했을 뿐이었다. 신발도 나름 접지력이 좋은 괜찮은 신발이었고. 눈은 한참 전에 그쳐서 녹고 있었다. 마트에 가려고 계단을 내려 갈 때는 주머니에 손도 넣지 않았다.

단지 오전에 내린 눈이 물이 되어 계단 위에 그대로 있었고, 저런 상태라면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미끄러져 뒤로 넘어졌다. 2월 12일 수요일 오후 6시 45분. 바로 전에 넘어진지 딱 4주째였다.

기절하지 않았다. 넘어지며 왼팔을 급하게 뒤통수로 넣어서 머리가 부딪히는 걸 막았는데 내가 뭘 했던 건 딱 그 정도였고 넘어지면서 계단을 몸으로 내려왔다. 도대체 어디서 느껴지는지 모르겠는 격통 때문에 나는 계단에 쭈그려 앉아서 - 아니 이 때는 안 울었다. -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3명인가 4명인가 몇명씩 사람들이 지나가다 괜찮으시냐고 119불러드릴까요 라고 물어보았는데. 괜찮다고 거절하고 더 앉아있었다. 그래 누가 봐도 넘어진 사람으로 보였겠지. 일어나려는데 왼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내가 망했다는 걸 알았다.

20미터만 걸어가면 내가 평소에 가는 정형외과가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곳에 가면 괜찮을거란 GTA적인 희망으로 팔을 붙잡고 힘들게 그곳에 갔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 하는 동안 서서 덜덜 떨고 있는데 앞의 차례 사람이 이해 할 수 없는 잡담을 하느라 계속 기다리고 있어서 아 기절하겠다 기절한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고 있던 간호사 한 분이 다치셨어요?(나는 이 병원에 왼쪽 어깨 때문에 1년째 다니고 있는데, 이번에 다친 것도 왼쪽 어깨이다. 메이저 리그 진출은 물건너 갔다고 보면 된다) 라고 하더니 나를 알아보기에 아 넘어졌어요. 라고 말하고 덜덜 떨면서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어른스럽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아 선생님 한 4주만에 뵙는것 같은데 저 요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너무 아프네요. 라고 덜덜덜 떨면서 말하는게 최선이었다. 내 어깨를 보는 선생님도 표정이 별로 안 좋아보이셨다. 어깨 엑스레이를 보며 아이고 부러졌어요…라고 말하시는걸 들으면서도 나는 진짜 아니길 바랐다.

뭐라고 하셨더라. 수술을 안하면 팔이 짧아질거라고 하셨던가. 저는 팔이 너무 긴게 문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급하게 진통주사를 맞고 바로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전원하는 걸 권했고 나는 쓰고 달고 시고 뭘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정말 너무 아파서 덜덜 떠는거 말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진통주사를 맞기 위해 눕는 것도 바지를 내리는 것도 못했다. - 이 때 쯤 부터 질질 울기 시작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너무 억울했기 때문인데.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앞서서 넘어진지 딱 4주째 되던 날이었다. 도대체 왜? -

병원 사람은 친절하게 다음 병원을 수배해주고 1층까지 내려와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주었다. 운이 좋게도 그 병원도 첫번째 병원에서 200미터정도면 걸어가면 되는 병원이었는데. 진통 주사로 덜덜 떨지는 않게 된 나는 옆자리 부장님과 형에게 전화를 했고, 친구들 몇 명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형은 어제 면회에 와서 내가 엉엉 울면서 전화를 했다고 했는데, 나는 전화하면서 울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지 싶었지만 형이 쇠고기를 사줬기 때문에 그냥 내가 운 걸로 했다.

그리고 지금 16일 일요일. 나는 입원 중이다. 5인실이지만 사람들이 빨리도 퇴원하고 입원하길 반복하는 이 병원은. 간병인도 보호자도 병실에 두지 않는 맘에 드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나보다 먼저 이 병실에 와있던 할아버지 하나가 이젠 눈치도 보지 않고 보수 우익 유튜브를 스피커로 틀고 있어서 나는 현재 너무 괴롭다. 진짜로 괴롭다. 엄청 큰 소리는 아니지만 귀를 기울이면 무슨 얘길 하는지 알아들을 정도로는 크다. (아니 할아버지와 나의 병실은 양쪽 끝인데도 그렇다.) 수술이 잘 되어 내일 점심 때 쯤이면 퇴원 할 수 있을 거란 얘길 들어서 기분이 좋아진 참인데도 기분이 좋지 않다.

나의 진단명은 좌축상완골 골절이다. MRI를 찍고 나서 알게 된 것 같지만 오른 쪽 늑골도 골절되었다고 한다. 아니 뭐 어쩌겠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부러져 있던 것이 아닌지. (이전 블로그 글 참조)

당일에는 수술이 안 되었기 때문에 진통제를 받아들고 집에 와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 앓았고 1회차 넘어 질 때 받았던 슈퍼 진통제가 놀랍게도 두 봉지가 남았기 때문에 하나를 먹어서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이전 블로그에 안 썼음)
다음날엔 종일 금식 상태로 대기 하다가 겨우 17시가 되었을 때 수술을 받을 수 있었는데. 40분이 걸릴거고 2시간이면 깰 거라고 하더니 일어나보니 0시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상의 어깨 부분엔 피가 말라붙어있었고 - 당연하다 수술을 받았으니 - 처음보는 거창해보이는 서포터가 장착되어 있었고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저 이제 자도 되나요?라고 물어보았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걸 보니 전에 누군가가 못자게 했었던 이력이 있었던 것 같지만 저 당시에는 내가 왜 저런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저렇게 얘기 했다.

자려고 했지만 잠이 들지는 못했다. 무통 주사 버튼을 계속해서 누르며 아픔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이것도 후에 알았지만 내가 메스꺼워했기 때문에 무통주사를 닫아놓았다고 한다. 아니 도대체 그럼 난 뭘 기대하며 무통주사 버튼을 밤새 딸깍 거렸단 말인가. 아침에야 다른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들 수 있었는데 그러고 잠에서 깨자 내가 전날 수술을 받은 후에 했었던 진상 짓들이 생각나서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그날 밤에도 아파서 제대로 잠이 들지 못했던 건 똑같았다.

어제가 되서야 소독을 하게 되어 내 상처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수술 상처가 생각보다 컸다. 해적처럼 흉이 지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몇명이 찾아왔고 형네 가족, 이모와 이모부가 오셨었다. 조카는 너무 긴 운전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이모가 요즘엔 굿도 단가가 많이 비싸져서 1억 정도 한다고 말해주었다. 치료비 다 하면 500정도 들 것 같은데 그러면 굿 한 번 할 돈으로 20번 정도 넘어질 수 있네요. 라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면 20번이나 넘어지고 싶지 않다 진짜 싫다.
내가 이렇게 넘어진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이 제각기 내가 체중이 너무 빨리 줄어들어서 그렇다거나 아니면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렇다든가 하면서 의견을 내고 있다. 나 본인의 의견은 글쎄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그럴만해서 그랬던 것 같다. 모두의 의견을 반영 하려면 나는 살도 10킬로그램을 찌우고 피티도 6개월 받고 굿도 1억원어치를 받아야한다. 그럴바엔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지금은 좀 덜 아프다. 아직 팔에 주사바늘은 꽂혀있지만 진통제는 먹기만 하고 주사로 따로 맞진 않는다. 갈비뼈가 부러진건…진짜로 괜찮은가보다. 시험삼아 기침을 해보았는데 아픈 걸 모르겠다. 팔이 조금 덜 불편해지면 러닝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서포터를 하고 다녀야 하는 기간이 생각보다 길다. 실을 뽑는데도 2주 정도 걸리고 어깨뼈에 박은 핀을 제거하기 위한 수술도 다시 받아야 한다고 한다. -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 생각보다 나는 꽤 심하게 다쳤다. 하지만 다치자마자 집 앞 정형외과 선생님과 형수 - 형수는 의사다. - 양쪽에게 저 얼마나 많이 다친거에요?라고 물어보았는데 둘 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별 거 아니라고 하기엔 인간적으로 미안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어찌 되었든 내 발로 병원까지 걸어갔으니까 의학적으로 중상환자는 아닌거지 싶다.

