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야트막한 언덕에 붉은 꽃무릇이 피었다.

어디서도 잘 자라는 꽃이라 어디서 씨앗이 날아와 피었나 싶었는데 언덕 곳곳에 피어난 걸 보니 누군가가 꽃무릇을 좋아해서 심었나보다.
추석 때 쯤 피어나 한 달 정도면 지는 꽃이다. 뿌리에는 독이 있고 줄기를 섣불리 먹었다간 탈이 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돌+마늘이라는 뜻의 석산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요사한 모습 때문에 피안화라고 부른다. 장례화, 사인화, 만주사화… 모두 이 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같이 불길하고 슬픈 이름이라 때마침 잘 되었구나 싶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꽃무릇 군락을 보는 것이 일이 되었다. 달리기를 하러 계단을 내려갈 때도 꽃무릇 군락을 지나쳐서 간다.

8월 말부터 세보니까 6주 정도 로드 러닝을 했다. 그리 오랫동안 했다고 볼 순 없지만 병원에 있었거나 하는 불가피한 이유가 아니라면 거르지 않고 매일 매일 뛰었다.
늑골이 아프고 무릎이 아프면 진통제를 두 알 정도 먹고 느림보처럼 뛰었다. 목표나 목적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 이유가 없다. 그냥 나의 모든 것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시작했다.

러닝에 대해서 글을 써보려고 했다가 6주를 뛰어보고 러닝에 대해서 쓴다는 것 자체가 좀 바보 같이 느껴져서 쓰지 않고 있었다만. 실은 원래부터 꽤 오랫동안 러닝을 했었다. 오히려 러닝을 안 한 요 몇 년이 특이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두 시간 운동을 했던 20대 때는 3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고 줄넘기 3천개를 하는 걸로 운동을 시작했었는데. 러닝속도가 지금보다 훨씬 빨랐기에 시속 11-12킬로미터 정도로 3킬로미터를 달리는 걸로는 15분 남짓 시간이 걸리는 정도여서 부담도 없었다.

그 땐 보통 집을 나와서 좀 걷다가 국도가 나오면 그 때 부터 러닝을 시작했다. 국도를 건너 논 밭을 지나 산길을 뛸 때도 있었고 국도를 따라서 그냥 무작정 달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집 주변의 럭비경기장(서울 럭비구장이라는 이름이다)으로 뛰어가 트랙을 달렸다.

밤이면 사람이 없어서 트랙을 독차지하는 기분이 좋았다. 멀리에서 들려오는 온수역의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서 트랙을 달리고 또 달렸다. 가끔 동네에 아는 여자애가 찾아오면 술을 마시고 그 럭비경기장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조명이 거의 없어 밤하늘을 보기에도 좋았고 넓은데 사람이 없어서 이야기를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꽤 어려서 여자애에게 뭘 해줘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에 대체로 먼저 말을 하지 않고 하는 얘기를 들어주는 것에나 신경을 썼다.(지금도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때때로 공장들과 국도를 지나 그 트랙을 달리던 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조명도 없는 새까만 운동장을 달리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 까지 사산조 왕국의 운명이나 로마시대의 군사 체제에 대해서 생각하며 달렸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묘하게 따분한 인간이다.)
어쩌다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달리는 날이 오면, 그 때는 온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 때 까지 뛰었다.
내 나름의 방법으로 하는 기도 같은 달리기였다.

그 때 내가 달리던 국도는 그대로 있지만. 산길은 수목원이 되었고. 서울럭비구장 부지는 40층짜리 주상복합 단지가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1시간을 꼬박 혼자 달려도 되는 트랙보다 거대한 상업 단지 쪽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돈 한 푼 내지 않고 써왔으면서 그냥 투덜거려봤을 뿐이다.

내가 러닝을 하는 것은 좀 더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될 것 같다. 호흡법을 포함해서 뛰는 방법을 배운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때 태권도 학원에서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하는 러닝에 대한 기억이 시작되는 것은 중학교 때다.
그 시절 즈음엔 밤이 되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밖에 나가서 무작정 달리기를 했다. 카세트 플레이어라니 너무 오래된 용어인데. 그 당시에는 음악 감상 서비스가 지정해주는 랜덤 플레이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경험과 취향을 바탕으로 고유의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음악을 듣는게 당연했다. 중학생인 나는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그 당시 듀크 엘링턴을 비롯한 재즈에 푹 빠져서. Take the A-train 이라든가 Me and My shadow 같은 음악을 엄청나게 큰 볼륨으로 들으면서 양 쪽에 공장이 가득한 국도를 무작정 뛰었다.

예전에 얘기하지 않았던가. 나는 가난한 공업지대에서 자랐다. 위에서 썼던 럭비구장도 근처에 그 럭비구장을 만든 커다란 제강 회사가 있었다. 밤이면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고 먼지로 가득한 공기가 그나마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공기가 깨끗하든 말든 중학생인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달렸다. 온수역에서 역곡역 까지 달리면 편도로 1.5킬로미터. 다시 돌아오면 3킬로미터 정도였다.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은 보도는 울퉁불퉁해서 달리다 보면 발목이 아파질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달리면 기분은 항상 나아졌다.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변덕이 들어 달리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면. 평소(평소라고 생각한 20대때)처럼 시속 12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달렸다.
항상 달리는 건 밤이다. 밤 공기를 깊게 들이 마시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상쾌해지지만. 보통 그 뒤로 3주 정도는 무릎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운동 중에 한 번 다친 무릎은 무슨 짓을 해도 안 낫는 기분이다. 20대 중반 정도에 바보 같은 짓을 하다가 다친 탓이다.
그렇게 몇년 동안은 신나게 뛰고 한 3주 아프고를 반복하고 살았다.

요는 나에겐 가끔 달리는 행위 자체가 필요한가보다. 공을 던지고 싶지도 방망이를 휘두르고 싶지도 않은데 달리기만은 다르다.

이번 6주 동안에는 나름 성공적으로 연속 러닝을 다니고 있다. 무릎이 아파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무릎은 아직도 아프다. 무릎 보호대를 차고 파스를 잔뜩 바른 채로 달리기에 나간다. 단지 첫 번째, 이전에 얼마나 빨리 달렸었는지에 대한 고집을 버리고 시속 7-8킬로미터의 느린 속도라도 좋으니 30분 연속으로 뛰는 걸 목표로 달리기 때문에 무릎의 부담이 덜해졌다. 두 번째, 달리기 만이 삶의 목표라도 된 것처럼 달리지 못하면 오늘 밤에라도 죽을 것처럼 굴고 있기 때문에 퇴근해서 피곤해 바로 잠을 자더라도 살풋 잠에서 깨면 옷을 갈아입고 나가서 달린다.

달리는 목표는 30분 연속 러닝이다. 속도는 시속 8-9킬로미터 정도지만 무릎이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으면 시속 6-7킬로미터 정도의 느긋한 속도로 달린다. 그 정도면 그냥 빠른 걸음 아닌가 하겠지만 아니다. 달리기다 마음가짐이 다르다. 양 손을 가슴 높이로 올린다는 것 부터가 달리기라는 증거다. 로드 러닝을 하고 있으면 시속 10이 분명하게 넘는 속도로 쌩하니 달려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초보운전”표지판처럼 무릎 보호대는 러닝을 나갈 때 마다 빼놓지 않는다. (변명이 아니고 실제로 무릎이 아프다.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달릴 수가 없다. 이상한가?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달리는 코스는 랜덤이다. 로드러닝 자체가 트랙러닝이나 어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짓 10개를 뽑으면 상위권으로 뽑힐 트레드밀 위에서 하는 러닝보다 상대가 안 될 만큼 즐겁긴 하지만. 랜덤으로 달리면 더욱 즐겁다. 어차피 나는 동네의 길을 대충 뛰는 거기 때문에 길을 뛰다가 횡단보도가 파란색이 되면 그냥 길을 건넌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차려보면 너무 먼 곳에 와있는 경우도 허다하고 코스가 머릿 속에서 제대로 정리가 안되서 페이스 조절도 안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속도 조절을 하고 싶어서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사람이 없는 길을 따라가지만 항상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취객으로 가득찬 번화가 한가운데를 반바지를 입고 뛰게 된다.

자연스럽게 달리는 시간은 심야가 된다. 사람도 없고 자동차도 없다. 소리는 낮게 가라앉고 들이마시는 공기는 차가워진다. 자외선 차단제도 필요없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기껏해야 무슨 글을 쓸까 정도 생각할 뿐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땅을 밟는 것에 집중하며 아직도 내가 달리기라는 형태로 기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신이 내 이 기도를 듣고 있을까. 나는 당신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칠대로 지쳐 더이상 악하지도 슬프지도 않을 내 기도가 당신에게 닿기를.

내 어떤 말보다 달리면서 생각하는 이 말들이 진실에 가깝기를.

달리기에 집착하고 있다. 약을 먹고서라도. 보호대를 차고서라도. 그닥 긴 시간도 아니잖아 하고 스스로에게 변명도 하면서.
그렇게 매일 달리기를 하고 있다. 사실은 정말로 달리는 것 외에 나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해가 있을 때 뛰리라 생각하고. 석양이 슬슬 내려오기 전에 러닝을 시작했다.
4킬로미터를 넘을 때 쯤 해가 지기 시작하여 서쪽을 향해 뛰고 있노라니 언제까지라도 뛰고 싶어져서 마음이 아파왔다. 무릎 아파질라.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래서 단지 이 노래가 끝날 때 까지만 달려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그 어느 누구도 영원히 달릴 수는 없다.
소멸하는 것들은 모두 어디로든 달려가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정해져있다.


24년 10월의 글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절을 했는데. 기절한 상태에서 살풋 봄날의 꿈을 꾸었다.

깨어나서 이 글을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패드의 받아쓰기 기능으로 글을 썼다. 두서없이 쓰여진 글을 고쳐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이해해주기 바란다.


나는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돌아가신지 너무 오래 되기도 했지만,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예 모르는 사이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주로 해외에서 사셨던 외할머니가 한국에 계실 때면 종종 우리 집에 머무르셨고. 미국으로 아예 건너가시기 전인 내 고등학교 2,3학년 - 한창 신경질이 가득할 때 - 우리집에서 같이 사신 적도 있었다.

아…외할머니가 또 그러잖아. 엄마 나 외할머니 싫어 -라고 다들리게 투덜거리는 나에게. 역시나 본인의 어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의 어머니는 나를 말리지도 않았고. 결국 외할머니가 좀 드물게. 아이고 모자가 아주 쌍으로 싸가지가 없네 하며 화를 냈었던 일이 기억난다. 그것이 외할머니에 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외할머니가 좋았느냐 하면, 싫었다. 외할머니는 외모로는 어머니를 꼭 빼닮은- 그 반대긴 하지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닮은거지 - 화려한 미인이었고, 영어도 일본어도 유창(원래 영어 교사였다고 들었다.)했다.
주로 해외에 체류하시느라 한국에 거의 없었고 해외살이를 오래한 사람의 그 특이하고 세련된 느낌이 강해 일반적인 “외할머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하여간 그와는 별개로 나는 외할머니와는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 일단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안 좋아하는 나와 다르게 평생 말보로 레드를 줄담배로 피고(본인 주장으로는 말보로 소프트를 한국에선 잘 안 팔아서 레드를 피운다고) 술도 말술이었으니. 성향부터 다른 사람이다.

이제와서 외할머니가 나를 대했던 방식을 생각해보면 애초에 외할머니는 아이를 제대로 길러본 적이 없어서 나를 포함 아이들을 대하는데 항상 서툴렀다. 평생 세 아이를 낳았지만 어머니가 갓난 아이였을 때 외할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해외로 떠나버린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에 대한 불공정한 감정은 어머니가 가지는 외할머니에 대한 애증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내가 처음으로 돈이라고 할만한 것을 타왔던 글은 외할머니의 장례와 그 장례를 참석하는 딸들(이모와 어머니)의 마음에 관한 글이었다.
내용은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었는데. 그건 진실을 위해서 썼던 글이 아니라. 미국에서 돌아가셨기에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쓴 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글로 상금을? 그렇다 나는 20대때 별로 사람다운 마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 부끄러움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글은 이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외할머니가 그렇게까지 싫은 사람은 아니었고 그냥 낯선 할머니였을 때, 외할머니는 맛없는 외국 과자를 사오고 - 몰랐는데 고급과자였다. - 이상한 외국 노래를 듣는 - 몰랐는데 김연자씨의 일본 노래였다 - 그런 사람이었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외할머니는 나와 단 둘이 있게 되면 어른인 본인이 먼저 어색해해서 억지로 담배 심부름을 시키거나 마작을 가르쳐주려고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어느나라의 동화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다. 외할머니에겐 다행이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가 이야기를 해주면 굉장히 얌전하게 그 이야기를 듣는 이상한 성질이 있다.

하여간 어른이 되고 나서 외할머니가 해준 이야기들의 원전을 대부분 확인했는데. 다음에 내가 쓸 이야기는 원전을 확인하지 못한 몇 안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심플하다. 다른 사람에게 닥치는 재앙을 막아주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거두자 기다렸다는듯이 재앙이 닥친다는, 하멜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비롯 비교적 흔한 모티브의 이야기이다.


어느 산속에서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고 팔다리가 길었으며. 주변 동리 사람들과는 눈에 띄게 다른 풍습을 유지하고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혹자는 그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하였고, 또 혹자는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런 소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람들은 단지 겸손하게 떠들썩하게 사는 일도 없이 산 속 분지의 작은 땅에서 소소하게 살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유명하지 않은 소문 하나가 더 있었는데.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재주가 있어서 이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액운을 막아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액운을 막는다니 그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그 마을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택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수도에서 마을로 사람이 와서 용모가 단정한 아이 몇을 데려가 지체가 높은 분들의 시종으로 데려가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수도의 사람들 중 몇 몇은 그걸 정말인 것 처럼 믿었던 것 같다.

