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돈내산임을 밝힌다. 아니 안 밝혀도 되는건가?

아이패드를 새로 샀다. 원래부터 생일선물로 아이패드 하나 사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어서 별로 고민 없이 샀다.
무슨 거짓말을 고하랴 나는 원래 뭘 살 때 딱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어 사야지 하고 사면 끝이다.
원래부터 그런 못된 습성을 가진건 아니고 믿어달라, 어릴 때 부터 나는 모든 걸 아껴쓰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어릴 때의 나와…지금의 나를 비교한다고 하면 비슷한 점이 훨씬 적은 것 같지만…하여튼

원래 여행기와 나의 근황을 부재증명이라는 이름으로 올리기 시작한 이 블로그가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거나 올리는 곳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의 역할을 잊어버리면 안되겠기에 이렇게 근황을 올린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아이패드랑 매직키보드를 같이 샀는데 더럽게 더럽게 비싸면서 별로 제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일단 글을 써보면서 자신의 소비를 정당화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의 편집이 좀 이상하게 보인다면, 그건그냥  아이패드로 작성했기 때문이다.

요즘 티스토리에 글을 쓰면 적게는 30, 많게는 100이 넘는 방문객이 들어온다. 여러분이 이 티스토리에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원래 아무 글이나 쓰는 사람이고 아무 일이 없을 때 나의 텐션은 이 정도이다. 언제 어디서 물어봐도 귀신 이야기나 문학 이야기 두 세 개는 뽑아낼 수 있지만 (애초에 그런 인간이 아니면 블로그를 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나는 회사원이다. 우울하고 문학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효율적으로 일하고 빨리 집에 가서 누워있는 것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관심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 뿐이다. 하루 종일 유령같은 마음으로 지내다가 두부 세일하면 두부 4모 살까, 하고 고민 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어제는 2시간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수육을 샀다. 아무래도 고기가 먹고 싶어서이다. 무친 무말랭이랑 그런 것들이랑 먹다 보니 두 입을 먹고 나서 더 이상 먹고 싶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먹었다. 복통이 심해서 2시간 정도 모로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머릿 속으로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미술적 상징에 대해서 생각했다. 연기가 나는 거울이라고 불리운다니 얘네들의 제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거지?

그거 말고 뭐하고 지내냐면, 그래 아즈텍 신화의 신에 대해서 자기 전에 생각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을리가 없지.
극단적으로 편식을 하며 두부, 수박, 냉면만 먹고 있다. 회사에서 먹는 점심은 친구와 같이먹기 때문에 다른 사람처럼 그럭저럭 먹지만 왠지 집에 혼자가 되면 다른 걸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얼마 전 역의 쇼핑몰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에일리언의 신작을 보고나서가 아니고 그냥 냄새가 너무 역해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
이게 바싹 마른 녀석들의 식욕인가? 하고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집에 돌아와서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두부를 먹었다. 진짜 아무 것도 안 먹으면 배가 고픈걸 보니 바싹 마른 녀석들처럼 되기엔 무리 같다. 얼마 전에 회사 동료에게 저 살 많이 빠졌죠? 라고 하니 얼굴만 빠진거 아냐? 라고 하길래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누가 봐도 저자식 왜 저렇게 말랐지 소리를 듣고 싶다.

SNS에서는 아무나 일단 팔로잉 하면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내 이 증상들이 언제 나아질지 알수가 없어서 우선 내 머릿속에서 나 자신을 좀 뽑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게 가장 효과적이지만, 나가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을 하니 내 평소의 적당한 매너와 유머감각을 유지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최근에 아는 동생과 몇명이 차례차례 우리 동네에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다. 엉망인 얼굴을 하고 나온 나와 잘도 놀아준다 싶었다.
(사촌)형이 동네로 찾아올 정도였으니 다들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냥 만화카페에 가고 싶은데 자기 동네에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깨가 아직도 낫지 않아서 어떤 운동도 하기 적당하지 않지만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정말 이상하다 나는 혼자가 되면 달리기를 하고 싶어한다.
그거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쓰길 반복한다.
지웅이형과도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형에게 그래도 글을 쓰면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상하죠? 라고 말하자 형은 아냐 맞어 그러니까 우리가 안되는거야 라고 대답했다.
형은 몰랐겠지만 나는 그 때 쇼핑몰 구석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형의 대답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아니 형의 대답이 감동적인 것으로 하겠다.

항상 글을 쓰고 나서 생각한다. 조금 더 살아가야지.

24년 8월의 글이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겠다. 20세기의 이야기이다.
 
나라고 20세기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20세기의 후반에 태어났고 이제 21세기에 살았던 시간이 더 길어져서 20세기의 일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설령 아니 그렇다고 해도. 사람에겐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어느날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창문 밖의 눈오는 밤을 쳐다본 일. 우리 외엔 아무도 없는 호텔의 옥상에 앉아서 불꽃놀이를 봤던 일. 정글짐의 꼭대기에 앉아있다가 말을 걸었던 일.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더운 여름에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던 일. 아버지가 저 멀리 해변의 트라이포트를 향해서 저건 고래의 뼈야 라고 말해줬던 일 같은거 말이다. 사기꾼 자식 진짜.
 
20세기의 전경이라고 해도 지금과 크게 다를바는 없다. 나는 공업도시에서 자랐다. 어느 정도 공업도시였냐면 아파트를 벗어나면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사는 저층의 주거지들이 있었고 바로 공장단지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를 가려면 공장 단지를 가로질러야 했으니까 말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아이들의 통학이 위험하고 어쩌고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엔 초등학생들의 값이 쌌다. 한 두명 정도 한꺼번에 등교에 늦어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1학년 때 나는 반친구 두명과 놀다가 깜빡 늦어서 30분 정도 늦게 등교했는데 선생님은 우리가 오지 않은 것도 몰랐다)
오히려 내가 1학년일때 고가도로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는데 서럽게 울고 있는 나를 공장 아저씨들이 번쩍 들어서 사무실에 데려가더니 약을 발라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제강제철을 위주로 하는 2차 가공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 가공된 철강제품을 인천의 수출단지로 보내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시꺼멓게 검댕이 묻어서는 옳지 옳지 하며 사내니까 울면 안돼 하며 나를 토닥이고 보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공장을 아주 좋아한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지금과 결정적으로 다른게 있다면,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초등학생들이 정말 값이 싸서 역곡시장에 가면 싱싱한 초등학생 한 명에 오천원 정도했으니까. 어딜 가나 친구들이 많아서 아파트 아무 곳에나 가도 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다치거나 구르거나 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나와 누나가 이유없이 꿀벌을 포충망 가득히 잡아서 가지고 다니다가 포충망이 찢어져서 내가 꿀벌에게 수십군데를 쏘였을 때도 (중간에 좀 다른 얘길 하자면 몇 년 후 소년이 꿀벌에 잔뜩 쏘여서 아나팔락시스 쇼크를 일으켜 죽는 영화가 나왔는데. 어린 나는 와 죽을뻔 한거구나 하고 소름끼쳐했다.) 내 친구가 통학길에 진도잡종인 커다란 개한테 청바지가 찢어지도록 물렸을 때도 어른들은 대단치않게 생각했다.

우리는 어땠는가. 어린애들도 보통 자기의 생명과 안전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한달에 두명 정도는 아파트 정글짐에서 뛰어내리다가 팔을 부러트렸으니까.
 
그렇다면 20세기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생명과 안전보다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건 우리 부천시 소사구만의 가치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는 가난과 불화의 상징 부천시에서 자랐다.) 100원짜리 동전이 초등학생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 무슨 동전 몇 닢에 목숨을 파는 용병 같은 소리인가 하드보일드 하구만. 하지만 정말이다. 20세기에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는 재화들은 대부분 100원 아니면 200원이었고. 500원짜리는 이미 고급의 영역이었다. 
 
여러분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간단히 말해주자면 거의 모든 아이스크림이 200원을 넘지 않았다. 500원을 넘어가는 것은...부의 상징 월드콘 정도였다. 엑셀렌트? 내가 너무 늙어보이지만 엑셀렌트는 내가 이미 좀 자아가 생긴 어린이였을 시절에 번개처럼 등장했다. 황금색 껍질을 가진 그런 비싼 물건은 어른들이 사주지 않으면 절대로 먹지 못하는 고급품 중의 고급품이었다.

우리 동네 태권도 사범님이 어느날 아주 침통한 표정을 하면서 얘들아 100원이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데 왜 뽑기(그 뭐냐 요즘엔 가챠라고 하지)를 하니? 그런 잡동사니를 사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렴. 이라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다. 이는 베트남 전에도 참전하신 진짜 20세기 인간 사범님과 우리 20세기 말의 어린이, 자본주의 악마 졸개들 사이의 차이였는데 우리는 먹을 것보다 재화(아무런 가치가 없더라도)와 도박(가챠는 도박이니까 말이지)에 혼이 나간 말세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말세의 자식을 가졌으면 응당 장난감을 좀 사줘야 했을텐데 부모님은 누나와 나에게 장난감을 그닥 사주지 않았다. 째째하다기 보다 아버지의 월급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쯤 아버지가 집에 가져다 주시는 돈이 80만원이라는 걸 알았는데 한국의 통계청 소비자 물가 지수 화폐가치 계산에 따르면 대략 1990년의 만원은 2020년의 이만육천원이다. 생각해보니 아니 집에 고작 200만원을 가져다 줬단 말인가? 확인해보니 1990년 기준 중위 소득은 92만원인데 명문대를 나와서 당시 모 기업의 이사였던 주제에 겨우 80만원을 받았다는 얘긴데 정말 믿을 수 없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째째해서 나는 장난감이 거의 없었다.
 