오늘, 앞으로는 더 넘어지지도 아프지도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또 넘어지면…아니 뭐 문제가 있는거다 이건.
아까 잠시 집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뭘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살아가는 것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다. 정말로 그만 살고 싶다면 더 편하고 쉬운 방법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더 아프지도 말고 더 넘어져서도 안된다.
병실 침대 주변에는 커튼이 쳐져있다. 그 앞에 그림자가 질 때면 의료진이란걸 알면서도 나는 꿈에서 자꾸 누군가 다른 사람을 본다.
어제는 ㅇㅇ의 꿈을 꿨다. 묘하게 굿하는데 1억이라는 이모의 말이 인상에 남았는지. 나는 500정도 들거면 매달 220은 네가 그냥 써도 괜찮아. 라고 말했다. ㅇㅇ는 220은 너무 많지 않아요?라고 하기에 그러면 180 어때라고 제안했다. 도대체 뭐하는 무슨 꿈인지 모르겠다.

마취가 풀릴 때 쯤. 내가 너무 아파서 울었던 게 그렇게 기억났다. 그리고는 이렇게 아플거면 울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입으로 와 … ㅇㅇ이 보고 싶다. 라고 말하고 울었다. 그리고 다시 기절했다. 어떤 말들은 그런 상황이 되어서야 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그런 말들이 있는거겠지.


22년 2월의 글이다.

'부재증명_(에세이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409] 춘래불사춘  (3) 2025.04.09
[20250405] 청명, 다음날  (0) 2025.04.06
[20250212] 불변  (2) 2025.02.12
[20250207] 쓰러져 일어나지 않는다.  (0) 2025.02.07
[20250205] 넘어졌었다.  (0) 2025.02.06

글을 쓰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을 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장은 현실의 조악한 복제품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기관과 지각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현실을 완벽하게 수용해낼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문장으로도 그럭저럭 충실한 현실의 재현품을 삼을 수 있다.

우리는 회상이라는 형태로 비교적 쉽게 과거를 재현해 낼 수 있지만, 재현은 재현일 뿐이다. 불완전한 세계의 불완전한 반영이다. 실제로 현실의 시간을 뒤로 돌려 완벽하게 과거를 다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문장은 완전한 역행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의 모습을 최대한 뭉툭하게 깎아내어 현실이 가진 속성들의 중요한 부분만을 추출한 후. 몇 번이나 재현이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주장에는 한가지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문장을 읽어줄 불변의 독자이다.

이론 상 - 물론 이론 상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지만 - 세상 어딘가에 불변하는 독자라는 모순적인 존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 불변하는 독자에게 문장을 읽게 함으로서 그의 머릿속에서만은 동일한 현실을 반복해서 재현시킬 수 있다. 그것은 재현이라기 보다는, 강림이나 재생에 가까운 행위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변의 독자. 문장의 모든 체험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당신을 가정해보자. 나의 모든 글을 읽었을 당신이 나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라고 해야할까.
누군가는 이 불변의 독자가 신에 대한 메타포로 이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불변의 독자를 신이라는 가정을 부정한다. 당신이 정말로 신이라면 내가 쓴 모든 것들은 단지 길고 지루한 기도문일 것이고, 내가 겪고 있는 부패와 결락들은 결국 신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재료가 될 뿐이다.

고전 모험, 추리소설의 소설가들은 독자제현 이라는 말로 자신의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들은 때때로 자신이 이 글을 쓴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21세기에 들어서 자기의 컨텐츠를 봐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유 불명의 적대감을 표시하는게 유행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그랬다. 자신의 소중한 존재. 다시 없는 사람. 글과 나 사이에 놓인 유일한 세계.

샐린저는 소설에서 시모어가의 둘째가 쓴 글을 통해 독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는 가상의 독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새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 이유는 새가 그 어떤 것보다 영혼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독자 당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가 쓰고 있는 이 불완전한 글을 읽고 있는 완벽한 타자인 당신은. 예전에는 더욱 확실한 형태를 가지고 어떤 사람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빠르게, 세월 그 자체보다 빠르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버리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싶지 않게 된 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떠올리지 못하게 되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나는 한 밤 중의 변덕으로 빨랫감을 들고 집 근처의 코인라운드리에 갔다. 당신이라면 알 고 있을 집 근처 상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 곳의 코인 라운드리 얘기이다. 물론 빨랫감을 들고 가기 전 마트에 들르는 척 라운드리에 들러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세탁기는 비어있는지 몰래 살펴보았다. 웃기게도 내가 염탐하러 갔던 그 때 보다 손님은 줄어들었지만 커다란 빨랫 바구니를 들고 간 사람들이 늘어 줄을 서 있었던 탓에. 나는 삼십분이 넘도록 빨래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코인 세탁기 앞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분간은 글을 쓰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내가 당신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생각한 건. 그 삼십분이다. 나는 내 차례가 되자 타올 한 무더기와 속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집에 돌아가 책을 들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코인 라운드리는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책을 읽기에 좋은 곳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면 나란히 앉아서 손을 잡는 것 정도이다.

나는 대만 작가가 쓴 소설책을 맨 뒤부터 읽으며 (처음부터 읽을 때 이해가 가지 않고 별로 좋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초식동물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진동하는 소리를 내는 커다란 세탁기들의 소리를 들었다. 어떤 남자들은 - 대체로 남자들이었다. 심부름이겠지 - 아이들이 쓸것 같은 이불을 들고 찾아왔고. 어떤 사람들은 급하게 세탁해야하는게 틀림없는 속옷들을 들을 들고 사라졌다. 세탁소 밖은 춥고 새까만 밤이라.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내세가 이런 곳이라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옆자리의 아저씨는 어딘가로 사라지기에 담배라도 피러 나갔나 싶었더니 아이스크림을 사와서 몰래 먹기 시작했다. 눈치를 볼 필요는 없을텐데 혼자 군것질을 하는게 왠지 불편한 눈치이다.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아저씨가 편하게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도록 더더욱 신경쓰지 않는 척 한다. 여름부터 내내 읽고 있던 책이라 조금 너덜너덜해졌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여름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 대만은 아열대 기후이다. 어떤 계절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에겐 그냥 여름으로 느껴진다. - 책을 읽으며 비가 내리는 어떤 곳에 대한 생각을 한다.

세탁기를 돌리는데 30분. 건조기를 돌리는데는 4분에 500원. 만원짜리를 전부 동전으로 바꾼 나는 40분이고 50분이고 건조기를 돌릴 수 있었지만. 왠지 낭비를 하는 기분이 들어 20분만 건조기를 돌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80분 남짓한 시간이 그 주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며 당신, 나의 불변의 독자인 사람을 떠올렸다. 당신이라면 나의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읽어주리라. 내가 왜 행복해했는지, 왜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주고 싶었는지 이해해주리라. 매일 매일 당신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목소리를 가졌을까.
당신은 새를 좋아할까.

25년 2월의 글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실망을 쌓아가는 것이다.

나는 대체로 6시에 일어난다. 대체로라고 말하는건, 사실 아무 때나 일어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제는 5시에 일어났고 오늘은 6시 30분에 일어났다. 규칙적인 생활이랑 거리가 멀다.