그 해에도 수도에서 사람이 와서 시종으로 쓸 아이 몇명을 뽑아서 데려가는데. 그 해에는 여자아이 하나도 수도의 대감집의 시종으로 쓰이게 되었다. 산 속의 조용한 마을에서 살던 아이가 수도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들떴겠는가.

그런 아이에게 마을의 어른들은 두가지를 당부 하였는데 하나는 주인집이 될 분들에게 항상 충성하되 그 분들에게 친애의 마음을 갖지는 말 것. 다른 하나는 힘이 닿지 않는다면 사람을 구하려고 들어서는 안된다는 당부였다.
옛날의 이야기인만큼 굳이 해석을 하자면 분수를 지키라는 이야기였지만. 실은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은 분수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아이는 마을 사람들과 일가친족들이 가진 조금은 기묘한 운명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마음 속 깊이 새기었다.

아이는 어렸고 수도는 화려했다.
두견새 우는 소리야 고향에서도 수도에서도 똑같거늘, 높은 담 불빛이 가득한 수도는 밤이 없는 것 같았고. 본 적도 없는 화려한 색의 치마와 장의에 마음을 빼았겼다. 고작 열 칸이 넘는 집도 없었던 마을과 다르게 스무칸 서른칸의 권세 있는 저택이 넘쳐났으며. 그 중에서도 주인집은 수도에서도 권세가 높은 정승댁이라 하였다.

하루에 불이 붙는 가마솥이 몇 개인지 통문을 드나드는 수레가 몇 개 인지 셀 수도 없었다. 주인댁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종으로 불려왔다고 하여도 지체가 높으신 분들과는 애초에 신분이 다르다. 아이는 새벽같이 일어나 부엌일을 도왔고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모시게 된다는 주인댁 도련님은 보지도 못한 채 달포가 지났을까.

어느날 도련님이 머무시는 별채를 치우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리고 그곳에서 도련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아이의 눈에, 지체가 높은 소년 - 그러나 자기와는 나이차이가 그리 나지 않는 흰 얼굴의 소년 - 이 어떻게 보였을까. 아이는 새벽에는 부엌일을 하였지만, 낮에는 도련님의 별채를 치우고 식사를 갖다드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도련님의 아침은 일렀지만 아이의 아침은 더 일렀다. 도련님이 식사를 하면 시중을 들고 그걸 치울 때 까지가 아이의 일이었다. 도련님은 아이를 잘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아이는 식사를 하는 그 옆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다.

도련님도 아이가 익숙해지고, 아이가 익숙해진 만큼 아이는 커져서 소녀가 되었다.
아이가 붙박이 가구처럼 거기 있는게 자연스러워진 도련님은 매 끼니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한 두마디 정도 아이에게 말을 걸었는데. 집안의 대소사나 장터의 소문들 같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수도 살이가 익숙하지 않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이는 열과 성을 다해서 도련님이 물어보는 말에 대답하였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도련님이 실망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아이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다음 끼니 때 까지 꼭 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곤 했다.

도련님은 보통 아이에 대한 것은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번 아이에게 아이에 대한 것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고향마을에 대한 소문. 너희들은 사람에게 오는 액운을 피하게 할 수 있다면서? 하고 도련님이 묻자 아이는 또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서 대답했다. 저는 무식하여 어려운 것은 잘 모르지만 액운은 하늘이 내리시는 것인데 촌 사람들이 무슨 수로 그런 것을 피할 방도를 알겠습니까. 도련님은 금세 흥미를 잃고 네 말이 옳다. 하고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식사를 마쳤다.

아이가 정승댁에서 일하기로 한 것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였다. 그렇게 아이가 어른이 될 때 까지 도련님에게는 별 다른 횡액이 없었다. 병을 알아도 이틀 이상 앓지 않고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학당의 친구들과 말을 타고 사냥을 간다 어쩌다 하다 무리가 들짐승에 쫓겨 동무 하나가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졌는데 도련님은 무사 하였다. 물놀이를 가도 나들이를 나가도 항상 도련님은 무사 하였다.
도련님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아지만 내심 나는 운이 따르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점점 태연해지고 대담해졌다. 도련님의 부모님인 정승 내외는 그런 도련님을 바라 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얼마 남지 않은 동짓날이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로 약조한 시기가 되었다. 섣달이 되면 아이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주인댁에서는 이제까지 몇 년간 일을 한 새경을 쥐게 된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은 후련하지 만은 않았다. 몇 년 간의 봉사로 큰 돈을 손에 쥐게 된다지만 수도도 아닌 고향 마을에선 돈은 별로 쓸모가 없었다.

수도에서 물건들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성인이 되어 곧 혼인을 올리실 도련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하고 아이는 생각했다. 정승댁의 인심은 후하였다. 몇 년이나 성실하게 시종을 한 아이에게 약속한 새경만 내어준게 아니었다. 큰 마님이 정승댁을 떠나닌 아이에게 특별히 내어준 옷감으로 곱게 차린 옷을 입은 아이는 눈썹이 구름 같고 눈이 연못처럼 동그랬다.

아이는 마지막 식사 시중을 들며 도련님에게 곱게 절을 하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강녕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도련님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아 그래 곧 섣달이 되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구나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느냐 라고 물었다. 아이는 네 도련님 곧 혼사가 있으시다고 들어서 작은 일로 마음을 쓰이게 할 수 없기에 이제야 말씀 드립니다. 혼인 감축 드립니다. 하고 천천히 그리고 길게 절을 올렸다.

도련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수도에서의 일들이 꿈이었던 것처럼, 도련님의 시종을 보았던 일도 모두 없었던 일인 것처럼. 고향 마을은 예전과 똑같다.
아이는 고향에 내려오기 훨씬 전부터 집안이 정해주는 상대와 혼인을 하였고 곧 아이를 낳았다. 파란 꽃 같은 남자아이 하나와 빨간 열매 같은 여자아이 둘을 낳았다.

고향 마을은 수도에서의 일들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만큼 척박하고 아름다웠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다. 아이는 수도에서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하지만 수도는 아이의 일을 잊지 않은 듯 보였다. 어느날 정승댁에서 난데 없이 전갈이 왔다. 정승댁 내외가 아이를 찾으니 여유를 두고 수도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그 전갈을 보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뢰옵기 송구스럽습니다. 천한 것들이 언제 정승댁에 초청을 받을까만 아이가 산달이 얼마 남지 않나 남지 않아 수도까지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라고 회신을 보냈다.
물론 아이에게는 세 자식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젖먹이라고 하여도 마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간다면 올라가지 못 할 것도 없었는데 마을 어른들은 어째서인지 아이가 수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아이가 고향 마을로 돌아왔을 때 마을 어른들은 안심 하는 듯 보였다. 아이는 알 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안심한 것이다.
커다란 전란도 없이 가뭄도 없이 태평성대가 몇년이나 계속되었다. 아이가 봉사했던 정승댁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 어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내심 도련님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곧 그런 일은 잊어 버렸다.
지체 높은 분들의 변덕이라, 생각이 나 부르시고도 곧 잊으셨으리라.
그러나 일년이 지나고 다시 전갈이 왔다. 아이를 부른 것은 정승 내외가 아니었다. 아이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도련님의 안 사람이 되시는 새 마님이었다.

어째서 새 마님이 아이를 부르는가. 마을 어른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눴지만. 새 마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간에 정승댁에서 연락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두번째에도 연락을 피할 일은 없었다. 그나마 꾀라도 낸 것이
자식들이 어려서 놔두고 먼 길을 가기가 힘듭니다. 말미를 주시면 채비를 갖춰 올라가겠습니다. 라고 회신을 한 것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굳이 정승 댁에서 아이를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말겠지. 잊어버리겠지.

그러나 정승 댁은 이번에 말과 사람을 보냈다. 아이는 두 딸을 마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아직 엄마 품을 떠나려하지 않는 아들을 데리고 수도로 향했다.

정승댁에서 아이를 맞이한 것도 새 마님이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승댁보다도 권세가 높은 집안의 자제라고 한다. 정승댁 내외는 아이가 찾아온 다음 날 인사를 받을 때 얼굴을 봤을 뿐 그 후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큰 마님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시고 아이에게 미안한 기색이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새 마님은 아이에게 해줄 것이 있다고 하였다. 새로 태어난 어린 아기씨의 젖어멈을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아이는 어렵다고, 이미 자신의 자식들이 커서 젖이 나오지 않는다고 아뢰었지만.
새 마님은 막무가내였다. 새경을 충분히 주지 않을까봐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젖어미가 어렵다면 댁하인으로 아기 곁에 있어주도록 하여라. 네 원한다면 너의 어린 아들에게는 글공부도 시켜주도록 하겠다.

덜컥 겁이 난 아이는 양민이 글을 배워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름이나 쓸 줄 알고 숫자나 가르칠 생각입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린 자식들이 걱정이 되니 딱 1년만 댁하인으로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승낙하였다.

듣자하니 새 마님의 아이는 벌써 세 번째였다.
정승댁의 아이들은 대대로 건강하고 다치는 일도 거의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새 마님의 첫째와 둘째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유모를 둘이나 두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진 않았다.

편의 상 침모라고 부르며 대우도 침모로 해주었지만 아이는 바느질이 그렇게 능숙하지 못하였다.
유모가 따로 있었으니 아이가 하는 일은 단지 아기씨의 곁에서 아기씨를 지키는 일이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던 아이는 새벽이면 일찍 부엌에 나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오륙년 만의 정승댁 살림이었지만 아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실하고 친절한 아이를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 아이를 환영해 주었다. 그렇게 달포 쯤 지났을까 아이는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새 마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새벽이면 새 침모 - 아이 - 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알고는 불호령이 내렸다. 누가 침모에게 부엌일을 하라고 시켰더냐 하고 부드럽게 묻는가 싶더니 아이가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자. 부드럽던 새 마님은 서릿발처럼 화를 내기 시작하였다. 부엌을 맡고 있던 늙은 하인이 치도곤을 당했다. 나이가 많고 큰 마님의 신뢰가 깊어 겸인 역할까지 하는 하인들의 우두머리나 다름 없는 사람이었는데 새 마님의 추궁을 받고 새경을 중간에 챙겨 나간다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아이는 부엌일을 돕는걸 그만 두었다. 다른 사람이 곤경에 빠질까 단 한 순간도 새 마님과 아기씨 곁을 떠날 수가 없게 되었다. 아이는 자기 아들인 어린 꼬마에게도 신경을 쓰지 못 하게 되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사람을 잘 따르지 않던 꼬마는 너무 어려 소를 치거나 나무를 해올 수도 없었고 다른 집안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또래 친구도 제대로 없으니 외롭게 정승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런 꼬마와 가끔이나마 놀아줬던 것은 다름아닌 도련님이었다. 꼬마는 어째선지 도련님을 꽤 잘 따랐고. 글공부나 가소사를 챙기기보단 나돌아다니는 것에 더 바빴던 도련님은 장터나 어딘가에서 가져온 장난감들을 꼬마에게 선물하고 때때로 같이 놀아주기까지 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 정도였다 꼬마는 정승댁을 빠져나가 나돌아다니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또래들을 찾으려고 할 때가 많았고 그런 꼬마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의 생활은 점점 바빠져갔다. 아기씨는 칭얼거림이 심해졌고 새 마님의 신경도 더 날카로워져갔기에 유모 혼자서는 도저히 아기씨의 시중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수시로 열이 나고 발진이 나 의원이 드나들었고 유모나 새 마님을 대신해서 아이가 의원을 모셨다. 어째서 아기씨는 이렇게까지 아픈 걸까 도련님과는 아주 다르다 하고 하인들은 수근거렸다.

아이는 도련님이 특별했을 뿐 아기는 원래 언제든지 아플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자면 새 마님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씨가 아플 때마다 새 마님은 죄인이 되어 당장이라도 죽으려는 표정을 하고 유모와 아이를 쳐다보았다.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아기씨가 몹시 아파 밤새도록 울며 보채던 밤. 겨우 겨우 아기씨를 달래서 잠을 재우고 유모도 쉬러 간 그날. 방안에서 잠든 아기씨와 새 마님 그리고 아이 그렇게 셋 밖에 없었던 날이 있었다.
새 마님은 아기씨를 안고 잠을 재우는 아이를 바라보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기가 이렇게 아픈건 내 잘못이겠지? 아이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원래부터 아기님들은 자주 아프고 쉽게 열이 나며 부모의 가슴을 놀라게 하는 법입니다. 한 살이 되고 세 살이 되고 일곱 살이 되면 점점 아플 일이 줄어들고 부모님의 마음도 알아주는 것이 자식이라는 것이지요.

새 마님은 아이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하다 갑작스럽게 물었다. 친정 어머님께 들은 적이 있다. 너희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횡액을 피하게 해 줄 수 있다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말인 것처럼 아기씨를 안고 가만히 달랬을 뿐이었다.

새 마님은 대답을 원한게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방법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 사람을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무사를 바라면 그 사람이 받아야 될 횡액을 대신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들었다.

질문인지 추궁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담담하게 하고는 새 마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바란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랬다.

새 마님이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아기를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아기가 이렇게 아픈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이는 그제야 대답했다. 아니요 마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이는 이어서 말했다. 깊숙하게 생각한 사람의 횡액을 대신해서라도 받고 싶은거야 누구든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정말로 그런 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운은 누구에게나 닥치고 그것은 하늘에서 주신 벌이나 선행의 결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여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이 저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새 마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아기씨를 돌보며 밤을 새하얗게 보냈다.

그렇게 또 몇 개월이 지나갔다. 아기씨는 아프고 또 다시 나았고 의원들이 드나드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는 의원들의 시중까지 들며 몇 달을 바쁘게 지내야 겠다. 그렇기 때문에 꼬마가 도련님을 쫓아 사냥터에 같이 나갔다가 말에 밟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이는 그게 자신의 자식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째서 사냥터에 나갔을까 분명 어제도 그런 말이 없었는데 이런 어린 아이를 사냥터에 데리고 나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무슨 사고가 있었던 걸까.