대체로 가지고 노는 것은 사촌형의 장난감 중 더 이상 갖고 놀지 않는 것인데 나는 어른들이 꼴보기 싫어할만큼 내 장난감들 - 주로 레고였다 - 에 집착했는데. 가장 즐겨했던 것은 매일 5시쯤부터 공영방송에서 하는 만화를 보고는 그 만화의 내용을 내 장난감들로 재현하고 재창작하는 활동이었다.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때는 공영방송 외에는 제대로 된 채널이 없어서 하루 종일 만화만 틀어주는 채널 같은 건 없어서 아침에 만화를 보려면 잘 기다리다가 AFKN의 TV 방송을 봐야했다. 지금은 아날로그 TV송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 같지만. 그 때는 세서미 스트리트나 각종 일본 애니의 영어 더빙 버젼을 오전에 해줬기 때문에 다음 방송이 뭘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멍하니 AFKN을 봤다. 만약에 마징가 같은 것의 더빙 방송이 나오면 대박이었다!
내가 세서미스트리트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면 외국인들은 가만 듣고 있다가 근데 너는 한국인이잖아?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나도 어릴 때 세서미 스트리트를 봤다고. 내 인생에서 가장 영어를 잘했던 건 4세에서 7세까지 였다고. 집에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혼자 영어로 노래부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녔으니까.
 
어느날 나는 환상특급 (이게 뭔지 궁금하다면 트와일라잇 존을 검색해보면 된다)을 보다가 "악당의 최후"라는 제목을 보고는 어머니에게 가서. 엄마 엄마 최후라는 게 무슨 뜻이야?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스튜어디스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도 꽤 잘 했는데 하루 종일 영어를 물어보는 내게 좀 질려서는 뭘 물어보든지 좀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시기였기에 그 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건 죽었다는 뜻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는데 난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죽기를 바라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결말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왈츠를 추듯이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줬으면 한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그 최후라는 말의 무서움을 떠올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나는 때때로 그렇게 아무도 모를 이유로 우는 경우가 많았어서 누구도 나를 달래주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에게도 내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공업도시라고 해도 주변은 전부 산이었다. 그야 여긴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 바다 근처에서 자란 사람이 자기 어릴 때 얘길 해주면 홀린듯이 듣곤 했는데. 아파트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바로 저수지와 논밭. 그리고 과수원이 있었다. 지금 그 곳은 멋진 이름의 수목원이 되었는데 예전 논밭과 과수원이 있던 시절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온실 같은게 생겼잖아요 라고 말하면 우리 때는 비닐 하우스가 있었다구 라며 엣헴거리고 싶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게 지겨워지면 나가서 놀았는데. 내가 좋아하는건 역시 모래 장난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에서는 동네 놀이터의 바닥재를 교체한다면서 투표를 했는데 분명 우리 동에서는 압도적으로 모래를 밀었으나 결과는 합성수지로 결론이 났다. 모래 장난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들 까먹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못 분해했지만. 생각해보면 모래 장난을 하고 온 아이가 얼마나 더럽고 집에 모래를 잔뜩 흘리는지 까먹은 것은 내 쪽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래 장난을 할 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다름 아닌 비가 온 직후이다! 그 전 까지 함정이나 파고 탑이나 쌓아올리는게 전부였다면 비가 오면 그 꾸정물로 해자를 가득 채우고 강을 만들어 그 위에 다리를 세우는 것도 할 수 있었는데. 어릴때 부터 건축이라면 이상하게 환장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신나는 이벤트라서 비가 그치기만 하면 집을 뛰쳐나가서 거대한 마을을 축조했다. 크고 멋지게 만들면 만들수록 동네 어린이들이 몰려들어서 나의 거대 마을에 고사리손이라도 보태겠다는 뜻을 표하곤 했는데. 나는 관대한 건설자요 시장이었기 때문에 동전 하나 받지 않고 그들의 참여를 허락했다.
 
시간 제한은 항상 5시였다. 집에 가야할 시간이다. 만화가 할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에 가서 손발을 씻고 혼나지 않으려면 세수도 해야했다. 만화를 보면서 모로 누워있으면 누나가 와서 나 이거봐야해 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만화를 틀었고 그것도 보면서 구석에서 누워있으면 어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불렀다.
 
나는 오늘 반찬이 뭔지 묻지 않는다. 아까부터 갈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24년 8월의 글이다.

the Animals -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을 듣는다.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교토국립 박물관>
 
교토역에서 가모 강을 건너 산쥬산겐도를 근처에 있는 이 조용한 박물관은 항상 교토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서점을 좋아하는 이 습벽은 어디 가질 않아서 혼자 여행을 하면 사양하지 않고 한참 시간을 보낸다. 18년도 도쿄에서 여행을 했을 땐 여행 전체를 도쿄의 미술관과 도쿄국립박물관을 돌아다니는데 썼다. 몰라서 못 간 적은 있어도 사양 한 적은 없다니, 도박꾼이 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대단한 것은 아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좋아한다.
 
교토의 미술관들은 기대보단 그리 대단하지 않은데. 일본 미술의 성지 같은 곳이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에 교토에 처음 왔을 때는 미술관들을 주로 찾아다녔는다. 그러다 깨달은게 있다면 뮤지엄이란 뭔가를 모아둔 곳인데 말 그대로 천년의 교도인 교토의 미술과 유물들을 모아두게된다면 아무리 큰 장소로도 부족하다. 굳이 따진다면 교토라는 장소 자체가 거대한 뮤지엄이구나 거기 지하철도 있고 빵집도 있고...너무 무서운데...
그래서 여행 중에 굳이 찾는다면 보통 동선이 이어지는 교세라 미술관이나 교토국립박물관을 찾는다. 물론 마음에 드는 전시가 있는지 찾아보는 건 매번 하고 있다. 이번 여행중에는 무라카미 다카시와 로산진 기획전 정도가 흥미로웠는데 소중한 시간을 할아버지가 주물주물한 무언가를 보면서 보낸다고? 아니 아니 그럴 순 없지.
 
뮤지엄에서 좋아하는 활동 중 하나는 기념품 샵에 들르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추억 삼아서 마그네틱을 수집하고 있는데(우연히도 지금 방금 다시는 안하리라 마음 먹었다) 공항에서 살 수 있는 마그네틱보다 그나마 볼 만한 건 언제나 뮤지엄 기념품샵의 물건들이다. 아무리 전시가 훌륭해도 기념품 샵의 구성이 별로라면 나는 일단 실망하고 보는데. 좋아하는 것은 대표 전시물을 마그네틱으로 만든 것. 그게 아니라면 엽서 뭐 이렇다. 만약에 인형이 있다? 인형이 있다 그럼 최고다. 나는 인형을 모으지 않지만 일단 사고 주변의 아무나에게 준다. 그 대상은 대체로 조카나 친구들인데 예전에 펠메르의 그림을 이미지로 만든 미피 인형은 아직도 조카의 장식장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선물을 한 사람으로서 다시 바랄 수 없는 영광이다.
 
블로그에서 몇 번 박물관에서 봤던 불상의 이야기를 썼던 적이 있다. 그 중에서 '숨'이라는 소제목으로 부동명왕 상과 대일여래상을 봤었던 일을 쓴 적이 있다. 그 정도의 이야기를 쓸만큼 인상적인 전시물은 없었기 때문에 전시물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그 전시는 최근 몇 년 간 교토국박의 가장 성공적인 전시 중 하나로 불리우는 국보전이었다 표를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사실 반년이 지난 지금 전시물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을 할려면 할 수 있는데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장소인 뮤지엄에 대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다니. 너무 일부러 만들어낸 아이러니 같아서 스스로를 좀 비웃게 된다.
 
뮤지엄에서 좋아하는 활동 또 다른 걸 말해보자. 뮤지엄에 딸려있는 카페나 음식점에서 뭘 먹는 것이다. 이 오래된 습성은 혼자 미술관을 다니다가 생겨났는데. 우리나라의 뮤지엄들은 이전에는 카페가 없었던 엄격근엄진지한 곳이라서 그렇지 않았지만(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게 좀 기쁘다) 해외의 뮤지엄들은 작은 카페라도 하나 딸려있는 것이 대부분. 
언제인가 기억도 안나는데 우에노의 미술관을 반나절 만에 돌아야지 하고 마음 먹고 돌던 중 너무 배가 고파서 그 중 하나에 딸린 카페에서 파스타와 샌드위치를 시켜서 먹었는데 가격이 합리적인 것은 물론이고 꽤 맛이 있어서 대만족한 나머지 기회가 있다면 뮤지엄에 딸려있는 장소에서 뭔가를 먹고 있다.
항상 가격이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전시물들을 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가까운 거리에서 달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사실 이번 박물관 방문에서 내가 항상 가던 가게가 없어졌다는 것에(뮤지엄 직원이 알려주었다. 그 분도 정말 쓸쓸한 표정이었다.) 격노했지만 뮤지엄 부지 안에 있는 마에다 커피를 갔더니 이게 웬걸 이 곳 한정 블렌드인 류노스케가 허세스러운 이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맛있고 다른 음식들도 먹을만해서 분노가 사그러들었다. 보통은 밥을 먹고 급히 일어나서 다음 곳으로 가는데 여유가 좋아서 류노스케를 한 잔 더 마시며 혼자 한참을 앉아있었다.
 
"혼자 한참을 앉아있었다.“

<가이유칸>

여러분은 수족관을 좋아하십니까? 이제까지 힘들게 비밀로 해왔지만 저는 동물원과 수족관을 둘 다 좋아합니다.
어느날 아사히카와 동물원에서 불행해 보이는 동물들을 보고 동물원은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가진 않게 되었지만 수족관은 그래도 저항감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고등어나 정어리가 불행한 표정을 지어도 나는 모르니까…아니 농담입니다.
 
그날은 엄청나게 비가 왔다. 애들을 데리고 굳이 저기에 간단 말이지 하고 생각하며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간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혀를 찼는데.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지 않은 것은 먼 미래의 기후조차 예상하는 뛰어난 지혜 덕분이 아니라 그냥 익스프레스 티켓을 여행가기 한달 전에나 예매해야지 하고 생각한(보통 두달 전에 오픈된다) 나의 멍청한 실수 때문이었다. 그 대신 간 곳이 오사카의 가이유칸이었다. 처음부터 가이유칸은 갈 생각이었지만 이왕 가는 김에 좀 더 느긋하게 보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맞겠다.
 
가이유칸에 생긴 지 몇년 안팍의 비교적 최근에 생긴 프로그램으로 보이는 "백야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다. 고래상어 등 대형어류가 전시되어 있는 태평양 수조를 위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투어인데. 정면이나 옆모습을 그냥 볼 수 있는데 굳이? 위에서?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나와 동행은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백야드 투어가 포함된 티켓을 샀다. 애초에 나도 그렇고 동행도 그렇고 "그런 인간"인 것이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면 모를까 시간이 맞다고 하자 고민이 없었다.
 