해가 뜨기 전의 새벽에 러닝을 하는걸 선호하지만 요즘엔 역시 춥다. 6시에 일어나면 그냥 출근을 할지 운동을 하고 나갈지 고민하는 신성한 시간을 갖(침대에 그냥 누워있는다는 뜻이다)다가 러닝을 하러 나간다. 아침에 운동을 하면 하루 종일 묘하게 나른하지만 운동에 대한 부채감이 없는 하루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선호하는 러닝 거리는 5킬로미터이다. 전에는 급하면 3킬로미터 정도만 뛸 때도 있었지만 역시 좀 서운한 거리이다. 러닝 선배들은 킬로미터 기준으로 운동량을 정하지 말고 시간을 기준으로 다양한 시간을 뛰라고 조언해주지만. 실은 나는 풀코스 마라톤 같은 건 관심없다. 그냥 좀 더 달리고 싶을 뿐이다.

러닝을 하든 하지 않든. 집에서는 8시 전에 나간다.
회사가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보통 걸어서 출근한다. 아닌가,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는지도 모른다. 실은 2.5에서 3.0킬로미터 정도 거리다. 왜 0.5킬로미터 정도 차이가 나냐면 굳이 좀 돌아서 가는 경우가 많다.
고래로 철학자, 수학자, 정치인, 백수건달, 은퇴한 아저씨 등 자기가 대단한 뭔가를 사고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산책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주장하는데. 그건 모르겠다 나는 그냥 걷는 걸 좋아하고 요즘은 아침 출근 시간이 피ㅋ민을 하는 시간이다.

하여간 회사에 도착하면 아침밥을 회사에서 먹는다. 회사 식당에서 앉아서 먹어도 되고, 테이크아웃류의 음식들을 받아서 가도 된다.(사무실 내 자리에서 먹는다) 받는 것은 건강한 야채구이라든가 군고구마니 삶은 계란이니. 아니면 기성품 커피 같은 것이다. 실은 나는 군고구마가 너무 좋다. 너무 많은 고구마가 건강에 안 좋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깟 건강.

변덕 때문에 7시 30분 정도 쯤에 회사에 도착 할 때도 있다. 그러면 회사 정문 시큐리티 업체 분 중에서 가장 미인이신 분에게 아침 인사를 할 수 있다. 딱히 하는 건 없다 그냥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 정문으로 들어갈 뿐이다. 그리고 이게 나의 하루의 클라이맥스다. 미인한테 인사 할 수 있다니 너무 신난다.

자리에 앉으면 받아온 테이크아웃을 먹으며 메일을 체크하고. 그날 해야할 일을 바로 시작한다. 출근하면서 오늘 뭘 해야하는지 생각해두기 때문에 나는 업무속도가 꽤 빠르다. 의외겠지만 일상생활 중에서도 일 생각을 많이 한다.
갑자기 뭔가 옆에서 튀어나오는 업무가 있어도 30분 이상 걸리는 일은 드물다. 집중을 해야하는 일이 있으면 귀를 막기 위해서 에어팟을 꽂고 노래를 듣는다. 때때로 3,4시간 정도 집중해서 일해야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정말 꼼짝도 하지 않고 일만 하고 있어서 이상하다는 얘길 듣는다. 아니 왜지 기계처럼 일하는 회사원 처음 보시나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메신저로 친구들과 농담을 하거나, 동네 맛집 얘길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게임 얘기나 한다. 더 한가할 때는 인터넷으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쓸모도 없는 지식들을 검색해서 읽는다. 너무 놀았다 싶으면 시장 레포트나, 테크 레포트 같은 것을 찾아서 읽고 내키면 뭔가 스스로 레포트를 생산해낸다.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과외의 일이다.

아직 어릴 때 회사원이었던 아버지에게 아빠는 회사에서 뭘 해? 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회사에선 일을 하지. 라고 말을 하기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라고 재차 물어보니. 아버지는 자못 곤란하다는 듯이. 여러가지 일을 해 라고 대답했다. 누가 나한테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나도 여러가지 일을 하죠 정도로 밖에 대답을 못하겠다. 진짜로 회사원은 여러가지 남들에게 설명하기 곤란한 일을 한다. 나도 기관사처럼 설명하기 쉬운 직업을 갖으면 좋을 것 같다.

점심은 친구들과 먹는다. 부지런한 회사원이기에 점심 메뉴는 꼭 체크한다. 점심 메뉴를 체크하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 회사원이 있다? 그 녀석은 먼 미래의 인공지능이 보낸 기계 암살자이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하여간 절대 그런 짓을 해선 안된다 점심 메뉴는 괜히 식당에 가서 고민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사전에 정해둔 메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길 바란다.

날씨가 좋을 때는 회사 근처 천변에 산책을 간다. 몇년 쯤 그랬을 까 생각해보니 6,7년은 된 습관이다. 요즘엔 너무 춥고, 또 러닝으로 충분히 운동량이 채워지는 것 같아서 산책을 잘 하지 않는다. 나의 친구인 당신에게 나는 몇 번 천변의 풍경을 설명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갈대가 많고 느티나무가 천변에 늘어서 있다. 오리와 비둘기, 그리고 설명 할 수 없는 작은새들이 많다. 게임이라도 하면서 걸어다니면 좋을 것을. 나는 생각을 하거나 머릿 속으로 글을 쓴다. 두개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저 두 가지는 진짜 명백하게 다른 활동이다. 그런 질문을 한 걸 반성하기 바란다.

얼마 전에 후배가, 선배는 심심할 새가 없겠어요. 아무 생각이나 하고 그걸 또 입으로 말하시잖아요. 라고 말하는데 내용이고 뉘앙스고 전혀 칭찬이 아니었을 뿐더러. 꼭 입가에 밥풀 붙이고 나온 다섯살짜리 꼬마한테 아이구 배고플까봐 도시락 가지고 나왔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말투라서 선배한테 진심을 다해서 공손하라고 설교를 해주었다.

점심을 먹으면 하루가 다 간거다. 쓸데없는 업무를 좀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면 오후는 또 금방 간다. 아니 거꾸로 오후 시간이 안 갈 때도 있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일을 좀 빨리 처리하는 편이라서 해야할 일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후배는 선배든 친구든 꼬셔서 커피를 사러 간다. 같이 가는 멤버에 따라서 커피를 사면서 잡담을 할 때도 있고 회사를 한바퀴 돌 때도 있고. 그냥 자리로 돌아올 때도 있다. 나는 보통의 회사원들은 사죽을 못쓰는 신기하고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그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해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그냥 평범하게 재테크 얘기나 애들 키우는 이야기 그런걸 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안합니다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이상한 동물 이야기나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녁시간은 금방 온다. 회사원들은 체력이 약해서 해가 지기 시작하면 준비해온 집중력이 다 해서 다들 비실거린다. 야근을 하니 뭐니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손이 느린 놈들이 그러는 것이다. 가끔 후배들이 업무에 퀄리티를 올리겠다고 아등바등 하며 일을 하는걸 볼 때가 있는데 내심 회사원은 업무 퀄리티보다 마감기한이 훨씬 중요한거라고 잔소리를 하고 싶어진다. 네 참습니다. 잔소리해서 뭘 하겠습니까.

저녁 식사로 저녁 테이크아웃을 받아 먹으면 진짜로 그날 회사 업무도 거의 끝이다. 메뉴는 또 삶은 계란 뭐 그런 것들이다. 맛이 없는데 괜찮냐고요? 맛이 없는 것도 그냥 먹는 것이 진정한 뚱뚱보의 자세이다. 까불지 말기 바란다.