아이는 차가워져서 돌아온 꼬마를 부여안고 아무도 대답 하지 않는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 했다. 꼬마를 사냥터에 데리고 나간 도련님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같이 사냥터에 나갔던 다른 하인들은 아이에게 사고 였다고, 갑자기 수풀에서 여우가 튀어 나와 말이 놀라 앞발을 들었다고. 꼬마가 우연히, 그리고 부주의하게 말 근처에 - 도련님 곁에 - 있다가 말에 밟힌 것이니. 도련님의 탓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니 이제 겨우 자기 이름자나 쓸만 한 아이가 말을 어떻게 피하고 도련님의 사냥을 어떻게 수행 한단 말입니까. 아이는 힘들게 질문을 짜냈지만. 같이 사냥에 나갔던 하인은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했다. 겸인이 그날 밤 찾아와서 실은 꼬마가 외로이 혼자 노는 것을 보고 도련님이 같이 가자고 하고 데려간 것이네. 이렇게 될 줄 알았겠나 도련님은 호의로 그렇게 행동하신 것이네.

아이는 기가 막혔다.

사냥터에서 돌아온 도련님은 말에서 떨어졌다더니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죄책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냥터에서 죽은 꼬마가 아이의 아들이란 것도 잊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정승댁에서도 꼬마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새 마님이 휴가를 주고 쌈짓돈을 내어주어 그것으로 사치스럽게 작은 관을 짜주었다. 고향은 너무 멀었다. 꼬마는 어렸던 아이가 고향 생각이 날 때 마다 두견새 울음소리를 들으러 가던 산에 묻혔다.

또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겨울이 왔고 새해가 오기 전에 아기씨도 죽었다. 새 마님의 잘못도 아이의 잘못도 아니었다. 겨울이 왔기 때문도 아니었다.
유명한 의원을 몇 명이나 불렀는데 의원 모두 아기씨 체질이 원래부터 그러하여 이렇게 한 살 이상 산 것도 보통일이 아니라며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한 살을 산 것이 오래 산 것이라니 부모 앞에서 어찌 그렇게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아이는 그렇게 물으려다 새 마님이 새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사방을 수소문해 계속 새로운 의원을 불렀다. 어떤 의원도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겨우내 시름시름 앓던 아기씨가 촛불이 꺼지듯 숨을 거두었다. 기가 세던 새 마님은 멍하니 산만 쳐다보았다.

정승댁 이라고 하여도 어른이 되지 못한 아기씨의 장례는 작고 조용히 치러졌다. 장례가 끝나자 새 마님은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소문을 들어보니 새 마님이 먼저 친정으로 돌아간다고 얘기를 했다는 하인도 있었고 큰 어른께서 이제 여기엔 더 이상 네가 있을 곳은 없구나 라고 먼저 말씀하셨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이는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일 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도련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

아이가 오랜만에 처소로 찾아갔을 때. 도련님은 여느 때처럼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옛날의 아이처럼 작고 마른 여자 아이가 밥 시중을 들고 있었다. 도련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라고 말씀 올렸다.

그러자 도련님은 의외라는 듯이 굳이 벌써 고향에 돌아 갈 필요는 없다. 일 년을 채우고 나서도 더 남아 있어도 좋다.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는 아기씨일로 봉사하려고 이곳에 온 것 입니다. 더 이상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돌아가는 것이 맞는 듯 합니다.

도련님은 피식 웃더니 일은 곧 하게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작년부터 다른 곳에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부인이 들어올 거고 그러면 곧 아이가 생길 것이니 네가 그 아이의 유모를 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얼마나 일에 열심인지는 내 익히 알고 있느니라.

아이는 혈색이 좋은 도련님의 얼굴을 곁눈으로 바라 보았다. 아 저런 분이셨구나 왜 몰랐을까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냥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알고있었다. 처음 얼굴을 보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저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 모르는 척 하였을까. 왜 보지 않으려고 했을까.

도련님은 내가 천 것이라서 이해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도련님은 그저 다른 사람을 쳐다보려고도 사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왜 도련님을 매일 생각했을까. 왜 도련님의 무사를 한시도 잊지 않고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이는 몰래 울었다. 눈물을 흘리며 그걸 숨기려고 더 깊숙하게 절을 했다.

그만 고향에 돌아 가게 해 주소서. 저는 더 이상 이곳에 있지 못 하겠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도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을 물렸다.

아이는 정승 댁에서 준비한 말을 거절하고 혼자 두 딸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 멀지 않아서 수도에 돌림병이 돌아 정승댁에 관이 여럿 나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때 도련님도 돌림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외할머니에게 들었을 때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원래의 이야기는 훨씬 더 두서가 없었고 위에 쓴 내용과는 전개도 대부분 달랐다. 얼마나 다르냐면 마지막에 커다란 산사태가 일어나서 정승댁을 덮치게 되고 정승댁이 그대로 떠내려간다. 이야기를 그럴듯 하게 각색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어린 내가, 할머니 그래서 다른 사람의 횡액을 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뭐에요? 라고 물어보자. 외할머니는 내가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듯이 첫번째는 그 사람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는거고, 두번째는 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 순간도 잊지 말고 기원하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그럼 어쨌든 도련님은 원래 죽을 운명이었다는 거네요? 라고 또 묻자.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죽을 운명이라는게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리고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까맣게 염색을 하고 파마를 해서 숱이 줄어드는 것을 숨긴 노인이면서 외할머니는 그렇게 아주 능글맞게 사람을 쳐다보곤 하였다.

먼 훗날에야 깨달은거지만 사람에게 닥치는 횡액들은 계절성 독감 같은거라서 주변에 누군가가 있었거나 살아야할 이유가 있었거나 하면 대체로 이겨낼 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애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래 애정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는 설명 할 수 없겠지 싶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위 이야기의 해설판이라고 하여도 좋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몇 년이나 지나서일까. 어느날 여상하게 이모와 잡담을 나누던 중에 - 나는 이모와 잡담 하는걸 정말 좋아한다 - 이모에게 큰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큰 오빠라고 하기도 좀 그래 다섯살땐가 죽었으니까. 라고 이모는 담담히 얘기했다.

이야기는 그랬다. 아들과 두 딸을 낳은 외할머니는, 당시의 인텔리로 자존심도 강해서 외할아버지가 후처를 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외할아버지가 후처를 두려고 하자 일가 친척 중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인 이혼을 선택하고 집안을 나가기로 하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 당시 아이는 집안의 소유물 같은거였으니까. 외할머니는 가장 어렸던 젖먹이 - 나의 어머니- 마저도 남긴 채로 해외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인으로 파주에 임지를 받은 외할아버지는 새로 들인 어린 처와 그나마 사리 분별이 어느 정도는 되는 큰 아들만을 데리고 파주로 떠나는데. 그곳에서 다섯살 난 큰 아들은 말라리아에 걸려서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이모는 심술궂게 갓 스무살이나 된 처녀애가 애 보는 방법을 알리가 없지. 아프다고 우는데 과자만 자꾸 입에 넣어주니까 병 난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그만 죽어버렸다지 뭐니. 라고 말해주었다.

외할머니는 언제 그 소식을 들었을까. 1960년대 초반의 이야기일테니 제대로 연락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얘기지만, 나는 외탁을 했다. 어머니의 동생인 외삼촌들과도 닮았고 외삼촌들의 아들들과도 많이 닮았다. 아마 외할아버지를 직접 닮은 것이리라.

고등학생일 때. 나는 외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는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아이처럼 취급했고 제일 싫어했던 것은 내가 밥을 먹고 있노라면 갑자기 밥 위에 김치를 찢어서 올려주는 거였는데 내가 그걸 얼마나 싫어했는지 외할머니에게 싫다고요 하지 말라고요 라며 몇 번이나 화를 냈고 그 때 마다 외할머니는 깔깔 웃으면서 아주 귀엽다는 듯이 매번 그렇게 김치를 주곤 했다.

…변명을 하자면 그 때 나는 큰 외삼촌이 그렇게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키운 아이는 바로 그 다섯살의 나이에 죽은 큰 외삼촌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매번 능글맞게 웃으면서 이북 사투리도 아니고 경상도 사투리도 아닌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이상한 말투로 나를 달랬던 것은. 자기의 아들을 달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커다랗게 자라서 고등학생이 된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아들을 생각했을까?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 아니 5년쯤 되었을때 였을 것이다.

상도동 어딘가의 참치집에서 외할아버지와 점심을 먹는 날이었는데 차나 한잔 하자꾸나 하고 한의원 옆 카페에 나를 데리고 들어간 외할아버지는 잘 드시지도 않는 진한 차를 시키시고는. 이 얘기 저 얘기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물어보시다가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문득 생각나서 물어봤다는 것처럼.

너희 외할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신거냐 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망설임을 읽었다. 나에게 외할머니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에 보인 망설임이라고 생각한다. 외할아버지는 나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춘화春花는. 이라고 중얼거리셨다.

봄의 꽃春花. 그것이 외할머니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망설임을 읽었다는 것을 티내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왜 돌아가셨는지.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두 설명해드렸다.
외할아버지는 나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외할머니의 일을 물어보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묻지 못한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이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외할머니가 나에게 이야기해준 버전은 내가 이 글에 쓴 버전과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른 이야기이다.

나는 딱 한 번 이 이야기를 나보다 두 배 정도 똑똑한 친구에게 해준 적이 있는데. 그 때 친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라고 말했다. 역시 그렇지? 나도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 그냥 외할머니가 대충 지어낸 이야기겠지.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게 외할머니 자신의 이야기이고. 나만을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사랑때문에 신세를 망치지 않는 법에 대해서 가르치고 싶었던 것 같다.

전혀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어떤 노인 하나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람은 사랑 때문에 죽는거라고 말 한 적이 있었다. 그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같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당황해했는데. 그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은 나는 그 노인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멀지도 않은 시기였는데. 그냥 그래서요, 라는 표정으로 그 노인을 쳐다보고 웃었다. 당신은 알 것이다 내가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웃었을지.

사랑 때문에 신세를 망치는 것은 외할머니 한 명의 일이 아니다. 나는 외모는 외갓집 식구들을 빼닮았지만 그런 부분만은 외할머니를 닮은 것 같다.

언젠가 이모에게 신기하게 외할머니는 꿈에서도 한 번을 안나오네요. 라고 했더니. 뭘 그렇게 신경쓰니 저승에서 큰 아들 만나서 재미가 좋은가보지. 하고 꺄르르 웃으셨다.

이 글에서 내가 다시 정리한 이야기가 아닌, 외할머니가 해준 원래의 이야기는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해줄 생각이 없다. 나는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한 것 같다.

자, 들어보아라.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법이고. 그 이야기는 당신이 사랑받은 증거이다.

그래. 그렇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나만의 것이다.


24년 9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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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7월 말에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주 단위로 예약을 걸어서 내가 제 때에 예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글이 올라가도록 해두었다.

당신이 이 글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예약의 연장이 제 때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연장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글을 쓰는게 지겨워졌을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사는게 지겨워져서 그만 죽어버렸을 수도 있다.

예전의 작가들은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남겨둔 메모들이 오랜 후에 발견되어 책이 출간되고 그랬으나, 작가는 되지 못할 현대의 우리들은 그저 블로그를 지우지 못하여 그 흔적을 남긴다. 서비스가 상업성을 유지하는 한 우리의 문장은 서버에 남으리. 하여간 누군가 마지막 손질을 하지 못한 글이라니 으휴 완성도가 부족할 것 같다.

이 글 또한 완성도도 몹시 걱정된다.
나는 이 글을 더 손 볼 생각이 없는데다 지금 술을 몹시 많이 마셨고 그것도 운치있게 홀짝홀짝 먹는 것이 아니라 병을 들어서 꿀꺽꿀꺽 마셨다.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왜 글을 쓰겠다고 키보드 앞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쓸지도 모르면서 그냥 한가지 아이디어 - 내가 예약을 갱신하지 않으면 블로그에 그대로 올라갈 글을 쓰자 - 를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유치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 글의 예약을 연장해야할 때 쯤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글의 어디를 고쳐야 할지도 생각날 지 모르지.

게다가 나중에 너희들에게 뭔가 나에 대한 이유가 필요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막연한 불안ぼんやりした不安”같은거. 농담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면 넘어가자.

그냥 내가 블로그를 업데이트 하는 걸 잊었을 때의 예비라고 봐달라. 아 이것도 농담이다. 내가 블로그를 그렇게 진지하게 할까? 진짜 진지하게 하려면 내 아이패드의 메모 앱과 스프링 노트들을 털었을 것이다. 내 서재 어디에 놓여있는지도 모를 것들.

아이고 술을 너무 마셔서 슬슬 숨이 막힌다. 빨갛게 올라온 취기가 딸꾹질을 일으킨다. 나는 보통 이렇게 까지 취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은 숨기고 타인에게만 솔직함을 강요하는 것이 나의 나쁜 버릇이긴 하다. 일단 뭐라도 솔직하게 말해보자. 내가 죽기 전 까진 말하지 않을만한 것으로.

