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옛날의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주 최근의 일도 아닙니다. 때는 숲 속에서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늘어나 열매를 줍는 동물들보다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훌륭하다는 여겨지는 평판이 생겨났고 비버씨가 댐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공터를 크게 늘려 더 많은 동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소리씨는 어째서인지 농사를 짓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가끔 사촌인 비버씨네나 이웃의 곰씨네의 밭에서 도움을 줄 때도 있었지만 한가한 시간에는 강변에 나가서 진흙을 골랐습니다. 아주 이상한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죠.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릇이라고 해도 여러분 집에 있는 그릇들 처럼 편리하고 멋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냥 진흙을 이렇게 저렇게 빚고 말려서 나무 열매 정도 넣어 둘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오소리씨의 사촌인 비버씨는 그런 오소리씨가 맘에 들지 않았답니다. 손재주가 아까웠던거죠.
며칠을 고민하던 비버씨는 그날도 강가에서 진흙을 모아 가던 오소리씨에게 댐을 만드는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네 취미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우리가 하는 일은 밭과 논을 늘리는 훌륭한 일이야. 오소리씨는 고개를 끄덕이죠. 비버는 오소리씨의 유일한 사촌이었고 훌륭한 비버가 하는 말이니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아직 그릇의 훌륭함을 모르고 있어. 내가 장돌뱅이 개미햝이가 보여준 것 같은 흰 그릇을 만들어내면 알아줄지도 몰라.

오소리씨는 여름 동안 비버가 댐을 만드는 일을 열심히 도왔답니다. 비버의 댐은 나날이 갈수록 크고 튼튼해져갔죠. 해가 화창한 날에는 댐의 위쪽 끝에 햇볕이 하얗게 내리쬐어 오소리와 비버는 그 위에 누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마른 여름이었지만 비버의 댐이 모아둔 물 덕분에 어떤 동물도 목이 마르지 않았죠.

눈을 감고 햇볕을 쬐던 오소리씨는 말했습니다. 비버, 나는 잠시 구릉지대에 다녀오려고 해. 나에게 여름 동안의 삯을 계산해주지 않겠어? 비버씨는 깜짝 놀랐죠 가을이 된다고 해서 댐의 공사가 끝나는건 아니었으니까요. 증축이 끝나면 보수공사가 있고 또 비버씨는 자신의 밭도 일구어야 했으니까요. 구릉지대는 왜 다녀오려는거야? 라고 묻자 오소리씨는 거기 좋은 흙이 있대 그 흙만 있으면 흰 그릇을 잔뜩 만들 수 있다던데. 라고 말했죠. 비버씨는 또 그릇 얘기냐 하고 한숨을 쉬었지만 오소리씨에게 나무 열매를 잔뜩 주었죠.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와. 내년 봄이 되면 새끼 동물들이 늘어날거고 숲에는 공터가 더 필요해.

비버씨는 그렇게 혼자서 오소리씨를 기다렸어요. 겨울은 금방 왔어요. 해가 길어지고 숲의 어떤 넓은 공터에도 겨울의 긴 햇볕과 그림자가 늘어져 동물들은 어떤 계절보다 더 게으르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냈죠. 비버씨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댐의 위를 돌아다녔습니다. 오소리씨와 같이 쉬던 댐의 끝에 다다르면 코를 킁킁 거리며 먼 곳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구릉은 멀고 이미 겨울이 되었으니 겨울이 지나고 오는 게 좋겠군. 비버씨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었습니다. 그 해의 봄은 유독 영원처럼 긴 봄이었지요.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죠. 봄이 왔으니 천천히 출발하면 여름에는 도착하겠어. 비버씨는 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뽑았어요. 동물들이 찾아와 새끼들이 태어났으니 공터를 더 늘려야 한다고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죠. 오소리가 감독을 해줬으면 편할텐데...