일이 남으면.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다음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둡니다. 그러면 오늘의 업무는 진짜로 거의 끝이다. 나는 쓸데없이 회사에 남아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사무실 체류 시간은 대체로 10시간 정도이다. 이젠 회사에서 밤을 새거나 남들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컨퍼런스콜을 하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퇴근이다.

퇴근도 거의 걸어서 집에 간다. 출근과는 다르게 여유가 있다. 노래를 들으면서 걸어가면 신이 난다. 퇴근이 좋은건 어떤 회사원을 막론하고 동일한 습성인데. 나는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잠이 들고 로봇처럼 그냥 출근하는 생활을 오래해서 그렇게까지 퇴근이 즐겁진 않지만 아 콧노래를 안 부를 수는 없다.

퇴근하는 루트는 출근하는 루트보다 조금 짧다. 하지만 마트를 들른다. 요즘에 사는 것은 싱싱한 딸기나 우유, 집에 식료품이 부족하면 두부나 컵라면이나 하여간 두 손으로 들고 갈 수 있는 것을 산다. 뭐라도 사서 들어가야 마음이 좀 덜 허전하다.

집에 오면, 아무도 없다. 뭔가 해야할 집안일이 있다면 바로 지금 퇴근한 시간에 해야한다. 왜냐하면 옷을 갈아입고 어딘가에 등을 기대게 되면 퇴근한 직장인 모두가 그런 것처럼 끈적하게 녹아버려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설거지, 빨래, 청소 하여간 뭐든지 해야할 일들을 한 30분내로 하고 나면. 그래 그제서야 온전히 누워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아침에 러닝을 하지 못했다면 이 시간에 러닝을 한다. 퇴근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이 시간에 하는 것이 비결이다. 이전에는 집안일을 마치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11시 12시에 러닝을 하고 그랬는데. 생활 습관 상으로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고담시 같은 곳에선 가져서는 안되는 습관이기도 하다. 극장 뒤에서 총을 맞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뭘 하냐면. 뭘 하지? 다양하다. 책을 읽거나 뭔가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잠을 일찍 잔다. 회사에서 업무가 많지 않아도 그냥 회사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모든 기력을 소진한 상태라 마음만 먹으면 바로 눈을 감고 잘 수 있다.

씻기? 러닝을 하고 나서 씻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아침에 씻는다. 세간에 들키지 않게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할 사실이지만 가끔 세수를 하지 않고 그냥 잠이 들 때도 꽤 많다. 유독 지치고 늘어지고 촉촉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어떤 얼굴을 떠올릴 때도 있다. 괴물도 신도 아닌, 사람의 얼굴이다. 침대에 누워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떠올린다. 표정들을. 순간들을. 어떤 감정들을. 나는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말랑말랑한 무인양품표 쿠션을 껴안는다.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어떤 피와 살로 된 애정인것처럼. 그리고는 아무 꿈도 꾸지 않기를 바라며, 숫자를 세는 양치기보다 빠르게 잠이 든다.

꿈을 꾸지 않는 것. 그게 나의 요즘 바라는 바이다.

그거 말고는 없다.
처음에 무슨 얘기를 했지? 살아간다는 것은 실망을 쌓아가는 거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계속 살아가는데는 어떤 형태로든 희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희망이 없이. 아무 의미도 없는 하루를 쌓아가면서.

25년 2월의 글이다.


'부재증명_(에세이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216] (일어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또 넘어졌다.  (0) 2025.02.16
[20250212] 불변  (2) 2025.02.12
[20250205] 넘어졌었다.  (0) 2025.02.06
[20250204] 넘어졌다.  (0) 2025.02.05
[20241220] We are TEAL  (0) 2024.12.20

전의 블로그 글에서 썼지만, 나는 3주 전쯤 넘어졌었다. 세어보니 정확하게 3주였다.
처음 정형외과에 갔을 때 전치6주에서 8주 쯤 되지 않을까요 라고 하셨는데. 지난주 금요일에 방문했을 때 2,3주 정도는 경과를 더 봐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라고 하셨으니 정확하게 6주 정도 되는 셈이다. (용하기도 하셔라)
차에 치인 것도 아니고 빙판길에 넘어졌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다치다니 재주도 좋다.

몸이 이런 상태이다 보니 러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남이 얼마나 아팠는가를 듣는건 정말 지루한 일이지만 여긴 내 블로그니까 내 맘대로 쓰자면.)
다친 첫번째 주에는 러닝이 문제가 아니었던게 정말 말도 안되게 아파서 4종류의 진통제를 매 끼마다 먹으면서 일상생활 비슷한 걸 했다. 입원을 왜 안 했는가? 아니 내가 노인도 아니고 빙판길에 넘어졌다고 입원을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숨이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골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용케 부러진 곳은 없네요.”) 그냥 몹시, 아주 몹시 아픈 것 뿐인데 입원을 할 필요는 없다 싶었는데. 걱정이 되셨던 정형외과 선생님은 소견서와 전원서를 써서 3차 병원에 가보라고 하셨다만…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구석에서 고집이 쎄다.

다친 지 2주차가 되자 아픈게 좀 가라앉고 걸을만해지니까,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러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러닝을 못하는게 괴로웠냐 싶겠지만. 작년 여름부터 내 인생은 철저하게 러닝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애초에 가족도 친구도 없이. 인생을 운영하고 있던 사람이니까(하하)

집중해야하는 것을 러닝으로 슬쩍 바꾸기만 한 것 만으로 자연스레 러닝 없이 못 사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매일 정형외과에 가면서 선생님이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아직 운동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주의를 주셨는데. 그걸 보면 내가 되게 티나게 러닝을 하고 싶어한 것 같긴 하다. 어떻게 안 걸까 내가 이 겨울날 손바닥만한 바지를 입고 진료실에서 달리는 흉내를 낸 것도 아닌데 말이지. 물론 적당해졌다 싶은 주기마다 언제쯤 운동을 해도 될까요? 라고 물어보긴 했다만…아 맞다 다친 날 아침에도 러닝했다고 얘기 했었지만 뭐 그래.

길고 긴 설 연휴에도 대체로 누워있었다. 어디 미술관 구경하러 가자고 나오라는 연락도. 뭔가 먹으러 나오라는 연락도 모두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냥 누워있었다. 초조하게 도대체 언제 다리가 낫는거지 하는 생각만 했다. 설 전에 갔었던 진료에서 무릎을 초음파로 보다가 왼쪽 무릎 연골판에 파열 의심 증상이 있다는 소리를 듣자. 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든걸 보면 정말로 러닝 말고는 인생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된건가 싶기도 하다. (연골판에 파열되었을 경우, 애초에 완치는 안된다. 심한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하는데 재활에 몇개월이 걸린다.)

러닝을 못하게 된지 2주가 넘어갈 때 쯤엔 러닝을 하지 못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걸까.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죽은 눈으로 게임 패드를 잡고 죄없는 병사들을 칼과 창으로 때려잡으며. 아니면 베트남, 대만의 신진 작가가 현대사의 비극을 녹여낸 훌륭한 문학 작품을 기운없이 읽으며. 내내 그냥 러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훌륭히 멘탈이 무너졌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피ㅋ민 블룸이라고. 나ㅇ언틱에서 만든 산책게임이 있다. 원래 있던 게임인 피ㅋ민을 나ㅇ언틱 특유의 위치 기반 서비스와 결합한 게임인데. 나온지 몇년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갑자기 인기를 끌기 시작해서 아주 최근에 한글판 공식 에스엔에스 계정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나도 도쿄 여행을 갔다오기 얼마 전부터 친구의 권유로 하기 시작했는다.