나는 지금 서재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내 서재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던가? 쾌적하거나 아늑한 것과는 상관없이 숨이 막히는 공간이다. 나는 혼자 살고 있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런것처럼 거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데 끊임없이 쌓이는 책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서재를 따로 두고 그곳에 컴퓨터를 두고 있다. 효율이나 깔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방에는 책장으로 가득차 있고 거기엔 또 책으로 가득차있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책도 아직 읽지 않았던 책도 대중없이 쌓여있다. 오래된 데스크탑들이 구석에 놓여져 있고 그나마 자주 쓰는 데스크탑 위주로 정리가 되어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냥 모든 것이 모든 것 위에 쌓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뭐 대대로 “나의 방”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서재 쪽이 진짜 내 방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어느 정도 철이 들자. 나는 쓸 수 있는 모든 돈을 써서 책을 샀는데. 책장을 사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책은 계속해서 위로 쌓여만 갔다. 나는 책으로 성을 쌓고 잡지로 해자를 만들어 어린 시절의 나를 보호했다. 무엇으로부터 보호였을까.
어른이 된 지금의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여러가지 공포가 있었지만. 당시의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세계가 폐색되어 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끝이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갈 수 있는 곳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이의 공포는 어떤 때는 어른의 공포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솔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아니다 당신은 잘못 생각했다.
나는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더더욱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끝을 직면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의 방을 찾아왔던 사람이 내 방에 대해서 감옥 같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는 그 편지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인생에 받았던 편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편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면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편지 정도로 중요하다. 그 편지는 멋진 글씨체로 나의 손자에게, 라고 써있다 내가 지구 어디에 있어도 나는 홍식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 편지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감옥과 같은 방의 주인에게, 라고 첫머리를 적었다. 당신은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는지 알 수 있는가? 자세한 편지의 내용은 여기서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로 나를 정의했다는 사실이다. 편지들은 대체로 누군가를 부르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엔 외면 했고 그 뒤엔 몇 번이나 읽었으면서도 결국 그 편지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네 말들이 다 맞다는 사실도, 너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너를 피하기로 했다는 것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답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수년이나 지난 지금. 비열한 변명을 해보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스피노자던가 세네카던가 희망과 공포는 비슷한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애정은 근거없는 희망과 내면의 욕망의 결과인 만큼 그 근원에서부터 공포를 담보한다. 나는 그의 얼굴를 똑바로 볼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짝사랑은 하지 않는거라고 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시간을 들여 답장을 쓰기는 하였다. 우리가 그냥 카페에 앉아서 잠시 농담이나 하는 친구였다면 좋았겠지 어쩌고 너는 나보다 한참 어리고 네 재능은 내 외로움을 구원하는데 쓰기는 너무 반짝거려 어쩌고. 그렇게 쓰고는 바로 찢어버렸다. 너무나 자기애로 가득찬, 그렇다고 솔직하지도 않은 한심한 답장이라서 보내지 않는게 맞았다.

얼마 전 친구는 나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대답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게 잔혹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단지 내가 벽에게서 자기에게로 잠시 눈을 돌려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감옥에 아직까지도 영원처럼 갇혀있는거고. (나는 아주 오랜 후에 그 사람에게 해야했어야 하는 대답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한다. 그건…또 다른 이야기고 속죄에 관한 이야기이다.)

때때로 나의 생명체로서의 수명에 대해서 생각한다. 회사원을 한지 십년이 넘었는데. 앞으로 십 년 더 회사원을 할 수 있을까 싶으면 잘 모르겠다.
이십 년 후는? 내가 보기에 이십 년 후엔 확실히 회사원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 정부 규탄 시위라도 하면 모르겠다.
아니지 지구 온난화로 물 속에 뽀글뽀글 잠겨 있을 가능성이 더 높겠다.

사람들은 어떤 나이가 되면, 그러니까 사회적인 위치가 안정되기 시작하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 같다.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혔다고 힙합전사처럼 투덜거릴 때야 모르겠지만. 십대 이십대때 생각하는 죽음은 사회적인 본인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필사적인 보정작업이라면
먼 훗날 벌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절망의 결과물에 가낍다. 네 여러분은 적응에 실패했습니다.

뭐라도 해보려고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해서 밥벌이를 하기 시작하고 또 그게 그럴 듯 해질 때가 되면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이 직업을 통해서 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보이는 시점이 오는데. 그게 사람을 좀 미치게 만든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놀라울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에서만큼은 굉장히 자신감에 차있고. 주변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니까. 네가 몰랐다면, 단지 그냥 내가 너와는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를 가볍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성장 한계점이 아직 보이지 않고 노력을 하면 할 수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일을 엄청나게 잘하게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이는 더 이상 열 여섯살이 아니어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생리작용 같은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일어나는 일.

그것은 바로 폐색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항상 세상이 내 생각보다 좁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어른이 되면 그 기분이 나아질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시시각각 삶의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고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뚜렷해지기 시작할 때 사람은 겁을 먹기 마련이다.

폐색이란 결국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이곳에 갇혀 있다는 감각이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뛰어난 역량과 노력으로 남들보다 더 높은 성과를 발휘한 사람일수록 그 고통은 더 크다. 내가 이걸 죽을 때 까지 해야한다고? 라는 마음과 내가 이걸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서로 싸운다. 내 인생에 다른 길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이제까지 쌓아올린게 아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싸운다. 애초에 정답은 없다. 그냥 여러분은 폐색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머릿속에 갇히고 말았다. 판옵티콘의 완전한 반대니까 뭐라고 불러야 하지? 모노스옵티콘이라도 되나.

이런 폐색에 갇힌 사람들은. 여러가지 행동으로 자신의 폐색을 부정한다. 갑자기 자신의 주변 - 가족과 친구 - 에게 집착하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아이의 성장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20대 시절에 대한 향수인지 갑자기 사랑을 찾겠다고 불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에 더욱 매진하는 사람이야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더 얘기해볼까? 더 큰 가치에 매몰되기 위해서 종교에 빠져들거나 정치와 사상을 통해 본인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도 하고. 그냥 단순히 직업적인 측면에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재테크를 하고 놓쳐버린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운동을 하고.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요지는 그들 모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폐색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게 쾌락이든, 신앙이든, 관계이든 간에 하여튼. 그들이 진짜로 폐색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는…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아니고 나는 저 방법 중 어떤 것도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는 애초에 폐색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한가지 종류를 말해두는 걸 까먹었다. 그냥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죽음을 선택한 부류들은 확실히 자기 자신의 세상에서 탈출하는데는 성공하였다. 대단한 멍청이들이다.

직접적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나는 요즘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꼭 누군가에게 마음이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파형이 상승하고 또 하강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 죽음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언젠가 주파수가 낮아지고 파형이 잦아들 때 점이 한개의 점으로 수렴하게 되는 바로 그 지점. 그 끝 점에 대해서 생각한다.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돌려도 결국 생각은 다시 돌아와 죽음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정말 질릴 정도로 지겨운 반복이다. 내가 정말로 죽지 않는 이상은 멈추지 않을 생각인 것처럼 느껴진다. 제기랄.

나는 한 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한 번에 보고 수많은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면 당신도 놀랄 것이다.
하지만 웃으며 농담을 하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달리기를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결국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구르는 돌과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 같이. 모든 하찮은 존재들의 기도같이.

나는 가끔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마다 나의 상상력이 빈약한 것에 진절머리를 낸다. 가끔 앞일에 대해서 뭐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면 문득 답을 말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저 사람들은 그냥 여러분보다 상상력이 빈약해서 가장 일어날 법한 일을 말하는거랍니다.

빈약한 상상력으로 노력해보자.
그러니까 내 삶은 아무 것도 없어.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사랑해야하는 사람도 없어. 근데 내가 왜 10년, 20년을 더 살아야하지? 하고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짜증을 내며 그래도 좀 만 더 살아봐 라고 말했다.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 더, 그게 나에게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때면 무언가를 내 인생에 삭제하는 것으로 삶을 유지해나갔다.

만약에 이 글이 내 블로그의 마지막 글이 된다면. 그건 내가 그냥 이 블로그를 버렸다는 뜻이다.
혹은 블로그가 아니라 글 쓰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거나.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겠지.
어느 쪽이든 당신과 나 둘 모두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당신을 정말로 소중히 여긴다는 고백이고 나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만약에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그것은 내 실수이다.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언젠가 아무 것도 없는 습지에 간 적이 있다. 흰색의 바람이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고 녹색의 풀들이 서로에게 부딪혀 엄청난 소리를 냈다. 마귀와 악령들이 공중에서 난폭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고 새들이 새된 소리로 날아다니며 그들을 비웃는 268제곱킬로미터의 녹색 땅에서 나는 정말로 몇 없는 두 발로 걷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불어와 난폭하게 떨어져내려오는 그 무엇에 나의 일부는 불려 날아올라 굉음과 밝은 빛 아래에서 영원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는 나는 나의 이름을 한 어떤 일부이다. 나의 일부는 영원히 바람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그런 내가 어떤 애정이나 행복을 갈구하는 것이 마땅한 일 일까? 그냥 웃기는 얘기이다.
나는 자격이 없는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영혼도 없다. 나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 폐색되어 있다.

나는 이미 몇번을 죽었다. 결국 여기에 있는 글들은 대체로 나의 헛된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아마도 실패했다. 하지만 바란다. 누군가는 실패하지 않기를. 당신을 봄을 만난 것처럼 사랑해주길.

처음에는 이 글을 7월에 썼다고 말했지만. 글의 예약 기간을 연장하며 글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7월에 쓴 글 위에 8월에 쓴 레이어가 올라와앉았고 지금은 9월이다. 처음 글을 썼을 때처럼 술을 마시고 있다. (외할아버지를 조문하러 갔을때 받았던 죽은 사람들을 위한 소주이다.)

지금은 더 이상 뭔가를 더해서 쓸 생각은 들지 않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샐린저의 어쩌고 라는 소설이다)중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글의 예약을 다시 연장해둔다.
가능하다면 당신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정확히는 이 글이 오직 스스로를 위한 글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인용문은 이렇다.

“시모어는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이 결국 ‘거룩한 땅’의 어느 작은 곳에서 그 다음의 작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그는 절대 틀리지 않는 것일까? 이제 자러 가자. 빨리. 빨리 그리고 천천히.”

저 책의 주인공은 간절하게 자신의 형 시모어가 자살한 곳인 307호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주와 샐린저와 우리들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래 어떤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라틴어 경구였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빨리. 빨리 그리고 천천히 Festina Lente 혹은 급할 수록 돌아가라. 우습다. 결국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만이 307호에 당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니.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이 폐색에서 탈출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가? 누군가 내가 갇혀있는 머릿속에서 나를 끄집어내어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아가게끔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없는 다른 곳으로?

지루해졌다. 이제 그만 자러 가자.


24년 7월부터 여름 동안에 쓴 글이다.




바닥에 고무공을 던져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색의 공이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넓은 바닥 위에 고무공을 던진다면, 그 공은 탄성에 의해 튀기기를 반복하다가. 점점 그 튀는 높이가 낮아지고. 어느 순간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는 그 굴러가는 공을 보면서 그 공이 어디까지 굴러가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날이 덥다. 금세 시원해질 것 처럼 매일매일 선선해지더니 그랬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덥다.
오늘은 뭐라도 해야했기에 연두색 티셔츠에 갈색 반바지를 입고 장을 보러 나갔다. 아주 느릿하게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바닥을 밟고 다시 뗄 때 마다 웃기는 소리가 난다. 밟지 좀 마, 안 그래도 참고 있으니까- 라는 의미의 행성의 투덜거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햇볕이 쎄다면 바닥은 금방 마를거야.
촤악, 촤악 소리를 내며 걷고 있으니까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요즘은 로드 러닝을 주로 한다. 아침엔 슬로우버피 3세트를 하고 어깨 스트레칭과 무릎 강화 운동 양쪽 3세트씩을 하고 출근한다. 러닝은 저녁 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이 하진 않는다. 나는 뛰는 걸 굉장히 좋아해서 쓸데없이 무리를 하고는 하는데. 20대때 다친 왼쪽 무릎과 발목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이번에는 무리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가볍게 시속 7-8킬로미터로 3킬로미터 정도를 뛴다. 원래는 시속 10-11킬로미터 정도로 30분을 달리는게 내 운동 루틴이었지만. 체중은 늘고 근육은 줄어들은 지금 - 공평하게도 그렇게 되었다 - 그렇게 뛰면 반드시 다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안 그래도 지난주 주말 조금 신나길래 토일 연속으로 6킬로미터를 달렸더니 왼쪽 무릎이 묘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무릎이란 무리를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강화가 되지만 무리를 하면 바로 탈이 나는 신비로운 곳이라서 바로 고무밴드를 사서 레그 익스텐션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달리던 러닝도 하루 건너로 인터벌을 주었다.

로드러닝보다는 트레드밀에서 러닝하는게 무릎에는 더 안전한데. 나는 트레드밀이 너무 싫다. 트랙 러닝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진짜로 달려서 세상의 어느 곳에서 다른 어느 곳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러닝의 재미인 것 같다. 설령 그게 실제로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그냥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나의 로드러닝은 크게 특이할 것은 없는데.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몸을 풀다가 현관문을 나가면 냅다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속 7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거니까 절대로 빠르지 않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동네의 거리를 달리다가 아파트 단지의 커브가 있으면 틀고, 횡단보도가 때마침 파란불이 되면 길을 건넌다. 아니 왜? 이유는 없다. 정해진 코스도 없고 이정도 뛰면 된다- 정도로 정해둔게 있긴 하지만 어차피 동네는 동네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고 해봤자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앞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물론 길치 이슈는 있다. 나는 남해보타락산 관세음보살도 구해내지 못할 정도로 길치라서 신나게 뛰다 보면 여기가 어디지 하는 생각이 들게 길을 잃는데. 로드러닝을 할 때는 애플워치와 에어팟만 가지고 길을 나서기 때문에 - 그 외엔 수상할 정도로 짧은 반바지를 입은 중년 남성 정도죠 - 어차피 길도 찾을 수 없다. 그냥 내가 너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가길 간절히 기도하며 일단 신나게 달리는 것이다. 여러분 저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신이 납니다. 강도들 도둑들 소매치기 놈들아 너희가 나에게서 가져갈 것은 반바지 뿐이다. 아니 애플워치는 가져가시면 안됩니다 제 달리기 이력이 입력되어 있다구요.