백야드는 정말로 백야드이다.입장을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입장을 해야하는 곳은 그냥 스탭들이 이용하는 통로로 보여서 여기서 정말로 기다려도 되는걸까 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기다려야 한다. 어색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가 맞을까요 하고 물어보면 확신이 없다는 듯이 아아 그렇겠죠 하는 식으로 대답한다. 애초에 그렇게 경험해본 사람이 많지 않은 서비스인 것이다. 
시간이 되면 스탭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하고 물건을 떨어트리면 되찾을 수가 없으니 모두 로커에 넣어달라고 설명을 해준다. 휴대폰은 당연히 휴대 할 수가 없다. 꽤나 다들 진지해서 동행에게 귓속말로 아이돌 콘서트 티켓이랑 각성제 팔아요, 총이랑 칼도 제시하면 싸게 드려요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 둔다. 나와 동행 말고도 외국인과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이 많다. 
 
백야드는 춥고.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 말소리가 울리는 공간에서 스탭이 마이크로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고래상어와 가오리. 그리고 여러 물고기 들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설명은 그렇게 길지 않다. 너희들은 굳이 여기 들어올만한 녀석들이니까 내 설명 같은건 하나도 필요 없을거야. 하는 태도이다. 그 말이 맞다.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위치를 잡고 물 속의 거대한 짐승들을 내려다본다.
 
고래상어는 일정한 서식지가 없다. 물고기 치고는 아주 느릿한 초속 1.3m/s 정도의 속도로 헤엄치며 사람의 걸음걸이로도 조금 급하게 걸어가면 따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속도이다. (마이크 펠프스의 수영 속도는 시속 9.7km...그러니까 초속 2.7m/s 정도이다. 장하다 펠프스 고래상어를 이겼구나.)
가이유칸의 고래상어는 오키나와에 있는 츄라우미 수족관의 고래상어보다는 작은 크기지만(작다. 왜냐하면 물어봤다.) 두마리 다 좀 더 활발하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원래 집이 없는 생물인 것 처럼 끊임없이 헤엄을 친다. 멀리 가버렸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금세, 그리고 천천히 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고래상어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쥐 가오리, 숏테일 가오리 등 가오리들은 상어의 친척다운 우아한 태도로 헤엄을 친다. 사람들은 대체로 물고기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그들의 표정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표에서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육상 동물이 3차원을 인식하여 살아가는 바다생물보다 뛰어날지 의문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 안에 물고기들이 가득 헤엄치는게 보인다. 나는 수영장에 누군가와 가면 두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첫번째는 어느날 헤엄치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수영을 하다보면 내가 보지 못하는 이 물 밑에 커다란 물고기가 있을까봐 무서워진다는 이야기이다.

백야드의 철책에 기대어 서서 나는 이거야 말로 내가 무서워 하는, 바닥을 보지 못하는 물 밑의 커다란 물고기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백야드에서의 체류시간은 짧다. 20분 정도이다. 물고기에 환장한 녀석들과 아이들의 시간이 끝나고 나와 동행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물고기를 구경한다. 나는 나가기 전 동행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대관람차>

오사카에는 유명한 대관람차가 세 개나 있다. 요즘 유명해진 도심 속의 헵파이브. 바다 가까이에 있는 린쿠노호시. 그리고 가이유칸에 과하게 가깝게 있는 텐포잔의 대관람차이다. 잊어버리고 말을 안 했지만 나는 관람차도 무서워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가이유칸에 간 날엔 비가 내렸다. 동행은 대관람차를 타고 싶어했다. 물론 동행은 내가 대관람차를 무서워한다는 걸 잘 알 고 있었다. 다만 동행이 나에게 뭔가를 하자고 말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비바람이 부는 슈퍼 악조건에서도 관람차를 타기로 하고. 쪼잔하고 집요하게 그럼 탑승료는 네가 내라고 투덜거렸다.

내가 애초에 탈 것 전반에 약한 것은 사실이다. 20대 후반 쯤 친구들과 이유없이 놀이공원에 가서. 이유없이 후룸라이드-바이킹-롤러코스터를 연속으로 타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어어 나는 괜찮아 어서 다음 탈 것으로 가자고오오 하고 가다가 속이 메스꺼워져서는 토하기 직전이 되어 벤치에 누워버린 적이 있었다. 생리적인 영역에서 일단 멀미에 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리적인 부분을 뛰어넘어 관람차 그리고 그와 비슷한 케이블카는 정말로 타는 것을 무서워한다. 나는 내가 왜 관람차를 무서워하는지 정확하게 알 고 있다.

동행은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겁쟁이 주제에 탈 것은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곤란해하는걸 보는게 좋은 것 같다. 심지어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는 대관림차(하느님 맙소사 일본인들아 천벌이 내릴 것이다.)가 타고 싶은지 그 쪽을 지긋이 보길래 사정을 하며 일반 관람차 쪽을 타자고 했다. 아니 제안했다. 아니 솔직히 빌었다. 부탁드렸다.

저승 아니 천포산의 대관람차는 기다리는 사람도 적었다. 애초에 비바람이 부는 날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관람차에 올라타니 천천히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고 저 멀리 도심과 바다 모두가 보였다. 나는 스스로가 충분히 위엄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이 들자. 동행에게 내가 덜덜 떨거나 바닥에 쓰러져 훌쩍훌쩍 울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어서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자. 바람이 또 엄청나게 불었고 관람차의 창에는 비가 부딪혀서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대관람차를 무서워하게 된 것은 처음에 고베에 갔을 때 하버랜드의 대관람차를 탔기 때문이다. 그 때는 겨울이었는데 도대체 몇년 전인지도 바로 숫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옛날이다. 길고 지겨운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얘기하자면 하버랜드의 대관람차 안에서 당시의 동행이자 여자친구였던 사람이 이제 그만 만나자는 얘기를 했다.

왜 거기였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떴다는거야 당연히 알았다 그러나 이 타이밍에? 그것도 관람차 안에서?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거꾸로 알았다는 말을 해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갔던게 료안지였던 것 같다. 그래 이야기가 그렇게 이어진다. 2년…아니 3년이었던가. 하여간 그 후로 몇 년을 더 만났다. 싸우고 헤어진 것도 여러번. 다시 만난 것도 여러번.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차였다. 내 생일 바로 전 주의 일이었고 그 뒤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관람차를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무슨 90년대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얘기라고 나도 생각한다. 케이블카도 관람차와 비슷해서 그런지 무서워한다.

그리고 (놀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정말로 무서워하는게 관람차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정말로 무서워 한 것은 관계가 끝나는 것이다. 나는 그걸 혼자서 케이블카에 타면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천포산의 관람차에서 동행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한 것이다. 당신을 잃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더 이상 뭔가를 쓰기에는 너무 지쳤다. 요즘 나는 하루에 2시간 이상 자는 날이 드물고 오즈의 나라 용감한 허수아비처럼 마르고있다. 아니 심장이 없는 허수아비인가. 그래 그게 맞겠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직도 다 못했음을 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정말로 갖고 싶어한 것은 헤어질 걱정을 하지 않고 앞으로의 일을 함께 얘기 할 수 있는 사람 - 가족 - 이라는거 라든가. 관계란 결국 서로가 가진 마음의 병을 나누어 갖는 거라는 거라든가.
무엇보다 내가 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 마지막으로 방문한지 7년 만에 다시 교토에 오게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얘기들을 해야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동네 대장 고양이가 죽었을 때와 같다 혼자가 된 나는 그 누구에게도 고양이가 죽은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다. 우리는 이야기로만 스스로를 이해 할 수 있고 이야기-개인서사를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정의마저 바꾸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이야기를 바꿔 당신이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존재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만든다고 해도 그걸로 내가 정말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나에게 스며든 당신을 그대로 그림자로 만드는게 옳은 결정이기는 할까?

나는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바싹 말라버렸고 어떤 소원도 빌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입을 다물고 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옳은 일이길 바란다.


24년 8월의 글이다.


 
지난 주, 친구 한 명을 묻었다. 비유적인 표현이다. 나는 지폐 몇 장을 내고 절을 두번했다. 자리에 앉아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쓸어넣고는 딱 30분을 맞춰 앉아있었다. 프로필 사진이 너무 별로다. 라고 굳이 입 밖에 내어 말하고 15분을 밖에서 기다려 마을버스를 탔다. 그제서야 그가 내 친구였다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항상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토요일. 개의 날의 한가운데. 해가 너무 뜨거워 머리 끝까지 뜨거워지고 머리카락을 남겨두는 방향으로 진화해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다. 커피라도 사지 않으면 주말 내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가는 김에 맥모닝도 사오기로 했다. 왕복 30분 쯤 걸려서 사온 것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나갈 때 사오기로 생각한 맥모닝과 커피(아니 거짓말이다 아샷추를 샀다. 아무래도 커피를 사왔다고 하는 편이 하드보일드해보이지만 실제로 산 것은 아샷추이다.)만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큰 길을 따라 우리집 쪽으로 걸어올라오다 보면 나무들이 듬성이 자라나 있는 언덕이 보인다. 지렁이와 쥐와 가끔 비둘기 날개나 까치 새끼 시체 같은것 까지 가끔 보이기 때문에 나는 그 언덕을 그렇게 집중해서 살피지 않는 편인데. 젖소무늬 동네 대장 고양이 - 커다란 녀석이다-가 오랜만에 보였다. 너무 편한 자세로 낮잠을 자는 것 같길래 너무 더워서 그런가 싶어서 물이라도 갖다 줄까 하고 유심히 지켜보는데. 파리가 붙어있는게 보였다.
 
맥모닝을 집에 모셔다 놓고. 경비실에 가서 삽을 빌렸다. 삼각삽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눈이나 치울 때 쓰는 사각삽 밖에 없었다. 네에 고양이가 죽어 있어서요 여름이고 그래서 일단 묻어주려고요. 네. 잘 쓰고 갖다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의점으로 가서 1.5리터짜리 생수를 한 병 샀다. 목이 말랐을테니까 지금이라도 물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니까 물을 땅에 뿌려서 땅을 파기 쉽게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부드럽지도 않은 흩날리지도 않는 적토 언덕이라 사각삽으로는 도저히 구덩이가 파지지 않았다. 생수를 반쯤 뿌려서 땅을 적시고 다시 땅을 팠다. 두 병 살 걸. 그거 별로 비싸지도 않은데. 하고 고양이를 뒤에 두고 땅을 파고 있노라니 말도 안되게 땀이 솟았다. 마지막으로 땅을 판게 언제지. 터무니 없는 이유로 교수를 죽인 일도 없어서 진짜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땅을 파는 방법은 금방 기억났다. 그냥 자고 있는거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주기적으로 했다. 땅을 파는게 너무 싫어서이다.
 