거기에는 “눈 데코 피ㅋ민”이라는 희귀한 피ㅋ민이 있다. 눈이 오는 시간 대에 특정한 위치에서 아이템을 쓰면 얻을 수 있는 피ㅋ민으로. 워낙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나는 얼마 전부터 그 눈 피ㅋ민을 얻으려고 노력을 아니 집착을 하고 있었다.

일단 매일 나ㅇ언틱에서 쓰는 날씨 서비스를 매일매일 찾아서 우리 지역에 눈이 올 확률을 찾아보고, 특정한 위치 (눈 피ㅋ민은 “길거리”아이콘이 딱 하나만 나오는 지점에서만 나온다. 우리나라엔 공지가 적어서 그런 지역이 드물다.)가 집과 회사 주변 어디에 있는지 찾아두었다.

설 연휴에는 폭설이 내렸는데, 우습게도 앱 안의 날씨는 매일이 흐림이었다. 눈으로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일찍 퇴근해 무릎 혈종 제거 시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갔던 날. 웃기게도 앱 안의 날씨가 눈으로 바뀌었다. 나는 붕대를 감은 채로 “길거리” 아이콘이 나올거라고 예상되는 곳으로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날씨 예보는 1시간 단위로 바뀌기 때문에 1시간 내로 예상한 곳 까지 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난리를 쳐서 눈 피ㅋ민을 두마리나 얻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여기에 과하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게임을 한지 두달이 되기 전에 레벨이 50에 근접한 것 부터가 정신줄을 놓고 이걸 하고 있었다는 증거였긴 하다.)

이게 뭐라고 말이지. 눈 피ㅋ민이 뭐라고. 러닝이 뭐라고.

3주 정도는 더 봐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이 주말에 10킬로미터를 뛰었다. 무릎의 붓기가 빠지지 않아서 붓기가 빠지기 전에는 연골판의 파열을 확인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냥 냅다 뛰었다. 무릎이 아파오자 눈물이 좀 날 것 같았다. 계속 달리고 싶었다.

나는 보잘 것 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어느 것에도 집착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였다고 생각한다.
그냥 무의미한 집착이었다. 다 알고 있었다. 사랑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집착하고. 사랑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번뇌에 빠졌다.

여름부터 썼던 포스팅을 읽자. 그 동안 내가 어떻게 매달 다치고 아팠는지 (놀랍게도 매달 어딘가를 다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괴로워했는지. 어떻게든 나아보려고 노력했는지 거기에 다 적혀있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쓰지 않을 것을 그랬다. 의도치 않은 사고로 넘어지고 굴러 애써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게 내가 아니었다면 좋았을텐데.

어제 밤에 차림새를 갖추고 무작정 달려보려고 하는데. 허리가 아려왔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어서 새벽에 일어나 다시 달리려는데 아직도 허리가 아렸다. 디스크일까, 근막의 통증일까. 아니면 그냥 춥기 때문일까. 피트니스에 가서 트레드밀 위를 뛰었다.

모두 다 미망이고. 모두가 미련이다. 여기에 어떤 의미도 없었다.

나는 넘어졌었다. 뜻하지 않은 빙판길에 미끌어진 것 처럼 넘어졌다. 용기를 내어 혼자 걸어가야 하는데. 아무리 엉망이 되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25년 2월의 글이다.


'부재증명_(에세이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212] 불변  (2) 2025.02.12
[20250207] 쓰러져 일어나지 않는다.  (0) 2025.02.07
[20250204] 넘어졌다.  (0) 2025.02.05
[20241220] We are TEAL  (0) 2024.12.20
[20241207] 새벽에게  (0) 2024.12.07

1월 14일 아침, 나는 넘어졌다. 넘어졌다기 보다 굴렀다.

13일 밤부터 눈이 내렸다. 새벽에 일어난 나는 막연히 괜찮을거라고 생각하고 러닝을 했다. 5.05킬로미터에 36분간의 러닝. 두번 정도 넘어질 뻔 했짐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속도로(겨울이니까 빨리 달릴 수 없다) 달렸는데 정작 넘어진 것은 출근하려고 걸어갈 때였다.

나는 떳떳하다.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지도 않았다. 뉴스를 듣고 있긴 했지만 하여간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지도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건 아침에 나올 때 바닥이 미끄러운 편인 나이키 모델을 신었던 것 정도다. 나는 그 신발을 신으면 어라 이거 오늘 아침 같은 날에는 좀 위험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니까 어른의 지혜로 나 스스로에게 충고를 한 것이다. (정작 나는 그 어른의 지혜를 무시했다. 항상 내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차에 치인 것 같은 몰골로 회사에 도착하자. 옆자리의 부장님은 뭐냐 어떻게 된거야 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어 넘어졌어요. 하고 얼빠지게 대답을 하고는 몸에 묻은 흙과 눈을 털고 아까부터 뜨겁고 쓸린 느낌이 나던 무릎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바지를 걷어보니 맙소사 무릎이 두개가 되었다. 심지어 아랫쪽에 새로 생긴 무릎 쪽이 더 컸다. 피야 당연히 나고 있었고 휴지로 닦아냈다. 보통 다친게 아니란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야 빨리 병원 가봐라 라고 부장님이 성화신데 나는 좀 현실감이 없어서 아침에 보고 하나 작성할 게 있어서요. 라고 얼빠지게 말하고는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회사 근처의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께서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하셨다. 병원의 직원들이 다들 한 명씩 와서 내 무릎을 구경하고 갔다. 아프신가요? 아뇨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은데요. 라고 말헀는데 엑스레이를 찍고 진통주사를 맞추고 진통제를 세 종류 처방해주셨다. 저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은데요. 오늘밤부터 엄청나게 아프실거에요 내일은 더 아프실거고요. 너무 아프면 꼭 병원 나오셔야 합니다. 진통제 더 처방해드릴게요.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그날 밤은 엄청나게 아팠고. 그 다음날은 더욱 아팠으며. 다다음날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처음 넘어진 곳은 언덕을 올라가는 횡단보도였다. 평소엔 차들이 사양하지 않고 우회전이고 직진이고 하는 곳인데 그 날은 왠지 한 쪽에 경찰차가 서있었다. 거기에 눈이 팔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펭귄처럼 걷다가 앞으로 꽈당 소리와 함께 넘어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후에 깨달은거지만 워낙 사고가 나기 쉬운 고갯길에 (나는 평소에도 그 곳에서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눈이 내린 아침이라 경찰차가 미리 와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도 내가 넘어지자 맞은 편에서 오던 차가 마법처럼 서행을 하고 있어서 횡단보도를 넘어서까지 밀려내려오진 않았다.

후에 알았지만 운이 좋게도 무릎으로 넘어지지 않아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나는 넘어졌다는 당혹감과(어른들은 넘어지면 굉장히 당혹해한다.) 창피함에 발버둥치며 일어났지만 차도 경찰도 행인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여기 오늘 아침에 넘어진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나보다. 검은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무르팍에 더럽게 묻은 블랙아이스를 털고 일어나니 그냥 좀 더럽고 출근 중인 아저씨인지라 비틀비틀 걸어갔다. 회사까진 2킬로미터 정도 남았고 이 정도 넘어진 걸로 회사를 안가기엔 좀 그랬다.

무릎이 쓸리는 감각과 건조한 통증이 있었지만 찰과상이겠거니 생각하며 고갯길을 비틀거리며 걸어올라 회사 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중간 쯤 걸어내려오는 횡단보도의 중간 쯤에서, 나는 한 번 더 넘어졌다.