어차피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뛰어나갈 체력은 없다. 삼십분 정도 연속으로 달리면 숨을 너무 심하게 쉬어 등이 아프기 시작하고. 심박수 평균 150을 넘어가는 페이스로 달리기 때문에 유산소 운동이 아니라 무산소 운동이 된지 오래이다. 오래 달리면 온 몸이 아프다. 고통스럽다. 땀이 범벅이 되고 코와 입 동시로 숨을 쉬다 보니 목이 갈라진 소리가 난다. 그런데도 왜 로드러닝이 즐겁냐고 하면. 나도 이유는 모른다. 상대가 없이 하는 섹스랑 비슷한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인류에게는 상대가 없는 성행위에 자위라는 적당한 이름을 붙여두긴 했는데. 무의미하고 가학적이고 육체를 소진한다는 점에서 로드러닝은 정말 그 뭐시기 그런 훌륭한 활동이다.

그렇다면 트레드밀에서 달리는 쪽이 훨씬 훌륭한 활동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텐데. 아니 트레드밀 러닝은 진짜로 아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짓이고. 영국 공상과학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트레드밀은 시급 9,860원을 챙겨주는 노동으로서 나라에서 보상해줘야만 할만한 활동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트레드밀로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트에 갔다. 사람이 많기도 하지. 뭘 특별히 사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배추 두 포기를 사니까 의욕이 사라졌다. 나는 알배추를 좋아하는데. 그냥 잡곡밥이랑 쌈장 정도가 있으면 그걸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농촌의 촌로 같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진짜로 그걸로 매일매일 먹는건 아니니까. 그냥 귀찮을 때 그렇게 먹는다는 뜻이다. 또 묘한 자책감이 들어서 깻잎도 사고 훈제연어와 중량이 그럭저럭 많지 않아 보이는 호주산 쇠고기도 샀다.

가족 단위로 모여있는 곳에 유일하게(정말 유일하게) 혼자 와 있으니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내 쪽을 향해 환하게 웃길래 옆을 돌아보니 무릎 높이 정도의 아이 하나가 꺄르르 웃으면서 뛰어가는게 보였다. 흑백 영화겠지. 파란색 원피스와 검은색 원피스는 구분이 가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또 유니클로를 들렀다. 먹을 것이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며, 집 근처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유니클로 정도 밖에 없다. 먹을 것은 사두면 썩는다 얼마전에도 포도를 잔뜩 버렸다. 샤인머스캣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살려면 부피가 작아야 하는데 필기구는 좀처럼 쓰질 않는다. 책은 이미 너무 많이 샀다. 읽는 것보다 사는게 더 쉬운 물건이라니 이번 연휴 동안 도대체 몇 권을 읽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집 근처에 백화점이 있었던 시기에는 아무 이유없이 백화점에 갔더랬다. 그 덕분에 단칸방 자취 생활을 오래동안 벗어나질 못했다.

어머니는 내 나이에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서 방에 쌓아두는 취미가 있으셨다. 대단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커트러리라든가 그런 것들. 굳이 살 필요가 없는 것들이 할인을 나쁘지 않게 한다 싶으면 일단 사서 가져다 놓으셨다. 이걸 왜 사는거에요 라고 하면 너나 너희 누나가 결혼할 때 주려고 라고 말했는데. 내심 이런 잡동사니를 나한테 떠넘기려고?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취를 하려고 집을 나갈 때도 어머니가 주는 잡동사니를 다 그대로 집에 두고 도망쳤다.

어머니가 마음이 공허하여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자식이었고 어머니 마음의 공허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도 내가 먹지도 않을 음식들을 사고 읽지도 않을 책을 사며 입지도 않을 옷을 사고 있는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 어머니 차라리 그냥 비싼 물건들을 하나씩 사는게 어떠세요. 이런거 하나도 필요 없잖아요 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좀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어머니는 마음이 약하고 때때로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잘 살아계신다. 그러나 왠지 과거형으로 쓰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두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의 일종의 안티테제 같은 존재인데. 나는 내 안에서 어머니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 할 때 마다 징그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또 내심 안심하기도 한다. 그 안심이란 결국 내가 아버지의 클론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오는 안심이긴 하다.

유니클로에서 산 건 속옷과 후드티였다. 내 나름의 합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소모품이고 필요한 것이고 말야. 집에 가득 쌓여있는 언젠가는 버려야할 옷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을 해보기로 한다. 집에 정리 해야할 옷들과 책들이 가득하다.
내 옷도 내 책도 아닌데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걸 정리하지 못하면 난 영원히 쓰레기더미에서 살아야 할텐데. 아직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용기라기 보다 의욕에 가까운 것이다.

고무공을 바닥에 쎄게 던지면 공은 크게 튀어오르지만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고, 튀어오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바닥을 구르게 된다.

어떤 생각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인생이 그러는 것처럼.
모든 운동은 크게 튀어오르는 것 같다가도 결국 바닥을 구르고, 또 어떤 한 지점에서 멈춘다.

당신과 나는 공이 언젠가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어떤 때는 그 공이 어디에서 언제 멈출지도 거의 정확하게 맞춘다. 그것은 공을 여러번 튀겨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그 공이 영원히 튀어 어딘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까지 올라가고 보이지 않을 천상에 다다를 것을 바라기 때문에 오히려 거꾸로 그 공이 어디서 멈출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나는 그냥 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삶에 대한 용기 그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그것은 결국 어떤 운동이다. 비가역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무의미에 대한 저항.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은 세상의 작은 어떤 곳에서 다른 어떤 작은 곳에 도달하는 것 뿐이다.

나는 내가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두렵다. 저 별로 멀지 않게 보이는 그곳.
내가 그 지점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 또한 두렵다.

24년 9월의 글이다.



친구가 얼마 전에 <패스트 라이브즈>를 봤던 얘기를 하며. 가장 맘에 안 들었던 부분이라고 투덜거린건, 극 중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들의 전생 그러니까 패스트 라이브 때문이라고 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냥 취향에 안 맞는 영화를 굳이 본 것이 아니냐고 웃었지만 친구는 그게 몹시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설자楔子라고 부르는 동양 문학의 전통이다.

설자란 무엇인가. 옥스포드 랭귀지 사전에서는 설자를 이렇게 정의 한다.
1. 꺾쇠
2. 문예 작품에서, 어떤 사건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따로 설명하는 절(節)

그러니까 중국의 소설이나 혹은 경극류의 작품에는 앞 부분에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어떠한 주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는데. 현대적인 서사의 관점으로는 왜 이런게 있지? 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서술이나…사실 그 부분은 이야기의 주제와도 관련이 깊으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연결된 인과의 원인 부분에 해당하는데.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등장인물이나 중요 사건의 카르마 자체를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말 할 수록 뜬 구름 잡는 소리인거 같으니까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다.

<홍루몽>은 청나라 때 조설근이 지은 중국 문학사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소설 중의 하나로.
이걸 진짜로 처음부터 다 읽은 사람은 한국인은 나의 이모 밖에 보지 못했으나…설자 개념을 설명하기 좋은 책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사촌 남매들이기도 한 가보옥, 임대옥, 설보차 (한국인 감각으로는 어느 쪽이 남자고 여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텐데 가보옥이 남자이다)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와 공작위를 받은 개국공신 가씨 가문의 몰락과 재흥.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허무함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설자가 되는 부분은 주인공 가보옥과 임대옥의 전생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가보옥은 여와가 하늘을 복구하기 위해 모았던 돌이 오랜시간 동안 자아를 갖게 되어 선술로 인해 인간으로 전생한 것이고. 임대옥은 (가보옥이 되는) 전설의 돌이 인간이 되기 전에 우연한 기회로 물을 주어 살렸던 풀이 은혜를 갚기 위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설보차에겐 이런 대단쓰한 전생의 내용이 없는가? 없다…덕분에 세상은 가보옥-임대옥 커플링을 정설로 여긴다.)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이런 설자는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 홍루몽의 본래 이름은 석두기石頭記로 이 소설은 딱히 배경이 되는 설화가 없이 조설근의 창작 - 실은 작가인 조설근의 자캐가 주인공인 가보옥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돌머리의 이야기라는 석두기라는 제목이 지어진 이유는 조설근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이 소설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 이기 때문에 작가가 이 작품의 설자인 여와의 돌이 전생하는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다.

다르게 설명해보겠다. 주인공 가보옥은 사촌들인 임대옥, 설보차 사이에서 시종 갈등하는데. 몸이 약했던 임대옥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가보옥의 가족들은 결혼상대가 임대옥이라고 가보옥을 속이고 설보차와 결혼을 시키는데. 임대옥은 상심한 나머지 가보옥의 결혼식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너무 과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가? 애초에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가보옥이 여와의 돌이 전생한 존재로서 고귀한 출생이나 어리석음을 설명했으며. 임대옥이 돌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풀에서 전생한 존재로 아름답지만 덧없이 사라질 존재임을 설명했다. 이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전개는 그들의 배경-전생의 삶-을 통해서 설득력을 가지고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설명된다.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적이며 어떠한 것도 독립적인 현상은 없다. 이러한 연기를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현대 이전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뜬금없어 보이는 설자의 존재가 거꾸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패스트라이브스의 이야기를 하자면. 결말에 이르러서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에게 그들이 인생에서 계속 서로 집착하고 잊지 못하고 인생이 겹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전생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와는 관련없이 이 부분이 영화의 앞부분에 삽입되어 있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훌륭한 설자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배경이 앞에 나와있다 : 동아시아 문학 전통의 설자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마지막에 가서 등장한다 : 할리우드 문화 전통의 반전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설자에 대해서 또 그럴듯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어떤 남자가 유명한 호수를 지나치다가 아름다운 두 명의 여인을 본다. 총명하고 부유하기까지 한 두 여인 중 하나는 평범한 서생인 그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 개수작을 부려온다. 남자는 금세 그녀에게 빠져들고 결혼까지 하고 말지만 어느날 흉측한 승려 하나가 나타나더니 이보게, 자네는 큰일났어. 자네가 결혼한 여자는 엄청난 요괴일세. 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쓰면 오오 남자는 죽는건가. 큰일나는건가. 전형적인 요괴이야기겠군. 하겠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는 어떤 판본이든 관계없이 항상 맨 앞에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수련을 거듭해서 쌓은 뱀으로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전따윈 없다.
원래부터 독자도 여자들도 스님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남자만 몰랐다.

다름아닌 이 이야기는 항주 뇌봉탑 설화가 변형된 <백사전>이다. 이 이야기 또한 여러가지 판본이 있지만. 공통적인 주제는 사랑이다. 처음부터 둔갑한 뱀이란 정체가 나오고, 영원처럼 천년을 살던 이 뱀은 정말로 그 남자를 사랑하여 같이 살고 싶어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악당은 중간에 나와서 남편에게 그 정체를 아웃팅한 승려이다. 잠깐만 이렇게 쓰니까 되게 현대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하여튼. 백사전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니 굳이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설명하지 않겠다. 홍루몽에 비해 분량도 짧다.

이제 여러분도 이제 설자가 무엇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거이다.

설자를 바이두에서 검색하면. 쐐기가 나온다. 애초에 설자라는 말 자체가 쐐기나 꺾쇠를 의미한다. 나는 쐐기의 사진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부처는 연기를 우리에게 설파했지만. 우리는 인생에 펼쳐지는 고통과 기쁨의 원인을 알 수 없다.
어떠한 이유로 이 마음이 나에게 왔는지 그리고 떠나가지는지도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기계는 적절한 입력값을 넣었을때도 항상 같은 출력값을 내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는 충분히 현명하지 못하여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다른 어떠한 영향을 줄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때때로 내가 당신의 인생에 그저 설자로서 존재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로 적힌 이름. 따로 적힌 말. 아니 이름조차 되지 못하는 배경.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참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설자가 되고, 우리의 현재의 삶은 미래의 설자가 된다.
이 마음조차 또 어떤 설자가 되어 누군가의 서사에 끼어들지, 나는 알 수가 없다.

24년 9월의 글이다.

아래의 문장들은 내가 아이패드에 남겨둔 짧은 메모들이다. 어떤 편지의 일부이며 단상이고 쓰다 만 소설의 일부이다. (내 글이야 뭐 그렇지)
아래 메모들에게는 각자 노래 이름으로 된 제목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제목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정말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어느 날 밤, 평소처럼 퇴근이 늦은 날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불을 끄고, 계단을 내려와 뒷 문의 현관 앞에 섰다. 코트를 챙겨 입고 헤드폰을 꼈다. 곧바로 문을 나서지 않고 유리문 밖을 바라보며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올 때 까지 기다렸다. 문장이 동작이 되고, 생각이 호흡이 되기라도 하듯이 나는 밤을 그대로 바라보다 밖으로 나섰다.

문 밖엔 직각의 건물들과 그 사이를 가로질러 전선이 늘어져 있었고, 아무도 칠할 수 없는 색들이 거기에 있었다. 사방을 보았다. 공업도시의 오피스 건물들이 하늘과 맞닿은 선을 보았다. 새삼스럽게 직선들이 추상을 향한 기도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벌리면 밤이 입안에 고여들까봐 입을 벌리지도 못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볼륨으로 음악을 들었다.

세상을 감각하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동작이다. 세계를 표현하는것과 표현된 세계를 감상하는 것이 전혀 다른 동작인 것 처럼 말이다.


(2)
나를 제외한 모든 세계에 한 명의 타인도 없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가 결국 불완전한 자신의 일그러질 상일 뿐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우리가 어떠한 것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고 애정 또한 고여있는 물처럼 어딘가에 쏟아져버리기만 할 뿐 이라면.

(3)
나는 항상 “달moon”이라는 단어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 지구의 단어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왔다. 이러한 종류의 어떤 불안정한 애정은 어디로 가고 어떻게 남을까. 나는 새삼 두려워진다.


(4)
나는 아무래도 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라고 생각을 한 건 밥을 먹고 해변을 산책하다가 중간 쯤 와서야.
중간이라고 하는 이유는...원래는 훨씬 더 멀리 까지 다녀와서 저 멀리 보이는게 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중간 쯤 네 생각을 하게 되고 너를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서 돌아갔어. 돌아가는 중에 스피커로 트로트 들으면서 걸어가시는 분이랑 동선이 겹쳐서...몹시 후회가 되었지. 이럴 바엔 그냥 저 멀리 까지 갔다가 돌아갈걸 그랬지.

