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열었다. 가을이 깊어진지 오래다. 나는 포갠 나의 손 위에 얼굴을 묻고는 엎드린다.
거기에 눈까지 감으면 모든 세상에서 타인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하품을 길고 천천히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작은 언덕 위에 올라앉아있는 곳이라 창문을 열면 먼 곳의 소리까지 들려온다.내가 이 집에 대해서 무엇을 그리워할까 생각해보았는데, 그건 역시 새벽녘 국도의 어딘가를 달려 어디론가로 가고 있는 자동차의 소음일 것 같다. 멀리서 다가와 다시 멀리로 사라져가는 그 소음은 익숙해지면 어딘가 슬프게 들리기 까지 한다. 선생님. 급하지 않으시면 잠시 들렀다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장 후회 하는 것은, 아니 후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자. 어느 곳에도 쓰지 않으면 언젠가는 잊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곧 고쳐 생각한다. 항상 가장 깊이 후회하는 것은 사랑에 관련된 것이고 마음 속 깊이 스며든 애정에 대한 것은 어떤 후회로도 되돌릴 수 없다.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여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사랑이다.
7월의 어느 비오는 날부터 갑자기 쓰기 시작한 블로그 글이 10월 현재 30개가 넘었다. 변덕으로 또 몇 년간 써왔던 글들을 전부 비공개로 돌리고 지난주에 한 꺼번에 써둔 포스트만 남겨두었다.
중편이 되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 소설 두 개 정도를 같이 쓰고 있고. 아이패드에 절반쯤 써놓고 어떻게 결론을 내지 하고 골치가 아파서 안 올린 것도 또 몇 편 정도 된다. 그렇게 따지면 3개월이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쓴 게 40편 정도. 페이지수로 따지면 2-300페이지 정도라서 엄청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내 인생에서 이렇게 단 기간 동안 글을 많이 썼던 때는 없었다. 왜 이렇게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글을 썼냐고 묻는다면.
아까 위에서 썼던 것처럼 7월 어느 비가 오는 날 이후로, 누군가 나에게 비가 오고 있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자는 말을 해주길 기다렸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메리칸 코믹스 중에는 둠 패트롤이라는 시리즈가 있다. 얼마 전 형이 데리고 간 북카페에 무려 원어로 된 책이 있어서 내가 보지 못했던 어떤 결말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크레이지 제인과 로봇맨의 결말 말이다.
둠 패트롤에는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강력한 초능력자 크레이지 제인과 그녀의 친구이자 사고로 몸을 잃은 히어로인 로봇맨이 등장한다. 크레이지 제인이 등장한 초기 무렵 그림을 그리고 있던 크레이지 제인이 갑자기 내린 비에 그림을 망쳐 낙담하자 로봇맨은 그녀에게 “들어가자, 비가 오잖아.”라고 말하며 그녀를 데려간다.
그리고 먼 훗날 크레이지 제인은 사고로 인해서 모든 동료들과 떨어져 혼자만 다른 평행우주에 갇히게 되는데. 혼자가 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결심한 크레이지 제인 앞에 비와 함께 우주의 경계를 몇개나 넘어서 로봇맨이 나타나. “내가 약속하지 않았어? 우린 집으로 돌아갈거야.”라며 제인의 손을 잡는다.
“들어가자, 비가 오잖아.”
그 아이와 헤어지게 되리라고 눈치챈 건 5월 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네가 나를 떠나면 나는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다. 네가 떠나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렇게 널 보내고 널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리고 그 아이는 쉽게 나를 잊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허세를 부리는 것 뿐이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은 좋건 싫건 허세를 부리게 되기 마련이다. 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친한 형 한 명이 해외로 떠나게 되어 커피를 마시면서 인사를 나눌 일이 있었다. 형은 요 한 1년 간 아주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내심 꼴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인사를 하며 알게 된 것은 5년이 넘게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해외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근엄한 표정도 실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우울해서는 매일 같이 혼자 술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형의 여자친구는 나이 차이가 열 몇살 된다. 20대 초중반의 좋은 시절을 5년이나 같이 보내놓고 형은 여자친구가 결혼하자고 하는 걸 계속 피하고 있었는데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헤어진거겠거니 싶어서. 제가 분명 형도 여자친구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데 빨리 결혼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라고 묻자 형은 부정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진 내가 형은 너무 바보 같아요 라고 말하자. 형은 정말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무엇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겠다.
우리가 만나고 있을 때 나는 그 아이에게 너랑 헤어지면 나는 미친 사람처럼 글을 쓰기 시작할거고. 노벨문학상도 받게 될거야. 라고 말했는데. 미친 사람처럼 글을 쓰는 건 이루어졌고. 노벨문학상은 한강 작가가 받게 되었다. (축하합니다.)
그런 얘기도 했다. 가장 친한 친구한테도 나랑 만나고 있다는 얘긴 하지 말라고. 그저 남자친구가 있어요 정도로만 얘기하라고. 물론 우리가 계속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그 때는 얘기해도 괜찮아. 라고 단서를 달았는데. 물론 단서 쪽이 본론이었다. 눈치가 없어서 아마 내가 정말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했는지는 하나도 몰랐을 것이다.
내 욕심만 같아서는 너랑 평생 같이 있고 싶어- 같은 얘길 했다는 걸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알게 되면 정말 정색을 하겠지. 야 너 그런 얘기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냐 라느니 미래를 약속하는건 그렇게 쉽게 얘기 할 수 없지 라느니 잘난 척은 잔뜩 해놓고 말야. 그래요 미안합니다. 그 뭐냐 사람이란 복잡한 존재잖아요. 저도 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이다. 내가 본인에 대해서 쓰는 걸 좋아하진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 아이에 대한 것을 최대한 기억으로만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그 아이에게 다 잊어버릴거라고 말한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쓰지 않는 만큼 나는 그 아이에 대해서 잊어버릴 것이다. 그 많았던 일들도 말이다.)
나는 얼마 전에 두 번의 사고를 당했다. 사고 한 번은 큰 사고여서 몇 주 입원을 했어야했다.
운이 나쁘게도 죽는 일은 없었다. 친구들 중에 몇은, 그리고 아주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자살을 기도를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몇 번이나 내가 그런 걸 실패같은 걸 할 것 같아? 한 방에? 어? 스윽 하면 끝이라고! 하며 과장된 대답을 하며 겁먹은 사람들을 달래야했다.
어제는 친구 하나에게 전화를 했다. 너무 오래 앓는거 아니야? 라고 말하기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에게 글을 못 쓰게 되는 건 마음이 나았다는 증거 아닐까요? 라고 말하기에 속편한 소리 하네 글을 못 쓰게 되면 난 노벨 문학상을 못타게 되잖아. 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더 이상 “비가 오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해주며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미아가 되거나 집에 틀어박힌 외톨이가 되거나 하는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 (두개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만)
나는 이제 그만 입을 다물고 짐을 챙겨 혼자 집에 돌아가려고한다. (혹은 영원히 비를 맞으며 눈동자가 녹아내릴때 까지 기다려야한다. 그건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내리는 것이 비인지 눈인지는 상관없다. 그저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아보는 것이 요점이다.
그런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부탁은. 밤 1시가 넘은 지금, 아직도 내가 혼자 테이블 앞에 앉아 창 밖의 소음들을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척 해주는 일이다.
밤은 길고 겨울은 아직 오지 않았다. 겨울이 다다르면 나는 언제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당신에게 농담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내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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