이십분을 파내려가도 저 커다란 대장 고양이를 묻을만큼은 되지 않았다. 이 정도 속도로는 60분이 지나야 겨우 한마리 넣겠어. 근데 그 정도가 되면 날 넣을 구덩이도 하나 더 필요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구덩이를 물끄러미 보는데 물을 뿌리고 땅을 파서 그런지 지렁이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뭐야 진짜 싶어서 하나하나 지렁이를 떼어내서 주변으로 옮기고 땅을 파는데 한도 끝도 없었다. 거짓말 같았다. 일단 현재 온도 32도라면서 내 느낌상 기온이 38도는 될 것 같았다. 땀이 너무 많이 흘렀다.
 
하는 수 없이 (변명이다. 사실 40분만 더 팠으면 될 것이 아닌가) 고양이 위에 파낸 흙들을 덮었다. 풀들도 가져다가 그 위에 덮었다. 뜻하지 않게 훌륭한 고양이 무덤처럼 보였다. 남은 생수를 무덤 위에 뿌리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고양이가 알아들을만한 기도문은 몰라서 편히 쉬어라. 라고 했다. 처음엔 땀이 너무 많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누가 흘린지도 모를 눈물이었다.
 
몇 년 전 이 동네에 처음 왔을 때 부터 이 고양이가 이 동네의 대장 고양이였다. 가끔식 발견되는 비둘기 날개죽지 같은 것도 이 녀석 짓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덩치가 크지만 점잖아서 사람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 한 번 들려주지 않는 그런 고양이였다. 미안하다고 할 걸 그랬다. 편히 쉬어라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삽을 경비실에 돌려놓고 집에 올라가는 동안 계속 바보처럼 울었다. 누군가에게 우리 동네 대장 고양이가 죽었어 너무 슬퍼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고양이가 얼마나 커다랬는지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했기에 나는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적당한 기도문을 알아두었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집에 돌아와 울며 불며 맥모닝을 먹고 구청 당직실에 전화를 해서 죽은 고양이가 배전반 옆 흙무더기 안에 묻혀있다는 걸 신고했다. 여름의 비를 견뎌낼 정도로 내가 만든 작은 무덤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지 않기 때문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위생 문제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요. 네 배전반 옆이요 네 지도 좀 열어서 봐주시겠어요 네 샛길요 네. 제 연락처 괜찮습니다. 토요일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
며칠이 지났다. 오늘 성모 호칭 기도 Litany of loreta를 검색했다. 한줄 한줄 읽다보니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걸 참을수가 없어서 나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개처럼 울었다. 아래는 기도문의 일부이다.
 
샛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병자의 나음,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죄인의 피신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근심하는 이의 위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신자들의 도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여러분, 고양이와 저의 친구를 위하여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24년 8월의 글이다.

 
나는 설명을 잘 못하는 편이다. 어떤 일의 원인1부터 결과인 5까지 12345의 논리적 흐름을 통해 도달해야한다면 나는 주로 5만 말한다. 기껏해야 145정도이다. 12345를 전부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걸 업무 메일 같은 곳에 써야한다? 정말 최악이다. 12345를 전부 쓰는 메일을 작성하려면 한 30분 동안, 아니 3시간 정도 싫음과 고통에 몸부림 쳐야한다.
 
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버릇이 아니란 걸 알고 있는데 모든 걸 뛰어넘고 5만 얘기하다 보니 어떤 친구들은 (비난의 뉘앙스를 담아서) 예언이라도 하느냐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아 고민하고 싶지 않다 설명하고 싶지 않다. 설명 혹은 변명을 하는 것은 멋지지 않다. 간지가 나지 않는다. 혼자서만 아는 수십가지 의미를 넣어서 음습하게 넣어서 글을 쓰고 설명은 하지 않고 뭔가 남 모를 걸 알고 있다는 듯 한 잘난척 하는 자세로 자신감에 차서 행동하고 싶다.
 
가끔 12345를 전부 설명해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딱히 이유가 없고 순전히 변덕에 의해서이다. 얼마 전에는 회사의 후배가 선배는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일을 하는데 하루 종일 배고프지 않으세요? 라고 질문했다. 실제로 나는 자주 배가 고픈터라 이게 나보고 뚱뚱보라고 놀리는 건지 잘 구분이 들지 않아서 어어 그 정도는 아닙니다 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벌컥 화를 냈어야 옳다.
 
얼마 전 동네를 찾아온 친구와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러면 안됩니다 어린이 여러분들도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 해야할 얘기가 떨어져서 순수한 변덕으로 12345를 얘기할 일이 있었는데. 얘기를 다 들은 친구는 그렇게 슬픈 생각을 하며 살 필요는 없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변덕으로 이 블로그나, 나에 대해서 아무 생각나는 것들.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은 것들을 설명하려고 한다.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이 블로그의 글 중에서 제목이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은 그 글을 쓸 당시 내가 자주 들었던 곡 중 하나의 제목이다. 
 
2. 이 블로그는 내가 개설한 블로그 중에서 여섯?번째 정도? 된다. 싸이월드에 적었던 글 중에서 여행기만 따로 모아서 올리는 블로그였는데. 다른 블로그들은 모두 폐쇄하고 이제 이 블로그 밖에 남지 않았다. 내 다른 블로그에서 내 글을 봤던 사람이 이 블로그에 찾아와서 혹시 ㅇㅇ님이 아니신가요? 라고 물어보는걸 인생 내내 두려워했는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서 오히려 서운한 상황이다.
 
3. 다른 블로그 중 가장 좋아한 블로그는 텀블러였는데. 다른 언어로 동화 비슷한 괴담을 올리는(인기는 없었다) 곳을 제일 좋아했다. 하지만 내 모든 블로그 중에서 제일 인기가 없는 곳은 바로 여기 티스토리이다.
 
4. 티스토리의 모든 글들이 마지막에 ㅇㅇ년ㅇㅇ월의 글이다. 라고 끝나는 이유는 그게 내 여행기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블로그에서는 거기에 맞는 또 나만의 법칙의 글들을 써댔다. 대부분 삭제되어서 일부는 출력물 형태로 남아있고 일부는 txt로 남아있다. 그걸 복구 하려면 전에 쓰던 데스크탑을 살려야한다. 내 주제에 굉장히 아름다운 글도 몇 개 썼지만 살리는 것은 너무 귀찮은 일이다.
 
5. 다른 블로그를 모두 없앤 이유는. 크게 상심할 일이 있어서 나 자신의 일부를 상실함으로서 그 상심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6. 최근에 스마트폰 비밀번호를 299792로 바꾼 이유는 광속의 속도가 299,792,458m/s이기 때문이다. 광속으로 한 이유는 여기서 말하고 싶지 않다. 
 
7. 나는 자주 이런 물리법칙 상 유명한 숫자들로 비밀번호를 해두는데. 꽤 오랫동안 980665로 해둔 적도 있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중력 가속도 (9.80665 m / s2)의 숫자이다. 여기에 지금 비밀번호를 썼기 때문에 또 비밀번호를 바꿀 생각이다. 여러분은 모두 나를 실제로 볼 일이 없지만. 그래도 뭐.
 
이런 물리법칙이나 수학 상의 유명한 숫자들을 비밀번호로 해두는 이유는 예전에 (전에 사귄) 여자친구의 전화번호로 비밀번호를 해두고는 까먹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마셔서였긴 했는데 진짜로 생각이 안나서 2시간 정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980665를 또 까먹을 일이 있을수도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죄송한데 지구의 중력 가속도 좀 검색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라고 해서 집에 들어갈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넌 어느 별에서 왔느냐 첩자 녀석 하고 광선총을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지금까지 그럴 일은 없었다)
 
8. 나는 이렇게 여러가지 숫자로 비밀번호를 해두는데. 지금 집 비밀번호는 예전에 살았던 집의 번지수이다. 다음 집으로 이사 가면 지금 집의 번지수로 바꿀까 생각 중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기억하기 좋기 때문이라기 보다 나의 족적을 잊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네에서는 6년이나 살았고 이사를 가야한다고 느끼고 있다.
 
9. 대학시절 맘에 안 드는 남학생에 대해서 누가 평을 물어보면 못생겨서 싫어한다. 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실은 굉장히 종합적으로 그 사람이 맘에 안 드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12345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못생겨서 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곤 했다. 
 
예전에 후배J가 후배C를 좋아하는걸 알고 있었는데. C가 어느날 J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C는 이상할 정도로 나를 정신적으로 의지 했는데 J가 C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서 차마 혹평을 하지 못하고 애매한 평 - 어어 나쁜애 아냐-을 하고 말았다. 결국 J와 C는 2,3년 정도 사귀게 되었는데 C가 그 후 왜 그랬냐고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몇년이나 사귀었다고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혹평해야할 때는 사양않고 해야한다는 삐뚤어진 교훈을 얻게 되었다.
 
10. 친구L과 연락을 하지 않게 된 건 몇년 전 나의 연애 때문이었다. L은 상황도 이해하고 네 생각도 이해하지만 그런 연애는 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이 연애를 시작하면 다시는 널 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언했고. 우리는 그 뒤로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 때는 아니 내가 뭐 만나면 안되는 사람 만나냐 하고 자못 분해했지만. L이 그냥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관계가 망가진 건 전적으로 나의 탓이었다.
 
11. 나는 사실 타고난 동생으로 어리광부리는 걸 엄청 좋아하는데. 사회적 지위도 있고 외관 상 어울리지도 않아서 항상 꾹 참으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보이는 차가운 모습이나 짜증나 보이는 모습 중 일부는 어리광을 부리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징그럽게 느껴지겠지만 어쩌겠는가.
 
12. 내가 카레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에게 카레를 만들어준 사람은 모두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있다.
 
