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나는 저녁꺼리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다. 까마귀 떼가 하늘을 날아 북북서에서 남남동으로 가로질러 어딘가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바깥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관심이 없었고 어떤 사람들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까마귀떼를 보았다. 나는 … 그리웠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까마귀떼를 보았다. 4년만의 일이었다.

저녁 까마귀 떼를 지어 수풀로 돌아가고.
아침무렵 흰 입김은 공중에 흩어지는데.

나는 여기까지 문장을 짓고는 뒤를 이을 연을 떠올리지 못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대신 어딘가의 연습장에 한자로 이어질 문장을 끄적이고는 어딘가에 쳐박아둔다. 언젠가의 내가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고 그 뒤를 이어주길 바라기로 한다.

어제밤엔 비가 왔다. 불이 꺼진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누웠는데 이상하게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운동복을 입고 러닝을 했다.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었다. 추운 밤, 비까지 내리는데 러닝을 하려고 하다니 나는 나를 제어 할 수가 없구나. 씁쓸한 기분과 함께 코너를 돌고 고개를 들었다.

비다. 비가 얼굴을 때렸다. 빨리도 장갑이 축축해지고 얼굴에 비가 쏟아져 숨은 차가워져갔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처음의 씁쓸한 마음은 가시고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평온에 한없이 가까운,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에 대한 기도를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날의 달리기를 하던 중, 비로소 내가 왜 이 어둡고 외로운 마음에서 낫지 않는가를 깨달았다.

내가 애초에 낫기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거꾸로 반쯤 정신이 나간 이 미친 상태에서 그대로 머무는 것.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긴 기도를 하는 것. 이 길고 긴 밤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길 바라는 것. 상실을 곱씹고 곱씹어서 이 상실이 내 피와 육신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느린 발구름에 물이 튀어올랐다. 차갑게 식은 빗물이 양말 안으로 들어와 발이 딱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그대로 하얗게 되어 비에 씻겨져 사라져버렸다. 몇 주째 아픈 등은 착지 할 때 마다 나를 불편하게 찔러댔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희미한 환희에 가까웠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내가 그걸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장마철의 개미처럼 젖어서 러닝을 마치고는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잤다. 음악을 듣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주 길고 긴 시간이 지나서 비로소 겨울이 당도한 것이다. 모든 것이 씻겨가버린 후였다.

얼마 전에 주문한 헌팅자켓이 왔다. 황토색에 튼튼하고. 아주 커다랗다. 뜻하지 않게 커다란 걸 산 것이다. 오버사이즈인걸 알았는데 키가 큰 거인 족인 나는 엑스라지 입어야지 하고 샀는데 어깨가 맞지 않을 정도로 크다. 어떻게 입을까 고민하다가 기모후드를 입고 헌팅자켓을 입었더니 그럭저럭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반품해야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이 정도 크기면 엘사이즈를 입었어도 나에게 크다. 그래 이건 크게 입는거야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기랄 누가 지적하면 어쩌지 패션을 모르는자야 이건 크게 입는거야 하고 받아쳐야지.

오늘은 추울테니까 싶어서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양말도 따뜻한 걸 신었다. 혹시 몰라 니트 비니도 하나 챙겼다. 혹시 몰라 목도리도 하나 챙겼다. 요즘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는데 뿔테에 니트 비니를 쓰니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려서 공항 도둑이 나타났다고 자수 할 뻔하였다.

어제 퇴근 길에 잘 쓰고 있던 장우산의 살 하나가 녹슬어서 부숴진 걸 발견했다. 어느날 종로-광화문 어딘가 쯤 비가 너무 많이 오기에 편의점에 들어가 휘릭 산 우산인데도 마음이 안 좋아서 살을 고쳐 쓰기로 했다. 다른 우산을 대신 들었는데 이것도 비가 너무 많이 오기에 그냥 편의점에 들어가서 산 우산이다. 우산을 이렇게 사대니까 부자는 못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출근을 하려고 나왔는데 눈발이 생각보다 거셌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새벽녘에 정신이 나간 나는 눈을 맞으면서도 러닝을 하려고 나왔다가 얼굴에 부딪히는 눈발이 너무 아파서 5분은 커녕 1킬로미터도 못 달리고 다시 집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산을 쓰고 조심스럽게 걷는데 추워서 웃음이 나왔다. 흐하하 하고 웃었다.

그렇게 겨울이 왔다.


24년 11월, 첫눈이 온 날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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