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실망을 쌓아가는 것이다.
나는 대체로 6시에 일어난다. 대체로라고 말하는건, 사실 아무 때나 일어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제는 5시에 일어났고 오늘은 6시 30분에 일어났다. 규칙적인 생활이랑 거리가 멀다.
해가 뜨기 전의 새벽에 러닝을 하는걸 선호하지만 요즘엔 역시 춥다. 6시에 일어나면 그냥 출근을 할지 운동을 하고 나갈지 고민하는 신성한 시간을 갖(침대에 그냥 누워있는다는 뜻이다)다가 러닝을 하러 나간다. 아침에 운동을 하면 하루 종일 묘하게 나른하지만 운동에 대한 부채감이 없는 하루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선호하는 러닝 거리는 5킬로미터이다. 전에는 급하면 3킬로미터 정도만 뛸 때도 있었지만 역시 좀 서운한 거리이다. 러닝 선배들은 킬로미터 기준으로 운동량을 정하지 말고 시간을 기준으로 다양한 시간을 뛰라고 조언해주지만. 실은 나는 풀코스 마라톤 같은 건 관심없다. 그냥 좀 더 달리고 싶을 뿐이다.
러닝을 하든 하지 않든. 집에서는 8시 전에 나간다.
회사가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보통 걸어서 출근한다. 아닌가,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는지도 모른다. 실은 2.5에서 3.0킬로미터 정도 거리다. 왜 0.5킬로미터 정도 차이가 나냐면 굳이 좀 돌아서 가는 경우가 많다.
고래로 철학자, 수학자, 정치인, 백수건달, 은퇴한 아저씨 등 자기가 대단한 뭔가를 사고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산책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주장하는데. 그건 모르겠다 나는 그냥 걷는 걸 좋아하고 요즘은 아침 출근 시간이 피ㅋ민을 하는 시간이다.
하여간 회사에 도착하면 아침밥을 회사에서 먹는다. 회사 식당에서 앉아서 먹어도 되고, 테이크아웃류의 음식들을 받아서 가도 된다.(사무실 내 자리에서 먹는다) 받는 것은 건강한 야채구이라든가 군고구마니 삶은 계란이니. 아니면 기성품 커피 같은 것이다. 실은 나는 군고구마가 너무 좋다. 너무 많은 고구마가 건강에 안 좋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깟 건강.
변덕 때문에 7시 30분 정도 쯤에 회사에 도착 할 때도 있다. 그러면 회사 정문 시큐리티 업체 분 중에서 가장 미인이신 분에게 아침 인사를 할 수 있다. 딱히 하는 건 없다 그냥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 정문으로 들어갈 뿐이다. 그리고 이게 나의 하루의 클라이맥스다. 미인한테 인사 할 수 있다니 너무 신난다.
자리에 앉으면 받아온 테이크아웃을 먹으며 메일을 체크하고. 그날 해야할 일을 바로 시작한다. 출근하면서 오늘 뭘 해야하는지 생각해두기 때문에 나는 업무속도가 꽤 빠르다. 의외겠지만 일상생활 중에서도 일 생각을 많이 한다.
갑자기 뭔가 옆에서 튀어나오는 업무가 있어도 30분 이상 걸리는 일은 드물다. 집중을 해야하는 일이 있으면 귀를 막기 위해서 에어팟을 꽂고 노래를 듣는다. 때때로 3,4시간 정도 집중해서 일해야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정말 꼼짝도 하지 않고 일만 하고 있어서 이상하다는 얘길 듣는다. 아니 왜지 기계처럼 일하는 회사원 처음 보시나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메신저로 친구들과 농담을 하거나, 동네 맛집 얘길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게임 얘기나 한다. 더 한가할 때는 인터넷으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쓸모도 없는 지식들을 검색해서 읽는다. 너무 놀았다 싶으면 시장 레포트나, 테크 레포트 같은 것을 찾아서 읽고 내키면 뭔가 스스로 레포트를 생산해낸다.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과외의 일이다.
아직 어릴 때 회사원이었던 아버지에게 아빠는 회사에서 뭘 해? 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회사에선 일을 하지. 라고 말을 하기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라고 재차 물어보니. 아버지는 자못 곤란하다는 듯이. 여러가지 일을 해 라고 대답했다. 누가 나한테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나도 여러가지 일을 하죠 정도로 밖에 대답을 못하겠다. 진짜로 회사원은 여러가지 남들에게 설명하기 곤란한 일을 한다. 나도 기관사처럼 설명하기 쉬운 직업을 갖으면 좋을 것 같다.
점심은 친구들과 먹는다. 부지런한 회사원이기에 점심 메뉴는 꼭 체크한다. 점심 메뉴를 체크하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 회사원이 있다? 그 녀석은 먼 미래의 인공지능이 보낸 기계 암살자이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하여간 절대 그런 짓을 해선 안된다 점심 메뉴는 괜히 식당에 가서 고민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사전에 정해둔 메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길 바란다.
날씨가 좋을 때는 회사 근처 천변에 산책을 간다. 몇년 쯤 그랬을 까 생각해보니 6,7년은 된 습관이다. 요즘엔 너무 춥고, 또 러닝으로 충분히 운동량이 채워지는 것 같아서 산책을 잘 하지 않는다. 나의 친구인 당신에게 나는 몇 번 천변의 풍경을 설명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갈대가 많고 느티나무가 천변에 늘어서 있다. 오리와 비둘기, 그리고 설명 할 수 없는 작은새들이 많다. 게임이라도 하면서 걸어다니면 좋을 것을. 나는 생각을 하거나 머릿 속으로 글을 쓴다. 두개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저 두 가지는 진짜 명백하게 다른 활동이다. 그런 질문을 한 걸 반성하기 바란다.