하지만 바다보다 저 멀리 보이는 흐릿한 풍경들 보다 밤새 고집부리며 뒤척거리다 잠이 든 널 보는게 중요하게 느껴져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나는 이렇게 메모를 쓰고있지. 딱히 할 말이 있어서는 아니고. 지금 방으로 들어가면 나는 참지 못하고 너를 깨울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더 자게 해주고 싶거든.

어제 여러가지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아. 중간 중간에 나는 깜빡 졸았는데도 꿈에서조차 너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기분이 들어.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 중에 어떤 것은 어쩌면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나는 수많은 실패를 했어.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다양한 종류의 실패-실수 들이었는데 결국 그 모든 실패-실수를 하는 동안 나는 죽도록 후회를 했고 똑같은 바보 짓은 하지 않을거라고 맹세를 했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또 이렇게 커다란 후회의 전조가 될 일을 하고 있구나.
이제까지 배웠던 것들은 다 무의미한 어디 망해버린 공화국의 짧은 역사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너와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마실거고) 같은 풍경을 보며 서로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네.

나는 또 그리고 계속해서 두려워져 그리고 널 보고 있으면 그 실수들이 다 아무래도 괜찮을 일들로 느껴져. 가끔 꺄르르 웃는 네 웃음이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들이나 놀란 눈을 하고 고장이 나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나기도 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문제를 점점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걸까. 우리는 좀 더 제대로 뭔가를 해결해야하는게 아닐까?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누군가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얘길 해야하지 않을까?


(5)
오늘 며칠이더라? 아니 확인 안해봐도 괜찮아. 그냥 어떤 말로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말해본거야.
일단 잠시만 있자. 이제 곧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거야. 하나…둘 하고 셋. 봐봐 진짜로 나오지.

아주 오랫동안 너한테 편지를 쓰려고 했었어. 할 말이 있을 때면 편지를 쓰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나 스스로도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를 때는 편지를 쓰는게 정말로 어려워. 한 바닥이 넘는 편지를 쓰고도 결국 해야할 말을 찾지 못해서 찢어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냐.

깔끔하게 인정하고 시작하자.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죽을 것처럼 보고 싶어. 하지만 그래서 편지를 쓰는 건 아냐. 아니 제기랄 그래서 편지를 쓰는 거기도 해. 이렇게 편지를 쓰면 네가 보고 싶은게 조금이라도 가실거니까. 나는 때때로 죽을 것처럼 보고 싶다는 말이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해. 만약에 죽게 된다면 그건…정말로 끝이잖아. 다시는 볼 수 없는거잖아. 근데 죽을 것 처럼 보고 싶다는게 말이 돼? 그냥, 그 말을 처음에 한 사람은 아마도 누군가를 보지 못하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았을거라고 생각했을거야. 스스로도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쓴거지. 그대가 보고 싶소 죽을 것처럼 보고 싶소. 꼭 지금의 나처럼 말이지. 나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잖아 안 그래?

언젠가 내가 지하철의 통로를 쥐 한마리가 뛰어가는 걸 봤다는 얘길 했던가? 아마 안 한 것 같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니까. 그건 내가 스무살, 아니 스물한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야. 그 때 우리집 앞이 종점이었던 호선이 하나 있었는데. 그 나이 때의 나는 그 호선의 전철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내가 사는 곳에서 멈춰선다는게 참을 수 없게 좋았거든. 그래서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마지막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갈 때가 많았어.

전철이 천천히 느려지며 살짝 쉰 듯한 목소리의 기관사가 - 나는 기관사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 곧 종점에 도착한다고 말하면 한숨처럼 느려진 전철이 멈추고. 몇 되지 않는 승객들 - 대부분이 주정뱅이 - 이 느릿하게 전철에서 내려. 그러면 전철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는 듯이 전철의 불이 한번. 그리고 두 번 꺼지고. 종점의 막차는 어떤 승객도 태우지 않고 저 멀리 터널로 사라져버리지. 보통 역장들은 - 역장들은 내 얼굴을 알았어 나는 보통 첫차를 타고 알바를 하러 가서 마지막 차를 타고 돌아왔거든 - 플랫폼에 있는 손님들을 다 데리고 나가서 어 그리고…모르겠다 어떻게 하지? 역의 불을 끄나? 사람들이 더 이상 플랫폼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으로 닫아버리는거야 많이 봤지만 역을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쥐를 본 날은 - 아니 정말 대단치 않은 이야기야 -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날이었어. 그냥 나는 그날도 밤이 늦도록 알바를 했고, 이제 막차를 타고 들어왔으니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다른 알바를 하러 갈 차례였지. 그런데 그날은 왠지 너무 많이 지쳐서 막차에서 내려서 그냥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있었어. 그날따라 주정뱅이도 없어서 막차에서 내린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은 그런 날이었어. 그리고 쥐 한 마리를 봤어. 막차가 사라진 열차선 어디선가에서 나타나서는 뭘 찾는 것처럼 두리번 거렸지. 나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어. 아니 분명히 마주친 것 같아. 찍찍하는 느낌으로 내 쪽을 쳐다보며 두 번 수염을 움찍 거렸으니까. 그리고는 적은 없어 라는 식의 표정을 짓고는 또 어딘가로 열심히 사라졌어.

나는 솔직히 이 이후에 지하철에서 쥐를 본 적이 없어. 아니 진짜로. 차라리 우리 동네의 풀 숲에서 보거나 번화가의 하수구 근처에서 본 적은 있는데. 지하철에서 쥐는 정말 없단 말야. 그래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거야 신기했거든. 어디론가 사라졌던 쥐는 금세 열차 선로 근처에서 나타났는데. 친구. 아니 친구일까? 하여간 다른 쥐 한 마리를 데리고 나타났어. 그리고는 또 내 쪽을 보고 찍찍 하는 느낌으로 코를 찡긋 거리더니. 터널 저 편으로 뛰어갔어. 마지막 전철이 사라진 전차 정거장 쪽이 아니라 마지막 전 정거장이 있는 쪽으로 말이지. 친구도 그 쥐를 따라갔어. 꼭 이 방향에서 이제 더 이상 전철이 오지 않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두 마리의 쥐는 찍찍 거리면서 신나서 뛰어가버렸어. 나는 안중에도 없었지.

나는 느릿느릿 플랫폼을 기어나와서 역장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아저씨 여기 쥐가 있어요?라고 물어보니까 역장아저씨는 웃더니 네 쥐 있겠죠? 하고 말씀하셨어. 진짜 별거 아닌 이야기지.

우리가 그 두마리의 쥐처럼 용감했다면 좋았을텐데. 설령 죽음을 부르는 수십톤짜리 괴물이 그 어떤 재앙보다 빠르게 달려온다고 해도 어두운 통로를 함께 달려나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겁이 많은 나는 그러지 못했어.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너를 잃는게 두려웠어. 그 모든 감정들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모순일 뿐이었는데 말이야.


(6)
일주일만에 머리를 감았다. 새까맣게 더러운 냄새가 날텐데 다행히 집에는 아무도 없다. 아침에 배달시킨 커피에 진통제를 한 알 먹는다.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은 지 일 년 쯤 되었고 노트에 적어 놓은 채 정리하지 않은 메모들이 피딱지 나는 상처처럼 뭉그러져 있다. 이제 글을 쓸 때가 된거다.

아파트의 난방을 끄고 써큘레이터를 꺼내 바람이 잘 통할 것 같은 통로에 켜둔다. 창문을 열어 먼 곳을 쳐다보니 오래된 공원 저 건넛편에 나무들이 듬성하게 서서 잎을 늘려가고 있었다. 국도를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창을 좀 더 여니 소리는 더 이상 부드럽진 않고 더 크게 들려왔지만 창 앞의 울타리가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 보다 너무 낮아 깜짝 놀라 창을 다시 닫았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나는 창 밖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이제 그만 끝 마치려 하지만 어떻게 글을 끝맺어야 하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글의 순서는 시간의 순서나, 사건의 원인과 결과와 상관없다.

나는 요즘 계속 같은 꿈을 꾼다. 거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꿈은 몹시 꿈일 뿐이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상들은 나에게 의미가 많아서 잠에서 일어나면 나는 한참동안 꿨던 꿈을 곱씹고 어디에도 기록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잊어버린다.

꿈은 그렇게 잊어버리지만. 어떤가 나는 당신이 이걸 모두 읽는다면 내가 어떤 노래를 들으며 이 글들을 썼는지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지금 듣고 있는 것은 다니엘 바렌보임의 BWV 846이다. 아무 의미도 없지만.

24년 9월의 글이다.





이 글은 2018-20년 사이에 쓴 글이다. 정확하게 언제 썼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여러군데에 글을 남겨두었는데, 이 것은 아이패드에 있었던 글이고 아이패드의 어플은 글의 최초작성을 알려주지 않는다. (갓뎀 애플아이엔씨)
이 글을 읽다보니 내가 아닌 누구를 위로하기 위해 썼던 글인 걸 깨달아. 미완성인 글을 조금 고쳐 블로그에 올린다.

아마 이 글을 받았어야 할 사람에게는 너무나 늦은 메세지 일 것이다.


3주 째 일요일 저녁에 카레를 만들고 있다. 커다랗게 자른 감자와 눅진눅진 할 정도로 진한 카레가 먹고 싶어서 계속 카레를 끓이고 있었는데 좀처럼 성공하지 못한 탓도 있다. 재료는 심플하게 감자와 양파, 그리고 때때로 아보카도나 토마토를 넣는다. 쇠고기가 있으면 쇠고기를 넣고 돼지고기가 있으면 돼지고기를 넣는다. 중요한 것은 결국 감자와 양파다.

골든카레 박스 뒷면을 보니 4피스 카레에 물은 1.2리터를 넣어야 한다. 처음엔 좀 진하지 않을까 싶어서 1.4리터를 넣었더니 카레가 무슨 국물처럼 되었다. 울면서 카레를 마시고 다음 주엔 물을 1.2리터를 넣었더니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토마토를 너무 많이 넣었고 감칠맛을 위해 넣은 아보카도가 덜 익었는지 쓴 맛이 났다. 월요일 저녁까지 차갑게 식은 카레를 먹으며 내가 뭘 잘못했지 하고 실패를 곱씹었다.

오늘은 일단 감자를 7개나 깎았다. 양파 커다란 걸 잘라 잘게 자른 후 캬라멜라이즈를 시도했다. 주간에 사둔 쇠고기를 잘게 잘라 갈변하기 시작한 양파와 섞고 볶은 후 커다랗게 자른 감자를 쏟아부었다. 냄비 밑 바닥이 타는 기분이 들어서 앗차 싶길래 물을 0.8리터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치킨 스톡이라도 넣을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보니 갈색에 아주 멋져 보이는 고깃국이 되었다. 역시나 이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형 카레를 넣고 15분 정도 끓이고 15분 정도 숨을 죽였더니 걸죽하고 감자가 커다란, 내가 처음부터 만들고 싶었던 카레가 되었다.

누군가 당신은 혼자 산 지 몇 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카레를 만드는 방법을 모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항상 카레 만드는 방법을 까먹어서 매번 카레를 만들 때 마다 그 방법을 발명해내야한다고 변명 할 생각이다.

그것은 100%의 사실이다. 애초에 나는 카레를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카레를 잘 먹는 사람이다. 어떤 종류의 카레든 상관없다.

몇 년 전인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처음으로 카레를 만들어 본 날, 그걸 먹어본 여자친구는 이거 되게 국 같아 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용기로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와 카레를 만들어 준 걸까. 생각해보니 다른 건 몰라도 예의범절은 올바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 전에는 내가 만드는 카레가 못 먹을, 아니 나나 먹을 음식이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스스로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그걸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로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우주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나는 평범하리만큼 나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일들은 대체로 누군가에게는 몹시 이상하고 끔찍하게 들릴 수 있는 일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에서는 정의롭고 똑똑한, 그리고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온 우주는 그들을 돕고, 모든 노력은 보상 받으며. 마지막에는 행복과 화해가 약속되어 있지만 자아를 깨달을때 쯤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길거리에 마주치는 아무개 하나조차도 그 사람의 우주에서는 주인공이며 그에게는 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우주가 있다.

당신은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주는 나에게 친절하며 나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일들은 다 나의 뜻대로 이루어질거야 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 나름의 우주도 꽤 아름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은가. 나에게 적당히 무관심한 우주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우주의 진짜 얼굴을 바라보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원래 우주는 카레를 제대로 한 번 만들기 위해서도 3주가 넘게 걸리는 그런 귀찮은 곳이다.
나는 별명이 고등학교때부터 카레인 사람이고.진짜 카레 가루를 쓴 것도 아니고 마트에서 편하게 산 고형카레와 정육을 쓴 건데도 말이다.

들어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
길고 긴 카레 만들기의 이야기를 한 것은 내가 이런걸 썼을 때 여기까지 읽어줄 사람은 당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아픔이 어디에 오는 건지 잘 모른다. 당신의 말을 더 귀기울여 들었다면 좋았을텐데 형편없는 인간인 나는 당신의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흘려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 바빴다.
우리 모두의 인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해야할 말을 올바른 시기에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좀 더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창 밖에서 보이는 탁한 색의 햇볕도, 어느날 문득 발 밑을 보았을 때 줄을 지어 걸어가는 개미들의 앞길을 피해주는 것도, 목이 마른날 마셨던 미지근한 물도. 우리가 마땅히 했어야 했던 인사들도 모두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작년에 썼던 글 중에 <현대인의 신념구조>와 <사악한 자들의 기도>는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이라고 말하니 좀 우습다. 어떻게 완성해야할지도 알고있었고 얼개도 짜서 기록해두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완성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사람들에게 준 고통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이것저것 메모를 해둔 페이지를 넘겨보며 그래도 작년엔 쓰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올해는 쓰고 싶은 것 마저 없었다.