엄청난 소리가 났다. 아니 나도 내가 넘어지면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한번 넘어졌기 때문에 무릎에 힘이 빠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부딪혔던 왼쪽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미끌어졌고 오른쪽 바닥에 넘어졌다. 눈을 감았는지 아니면 기절을 했는지, 아주 잠시 블랙아웃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생각한 것은 머리를 부딪혔을까 였는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격통이 찾아왔다. 나는 숨을 토하는 소리를 냈다.

역시 우회전을 하며 진입하려던 차는 횡단보도 앞에서 비상등을 켜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본인들 눈 앞에서 사람이 엄청나게 화려하게 넘어졌는데 나와보지도 않는건, 뭐 내가 보험사기라도 칠까봐 그런걸까? 일어날 수 없었던 나는 기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기어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서 숨을 내쉬며 기었다.

눈을 뒷통수로 떨어지는게 느껴지고. 나는 건넛편까지 기어와 기는 것도 하지 못해 누웠다. 차들이 지나갔지만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도 일으켜주지도 않았다.

회사까지 1.5킬로미터.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무릎에서 나던 피가 흘러내려 발목근처에 고이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대충 피를 닦아내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았다. 일어날 수 있을까. 걸을 수 있을까. 두 개가 해결되기 전에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눈이 덮여오는게 따스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짐승이 끌려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주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정확히는 무릎 근처가 엄청나게 부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왼쪽 무릎이 원래 좋지 않다. 20대때 멍청하게 운동하다 생긴 부상이다. 조졌네 조졌어. 큰일났네 큰일났어.

나는 엉망인 꼴로 발을 질질 끌며 회사로 걸어갔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내 옆에는 없었다. 고작 회사까지 걸어가는 것 뿐인데. 뭐가 이렇게 힘든지.

25년 2월의 글이다.


고토구는 주택가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이다. 도쿄 현대미술관은 그곳의 역시나 조용한 공원 - 키바 공원이라는 이름이다 - 외곽에 뜬금없이 세워져있다. 어떤 지하철 노선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이런 곳에 어째서 미술관을 세웠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도쿄 어디를 가도 시간이 일정하게 걸리는 시나가와에서도 1시간은 걸린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타야한다.

도쿄의 버스는 120엔에 노선의 끝에서 부터 끝까지 갈 수 있다. 비싸고 상업화되어 있는 전철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도쿄 도민의 발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으로 가기위해 역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며 낯선 - 나는 고토구에 올 일이 없다 - 동네를 두리번 거리며 구경했다. 추운 겨울인데 사람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 웃지도 않고 찡그리지도 않지만 우리 동아시아 인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혼자 무표정 으로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상태이다. 모두들 다른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겨울의 햇볕을 각자 즐기며 고요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버스에 안에서 본 거리의 풍경은 겨울처럼 따뜻했다. 아이들을 태운 자전거와 산책을 하는 노인들. 어딘가로 우르르 달려가는 중학생들. 대단지를 이루지 않고 다양한 크기로 세워져 있는 맨션들은 깨끗하고 안전해보였다.
키바 공원은 좋은 곳이다. 넓지 않은 공원이지만 나무들이 충분히 나이가 들었고 공터는 넓다. 내가 좋아하는 홋카이도 오비히로의 공원을 닮았다. 공터 어딘가 멀리에서 축구공 만한 아이에게 남자어른이 축구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니 축구를 가르치는 것보다 공을 굴리고 있었다는게 좋을 것이다.

미술관 관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수고가 아까워진 나는 지하의 패밀리레스토랑이라도 가볼까 생각이 들었는데. 이미 그곳은 아이들과 온 부모들로 가득하고 줄까지 서있었다. 그래보이지 않았는데 혹시 소문난 맛집인가. 초코 파르페를 커다랗게 찍은 포스터를 보자 나도 먹고 싶어졌다. 미술관을 나오는 길에는 역시나 축구공만한 아이(아까와는 다른 아이이다. 어째서 다들 축구공만할까?)가 산타 복장을 입고 계단을 혼자 내려가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버스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 보니, 이 노선은 스카이트리와 신주쿠를 왕복하는 상당히 긴 노선인 것 같다. 스카이트리에 가고 싶은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사람이 몰리는 유명한 관광지는 좀처럼 가지 않는 속물근성으로 유명한 나는 아까 미술관에서 본 전시 작품들 생각을 하면서 그에 대해서 어떤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내 주의를 끈 것은 버스 의자에 앉아 졸고, 아니 완전히 잠에 빠져있는 작은 아이이다. 아이는 촌스러운 털옷에 상하의의 색깔이 어울리지 않게 입고 있었다. 빨간 색에 가까운 자주색의 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연보라색의 윗옷은 오랫동안 길가에 놔둔 것처럼 회색이었다. 신발은 역시 작고 더러웠다. 아이는 좌석에 완전히 파묻혀서 버스에 얼굴을 대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덜컥 겁이 나서 자세히 살펴보니 아이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몇살 쯤 되었을까. 나는 조카를 생각한다. 또래보다 키가 큰 것이 자랑인 조카라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버스 안의 아이는 5살 정도 되었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오래 쓴 듯 조금 닳아있지만 마스크는 알록달록한 어린이용 마스크이다. 머리카락은 역시나 알록달록한 방울 - 나는 저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슈슈라고 부르던가. - 로 단정하게 묶어두었다. 나는 아이를 돌봐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한다. 그리고 아이의 근처 앞 좌석에 타고 역시나 고단하게 자고 있는 어른 한 명이 아이의 보호자일거라고 추측한다.

그 사람은 역시나 좌석에 깊숙하게 기대어 앉아 자고있다. 햇볕에 상한 피부라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옷은 역시나 때가 탔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와중에도 손으로는 등산지팡이를 꼭 쥐고 있다. 발치에는 옷만큼이나 낡은 빨간 색의 백팩이 놓여져 있다. 모녀하고 하기엔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 할머니일까. 갈라진 손등을 쳐다본다. 안전할 게 틀림없는 버스 안에서 잠에 곯아떨어져 있을 때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 같은 손등이다.

겨울이기 때문일까. 노선의 끝에서 끝까지 가도 한 사람 당 120엔. 아마 한 쪽은 아이였기 때문에 버스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노선의 한 쪽 끝에는 신주쿠이다. 원래는 신주쿠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까. 120엔에 따뜻하게 걱정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행자이다. 1400엔을 내고 전시를 보고 역시 그 정도 돈을 내고는 맛없는 커피와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먹었다. 호텔로 돌아가면 잠시의 변덕으로 사치스럽게 예약해둔 킹사이즈 베드의 방이 기다리고 있다. 몇 년만에 온 도쿄의 물가는 말도 안되게 올라가 있었다. 도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묻자 아주 저렴하게 먹으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다른 물가는 말도 안되게 올랐지. 도쿄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걸까 하고 혼잣말을 하니 친구는 그러게, 관광객들이랑 부자들 말고는 다 죽으라는 거랑 비슷하지. 라고 말한다.

세이브더칠드런 재팬은 24년 7월 아동계층의 빈곤에 대해서 19년 이래 최대급의 앙케이트를 벌였다. 전국의 일반층3만명과 단체에서 후원한 비과세세대의 13세부터 70세까지의 당사자층. 그리고 17세까지의 아동층이 대상이다. 해당 설문에서 우리의 주의를 끌만한 점은 19년의 앙케이트와 비교하여 아동빈곤에 대해서 알고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 퍼센테이지가 10%이상 늘어났다는 점이다. 아동 빈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고 한 비율은 더욱 더 줄어들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추정되는 일본의 절대 빈곤층, 즉 하루 $2.15 이내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일본 인구의 0.35%로 보여진다. 올해 일본의 인구는 1억2450만명. 즉 절대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40만명이 넘고 그 중 대부분이 복지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하는 어린이로 추정된다. 일을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수 없는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야유를 당하고 있는 일본의 사회복지 체제는, 일을 할 수 없는 어린이에게는. 어린이를 길러야 하는 부모에 대해서는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을까.