얼마 전에 후배가, 선배는 심심할 새가 없겠어요. 아무 생각이나 하고 그걸 또 입으로 말하시잖아요. 라고 말하는데 내용이고 뉘앙스고 전혀 칭찬이 아니었을 뿐더러. 꼭 입가에 밥풀 붙이고 나온 다섯살짜리 꼬마한테 아이구 배고플까봐 도시락 가지고 나왔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말투라서 선배한테 진심을 다해서 공손하라고 설교를 해주었다.
점심을 먹으면 하루가 다 간거다. 쓸데없는 업무를 좀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면 오후는 또 금방 간다. 아니 거꾸로 오후 시간이 안 갈 때도 있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일을 좀 빨리 처리하는 편이라서 해야할 일이 하나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후배는 선배든 친구든 꼬셔서 커피를 사러 간다. 같이 가는 멤버에 따라서 커피를 사면서 잡담을 할 때도 있고 회사를 한바퀴 돌 때도 있고. 그냥 자리로 돌아올 때도 있다. 나는 보통의 회사원들은 사죽을 못쓰는 신기하고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그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해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그냥 평범하게 재테크 얘기나 애들 키우는 이야기 그런걸 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안합니다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이상한 동물 이야기나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녁시간은 금방 온다. 회사원들은 체력이 약해서 해가 지기 시작하면 준비해온 집중력이 다 해서 다들 비실거린다. 야근을 하니 뭐니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손이 느린 놈들이 그러는 것이다. 가끔 후배들이 업무에 퀄리티를 올리겠다고 아등바등 하며 일을 하는걸 볼 때가 있는데 내심 회사원은 업무 퀄리티보다 마감기한이 훨씬 중요한거라고 잔소리를 하고 싶어진다. 네 참습니다. 잔소리해서 뭘 하겠습니까.
저녁 식사로 저녁 테이크아웃을 받아 먹으면 진짜로 그날 회사 업무도 거의 끝이다. 메뉴는 또 삶은 계란 뭐 그런 것들이다. 맛이 없는데 괜찮냐고요? 맛이 없는 것도 그냥 먹는 것이 진정한 뚱뚱보의 자세이다. 까불지 말기 바란다.
일이 남으면.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다음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둡니다. 그러면 오늘의 업무는 진짜로 거의 끝이다. 나는 쓸데없이 회사에 남아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사무실 체류 시간은 대체로 10시간 정도이다. 이젠 회사에서 밤을 새거나 남들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컨퍼런스콜을 하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퇴근이다.
퇴근도 거의 걸어서 집에 간다. 출근과는 다르게 여유가 있다. 노래를 들으면서 걸어가면 신이 난다. 퇴근이 좋은건 어떤 회사원을 막론하고 동일한 습성인데. 나는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잠이 들고 로봇처럼 그냥 출근하는 생활을 오래해서 그렇게까지 퇴근이 즐겁진 않지만 아 콧노래를 안 부를 수는 없다.
퇴근하는 루트는 출근하는 루트보다 조금 짧다. 하지만 마트를 들른다. 요즘에 사는 것은 싱싱한 딸기나 우유, 집에 식료품이 부족하면 두부나 컵라면이나 하여간 두 손으로 들고 갈 수 있는 것을 산다. 뭐라도 사서 들어가야 마음이 좀 덜 허전하다.
집에 오면, 아무도 없다. 뭔가 해야할 집안일이 있다면 바로 지금 퇴근한 시간에 해야한다. 왜냐하면 옷을 갈아입고 어딘가에 등을 기대게 되면 퇴근한 직장인 모두가 그런 것처럼 끈적하게 녹아버려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설거지, 빨래, 청소 하여간 뭐든지 해야할 일들을 한 30분내로 하고 나면. 그래 그제서야 온전히 누워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아침에 러닝을 하지 못했다면 이 시간에 러닝을 한다. 퇴근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이 시간에 하는 것이 비결이다. 이전에는 집안일을 마치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11시 12시에 러닝을 하고 그랬는데. 생활 습관 상으로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고담시 같은 곳에선 가져서는 안되는 습관이기도 하다. 극장 뒤에서 총을 맞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뭘 하냐면. 뭘 하지? 다양하다. 책을 읽거나 뭔가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잠을 일찍 잔다. 회사에서 업무가 많지 않아도 그냥 회사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모든 기력을 소진한 상태라 마음만 먹으면 바로 눈을 감고 잘 수 있다.
씻기? 러닝을 하고 나서 씻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아침에 씻는다. 세간에 들키지 않게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할 사실이지만 가끔 세수를 하지 않고 그냥 잠이 들 때도 꽤 많다. 유독 지치고 늘어지고 촉촉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어떤 얼굴을 떠올릴 때도 있다. 괴물도 신도 아닌, 사람의 얼굴이다. 침대에 누워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떠올린다. 표정들을. 순간들을. 어떤 감정들을. 나는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말랑말랑한 무인양품표 쿠션을 껴안는다.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어떤 피와 살로 된 애정인것처럼. 그리고는 아무 꿈도 꾸지 않기를 바라며, 숫자를 세는 양치기보다 빠르게 잠이 든다.
꿈을 꾸지 않는 것. 그게 나의 요즘 바라는 바이다.
그거 말고는 없다.
처음에 무슨 얘기를 했지? 살아간다는 것은 실망을 쌓아가는 거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계속 살아가는데는 어떤 형태로든 희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희망이 없이. 아무 의미도 없는 하루를 쌓아가면서.
25년 2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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