중력의 연구(1)이라고 써둔 메모에는 내 손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을 향해 낙하한다”
메모를 뒤집어 보아도 중력의 연구(2)는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다. 나는 조금 참담한 기분이 되어 볼펜을 찾아 “중력의 연구(2)”라고 적는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한 후 그 뒤를 이어서 적는다.

중력의 연구(2) “그들은 끌어당기는 힘을 발견했을 뿐, 밀어내는 힘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라고 쓴다.
언젠가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단지 모든 방향으로 낙하하고 있을 뿐이다.

24년 9월에 올린 미완성의 글이다.

어제 집으로 오면서 내가 블로그에 너무 많은 글을 쓰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들도 그런 고민은 안 할텐데, 참 생각도 사서하시네요. 하지만 나는 작가가 아니다. 그냥 회사원이고 현실과 가상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단편들을 조금 올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블로그의 내용은 에세이이다.
너무 내 삶이라는 뜻이다.

차라리 소설만 써서 올리는 블로그를 했다면 좋았겠지만 여러분, 소설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듭니다.
6년 전 쯤 머릿속으로 구상해놓고 쓰지 않았던 소설을 요즘에 다시 쓰고 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고 세상에 갑자기 유리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어느날 부터 세상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체험을 하고, 다른 사람은 결혼하려던 애인과 헤어진다.
쓰다보니 점점 길어져서 내가 질리고 있는 중이다. 어째서 이렇게 베스트 극장 대본 같은 걸 쓰고 있담.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여러분은 베스트 극장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MBC에서 방영하던 단막극 프로그램이다.
위키를 찾아보았는데 베스트셀러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83년도(!!)부터 방영하던게 시작이었고 그 후로 이름을 바꿔가며 방영. 결국 2013년에는 종영을 맞이한 것 같다.
방송시간은 하여간 밤이었는데 한시간 정도 남짓 하는 내용으로 1회성 드라마들을 방영해주었다.
내용은 대중이 없이 치정극일 때도 있고 사회극일 때도 있다. 공포나 추리일 때도 있었는데 추측하기로는 드라마 제작에 필요한 리소스들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서  놀고 있는 인력이 없도록 뭔가를 계속 돌려야했고 정규 드라마 시간에 편성되지 않은 주요 스텝들의 훈련을 겸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그러다보니 실험성이 강한 작품도 꽤 많이 나왔었고 뒤에 굉장히 유명해지는 사람들이 여기서 데뷔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수의 명작 문학들을 영상화 하는 경우도 많아서 문학과 영상 사이의 가느다란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그런 방송이기도 했다. 다른 방송국에도 비슷한 성격의 방송이 있었지만 내가 챙겨본 것은 문화방송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의 나는 그렇게까지 문학적이지는 않아서 단막극에서 사회성이 짙은 것들은 꽝이라고 생각했고 터무니없는 내용이 나올 수록 좋아했다.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가챠를 돌릴 수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 돌릴 수 밖에 없고 대박이 터진다고 해도 상품은 기껏해야 한시간 동안 재미있는 시간 보내기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즐겁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없던 시절의 삶은 대충 이랬다. 매일 종이 신문을 보면서 공중파의 편성표를 본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송의 편성시간과 또 무슨 특별한게 있는지 가슴 떨려하며 확인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방송이 하는 시간이면 경건하게 10분 정도 전부터 티비 앞에서 기다린다. 광고는 모두 본다. (그래 그것이 올바른 자본주의적인 태도이다.)
그렇게 보다보면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이어서 티비를 보고 그랬다. 그런 행태를 보고 모두가 아 티비는 바보 상자구나 하고 걱정하고 그랬는데 하하 걱정도 팔자셨다.
곧 유튜브가 나오는데 말이지.
또 뭘 좋아했냐면. 어린이 프로그램과 만화, 다큐멘터리와 코미디 프로그램.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그래 그러고보니 그 때는 비디오라는게 있었다. 그게 뭐냐면…그…동영상을 저장하는…테이프 레코딩…하여간 설명하기 어려우니 검고 단단한 필름맛이 나는 장치가 있었다고 알면된다.
넷플릭스의 혁신이 발생하기 전에 우리 20세기 인간들은 집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테이프라는 게 필요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고 진짜로.
하여간 어머니는 가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 현금으로 얼마를 맡겨두고 누나와 내가 마음껏 비디오를 볼 수 있게 해줬다.
몇달 지나지 않아서 누나와 나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너무 성인물인 것을 제외(그렇다고 그냥 성인물은 보지 않았는가? 목이 잘리는 것 정도는 그냥 보았다.)하고는 보지 않은 영화가 없게 되었는데. 시네필을 만드는데 꽤 정석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금세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서 몸부림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당시 공중파에는 주말의 명화라는 시스템이 있어서 주말의 적당한 저녁때가 되면 주로 미국의 영화들을 방영해주었다. 얼마나 영향이 컸던지 극장에서 내려간지 몇년 되지 않은 할리우드 대작 영화 같은게 방영한다는게 알려지면 학교가 술렁이고 그랬다. 집에 비디오 재생기가 생기기 전부터도 그런게 있으면 챙겨봤는데, 비디오를 마구 보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혼탁해진 나는 티비에서 해주는 모든 영화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이라도 좋았다. 어떤 나라 영화라도 좋았다. 나는 영화가 시작하면 꼼짝 않고 그 영화를 다 보았고 다음 영화를 볼 때 까지 그 봤던 영화를 머릿 속에서 계속해서 재생했다. 인상깊은 장면을 생각하고 대사를 읊고. 이걸 다르게 만든다면 어떻게 만들면 될까를 생각했다.
현실보다 영화 쪽이 내겐 더 현실에 가까웠다. 어릴 때의 그 나이에는, 망상 쪽이 현실보다 더 사랑스러운 법이다.

어떤 영화를 봤는지는 굳이 여기에 쓰지 않겠다. 사실 어떤 명작이라고 불렸던 영화들보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스며든 것은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어떤 광경이다.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사람들과 각이 진 자동차를 몰아 어디론가 가는 남자. 아름답지만 어딘가 채워지지 못한 눈을 가진 여자. 캘리포니아의 햇볕과 홍콩의 밤거리 같은 것들 말이다.
어느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홍콩에 갔던 날. 비가 오는 홍콩의 해변을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데 저 멀리 비안개 너머로 홍콩의 거리가 천천히 보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당신에게 내가 무엇을 봤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의 이야기이고.
나의 마음 속에 머물러있는 몇 되지 않는 사랑으로 가득찬 순간이다. 당신에게 말한다면 직접 말해주고 싶다.

어느날 후배와 영화를 보러가면서 얘길 했는데. 후배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안방에 기어들어가 - 안방에만 티비가 있었기 때문에 - 매일밤 잠이 든 부모님의 발치에서 영화를 두편, 때때로 한편을 보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본인의 학업은 둘째치고 본인의 부모님에게도 못할짓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았는데. 후배는 실로 광기에 가득찬 얼굴로 오빠, 그럼 오빠는 영화보고 싶은걸 참을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영화는 해로운 매체가 맞고 어서 깡그리 다 불태워버려야한다.

나는 가끔 궁금해한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주인공들. 저 멀리 사라지는 햇볕 아래에서 찍은 것처럼 갈색으로 바래있던 그 광경들. 총을 맞아 쓰러진 사람들. 어딘가로 떨어져 굴러가버린 과일들. 그 모든 것들은 정말 세상 어딘가에 존재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모두 영화의 구성요소와 세트일 뿐으로 저 모든 사람들과 과일들 모두 촬영이 끝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그리고 모두들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걸까?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것들이 정말 나의 것일까 아니면 천개가 넘도록 본 티비 드라마 단막극의 주인공이 하고 있던 생각일까.

24년 8월의 글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외할아버지의 성묘를 가지 않았다. 안장을 할 때도 가지 않았으니 한 번도 가지 않은거다.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지난주의 일요일 너무 피곤하고 괴로워서 이유없는 변덕으로 음력 7월 15일 중원절이 언제인지 꼽아보니 바로 그날이었다. 과연, 성묘를 가기에 적절한 시기구나 싶어서 성묘를 가기로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대전의 현충원에 계시다. 외가의 선산이 조치원에 있는 걸 생각하면 크게 다를 건 없다. 지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차를 타면 금세 갈 수 있는 곳이니 크게 준비 할 것도 없이 기차표만 예매해두고 온천이 되는 숙소가 있으면 하루 정도 자고 올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 외엔 대전에 사는 지인이 오는 김에 한 번 보자고 하여 저녁 기차로 예약 시간을 바꾼 정도이다. (결국 지인은 다른 일정이 생겨서 만나지 못했다.)

기차를 타기만 하면 대전은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다만 기차역까지 가는 것이 항상 문제라서 나는 기차를 타는 날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기차표값에 택시비를 슬쩍 끼워넣는 기적의 논리로 돈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가까운 대전이라면 그런 논리이고 먼 부산이라면, 그래 먼 부산이라면 기차값이 비싸서 택시비 정도야 거기에 더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만 그런 식의 기적의 계산법을 가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들하지 않는가 오늘은 평소보다 좀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치킨 시켜먹어도 되겠어. 체육 필기 시험을 잘 봤으니 내일 한국사 시험은 좀 조져도 되겠지. 이런거 말이다.

햇볕이 너무 강해지기 전에 성묘를 마치고 싶어서 대전에 도착하고 보니 8시도 되지 않았다. 오기 전에 가는 루트는 대충 보았지만 가장 편한 버스를 타고 가는 건 내키지가 않아서 굳이 대전1호선을 타고 현충원 앞에 가기로 했다. 술이랑 꽃 정도는 역에서 먼저 사가는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꽃에까지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기(택시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잖아)에 현충원 역 앞에 뭔가가 있겠지 하고 물도 휴지도 없이 대전역 성심당에서 산 빵을 씹으며 전철을 탔다. (빵은 샀다 그렇다.)

그리고 현충원 역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대학교 앞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당황해서 현충원 역 주변을 잠시 돌았는데. 편의점 마저 없었다. 여러분도 영원한 고향처럼 머릿속에 한국의 시골이 한 두개 쯤 있을텐데 읍내도 되지 못할, 그 정도 시골이었다. 쓸데없이 국도 옆의 나무들이 우거져있었다.

셔틀버스를 타려고 줄 서 있는 것 같은 대학생들이 보였지만 그들에게 딱히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 현충원에 보훈매장이 있으니까…라는 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단 현충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현충원까지는 대략 3~4km로 보였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셔틀버스나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혼자 있을 때 평소보다 훨씬 이상한 판단을 한다. 그냥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다리가 남들보다 좀 튼튼한 편이고 걷는 것도 싫어하지 않아서 역 두세개 정도 거리는 그냥 걸어서 가는데 8월의 뜨거운 태양을 생각하면, 전혀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날 말리지 않았을까. 그건 내가 친구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진 않기 때문이다. 혹시 동무들이 많은 인싸 자식들은 인생의 이런 변곡점마다 시시적절한 조언과 말림을 받으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걸까? 몹시 억울하다.

현충원을 들어가고도 외할아버지의 묘소는 현충원 북쪽에 있어서 말도 안되게 긴 언덕을 걸어가야 했는데. 솔직히 얘기하겠다 보훈처 홈페이지에 들어가 외할아버지 묘소 위치를 확인할 때 부터 그냥 걸어가려고 생각하고 갔다. 편도로만 5km가 넘었지만. 내가 믿는건 (고작) 처서를 지나 좀 선선해지는 날씨였다.

그래도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다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길을 지나 의외로 멀지 않은 길가에 꽃집을 찾아서 너무 기뻐서 들어갔다. 조화들만 잔뜩 있어서 당황하여 가게 주인 분을 불렀더니 생화인 국화도 있다기에 그걸 한다발 샀다.
어째서인지 10송이 단위로 팔고 있었는데. 왠지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몇 뭉치를 더 사려다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어서 관두고 나서려는데 가게 주인 분이 소주와 컵을 챙겨주시더니, 고인께 한 잔 따라드리세요 라고 하셔서 얼떨결에 받았다.

국도 변에는 법 같은 걸로 정해둔 것처럼 골프용품 전문점과 오토바이 가게들이 있고. 집 가까운데 있으면 한 번 쯤 갔을 법한(한 번 만 갔을 법한) 무슨 톳으로 만든 음식이 메인 요리인 가게들이 있었다. 이런 가게들만 있어야 한다고 조례로 정한걸까? 분명 나의 홈타운 부천에도 도심을 벗어나 과수원이 있거나 국도로 좀 벗어난 곳으로 가면 저런 곳이 나온다. 무엇을 숨기랴 내가 살던 근처에는 수목원이 있었는데 그 수목원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곳에는 몇층짜리 낚시용품 전문점이 있었다.
도시구조이론이나 지대이론 등 (바제스니 뭐니 하는 것들 말이다)에 의하면 이런 전문점은 굉장히 넓은 범위의 시장을 커버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편의점은 반경 일킬로미터 이내의 손님들이 주로 이용하지만 이런 취미류의 전문점은 수요가 적기 때문에 수십킬로미터의 반경을 커버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돼 이런 가게가 겨우 수십킬로미터의 반경을 커버한다고? 내가 본 것이 대전의 유일한 오토바이 배터리 전문점이란 말이지. 남한에 유일한 곳이 아니고?

3킬로미터 이상을 걷자 슬슬 즐거워지기 시작했는데. 머릿 속으로 처음에 뭐라고 인사를 하지 하는 생각을 계속 했다. 할아버지 저에요. 할아버님 인사드립니다. 할로 구독자 여러분. 등등 하여간. 나는 외할아버지의 생전에는 항상 외할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어리광을 부린 적은 없다. 외손자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그런 노인이 아니었다.