스카이트리로 가는 정류장이 얼마 남지 않자 버스안의 사람들은 더욱 웅성거린다. 누군가는 짐을 다시 챙기고.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보며 지도를 확인한다. 하지만 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서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걸 - 버스 안에 있는 다른 어떤 사람들처럼 - 깨닫고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보지만 어째서인지 자꾸 자고 있는 아이의 땋은 머리를 물끄러미 보게되어 나는 버스를 내린다.

나를 버스에서 내리게 한 것이 죄책감인지 아니면 비열한 안도감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24년 12월의 글이다.


블로그란 애초에 개인들의 시덥잖은 기록을 남기는 곳이다.
이번 주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개인적인 기록을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쓴다.

월요일에 부서 송년회는 대게 집이었다. 나는 대게 집이라면 깔끔하게 대게만 삶아서 나오는 곳을 좋아하지만, 대체로 대게집이라고 하는 곳은 쓸데없는 메뉴가 꽤 많이 나오면서 비싸다. 삶은 게만으로는 비용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일거다.

삶은 킹크랩을 먹으면서 이게 정말로 맛있다고? 하는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저씨들은 골프 이야기를 지루하게 맥락도 없이 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우리 스크린 골프 대회를 하죠 라는 결론을 세 번 쯤 내길래 나는 참지 못하고 뜬금없이 요즘에 제가 러닝을 다시 시작했는데요. 러닝크루란게 인기잖습니까. 모든 러닝크루가 그런건 아니지만 결국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곳이라 이겁니다. 라는 말로 올해 8월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저씨들 다수가 정신이 쏙 빠져서 신비롭고 기묘한 나의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계산을 마감할 시간이 되어서 나는 이야기의 3/4 지점에서 끊고는 하하 다음 이야기는 다음 회식때요. 하고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지하철을 탔다. 선배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집중 할 수가 없었다. 배가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에서 내려 화장실로 뛰어가야했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서 화장실에 갈 수 있었지만…집에 도착해서도 화장실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밤을 샜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나는 화장실의 문간에 누워있었다.

화요일 아침.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고를 하고 화장실에서 기어나와 침대에 누웠다.
나는 연차를 썼고. 배가 아파서 하루 종일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다가 스프를 좀 먹었고 낮잠도 좀 잤다. 정신이 차려지기에 기어나와서 동네를 걸어다녔다. 연차를 쓴 하루는 하는 일도 없이 빨리 가버렸다. 평소처럼 약간의 우울감이 있던, 별거 없는 겨울의 하루였다. 24년 12월 3일.

저녁에는 고집스럽게 러닝을 했다. 추워죽겠네 투덜거리면서 밥을 먹고. 씻고 누웠다. 유튜브로 뭐라도 봐야지 하고 모로 누워서 22시 15분에 시작하는 정치예능쇼를 켰다. 웃을 준비를 마치고 있었는데 실시간 댓글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통령이 심야 긴급 담화를 한다는데? 패널들도 나도 뭔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하겠지 싶어서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패널 중 한 명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비상 계엄이라는데?

22시 30분, 친구들이 있는 단체방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캡쳐를 보냈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당황한 상태여서 도움은 되지 않았다.
20분이 넘게 다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하고 당황하는 사이. 국민의 힘 당대표가 비상계엄의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고 발표했고. 민주당 당대표가 유튜브 라이브를 켰다. 시민들에게 국회로 와달라고 호소하였고 본인도 여의도로 간다는 이야기였다.

민주당 당대표의 라이브를 보고,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한 나는. 문자를 보내서 서울은 있기 힘들 수 있으니 수원에 와 있으라는 메세지를 보내고 샤워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친구에게 메세지가 와있었다 비상계엄이면 출근도 안하는거냐. 전쟁 때도 우리는 출근이지 원래 월급쟁이는 다 나가는거야.
해외에 있는 친구가 찐미친놈이네 라고 욕을 했다. 멍청한 거에는 한도도 없는거냐.

음소거 상태로 계속되던 민주당 당대표의 라이브는 그가 국회의 담을 넘어서 어딘가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고. 곧라이브가 꺼졌다. 친구들에게는 이제 그만 잔다 라고 말했지만. 친구들도 나도 아니 이 상황을 알 고 있던 어떤 한국인도 잘 수는 없었다. 언론들의 유튜브 라이브를 켜봐도 지금 상황을 확인 해 줄 수 있는게 없었다.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중소 신문사의 라이브로 현재 국회의 상황이 나오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이미 국회에 도착해 있었다. 카레야 어떻게 할꺼야 하고 연락이 왔다. 나 옷 갈아입고 있어. 응 같이 갈래? 성남으로 와.

23시 30분, 계엄사령부의 포고령 1호가 발표되었다.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을 싸서 약이랑 보조배터리 같은 것을 손에 잡히는대로 넣었다. 예전에 쓰던 폰을 꺼내서 유심이 빠져있는지 확인하고 여의도의 지도를 사진에 다운 받았다. 켜둔 유튜브 라이브에서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크게 부숴지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이동하는 소리. 스튜디오에서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물이 조금났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결국 이거구나. 여의도로 가는 진입로를 확인하고 샛길을 보았다. 나는 광화문과 여의도라면 거기서 살았던 사람보다도 더 잘 안다. 아 결국 이러려고 그런거구나.

저기 누군가가 있었다. 비상계엄을 해지하기 위해서 150명의 국회의원이 모여야했다. 23시 4분에 이미 국회의 출입문은 폐쇄되었다. 23시 45분이 넘어가자 팔로잉 해둔 주요 외신에서도 한국의 계엄 소식이 뜨기 시작했다.
곧 민주당 당원인 누군가가 국회로 집결하라는 문자가 발송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당원도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구석에 쳐박아둔 낡은 - 언제라도 버려도 되는 운동화 - 를 꺼냈다.

00시 07분, 계엄군이 국회 본청에 진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여의도로 갈거면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한 친구는 성남에 살았다. 라이브를 켜둔 상태로 집에서 나갔다. 친구에게 가면서 트위터에 짧게 “저는 가족이 없어서 상황을 지켜보다 서울로 갈 생각입니다.”라고 적었다. 다른 친구에게 아 내일 전세계의 공급망에서 한국 망했냐고 연락이 존나 오겠지. 하고 메세지를 보냈다. 너 가고 있냐. 라고 묻기에 뭐 그런거 아니겠냐 하고 말했더니. 가지마 위험할텐데 하루 종일 설사 했잖아. 라고 메세지가 왔다. 알았어 일단 잘게. 하고 말했다. 택시를 탔다.

00시 36분, 국회 의장은 본회의장에 착석했고 계엄군이 국회 본청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다. 아직 본회의의 의결 정족수는 채워지지 않았다. 택시는 성남의 친구 집에 도착했다. 기사 분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친구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친구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기사와 라이브를 들으며 기다리고 있으니 친구가 부인과 내려왔다. 와이프는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아니 기분이 안 좋은게 아니라 숫제 둘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기사 분께 죄송하다고 택시비를 계산했다. 택시에서 내렸다. 친구의 부인은 친구의 백팩을 꼭 잡고 있었다. 그걸 놓으면 친구가 죽기라도 한다는 듯이.