13. 내가 그 대학의 그 과를 간 이유는. 외할아버지 댁이 그 대학교 후문에 있었기 때문이고 그 분이 문학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반수를 해서 모 대학 법대를 갈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반수 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말하고 다녔었지만 수능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다. 억울하게도 여름에 알바 하다가 날짜를 헷깔려서였는데.
 
14. 내가 말린 무화과를 먹을 때는 대체로 아버지가 보고싶어질때다. 이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아 왜 말린 무화과냐면 아버지는 석류랑 무화과를 좋아한다. 취향도 이상하지. (향수 필로시코스랑은 관련없다 진짜 징그러운 발상이로군)
나는 아버지 얘기를 좀처럼 안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나와 닮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근본적으로 증오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아버지를 머릿속에서 최대한 지우고 싶어하긴 한다.
 
15. 나는 어릴 때 부터 감정이 남들보다 흐릿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거의 없었고 동물이라도 된 것 처럼 대체로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거의 없어서 친누나는 대학생이 되도록 아무도(심지어 연예인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 쯤 나도 스스로의 이상함을 느껴서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때 친구가 타이른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요지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누군가를 잘해주고 싶고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진다면 그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라는 말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착하고 예쁜 여대생이나 할 법한 얘기긴 했다. (진짜 친한 친구이다)
 
나는 그 뒤로 몇년이 지나도록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게 뭔지 제대로 이해를 못했는데. 서른 살도 넘어서 어느날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좋아한다는게 뭔지 깨달았다.
 
예쁜 사람을 좋아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래 전 내가 술자리에서 찍은 완전히 흔들리고 촛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후배 한 명의 사진을 보고는 스스로가 가진 애정의 깊이를 한 번도 이해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몇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는데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을 매일 했다. 머리가 이상해지고 그 아이가 했던 이야기 마저 어느 쪽이 진짜였을까 하고 의심이 들만큼 오래되서야 이것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었더랬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 뒤로 나는 가끔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서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해한다. 기묘한 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방식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을 사귀기 전에 그 사람이 관광지에서 사진사를 고용해 찍은 사진을 여러장 보여주며 어떤 사진이 마음에 들어?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가 맘에 든다고 고른 사진들은 하나 같이 얼굴색이나 턱 같은 것들이 보정이 되지 않은 사진들이었는데. 그 사람은 좀 질렸다는 듯이 너 나 진짜로 좋아하는구나. 라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16. 평소에 설명하지 않았던 것을 설명하고 있노라니 스스로가 두배는 멍청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난 평소에 진짜의 두배 정도로 스스로를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하는 행동의 이유들이란 이렇게 정말 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구 빌어먹을
 
 
24년 7월 30일의 글이다.
 

어제 새벽 4시, 아니 새벽 5시쯤 자기 시작해서 8시에 일어났다. 별로 하고 싶은게 없어서 책을 정리 하다가 이제 갈 일이 없어진 여행 예약을 취소 하고는 8월 말 까지 무료 취소인 이 예약은 그 때 가서 취소 할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가 더 바보 같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지금 쓰는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12시가 될 때 까지 책을 읽고 있다가 오늘은 만물이 생동하는 주말이니까 분리 수거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꾸러미에 플라스틱 병과 콜라 캔을 잔뜩 넣고 분리 수거장으로 내려갔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니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 쪽 구석에 보라색티에 마스크로 입을 가린 말라깽이 아이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엘레베이터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굉장히 놀라고 동요하여 서로 눈이 마주친 말라깽이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인사를 하는 것도 못 본 척 하고 밖으로 나가 천천히 분리 수거를 했다. 초등학생? 중학생 정도 되었으려나. 주눅이 든 아이 특유의 표정에 얼굴은 어둡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분리수거장은 그늘 아래에 있었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항상 쓰레기통 주변에서 서성이는 까치도 나무 위 그늘 안 보이는 곳에서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가지 위에 앉아있었다. 나무 그늘 벗어난 곳의 아스팔트는 지옥처럼 뜨거웠다. 바로 오늘의 일이니까 감히 현재형을 써서 말할 수 있다. 숨을 쉬기가 싫을 정도로 덥다.
 
돌아오는 길에 본 말라깽이 아이는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누군가와 통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워서 탈진 하고 있는 아이 특유의 나른해진 표정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목이 마른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쉽게 눈치 챈다. 여자친구들이 대체로 바싹 말라 물도 안 마시는 사람들이었던 탓이 크다.
집에 올라와 화장실에서 보니 아랫 잇몸 중 하나에 피가 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놀라서 입술을 깨물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피는 검고 멍울져있었다.
 
해야할 빨래가 있고. 집안일이 있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아직도 있다. 이걸 다 치우는데는 얼마나 걸리려나 빽다방에 가서 아샷추라도 사와야지 싶었다. 지갑을 가지고 나가는 길에 냉장고의 펩시제로 한 캔을 꺼내 가지고 나갔다. 아이가 있으면 줘야지 목이 말라보였으니까. 아이가 없으면 그걸로 다행이다 쿨팩이라고 생각하고 목 뒤에 대고 카페에 가야지.
 
저기요, 하고 캔을 내밀자 아이는 아주 순순히 캔을 받았다. 말도 안되게 더운데 이미 한 시간 이상 앉아있었던 것 같다. 너무 더울텐데 이거라도 드세요. 하고 말했다. 아이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목이 갈라져서 제대로 말을 못하고 겨우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아파트 통로인데도 후덥지근하다.
 
나는 걸어서 10분, 15분 정도 되는 카페까지 걸어가며 생각한다. 내가 돌아갈 때도 아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하지. 스마트폰 배터리는 있는 것 같은데 부모가 어디 멀리에서 오고 있는건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하는데. 어디에서 봤더라. 콜라에 카페인이 들어있는데 초등학생이면 마시면 안되는거 아닌가. 
아샷추를 샀다. 그것도 큰 사이즈로. 그리고 그걸 들고 평소의 반도 안되는 속도로 느릿하게 걸어간다. 아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하지. 곧 1시가 되고 2시가 되면 더 더워질텐데 어떻게 하지.
 
언덕 등성이를 올라가는 나무 계단에서 나는 속으로 애타게 기도한다. 제발 다른데로 가게 해주세요. 걔가 기다리는게 누구이든 이 더운 날에 걔를 그만 기다리게 하게 해주세요.
 
계단에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니 다행히 콜라는 마시기로 한 것 같았다.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보니 가끔 동네에서 보이던 중학생인 것을 알았다. 우리 동은 아니다. 우리 동 같은 라인에 친구가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이면 항상 아파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 전혀 눈치채지도 못했고 그냥 말라깽이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저기, 12시부터 앉아계시지 않았나요? 더운거 괜찮으세요? 아이는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좀 두서없이 대답한다. 아 친구가 1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자고 있었데여 지금 일어났다고 해서 2시에 만나기로 했어여. 아이는 얼굴에 난 여드름을 가리는 버릇이 있는지 얼굴을 가리며 웃는다. 아 친구라는게 그 못생긴 남자 아이 얘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네. 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요리를 하려고 아샷추를 한 모금 마시고 손을 씻다가 마음을 바꿔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하나 꺼내 1층으로 내려가서 아이에게 주었다. 콜라 하나 마시는 정도로 열기가 가셨을리가 없을거고.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흔히 그러듯이 배려 하나 없이 더 기다리게 할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그 뭐냐. 친구가 2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면 그냥 집으로 가세요. 아이는 문자로 따지면 ㅎㅎㅎ정도 될 듯한 웃음 소리를 내며 차가운 탄산수를 받았다. 다시 엘베를 타려고 올라가는데 소리가 너무 크게 나지 않게 조심히 잡아서 탄산수 뚜껑을 여는 소리가 났다.
지금은 고기를 재워두고. 빨래가 돌아가길 기다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은 글을 쓰는 사이 2시 20분 쯤 되었고 지금쯤 말라깽이 아이는 다른 말라깽이 친구를 만나서 원래 하려던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왜 아까 그렇게 놀랐냐고 하면.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흘낏 그 아이를 보는데 내 아이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나는 결혼을 한 적도 없고, 딸이든 아들이든 자식이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나는 그 새처럼 마른 아이를 잘못 보고 깜짝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잇몸에 고여있는 피를 닦아내자 입술에서 난 피가 다시 이빨에 맺혔다.
 
이상하지 애초에 나한테 아이가 있지도 않았는데 왜 입술을 이렇게 아프게 깨문거지. 하고 또 다시 생각한다.
 
 
2024년 7월 28일 너무 더워서 정신이 이상해버릴 것 같은 날에 쓴 글이다.

 
당신이 바다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 하는게 나을 것 같네요.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결정론자입니다. 운명론자라고 하는 편이 낫겠네요. 왜냐하면 저는 아주 유치하고 자기 위주인 방식으로 운명론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자신이 운명론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주 어릴 때였습니다. 기도를 하면 누군가가 저에게 맘에 드는 장난감을 사줄거라고 믿을 때였으니까요. 저는 어린만큼 사물을 그렇게 주의깊게 보지 않았고 생각을 여러 번 하지도 않았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쉽게 바뀌나요.) 그 나이 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어 여러가지를 세상과 어른들에게 기대하곤 했는데 그만큼 간절했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어쩌구 로봇 자동차를 받게 해주세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해하게 해주세요, 오늘은 맞지 않게 해주세요, 어른들이 저에게 친절하게 해주세요 같은 것들 말입니다. 바라는 것이 많은 만큼 실망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실망했던 날. 혼자 흙투성이가 되어서 놀이터에 앉아서 울던 날. 저는 제가 바랐기 때문에 그 일들이 일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것들을 기대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머릿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 어떤 훌륭하고 강력한 존재가 그걸 엿듣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버린다고. 누구에게도 그런 생각을 말할 순 없었지만 어린 저는 한동안 그 생각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심부름을 할 때 계산대 앞에 서서 돈 계산을 겨우 겨우 할 정도의 나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피했습니다. 작은 행운이라도 있길 기대하면서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생각을 다짐처럼 계속했습니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무엇일까요? 핏줄이라든가 태어날 때의 별의 위치라든가. 하여튼 그런 것 일까요? 스무살이 좀 지나서 저는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라고.