아무 날도 아니었는데 현충원 주차장은 7부 이상 차있는 것 같았다. 보훈매장의 물품 가격은 합리적이었는데, 생화는 거의 없었고 조화가 대부분이었다. 뒤에가서 알게 된거였지만 각 묘지에 꽂혀있었던 꽃들은 다 조화로. 유족들이 꽂아두는거였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자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조화를 꽂아두고 명절마다 바꾸는 거였다. 나는 부러 생화를 찾은건데, 내가 바친 국화가 시들었다면 누군가 그걸 버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소주를 받았지만, 아무래도 좀 그렇지? 싶어서 법주를 샀다. 외할아버지가 술을 좋아했던가. 할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할머니가 질색을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모르겠다. 마셔도 취할 때 까지 마시지 않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다.

현충원은 좋은 곳이었다. 조용했고 나무가 모두 커다랬다. 청소년 고양이를 하나 찾아 사진을 찍었는데 싫은 표정도 없이 날 쳐다보며 야옹이라고 말해줬다. 나도 야옹이라고 대답해줬다. 땀에 젖을때 까지 걸어서 외할아버지의 묘비를 찾았다. 묘비 사이를 지나가면서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성묘를 좀 하려고요. 하고 굽실굽실 거리면서 지나갔다. 아무래도 그렇게 말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이다.

저 멀리 산이 보이고 까막까치 우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석 앞에 서서 우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비한 인사도 다 까먹고 죄송해요 울어서 죄송해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소연하는 것도, 자기 앞에서 우는 것도 싫어한 사람이다.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걸 어쩌겠는가.

술을 바치고 물을 부어 비석을 깨끗하게 닦고, 사진을 찍어서 이모에게 보냈다. 잘 계시네요 아직 누워계세요.
외할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햇볕을 받고 있으니. 그제서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게 실감이 났다. 그냥 외할아버지랑 싸우고 10년 쯤 안 본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사랑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운거였다. 녹색의 산이란 저렇게 아름다운거였다. 벽처럼 둘러쌓인 산들이 숨도 쉬지 않고 서있었다. 내가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자 대신 벌레들의 날개 소리와 까마귀의 긴 울음 소리가 들렸다.

두서없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길래 남은 술들을 외할아버지 무덤 근처에 있는 다른 무덤들에 바치고 절을 드렸다. 바로 옆자리에는 외할아버지와 사관학교 동기인 유명한 분이 누워계셨는데 술을 더욱 가득 따라서 드렸다. 이모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돈 문제로 외할아버지가 그 분을 고소하셨다고 한다. 아니 죄송합니다. 어느 쪽에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또 올게요. 라고 하고 절을 두 번 더 했다. 다시 눈물이 나서 머리를 들을 수가 없었는데. 외할아버지 말투와 외할아버지 목소리로 그래 또 와라. 라는 말을 들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외할아버지 목소리를 하나도 잊지 않았다.

수분과 전해질 부족으로 죽겠다 싶어서 보훈매장에서 산 파워에이드를 꿀꺽꿀꺽 삼켰다. 내려가는 길도 너무 길었다. 현충원역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꽃집에 전화해서 저 아까 생화 산 사람인데요 소주를 주셨는데 생각해보니 값을 치르지 않았어요 계좌번호로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라고 물어보니 조문을 가는 분들에게 그렇게 한 병 씩 드려왔다고 한다. 감사하다고 번창하시라고 인사를 드리고 끊었다. 사실 그거 안 썼는데 말이지.

정말로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현충원을 나와 대전역으로 가는 버스를 비틀거리면서 탔다.

중원절이란 말은 도교용어로 같은 날을 불교에서는 우란분재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ullambana에서 나왔다고 한다. 굳이 해석하자면 똑바로 매달려있다는 말이 전화되어서 생긴, 거꾸로 매달려있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하나인 목건련은 신통제일이라 칭송되었고 마하목건련, 목련존자 등의 이름으로 칭송받았던 뛰어난 제자였다.
우란분경과 목련경에 따르면 그런 그가 어느날 천안통으로 지옥을 바라보자 생전에 많은 악업을 지은 어머니가 죽어서 아귀도에 떨어져 굶주림의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하늘을 날고 용왕을 조복시키는 마하목갈라나도 지옥에 떨어진 부모를 구할 수는 없었기에 스승에게 방도를 물었고 승려들에게 5가지의 과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죄업을 씻고자 하였다. 죄는 선업으로만 대속 할 수 있는걸까.

그것이 우란분재의 유래로 알려진 이야기이고, 거꾸로 매달려있다는 것은 아귀도에 떨어진 목건련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그 후 멀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일로 보이나 목건련은 반대교파들의 시비에 쫓기다 결국 스승인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멸에 든다. 전설에서는 그가 일찍 죽음에 이른 것이 전생에서 부모를 죽인 대죄인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의 선업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교의 중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행사이다. 인간의 죄를 계량하는 천관들이 일년에 세 번 그 죄를 가늠하는 날 중 하나가 중원절이고, 도교에서는 그날 음식을 차려놓고 부모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죽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말하자면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가끔 생각했다. 산자들이 우리를 생각하는만큼 죽은자들도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그들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지. 애처로울 정도로 어리석은 생각이나. 내가 아닌 누군가도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버스를 탄지 얼마 안되어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회사의 후배가 대전 갈 일 있으면 말해줘요 성심당 부탁 좀 합시다. 라고 말한게 생각나서 까먹었으면 모를까 해주겠다고 말까지 해놓고…싶어서 후배에게 연락을 하니. 마침 주말약속이 모두 깨져서 놀고 있던 후배가 1초도 안되어서는 대답을 하고 케익을 부탁했다. 운도 좋은 녀석이네 안 그래도 오후에 약속이 통채로 사라져서 할 일도 없었는데 해주마 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점심엔 맛있는거 드세요 태평소국밥이라든가…라고 후배가 말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가 오룡역(그 가게의 본점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역이다)에 도착하기 직전이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느껴서 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과연, 육사시미와 내장탕 모두 거기까지 와서 먹는 후회가 하나도 없는 맛이었다.

후배가 부탁한 케익을 사서 카페에 앉아 이모와 메세지를 주고받는데. 이모는 흰 국화가 할아버지가 조문을 하러 갈 때면 항상 사서 가던 꽃이라고 말했다. 단지 한 번에 세 송이만 사셨다고. 그 이상은 사치인 것 같다 라고 하셨다고 했다. 다음에는 더 큰 국화 꽃다발을 사서 갈 생각이다. 근데 노인네가 날 더 이상 어쩌겠는가.

꿈에나 나와서 잔소리나 좀 하겠지.

24년 8월의 글이다.

문득 언젠가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다 떨어질텐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점점 과거로 돌아가서 내 마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일들을 다 꺼내어 글로 쓰고, 전해야 할 말은 모두 전하고 전하지 못할 말들은 다 삼키면. 그리고 그 뒤에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1990년대 가장 더웠던 여름을 말한다면 94-95년의 여름을 빼놓고 말 할 수 없다.
동북아시아의 폭염은 정말 최악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라서 베이징은 건국이래 최악의 폭염을 기록했다고 하고 한국에서도 가뭄일수와 더위 양 쪽에서 20세기 최고.
전국의 폭염일수가 29.4일. 2018년이 되기 전까지 어떤 여름도 94년보다 덥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공교롭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기억하라고 하면 기억이 나지만 94년-95년에는 내 인생에 대체로 아무 일이 없었던 시기였다. 단수가 자주 되었기 때문에 물통을 들고 물차를 기다려서 물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어디 오지에 사셨나요? 아닙니다. 나는 경기도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도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뭄이 발생하면 물차가 나가는 걸로 알고 있다. 다만 경기도가 다른 지방에 비해서 수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요즘의 경기도민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광경일지도 모르겠다. 집에 들통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물통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제 집에 들통을 가져다 두지 않는다.

예전엔 집에 항상 있었지만 이제는 집에 잘 두지 않는 걸 얘기해보자면 랜턴과 양초이다.
그렇게 전력 사정이 안 좋았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 시절에는 선풍기도 잘 안트는 집이 많았는데도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한 여름이 되면 전기가 끊기곤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화를 내지도 않았고 어어 정전이네 하면서 능숙하게 양초를 꺼내서 집을 밝혔다.

그 당시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한 용어는 “열대야”였는데 밤이 되어도 덥다고? 그럴 수가 있나 놀랍구나 20세기 이러면서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래서 20세기 피플들은 열대야를 이겨내기 위해 에어컨을 사거나 선풍기를 틀었는가? 그렇지 않다. 20세기 피플들은 그냥 밤이 되면 집 밖에 나와서 누워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겠지만 그 당시에는 도시도 커뮤니티가 아직 살아있었고, 아파트 단지도 비슷한 시기에 이사온 구성이 비슷한 집들이 모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들 집에서 은박지처럼 반짝거리는 거나 진짜 대나무로 만든 돗자리(어휴 정말 간지템이로군요)를 들고 나와서 식구들끼리 누워있었다.
재미있는 체험으로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정상가족들을 구성하여 커뮤니티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충분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친)누나와 단 둘이서 집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 둘이 할 수 있는 건 창문을 활짝 열고는 양초도 끈 채로 어두컴컴한 집에서 애써 잠을 청하는 것 밖에 없었다.

조금 더 커서 태풍이 오던 날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나는 혼자였다. (왜 혼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전거를 있는 힘껏 밟아 집에 돌아온 나는 태풍을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구구단을 배우기 전에 이미 혼자서 밥을 해먹을 줄 알아서 당황하지도 않았다.

정전 중이라 건전지가 끝나면 랜턴의 불도 꺼지기 때문에 랜턴을 켜지 않았다. 전등 스위치는 모두 꺼둔채다.
아직 비바람이 오진 않았지만 창을 꼭 잠그고 선풍기가 켜지길 기대하며 미풍에 버튼을 눌러두었다. 그냥 서늘한 창문에 이마를 대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번개가 치고 천둥 소리가 올 때 까지의 숫자를 세면서 태풍이 얼마나 가까이에 왔는지 셌다. 세찬 빗소리가 들리고 뒤에서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선풍기가 켜졌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찍은 사진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 어릴 적의 기억은 군데군데 결락되어 있다.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몇년도에 뭘 했어 라고 물어본다면 어어 뭐였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오랫 동안 “올해”라고 인식했던 건 95년이었다. 머리 속에서 95년이 지나는 걸 거부하듯이 올해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하면 95년이 떠올랐다.

아주 오랜 후에 그 이유를 스스로 깨달았는데. 그 때 쯤에는 더 이상 95년을 올해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또 다른 해를 올해로 여기고 있다. 그런걸 보면 나는 뭔가를 배우는게 그리 빠르진 않은 것 같다.

매년을 기억하는 건 대체로 그 해에 읽었던 책들이다. 이 무슨 대책 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나는 92년의 7월을 내가 광화문 교보문고에 처음 갔었던 해로 기억한다.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에 감동했는데
아버지는 딱 한권을 고르렴 이라고 불가능한 숙제를 내게 주었다. 지금의 나라면 무슨 책을 골랐을까. 나는 꿈 속에서는 대체로 책이 많은 곳에 있다.
교보문고였던 적도 있고 모교의 중앙도서관일 때도 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의 작은 도서대여점도 자주 나오는 곳이다. 나는 꼭 영원처럼 그렇게 책 사이에 있고 싶어한다.

92년 7월의 내가 고른 것은 그 해 발매 된 스트리트 파이터2의 공략본이었다.
왜? 뭐 대단한 책을 골랐을거라고 생각했는가. 그 책은 올컬러에 멋진 일러스트가 가득했다. 오타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냥 일본에서 나온 책을 불법 복제하여 대충 번역해서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몹시 실망한 눈치였지만 본인이 한 권만 고르라고 했기 때문에 의외로 군말 없이 책을 사줬다.

그러고는 충무김밥을 사줬는데. 요즘에야 충무김밥이 창렬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아버지에게는 20대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어서. 누나와 내가 맛이 없다고 하자 몹시 분개해했다.

그리고는 그 해 겨울 누나와 나를 정말 충무에 데려가 충무김밥을 사주었다. 그 때도 맛이 없어서 누나와 나는 같이 나온 오징어순대만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한 성격에 머리가 너무 좋은 아버지라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나는 정말 길고, 웃긴 이야기를 여럿 할 수 있다.
애초에 자식이란 그런 존재이다. 자기 부모에 대해서는 그게 분노이든 슬픔이든 끝도 없이 길게 얘기 할 수 있는, 우리는 그들 인생이 가장 가혹한 목격자이다.

하지만 책의 이야기를 하자. 나는 그 공략본을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보았다. 비유가 아니다 정말 너덜너덜해지고 찢어질때 까지 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책도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보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내 지적 능력에 대해서 오해를 했는지 어느날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 교재를 사와서 나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또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정말 그만두자.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0세기이다.

방학은 좋았다. 책을 마음 껏 읽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결국 매년을 어떤 책을 읽었는지로 기억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94년만큼은 아니었지만 혹독하게 더웠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수학에 재능이 없다는 것이 판명이 난 나는 더 이상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해 방학은 통채로 내 것이었다.

아무 할 일도 없던 나는 모비딕을 읽었다. 모비딕을 읽다가 어느 토요일 오후 공영방송에서 해준 모비딕의 영화판은 인상적이었다.
장면은 어둡고, 화면은 붉고 사람들은 땀을 흘리면서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대사를 했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땀 범벅이 되어서 선풍기 앞에 앉아 아아아 어어어 하고 소리를 내었다.
변성기가 되지 않았던 내 목소리가 선풍기의 진동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선장님 고래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해보았다.

나는 아직도 종종 모비딕을 읽으면서 뺨에 닿았던 대나무 돗자리의 감촉을 떠올린다. 너무 더웠고. 나는 책을 읽는 것 외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죽음보다 더 외로운 여름이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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