00시 45분, 금융 당국이 무제한의 유동성 공급 등 시장 안정 수단을 총동원 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둘의 말다툼을 어떻게 중재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알았다 너는 가족이 걱정하니 오늘은 그만 들어가라 나 혼자 가겠다. 라고 말하자 친구는 - 대학시절 그 누구보다 운동권이던 친구는 - 내가 비겁하게 어떻게 집에 있겠니. 라고 말했다. 친구의 어린 와이프는 울기 시작했다. 구축의 작은 아파트 진입로에 세 명이 서서 한 명은 울고. 한 명은 달래고. 한 명은…한 명은 그냥 그렇게 있었다.

00시 48분, 본 회의가 개의했다.

01시 01분,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재석 190인 중 찬성 190인. 야당의원 172명.
셋이서 라이브를 듣다가 나는 중재안으로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서 철수하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지도 모른다. 거실 저쪽으로 힐끔 친구의 어린 자식이 자고있는게 보였다. 아직 아기이다. 2살, 3살 쯤인가. 나도 너를 보는건 처음인데 이렇게 너를 보게 되어서 유감이구나. 울어서 엉망으로 된 얼굴로 친구의 와이프는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거였는데 이렇게 보게 되서 유감입니다. 라고 하기 좀 그래서 제수씨 눈에서 콧물 나와요 라고 말했다. 죄송해요 하고 친구의 부인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01시 11분, 계엄군이 국회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시름 놓은 것 같은데. 저희까지 지금 여의도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제 밤이 늦었으니까 저는 그만 집으로 가볼게요. 라고 인사를 했다. 카레야 그냥 자고 가지. 자고 가긴 뭘 자고 가 미친 거 아니냐. 친구의 너무 어린 와이프는 울먹였다. 죄송해요 어쩌고라고 말한 걸 들은 기분이 든다. 친구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라는 말만 반복했다.

밤거리는 추웠다. 택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나는 성남 어딘가의 밤거리에 서서 라이브를 들으며 택시를 기다렸다. 거지같이 추웠다.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거리가 조용했다. 네가 이제 그만 버리라고 말한 운동화를 신고 나는 거기에 서있었다. 유리조각처럼 깨진 밤은 아직도 길어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사람들은 여의도 어딘가에 모여서 어깨를 서로 대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나는 뭘 하고 있는걸까. 아직 새벽이 이렇게 긴데.

택시에서 국회의장이 계엄해지 통지서를 보냈다는 선언을 들었다.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금세 집에 도착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항상 그런 것처럼. 그래서 나는 옷을 입은 그대로 소파에 누워서 라이브를 계속 들었다.

04시 27분, 계엄은 해지되었다.

친구 하나는 손이 차갑고 긴장이 되어 밤을 꼴딱 샜다고 했다.
친구 하나는 온 몸이 덜덜 떨려서 겨우 잠이 들었다고 했다.
친구 하나는 밤 중에 국회로 달려서 아침이 올 때 까지 거기에 사람들과 서 있었다고 한다.

나는 비척비척 옷을 갈아입고 회사를 나갔다. 비상계엄이든 전쟁이든 월급쟁이들은 출근을 해야한다.
새벽을 지나 아침의 바람도 차갑다. 그것이 겨울이라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 오늘도 그대로 민주국가의 시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교차로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눈물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울면서 아침의 출근길을 걸어갔다. 새벽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도 없는데.

24년 12월 3일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글이다.









며칠 전 나는 저녁꺼리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다. 까마귀 떼가 하늘을 날아 북북서에서 남남동으로 가로질러 어딘가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바깥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관심이 없었고 어떤 사람들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까마귀떼를 보았다. 나는 … 그리웠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까마귀떼를 보았다. 4년만의 일이었다.

저녁 까마귀 떼를 지어 수풀로 돌아가고.
아침무렵 흰 입김은 공중에 흩어지는데.

나는 여기까지 문장을 짓고는 뒤를 이을 연을 떠올리지 못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대신 어딘가의 연습장에 한자로 이어질 문장을 끄적이고는 어딘가에 쳐박아둔다. 언젠가의 내가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고 그 뒤를 이어주길 바라기로 한다.

어제밤엔 비가 왔다. 불이 꺼진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누웠는데 이상하게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운동복을 입고 러닝을 했다.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었다. 추운 밤, 비까지 내리는데 러닝을 하려고 하다니 나는 나를 제어 할 수가 없구나. 씁쓸한 기분과 함께 코너를 돌고 고개를 들었다.

비다. 비가 얼굴을 때렸다. 빨리도 장갑이 축축해지고 얼굴에 비가 쏟아져 숨은 차가워져갔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처음의 씁쓸한 마음은 가시고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평온에 한없이 가까운,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에 대한 기도를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날의 달리기를 하던 중, 비로소 내가 왜 이 어둡고 외로운 마음에서 낫지 않는가를 깨달았다.

내가 애초에 낫기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거꾸로 반쯤 정신이 나간 이 미친 상태에서 그대로 머무는 것.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긴 기도를 하는 것. 이 길고 긴 밤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길 바라는 것. 상실을 곱씹고 곱씹어서 이 상실이 내 피와 육신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느린 발구름에 물이 튀어올랐다. 차갑게 식은 빗물이 양말 안으로 들어와 발이 딱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그대로 하얗게 되어 비에 씻겨져 사라져버렸다. 몇 주째 아픈 등은 착지 할 때 마다 나를 불편하게 찔러댔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희미한 환희에 가까웠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내가 그걸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장마철의 개미처럼 젖어서 러닝을 마치고는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잤다. 음악을 듣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주 길고 긴 시간이 지나서 비로소 겨울이 당도한 것이다. 모든 것이 씻겨가버린 후였다.

얼마 전에 주문한 헌팅자켓이 왔다. 황토색에 튼튼하고. 아주 커다랗다. 뜻하지 않게 커다란 걸 산 것이다. 오버사이즈인걸 알았는데 키가 큰 거인 족인 나는 엑스라지 입어야지 하고 샀는데 어깨가 맞지 않을 정도로 크다. 어떻게 입을까 고민하다가 기모후드를 입고 헌팅자켓을 입었더니 그럭저럭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반품해야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이 정도 크기면 엘사이즈를 입었어도 나에게 크다. 그래 이건 크게 입는거야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기랄 누가 지적하면 어쩌지 패션을 모르는자야 이건 크게 입는거야 하고 받아쳐야지.

오늘은 추울테니까 싶어서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양말도 따뜻한 걸 신었다. 혹시 몰라 니트 비니도 하나 챙겼다. 혹시 몰라 목도리도 하나 챙겼다. 요즘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는데 뿔테에 니트 비니를 쓰니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려서 공항 도둑이 나타났다고 자수 할 뻔하였다.

어제 퇴근 길에 잘 쓰고 있던 장우산의 살 하나가 녹슬어서 부숴진 걸 발견했다. 어느날 종로-광화문 어딘가 쯤 비가 너무 많이 오기에 편의점에 들어가 휘릭 산 우산인데도 마음이 안 좋아서 살을 고쳐 쓰기로 했다. 다른 우산을 대신 들었는데 이것도 비가 너무 많이 오기에 그냥 편의점에 들어가서 산 우산이다. 우산을 이렇게 사대니까 부자는 못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출근을 하려고 나왔는데 눈발이 생각보다 거셌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새벽녘에 정신이 나간 나는 눈을 맞으면서도 러닝을 하려고 나왔다가 얼굴에 부딪히는 눈발이 너무 아파서 5분은 커녕 1킬로미터도 못 달리고 다시 집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산을 쓰고 조심스럽게 걷는데 추워서 웃음이 나왔다. 흐하하 하고 웃었다.

그렇게 겨울이 왔다.


24년 11월, 첫눈이 온 날의 글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