그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누군가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거나. 우리의 노력이나 성품이 곧 운명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저는 아주 오랫 동안 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우리의 운명이 곧 우리 자신이라는 저의 말이 맞다면. 저는 제 운명을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있었던 셈이겠습니다.
 
당신은 어떠셨습니까? 운명을 믿으시나요? 아니면 별로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사람들은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고 주변에 사람들이 친절해서 무슨 일이든 잘 풀린다고 말하더라고요. 또 어떤 사람은 자기에겐 행복 같은 게 사치이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선 안된다는 사람도 있었고요. 어느 쪽이든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나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간에.
 
가끔, 운명 같은게 어디있어? 운명은 내 스스로 개척하는거지 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틀렸다는 얘길 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그냥,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가끔 불안해 질 때가 있지 않나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 보다는 누구든 거대한 손이 당신을 조종하여 앞으로 당신에게 닥칠 불행을 피하게 해주고 앞으로 가게 하고 있다고 믿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하지 않나요?
운명의 진실이 어떻든 간에 삶은 여간 잔혹한게 아니고 그걸 받아들이며 계속 살아가기란 쉽지 않잖습니까.
 
저에게 일어났던 운명론적 이상한 일들을 몇 개 더 말해볼까요? 저는 이상하게 말입니다. 연애를 하던 도중에 이성과 단 둘이서 술을 마시게 되면 1,2주 내로 스마트폰이 박살나곤 했습니다. 처음엔 친구들과 하던 그냥 농담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진짜로 그렇게 되어서 휴대폰을 소중히 다루게 되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한 네 번 정도 연속으로 (그들끼리)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는 농담이었는데 두 번 정도 연속으로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던 이후로 세번째 상대에게 혹시 고등학교 ㅇㅇ인가요? 라고 물어보고 난 뒤로는 농담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저희 동네 고등학교냐고요? 아뇨 전혀 아니었어요.
 
저는 그래서 그런 묘한 징크스를 깨주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당신은 저의 징크스를 깨주었어요!”라고 고백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 무슨 로맨틱 코미디 같은 상황이래요)
항상 여자친구 혈액형은 B형이었던 저한테(네 진짜 이해 할 수 없죠?) 어느날 데이트 상대가 저는 AB형인데 왜 그런걸 물어보는거죠? 장기라도 빼가려고 그러시나요 라고 말 할 때 저는 정말 진심으로 활짝 웃었답니다. 당신 장기는 필요 없어요 저는 A형이거든요. AB형은 A형한테 수혈도 못한다니까.
 
그 외에도 저는 온갖 징크스와 운명론에 대한 이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제 약점이니까.

사실 위에서 얘기한 것들은 모두 이미 깨져버린 운명들이랍니다. 말하고 보니 판타지 소설 같고 멋있네요. 저는 AB형 여자친구도 있었고 O형 여자친구도 있었습니다. 진짜 많이 좋아했어요.
스마트폰이 깨지는 건 지겨워서 연애를 하던 도중에 이성과 단 둘이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건 뭐라고 말하기 그렇네요. 근데 아시잖아요 액정 수리비는 정말 비싸답니다. 테스트해보고 싶지 않아요.
 
제 첫번째 운명론적 이론은 깨졌냐고요? 그 뭐라고 해야하나. 요즘에도 자주 생각하긴 해요. 기도 같은 거죠. 제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들을 상상하고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대응하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건설적인 것 같죠?

하지만 이제까지 몇 번 제가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들을 생각하고, 또 그게 이루어지는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진짜 운명에 얻어맞은 것처럼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머릿 속으로 나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는 것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릿 속으로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를 행복한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아시잖아요. 저는 정말 오래된 탑처럼 먼지가 되어 무너지고 말겁니다.
 
얼마 전 저는 혼자 땡볕 아래 공원에 앉아서 아무 생각도 안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말 말도 못하는 시간낭비를 한 셈이었죠. 그것도 섭씨 32도가 넘어가는 폭염 아래에서 말이죠. 그러다가 문득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생각이 미쳤는데.

뭐냐면. 대학교 시절 아직 신촌에 멀티 플렉스가 아닌 극장이 있던 시절에 친구들과 2:2로 데이트를 했던적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진짜 재미로, 순전히 재미로 극장 안에 있던 사주팔자 머신(하하 진짜 20세기 같은 이름이다)에 각각 몇천원씩 넣고 사주 팔자를 보았는데. 다른 친구들은 다 멀쩡하고 평범한(두뇌가 뛰어나고, 관운이 있으며...외모가 뛰어나 결혼운이 있으며...어쩌고) 사주가 나왔는데 이상하게 저만 아주 이상한 사주가 나왔는데 거기 뭐라고 써있었냐면.
 
"많은 사람을 구하나, 스스로를 구하진 못한다."- 라고 써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엄청 어색해져서 잡담을 하다가 그냥 영화를 보러 들어갔는데. 무슨 영화를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이상한 문구만 기억나지.
 
그리고 웃기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 군대에 갔을 때 전산실의 친한 선임에게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얘기해줬더니. 얘기를 심각하게 듣고는 잠깐만 기다려봐 그러고는 사주팔자 프로그램(아니 뭐야 그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며 한 번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딱히 안 할 이유는 없었어서 해보았는데 전에 극장에서 했었던 사주랑 전체적으로 하나도 맞는 것은 없었는데. 끄트머리에 비슷한 문장이 있더라고요.
 
"사람들을 외로움에서 구하나, 스스로를 구하진 못한다."
 
선임에겐 별 말 하지 않고. 아 지난번이랑 하나도 안 똑같네요. 하고 웃었습니다.
 
그 뒤로도 사주는 꽤 보았습니다 재미있으니까 장난으로 사주를 본 적도 있고. 전문 역술인에게 돈을 내고 본 적도 있고요. 저는 물을 타고난 사주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제가 전 여자친구와 결혼했다면 멀지 않아 죽었을거라고 하더하고요. 박수를 치며 웃었습니다.
사주 팔자 머신으로 운세를 본 뒤, 그 뒤로 몇년 동안. 아니 십 몇년 동안 저 문구가 생각납니다. 가끔 무슨 문구인지 생각을 해보는 때도 있습니다. 말도 못하는 시간 낭비이죠. 이젠 정말로 저 문구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니까.

그런데 말한 것 처럼 저는 운명론자, 그것도 대단히 어리광쟁이인 운명론자입니다 당신도 익히 알다시피요.

그래서 제 유일한 친구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서, 아니 그렇게까지 오래 시간이 지날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어느날 당신이 바다에 다다르게 되면. 검고 먼 잿빛의 바다와 바다를 따라 끝이 없는 백사장 사이 어딘가에
혼자 앉아있을 저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때 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라면 저를 알아 볼 수 있을테니 잠시만 제 옆에 같이 앉아주세요. 그리고 제 어깨를 두드리고 눈을 바라보며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아무리 먼 훗날이 지나도 제가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도록.

그것이 저의 부탁입니다.
 
24년 7월 25일의 글이다.

죽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냥 가장 바라는 세계에 다가가는 문제에 관해서예요.
- 코맥 매카시(2023), 스텔라 마리스. p327
 
오늘 퇴근하는 길에 사람들이 몰려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쪽을 보니 기가 막힌 토끼 구름이 떠있었다. 여름이었고 비가 그친 후 무더위가 시작하기 전이라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흰 색이었다. 분명 해가 질 때 쯤이면 더욱 멋진 하늘이 되겠지. 색은 보라색에 천국을 암시하는 듯한 형태의 멋진 뭉게구름.
 
나는 그 사람들과 오래 같이 있지 않았다. 그들이 감탄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방금 찍은 멋진 사진을 보내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나는 사진을 찍어도 보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웠던 탓이다. 걸음을 재빨리 해 커다란 회사 공터를 가로지르다가 그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깨달았는데.

애초에 나는 이 몇 년간 이런 사진을 보내도 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머릿 속의 무언가가 잘못되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완전히 혼자였다는 것을 아무런 계기도 없이 알아채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로 급하게 게이트를 넘어 집으로 도망갔다.
 

작년 여름, 작가 하나가 죽었다. 아주 유명한 작가이다. 나는 그의 죽음을 제 때에 애도하지 않았지만 세상 중에 만명 정도는 그의 죽음을 제 때에 애도했을 것이다. 아니지 이만명 정도로 하자. 아니 오만명 정도로 할까?
 
이렇게 말하면 안되겠지만 작가는 죽음으로서만 온전한 평가가 시작된다. 살아있을 때는 그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도 있지만. 작가가 너무 유명해지면 무엇보다 "너무 유명해서 싫어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물론 세상에 몇 안되는 독서인구 중에 "너무 유명해서 싫어하는"사람들의 비중이 몇이나 되겠어 라고 얕볼 수야 있지만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런 세상에서 굳이 책을 읽고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제정신인 녀석은 별로 없다. 감히 말하건데 독서인구라는 녀석들은 기본적으로 "너무 유명하면 싫어"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 내기를 해도 좋다.

하지만 작가가 죽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갑자기 사람들은 자비로워져서 그가 현대 문학에 미쳤던 커다란 영향 같은 것을 앞다투어 얘기하고 흑백사진에 생몰을 적어서 올리기도 한다. 물론 너무 살아있는 전설이라는데 책이나 읽어볼까 같은 기특한 생각을 해주는 사람도 줄어들긴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죽어야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의 유명세는 기묘한게, 그의 몇 편의 영화와 그 영화의 명성을 완전히 갉아먹을 정도로 형편없는 시나리오 작업에서도 나타났다. 애초에 문장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희곡을 써도 그의 문장을 제대로 표현 할 수가 없어서 결과물이 형편없어진다고 해야할까.

예를 들어 내가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희곡 하나는 더 이상의 캐스팅은 없을 사무엘 존슨과 토미 리 존스의 연기로 영화화 되었는데 아무리 한국어로 읽었다지만 이게 같은 작품이 맞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잠들고 말았다. 중간에 잠이 들 정도로 길지도 않았는데 깨고 보니 엄청 상쾌하기까지 했단 말이지.