그 영원 같던 봄은 아주 길게, 그리고 빠르게 사라졌고 금세 여름이 되었어요. 그 해 여름엔 비가 많이 오지도 적게 오지도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열심히 일했죠. 이제 비버와 오소리 둘이서 만들던 시절보다 댐은 훨씬 훌륭해지고 튼튼해졌어요. 다른 숲의 동물들이 기웃거리며 찾아와 댐을 구경했죠.
곰은 나무등걸에 앉아 바람을 쐬다 비버씨 네 댐은 우리 숲의 자랑이야 고마워 라고 감사를 표합니다. 비버씨는 머리를 긁적였어요. 오소리가 있었으면 더 좋은 댐을 만들수 있었을거야. 이런건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 가을이 되었어요. 이제 올때가 되었어 하지만 너무 늦군 오소리. 공사 현장에서 밥을 먹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비버씨는 고개를 들어서 사방을 보았죠. 하지만 이웃집의 너구리씨나 여우씨인 경우가 많았죠. 곰씨는 커다래서 아무리 몰라도 곰씨를 오소리씨로 착각할 일은 없었어요. 비버씨는 좀 퉁명스러워졌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군. 이라는 말이 비버씨의 말버릇이 되었습니다. 동물들은 때때로 그게 자기들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서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또 가을이 지났습니다. 겨울도 또 지나갔죠. 그 해 겨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버씨의 말버릇은 변함이 없었지만 동물들은 그가 누굴 기다리는지 잘 몰랐어요. 숲의 시간은 빨리 지나가니까 몇몇 젊은 동물들은 오소리씨가 누군지도 몰랐죠. 그런 젊은 동물들이 보기에 비버씨는 숲에서 제일 훌륭한 동물이었고, 무서운 동물이었죠.

또 한 번의 봄이 지나고 그리고 어느날 여름.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날. 비버가 댐의 꼭대기에서 저 멀리 숲의 저쪽을 보고 있던 날. 오소리씨가 돌아왔어요. 흰 흙을 잔뜩 지고 그리고, 아기 오소리를 데리고 있었어요. 열매처럼 작고 아름다운 아이였죠.
오소리씨가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사촌인 비버씨였습니다. 비버씨 내 딸이야.
비버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군. 그래서 늦은거냐. 하고 생각을 했죠.
오소리씨가 원래 살던 동굴을 청소하는 동안 오소리씨의 작은 아이를 풀숲에 눕혀놓고 비버씨는 묵묵히 나무 뿌리를 갉으며 중얼 거렸죠. 이제 돌아왔으니 내 일을 도와줄수 있겠지

하지만 오소리씨는 돌아오고서도 비버씨를 돕지 않았어요. 그 댐은 이제 너와 내가 만들던 댐이 아냐 아주 훌륭해졌어. 하고 말하고 오소리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릇을 빚었고 딸을 키웠죠. 오소리씨는 정말 좋은 엄마였어요.비버씨는 댐의 높은 곳에서 나무를 갉다가 오소리씨가 딸과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버씨는 이제 더 이상 너무 늦는군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주 과묵해졌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오소리씨가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나 겨울이 가기 전의 어느 날, 오소리씨는 숲속의 동물들을 모아서 이제까지 만들어온 자기의 그릇을 보여주었답니다. 사촌인 비버씨, 친했던 곰씨, 이야기꾼 여우씨 등 많은 동물들이 모였죠. 정말 많은 그릇이 있었죠 나무 열매를 올려놓는 접시와 항아리. 빗살무니와 발바닥무늬 그릇. 오소리씨는 자랑스럽게 자기 그릇들을 소개했죠. 마음껏 가져가세요. 곡식을 넣는데도 쓸수 있을거에요. 이제까지 숲속에서는 곡식을 그냥 동굴에 쌓아뒀었거든요. 이제는 동굴 바닥에 두다 물에 젖는 일도 없을 거에요. 초대된 동물들은 오소리씨의 그릇을 구경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죠. 과연, 이런걸 하고 있었구나. 다들 웃는 얼굴로 오소리씨를 칭찬하고 오소리씨의 딸에게 너희 엄마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 하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죠.

그런데 그 때 오소리씨의 초대에 제일 먼저 나타나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던 비버씨가 갑자기 일어나 퉁명스럽게 소리쳤습니다. 말도 안돼 이런건 게으름뱅이의 취미일 뿐이야.
오소리씨는 당황해서 비버를 쳐다보았습니다. 비버 무슨 일이야.
우리가 매년 만들어내는 곡식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작은 그릇에 곡식을 채운다는거지? 나무 열매나 몇개씩 따먹고 배를 주리던 시절에나 어울리는 재주야. 우리가 털이 없어 앞발이 부드러운 인간도 아니고 이런 흙투성이 물건이 필요할리가 없잖아.
비버씨는 다른 동물들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시간 낭비 했군. 성실한 숲속 동물들의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너는 어떻게 된거 아냐? 이런 걸 만들 시간에 댐에 나와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줄테니까. 동굴을 나가버리는 비버씨의 뒤를 웅성거리면서도 많은 동물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오소리씨는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은 오소리씨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연중에 농사를 짓는 동물이 훌륭해.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비버씨는 댐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 제일 훌륭했어요. 오소리씨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훌륭해 똑똑해 잘났어. 나는 상대도 안되지. 하지만 나는 그릇을 만들고 싶어. 
오소리씨는 낮에는 열매를 줍고 밤에는 그릇을 만들었어요. 동굴 가득 그릇이 쌓여갔어요. 가끔 개미핥기 장돌뱅이가 와서 그릇을 사주기도 했어요. 숲에서 만든것치고 훌륭해. 근데 여기선 아무도 안 쓰는거야?
충분히 훌륭하지 않아서 그래. 하고 오소리씨는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소리씨는 자기가 훌륭한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비버씨가 자길 인정해주지 않는거라고 생각했어요. 딸이 자라 스스로 땅을 파고 열매를 따올 수 있게 되자 오소리씨는 더욱 많은 시간을 그릇을 만드는데 쏟았습니다. 비버씨가 더 훌륭해 지는 동안 말이죠 결국 주변 숲 전체를 통틀어서도 제일 근면하고 훌륭한 동물이 되었죠.

