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따뜻하기도 하고, 지갑 어딘가에 넣어뒀던 사진이 생각나기도 해서 나는 좀 죽고 싶어졌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두리번거리고 있노라면 달짝지근한 꽃향기가 난다. 하늘은 파랗고 며칠 전 내린 비에 공기는 맑아, 먼지도 흙도 입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숨을 들이쉬는 일이 즐겁다. 그렇다고 해도 죽고 싶어진 마음이 낫는 것은 아니다.
원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면 고스란히 그곳에 있다. 불합리하다고, 모든 것은 세상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데 마음만은 어째서 변하지 않는지 항변해보지만. 그런 항의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마음은 거기에 있다.
- 4월 10일 목요일, 비가왔다.
주말에도 비가 올거라고 했지만 별다른 계획이 없었던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20대 대통령 파면 기념으로 타올을 만들까 싶었는데 8일 화요일, 그 얘기를 들은 친구가 그러지 말고 다른 친구들한테도 얘기해보자- 라며 냉큼 단체대화방을 만들었다. 이러면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야 하잖아 싶어서 업체에 전화도 해보고 하면서 대충 비용은 얼마나 들 것인지 디자인은 어떻게 할 것인지 확인도 해보았다.
단계 별로 다른 친구들 확인을 받았는데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라 그런지 까다롭지도 않고 그래그래 좋아좋아 하며 다 넘어가줘서 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이 녀석들 근데 웃기는 타올 좀 받겠다고 인당 십만원 정도 쓰겠다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짜 다들 그 생각이었다.
드디어 오늘 모든걸 확정해서 타올을 주문했는데 시안을 여기저기에 올리자 의외로 인기가 좋아서 본인들에게도 팔라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일단 전체 제작 수량 중 내 몫은 15장 뿐이고 누구에게 팔기도 애매하여 그러지 말고 만나게 되었을때 줄게. 라고 말하자 타올을 팔라고 하던 사람들 중에 반 정도는 그게 더 어려운 조건이라고 투덜거렸다. 제작한 타올은 월요일부터 배송이 출발할거란다. 기대가 된다.
- 4월 12일 토요일, 비가 왔다.
어딘가에서는 눈도 내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동네에도 눈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박 정도는 내린게 아닌가 싶다. 눈이 아니더라도 바람이 세차고 비 정도는 내릴 것 같은 날씨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러닝을 했고. 그 뒤로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어서 한가해졌다.
지난주에는 그럭저럭 의욕이 남아있어서 넷플릭스도 보고 책도 읽고 그랬는데 오늘은 의욕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다. 이프 구문을 사용해 지금의 상태를 표현해보자면. 내가 의욕이 있었다면 나는 외출이라도 할 수 있었을텐데. 정도가 되겠다.
- 4월 13일 일요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마트가 문을 닫는 일요일이라는 것을 아침에야 깨달았다. 어제 뒤늦게 떡볶이라도 먹으려고 아파트의 야시장에 갔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선지 떡볶이 사장님은 철수를 하셨고. 과일 사장님이 시무룩하게 있으시길래 딸기를 4통이나 사왔다. 덕분에 굶어죽을 걱정은 없다. 하지만 딸기 4통…적절한 식단은 아닌 것 같다.
오후가 되서야 뭐라도 외식을 할 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밖을 나섰는데 역시나 바람이 세차서 기분이 자못 유쾌해졌다. 이상한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너무 더운 날을 제외하고 일단 기후가 평소같지 않으면 유쾌해지는 사람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 근처에는 항상 대학교가 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하여간 항상 그랬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평생 학교 근처를 기웃거릴 팔자인가 보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도 마찬가지라서 종종 그 근처로 산책을 간다. 학교에 들어가는 일은 잘 없다. 나는 어떻게 보아도 대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나이이고 혼자서 남의 학교에 용건도 없이 들어가는 것은 좋은 생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바람이 너무 쎄서, 때 마침 해가 지려드는 저녁이라서. 그리고 아직 꽃이 떨어지지 않을 시기라서 남의 학교에 들어가 교정을 걸어다녔다. 길고 나즈막한 산에 기대듯이 펼쳐진 교정이라 교정 전체에 심어져 있는 꽃나무들이 제법 잘 어울린다.
예전에 나는 메인도로를 따라 걸어 대운동장 주변을 돌아 언덕길을 올라가며 이 학교의 꽃들을 구경하곤 했다. 혼자서 그렇게 온 적은 거의 없다. 이 동네에 산 지 8년은 되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내가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보다도 더 오랫동안 이 학교를 다닌 셈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뻔뻔스러운 억지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나는 외부인이다. 있어서는 안될 정도는 아니지만 있는게 자연스러운 사람은 아니다.
대운동장에는 학생들이 뛰어다니고 있다. 도대체 뭘 하는 건지 훈련인지 놀이인지 알 수 없는 것을 하고 있다. 나도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어서 두껍고 오래된 꽃나무들에 눈을 돌렸다. 올해의 꽃은 작년의 꽃과 다를 바 없으며. 내년의 꽃은 다시 피어날 텐데. 나는 올해의 꽃에 미련을 담아 바라보았다.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는 내가, 가장 자연스러운 때에 피어나는 것을 부러워 하는 것은 실로 비참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나는 누구의 허락도 받지 못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나는 예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 저 멀리 보이는 나무들을 쳐다보다. 그대로 학교를 내려왔다. 저녁을 먹으려고 나갔지만 뭔가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 4월 14일 월요일, 비가 왔고 날이 풀리지 않고 그대로 추웠다.
회사를 마치고 서둘러 걸어 병원에 갔다. 예약해둔 치료에 늦고 싶지 않았다. 6시 반 쯤 예약해둔 치료에 때맞춰서 갔을때 모든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8시 쯤 된다. 일주일에 두 번은 그렇게 집에 들어가게 되니 5분이라도 빨리 도착해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이득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치료가 더 힘들었다. 가슴 근육이 짓눌린것처럼 아팠고. 넓적다리를 포함해 다리가 욱씬거렸다. 감기이려나, 생각하며 치료를 받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되지 않았다.
재활치료사 분은 잘 안 될 때도 있는거죠. 라고 말하며 약을 먹고 집에 빨리 돌아가 쉬는 걸 권했다. 그 말대로 집에 돌아가며 과자 한 박스를 샀다.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했다.
- 4월 15일 화요일. 일부 흐리고 따뜻해졌다.
파면 기념 타올이 왔다. 회사 선배 중 한 명은 인터넷말고 진짜로 이런거 하는 사람 처음 본다. 라고 하기에 짜잔 인터넷에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이 저에요 라고 말했다.
같이 타올 구매에 돈을 낸 친구들이 모두 먼저 받았고 마지막으로 받은 사람이 나였다. 생각보다 커다란 박스에 타올이 가득차 있었다. 이게 십만원 돈을 쓸만큼 보람찬 짓인가 하고 혼자 생각해봤는데,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다는 것 또한 애초에 맥락이 없는 건데 말이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25년 4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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