그렇게 문장이 아름답다면 시인을 해야하는게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시인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 장광설이라는 버릇이 있어서 시인을 하기에는 또 적합하지 않다. 과작의 작가라서 대체로 한가한지 갑자기 뜬금없는 내용을 엄청난 분량으로 쏟아낸다. 주제에 관련이 없는 내용이냐고? 아니 기본적으로는 있다. 그래서 그런 점이 더 화가 난다. 애초에 플롯이 복잡한 작가가 아니라서 줄거리가 10줄 이내로 끝나는 소설이 오백페이지가 넘어간다.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그의 문장을 정말로 사랑한다. 왠지 집에 자동소총도 다섯 정 정도는 사뒀을 것 같은 노인네지만 (심지어 그는 군인 출신이다 없을리가 없다) 그의 소설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예를 들어서 멸망한 세상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바다에 도착한다. 밑의 인용은 그 묘사이다.
 
저 멀리 잿빛 해변이 보였다. 둔한 납빛 물결이 느릿느릿 밀려왔다. 멀리서 소리도 들렸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세계의 해변에서 부서지는 어떤 이질적인 바다처럼 황량했다. (중략) 그리고 재가 그리는 잿빛의 스콜 선. 남자는 소년을 보았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파란색이 아니어서 미안하구나. 남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소년이 말했다.
- 코맥 매카시(2006), 더 로드. p244
 
중략이라고 써두었지만 내가 생략한 것은 두 줄 반 정도의 문장이다. 짧고 간결하게 그는 상황을 설명하고 그보다 더 짧고 간결하게 사람의 마음을 묘사한다. 그는 좀처럼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의 문장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한다. 하나를 더 보자.
 
고요 속에서 눈이 소곤거리며 내렸고, 불꽃들은 피어났다 희미해지다 영원한 암흑 속에서 죽었다.
- 코맥 매카시(2006), 더 로드. p111
 
이런 글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조지 부시 주니어를 지지했다거나(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인터뷰도 아직 보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는 사기야 하고 8기통 차량을 밟으며 다녔더라도 (그가 환경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인터뷰도 아직 보지 못했다) 이런 문장을 쓴다면 남들에게 비밀로 하는 일이 있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것은 그의 유작인 연작 소설이다. 작년 겨울에 발매된 책을 이제와서 읽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리 쉽게 잃혀지지 않고 30페이지 쯤 읽다가 며칠을 쉬고 문장 몇 줄을 읽고 한 시간쯤 다른 짓을 하며 천천히 읽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엔 남녀가 나오는데. 남자는 자기를 떠나간 여자에 대한 생각을 십년도 넘게 지난 지금(작중 시간)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여자는 ... 아니 소설의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은 관두자. 그냥 말하자면, 아주 기나긴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정도로 해두자.
 
하여간 유작인 책을 읽고 있노라니. 내가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읽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읽으면서 별별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정말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인간 존재 내면에 사라지지 않는 고독? 자아와 타자 사이의 갈등만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는 거? 모르겠다. 몇주 쯤 아니면 몇 개월  쯤 진득하게 생각해야 알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연구자가 아니니 이러다가 남이 써놓은 글을 읽고는 아이구 그렇구나 그런 내용이구나 하고 납득 할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성을 초월한 이치 같은것이 인간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가 직접적으로 "이것은 스파게티의 화신이다." "이것은 정부 관료제의 화신이다." 뭐 이런 설명을 집어넣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인간을 초월한 것이 분명한 것들 나오고. 평범한 인간인 등장인물을 말 그대로 박살내어 버리는 전개가 많이 등장한다. 어떤 초인 판사가 등장하는 서부 배경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 소설에서는 그가 문명의 화신 비슷한 것이란 걸 잘 숨기지도 않으며 책에 나오는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은 그 초인 판사의 손에 의해 말 그대로 박살난다. 말하고 보니 무슨 히어로물 같은데. 살인 강간 강도 방화 이 모든게 나오는 끔찍한 소설이다.
 
그런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는. 구원 받지 못하는 인간이다. 무언가를 구하겠다 는 의지를 가진 인간은 반드시 실패하고 그들을 정말로 구하는 것은 글쎄... 작중의 등장 인물들을 정말로 구하는 게 한 번이라도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기억나는게 없다.
그들이 받은 구원은 얄팍하고 불안한 것이고, 우리가 읽지 않는 동안 책 바깥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 순식간에 모든 등장인물들이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은 연약하다. 그들은 정말로 순간. 딱 어느 순간만 구원 받는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해야할지 우리의 필멸의 여정 중에 주어지는 잠시간의 위로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왜 갑자기 이 작가에 대해서 쓸 생각이 들었지 싶었는데. 잠시 서재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스스로 나에게 주어진 구원이 몹시 얄팍한 것이고 한 번도 구해진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아 빌어먹을. 서부극에 혼자 당나귀를 타고 가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죽는 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닐텐데 왜 이런거에 꽂혀있지 하고 쓴 웃음이 나온다.
 
그래. 오늘 다른 사람의 책으로 가득찬 방에서 내가 정말로 혼자라는 생각을 했다.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래서 지금 글을 쓰다 말고. 그가 쓴 작은 희곡의 문장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그 희곡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구하려고 대화하는 내용 밖에 없는 책이다. 마지막 문장은 기억나지만 구원을 거부하고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말이 뭐였더라.
 
결국 원하던 구절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아 글을 쓰길 그만두고 서재를 뒤져가며 책을 찾아보려고 한다.

어째서인지 책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나는 필사적이 되어서 제발. 제발이라고 중얼거린다. 중얼거리다 못해 제발, 이라고 기도한다.
 
 
이제 댁이 뭘 구한 건지 알겠지요.
구하려고 했지. 구하려고 하고 있고. 열심히
- 코맥 매카시(2006), 선셋 리미티드. p135
 
24년 7월 24일의 글이다. 

사람이라면 모두 다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나의 나무"가 있다.

"나의 나무"가 무엇인지 설명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로서는 나의 나무가 없는 사람을 상상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긴 하겠다. 예를 들어 아직 나의 나무가 있어본 적이 없는...그러니까 한 3살 쯤 된 사람. 아니면 다른 별의 지적 생명체가 지구 문명의 멸망 후 인류 문명의 서버들을 어렵게 돌려서 내 글을 읽고 있다거나. 해독에 수고하셨지만 다른 별의 사람이여 이 글에 뭔가 유용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뒤로 가기를 눌러 어딘가에 있는 알콜스왑으로 물건 이리저리 닦아보기 포스팅이나 읽어보십쇼.

짧게 설명하자면, 내가 말하는 "나의 나무"는 살아가다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나무를 뜻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유명한 에세이집 <'나의 나무' 아래서>에는 소년 겐자부로가 몹시 사랑하여 자주 그 아래에 앉고, 마음이 외롭거나 할 때 위안을 받았던 커다란 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 중에 안 그런게 있는가 싶겠지만) 우습고도 슬픈, 무력한 소년시절을 쓴 이 에세이에서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이라는 가혹하고 잔인한 시대에서 아니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했던 그의 ”나의 나무“에서 나즈막한 기도나 오래된 이야기에게서 얻는 그런 위로를 받습니다. 훌륭한 책이랍니다. 아동 대상의 에세이지만 그의 다른 소설들 보다 나은거 아냐 싶을 정도니까.

아주 어릴 적에 내가 가졌던 "나의 나무"는 관목처럼 키가 작은 단풍나무였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뜰에 심어진 관상용의 나무이다. 크게 자라지도 굵고 단단하게 자라지도 못한채 자라버린 나무였다. 원래 그럴 태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그 나무를 볼 때는 내가 너무 작았는데도 다른 나무보다 눈에 띄게 작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십 몇년이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는데 오래된 단지인 만큼 단지의 나무들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어떤 나무들은 5층 짜리 작은 아파트의 건물 높이 만큼이나 자라났지만. 그 단풍나무만은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 그 이유는 (아니 정말 그 이유에서 였을까)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그 나무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괴롭혀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단지의 뜰, 아니면 주변의 야산을 쏘다녔는데. 무당벌레나 꿀벌을 수십마리씩 산채로 모으거나 개미들 위에 과자를 뿌려 개미들이 그걸 옮기는걸 구경하는데 영원같은 시간을 썼지만 그것이 지겨워지면 대체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아마 다른 나무는 내가 오르기엔 너무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그 나무에 매달렸을 것이다. 나무로서는 정말 곤란했을게 틀림없는데 어딘가에서 나무는 가지만으로 생식이 가능하다는 걸 읽고는(그건 아마 접붙이기에 대한 이야기였을텐데) 그래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단풍 나무의 싱싱한 가지를 몇개 부러트려서는 그 근처에 심고 물을 주고 그랬었다. 아니 못되쳐먹은 꼬마였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내가 점점 커지는 동안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쉬운 나무타기 상대가 된 그 작은 단풍나무는 결국 어른이 되어 무슨 교목처럼 키가 커진 나보다 작아지게 되었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렇게 된건 역시 내가 중학생이 되도록 그 나무에 매달려 지냈기 때문 일 것이다. 부드럽고 탄력있게 휘는 그 가지에 나는 더 커지고도 가끔 매달려보곤 했는데 부러질까 두려워 체중을 실을 수는 없어도. 어두운 밤 집에 돌아오는 길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되는 양 양팔로 가지를 잡고는 대롱대롱 매달려 마음이 내킬 때 까지 있곤 했다. 전세계의 소년소녀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역시나 그 작은 나무를 사랑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재건축으로 사라졌다. 나무들은 잘리거나 파내어졌다. 13동 앞에 서있던 커다란 백목련이나 6동 뒤로 줄지어 서있던 포플러는 아마 파내어져 팔렸을 것이다. 단단하고 곧은 훌륭한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작은 단풍나무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너무 매달려 커지지 못한 단풍은 그냥 잘려졌을 까 아니면 어느 좀 마음 착한 인부의 손에 파내어져 여느 부지의 정원 구석진 곳에 심어졌을까? 운이 나쁘자면 또 어디 학교의 운동장 같은 곳에 심어져 원숭이 같은 인간놈들을 세명씩 네명씩 매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단풍나무 생각을 하며 한번 알아볼까 싶다가도 자기 땅 한평 없는 월급쟁이가 나무의 행방을 알아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금세 그만둔다.