오소리씨가 흰 흙을 가지러 구릉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황야의 문턱에서 쓰러졌을때도 비버씨는 댐을 짓고 있었죠. 소식을 들은 오소리씨의 딸이 오소리씨의 뼈를 오소리씨가 마지막으로 만든 그릇에 담아돌아왔죠.
뚜껑이 있는 항아리였어요 아주 특이한 작품이었죠. 그리고 작은 오소리씨는 이제 오소리씨와 완전히 똑같이 닮아 꼭 오소리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비버씨는 바쁜 일과 중에 부러 동굴에 찾아와 작은 오소리씨에게 말했어요. 알다시피 너희 엄마와 나는 사촌이다. 하지만 너희 엄마는 훌륭한 손재주를 썩혔어. 더 건실한 일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야.
작은 오소리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비버씨는 앞발을 핥다가 말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너의 친척이다 일자리가 필요하면 언제라도 찾아와라. 하지만 작은 오소리씨는 비버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대신 그 많던 그릇을 숲 속의 동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죠. 나눠주고 남은 것들은 모두 팔렸습니다.
장돌뱅이가 와서 며칠에 걸쳐서 실고 갔죠. 남은 것은 엄마 오소리씨의 뼈가 든 뚜껑이 달린 항아리 뿐이었어요. 작은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들진 않았어요. 하지만 댐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미도 독수리도 느티나무도 알듯이 그 해 정말로 큰 홍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손을 쓸수 없었죠. 비가 열흘 밤낮 동안 내렸어요. 해가 지나 더 크고 훌륭해졌던 비버씨의 댐이...결국엔 무너졌죠. 곡식 창고가 물이 잠겼어요. 숲의 반이, 아니 숲의 전부가 물에 잠겼죠 아무 것도 젖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파종을 위해 남겨놓은 것들도 모두 물이 묻어 썩기 시작했어요. 동물들은 아직 젖지 않은 나무 위에 올라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닷새가 지난 후였죠.

강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댐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개척한 공터는 대부분 다시 물에 잠겼고 숲은 아주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죠. 적어도 동물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모든 동물들. 살아남은 동물들이 겨우 해가 난 숲의 공터에 모였어요. 먹을수 있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파종할 씨앗에 물이 찬게 문제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습니다.

내가...인간 마을에 가서 씨앗을 구해오겠다. 곰씨가 입을 열자 모두 반대합니다. 여우씨가 말합니다. 무모한 짓 하지마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라. 털이 없어서 우릴 질투해 가죽을 벗기려고 드는 놈들이라고.
비버씨는 가슴이 타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다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인간 마을에 가야하는건 나야. 내 댐이 무너져서 이렇게 된거야. 내가 꼭 씨앗을 구해오겠어. 아직도 숲의 가장 훌륭한 동물이었던 비버씨가 그렇게 얘기하자 동물들은 모두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 망설였습니다.

그 때 풀 숲에서 작은 오소리씨가 나타났습니다. 뚜껑달린 항아리를 안은채로 작은 오소리씨도 물에 휩쓸렸었는지 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로 말했습니다. 씨앗을 구하러 가실 필요 없어요. 비가 오기 전에 제가 준비해둔게 있어요.작은 오소리씨는 뚜껑을 열어, 비버씨 앞의 겨우 마르기 시작한 땅에 항아리 살짝 기울입니다.
너..어머니의 뼈를...하고 놀란 비버씨 앞에 떨어진건

씨앗들이었습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숲에 비가 심상치 않게 오자 어머니 대신 씨앗을 넣어둔 것 입니다. 오소리씨의 뼈는 비에 씻겨 나갔지만 타타탁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젖지 않은 씨앗들이 공터에 떨어집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분명 어머니도 이걸 바라셨을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버씨는, 비버씨는 가만히 씨앗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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