나무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다. 나무가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쓰다듬어 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그 등치에 기대거나 그늘 아래 앉는 것 뿐인데 나무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니. 인간은 정말 제멋대로가 아닌가. 우리가 나무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나무들이 우리를 구분이나 할 수 있으려나, 우리가 나무에 울분을 터트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그 아래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나무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싶다. 그저 바람소리에 맞춰 그 가지를 흔들고 나뭇잎 부서지는 그 소리와 함께 그늘을 내려 볕을 가리기나 할 뿐이지.
말하자면 나의 나무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다.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서 우리는 그저 서있을 뿐인 나무를, 그 그늘과 단단한 침묵을 사랑하고 마는 것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나의 나무란 대체 그런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듯이 나의 나무를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을 나의 나무를 그리워하듯이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 내가 좋아했던 나무는 단과대 옆에 서있었다. 7층에 있는 학생회실을 나와 창가에 서면 보이는 커다란 나무로. 여느 건물 3층 4층 까지는 닿을 듯한 여름이 되면 가지를 사방으로 뻗는 나무이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과 풍성하게 매달린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려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어느 봄 학교에 처음 들어가 혼자 어슬렁거리다 문과대 창을 통해 나무를 보고는 한눈에 그 나무가 마음에 들어 매일매일 혹은 기회가 날 때 마다 창가에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질리는 일은 없었다. 복학을 하고 돌아왔을 때도 처음 한 것도, 졸업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것도 7층에 올라가 그 나무를 바라본 것이었다. 나의 학교 생활은 멍청하고 한심한 일화들과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읽은 책들, 그리고 변하지 않고 철이 되면 바람에 흔들려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번 겨울 볼일이 있어 학교에 돌아가 보니 그 나무는 있던 자리 그대로 있었으나 커다란 가지 대부분이 잘려져 있었다. 눈이 내렸지만 어떤 눈송이도 나뭇가지에 매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또 7층에 올라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가 내던 소리를 떠올렸다. 항상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23년 2월의 글이다.

얼마 전 이상한 일이 있었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 화장실에 가며 폰을 자리에 놓고 가는 바람에 화장실 문을 닫자 블루투스의 신호가 끊겨 듣고 있던 노래의 재생이 끊겼다. 이상한 일은 노래가 끊겼던 일이 아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어 볼일을 마치고 나오며 무선 이어폰을 재작동하자 듣고 있었던 한국의 유행가가 아니라 낯선 외국어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흥겨운 리듬의 곡이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인데도 아는 노래처럼 느껴지는 건 보컬이 내가 예전에 많이 듣던 곡의 가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운 기분이 들어 노래를 몇 분 정도 듣다가 사무실의 자리로 돌아와 내 스마트폰을 보았다. 노래는 역시나 내 폰에서 재생되는게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명 다른 사람의 신호가 - 사무실 내에서 나와 같은 종류의 스마트폰을 쓰는 누군가 - 섞여서 들어간게 아닐까. 아주 예전 라디오로 음악을 듣던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일이다. 아니 그 때는 다 유선 헤드폰과 이어폰이라 그럴일이 더욱 없었으려나. 낯설고도 익숙한 외국의 노래에 아쉬운 기분 반으로 무선 이어폰 연결을 다시 설정해 내가 처음부터 듣던 노래를 들으려는데 문득, 어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익숙한 음악의 가수가 누구였지? 아니 것보다 그 가수의 그 노래, 내가 엄청 많이 들었는데 그게 제목이 뭐였지? 진짜로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나는 그리 부지런한 음악 감상자가 아니다. 스트리밍의 시대에 나만 그런 것은 아닐꺼야 하고 혼자 하고 혼자 듣는 변명을 해본다. 유튜브와 애플뮤직 두 개나 굳이 음악감상 앱으로 쓰는 것은 그냥 해둔 구독을 해지하지 않을 뿐이다. 스포티파이까지 쓰기에는 너무 듣는 노래만 들으며 멜론을 쓰기에는 내가 너무 속물이다.

컴퓨터가 되었든 스마트폰이 되었든 파일을 어딘가에 저장하던 시절에는 나름 분류도 하고 태그도 하면서 음악을 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 음악감상 앱의 알고리즘은 너무 편리하여 어떤 가수의 곡을 하나 고르면 자동으로 그 다음곡이 알아서 흘러나온다.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고 어떤 기분인지 쓰면 검색이 괜찮은 재생목록을 골라준다. 생각은 필요 없고 그냥 기분만 있으면 된다.
앨범 전체를 들으며 앨범 전체의 구성을 하나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듣던 그런 감상법도 딱히 필요 없다. 하나의 좋은 곡이 끝나면 그것과 비슷한 그리고 더욱 포퓰러한 음악을 골라주니 항상 클라이막스만 골라서 신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얏호. 그러다보니 장르에 대해서도 가수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없다. 제목을 외울 필요도 없다. 그게 뭐 어때서요 라고 묻는다면 나도 솔직히 그게 싫다는 것도 이래선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 시대에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대체로 "소유"와 비슷한 의미였던 것 같다. 꽤 비싼 돈을 들여야만 음향기구를 갖출 수 있었고 LP나 CD, 이도 저도 아니면 Tape라도...하여간 물리적인 매체를 사서 듣는 것이 중요했다. 나도 CD의 부흥 무렵에 태어나서 그런지 그 후 대용량의 인터넷 회선이 당연한 시대가 되자마자 음악을 모으는데 열중했다. 유명한 당시의 유행가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유행곡을 하드에 저장하고 CD로 다시 리핑해서 들었다. 각자 컴필레이션 CD를 만들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이 로맨틱한 제스추어였던 시대이다.

나는 음악 수집에 꽤나 악질이라서 한국인은 나말고 아무도 모를만한 음악을 폴더로 정리하고 들으면서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때때로 인터넷에 잘난척하는 글을 써댔다. 아무도 모르는 음악에 대해서 글을 쓰니 조회수는 두자리수나 겨우 올라가고 가끔 달리는 댓글은 저 말고 이 아티스트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분이 계셨군요 어쩌고 하는 역시나 잘난척 하는 댓글들 뿐이었다. 복제된 컨텐츠의 시대일 수록 나는 내가 가진 데이터 베이스의 방대함과 희귀함에 (그리고 그걸 몹시 싼 비용 그러니까 드는 비용이 오직 나의 차고 넘치는 여가 시간인데, 생각해보면 10대 20대의 청춘만큼 귀중한 싸구려가 어디있을까 제기랄, 하여간 몹시 싼 비용으로 구축한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부심을 가졌다. 이런 취미는 본질적으로 몹시도 궁핍한 것이어서, 동시대 한국인의 기준으로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라 자부심을 가질 이유는 한 개도 없었는데 말이다.

요는, 한 때 나는 음악을 모으는 것과 듣는 것 모두에 시간을 마음 껏 낭비할 수 있었으며. 엄청난 시간을 다양한 음악을 듣는데 쏟았지만 거기에는 어떤 깊이도 없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하드디스크를 채우고 리핑된 CD에 네임펜으로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는 아티스트의 이름을 적는게 내 취미였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뒤의 결말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났다. 시대가 변하고. 인터넷이 더 발달하였으며 회선은 빨라졌다. 서버의 운용비용이 더 낮아지자 음악파일을 다운받는 시대에서 스트리밍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각 음악 사이트는 통합되었으며 결국 내 하드와는 상대도 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음악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멋진 (더 멋진?) 음악 저장고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게 되자 금세 음악 모으는 것을 관두었다. 그랬던 것 같다.

애플 뮤직의 초기에는 전처럼 재생목록도 만들고 했던 것 같지만 뭘 쳐도 거기에 음악이 있는데 내가 뭐라고 개인 음악 저장고를 유지한단 말인가. 제기랄. 하지만 노래를 모으게 되지 않게 된 무렵부터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테니 단순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어느새부터인가 나는 더 이상 음악을 취미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외국 어딘가의 음악감상 카페에 들어가 커피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불편한 자리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한참을 울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건지 본인인 나 조차도 알수가 없다.

이제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그 노래가 유럽의 곡이 아닌건 알 수 있었다. 제목도 영어가 아니다. 유튜브에서 재생했던가 싶어서 재생 목록을 찾아보다가 1,2년 어치의 검색을 해서 나올 곡이 아니란걸 깨달았다. 샤잠 같은 곳에 콧노래로 노래를 불러보다가 내가 일반인 뺨치는 음치라는 걸 다시 기억해냈다. 기억나는 키워드로 구글링을 해보기도 한다. 무슨 짓을 해도 나오지가 않는다.

결국 집에 가는 길에 내 트위터를 검색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맘에 드는 노래는 유튜브 링크를 트위터에 올리곤 했는데 키워드 유튜브로 내 트위터를 검색하면 분명 제목이 나올 것이다 싶었다. 제목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러니까 왜 그 정도로 특이한 노래인데 제목을 기억못하는가 싶지만 하여간 내 트위터를 검색했다. 정말 다양하게 이상한 노래를 엄청나게 들었구나. 1년치를, 2년치를, 3년치를 넘어갈 시점에서 노래를 하나 찾았다.

원래 기억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부분도 있고 가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내가 전혀 모르는 외국어 (포르투갈어였다)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활동한 것은 1979년에 내가 듣던 곡은 1972년에 발표한 노래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찾아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 곡을 왜 듣게 된건가 싶어서 생각해보니 나는 한 때 남미의 재즈를 엄청나게 들었는데 그 때 이어졌던 것 같다. 왠지 그리운 기분으로 노래를 듣고 또 유튜브가 이어주는 다른 노래들도 따라 들었다. 아 역시 좋은 노래들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다른 곡을 듣고 있다.
유튜브에도 애플뮤직에도 없는 한 15년 전 쯤 발매된 곡이다. 혹시나 싶어서 검색해봤는데 역시나 한국의 스트리밍 사이트에나 있는 곡이다. 분명 내 하드 어딘가에 앨범 전체를 추출한 (그렇다 나는 앨범도 엄청나게 사댄 사람이다) 파일이 있을텐데 지금은 들을 길이 없다.

만오천원이든 구천구백원이든 결재해서 들어볼까 하다가 미리듣기로 음악을 들어본다. 듣고는 너무 좋아 한 번 더, 그리고 한 번 더. 그렇게 글 하나를 통채로 다 쓰는 동안 1분간의 미리듣기를 반복한다.


이 노래가 이렇게 좋았던가 아니면 내가 미리 듣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좋게 느껴지는 걸까. 그건 스트리밍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22년 12월 30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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