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받아 마신다. 미지근한 물은 마시는게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수돗물은 음용수로 써도 문제가 없는 걸 알고 있기에 손을 모아 물을 담고는 물을 꿀꺽 삼킨다. 목구멍도 가슴도 아닌 어딘가가 살짝 지글거리며 아프던 감각이 금세 사라져간다. 공기를 잘못 삼켜 그렇게 어딘가가 작게 부풀어오르듯이 아파올 때면 물을 마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너는 언젠가 고집스럽게 그 아픔을 가만히 놔두었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기다려본 적이 있었다. 아픔은 작아지지만 결코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너는 그 뒤로 - 공기를 잘못 삼켰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은 원인을 모를 - 그 아픔이 올 때면 물이 있는 곳에 달려가 물을 마셨다. 그 아픔은 갈증과는 다르다. 그리고 갈증처럼 물이 없는 이상은 영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네가 있는 곳은 병원이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니고 정기적으로 들르는 곳이다. 아직 진료까지 시간이 남아 - 그리고 어쩐지 목 한 쪽 구석이 아직 아픈 것처럼 느껴져 - 커피를 사러 카페에 가려다가 혈액검사실 앞에 자판기가 있는 것을 발견해서 생수를 뽑아 마신다. 자판기가 있었던걸 알고 있었나 모르고 있었나. 화장실에 달려가 수돗물을 마신게 왠지 바보처럼 느껴진다. 주말에 예약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평일에 예약하고 왔던 건데, 평소에 느꼈던 것 보다 더 노인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너는 나도 어떤 사람이 보기엔 노인이겠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나이의 사람이면 나를 노인이라고 생각할지 궁금해한다. 스무살 쯤이면 그러려나.

진료는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났다. 마지막 진료 후에 사고가 있었어서 두달 가까이 제대로 운신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너는 고집스럽게 유산소 운동에 집착해서 숫자는 오히려 3개월 전보다 더 나아져 있었다. 너는 밝은 표정으로 깔깔 거리며 웃고 스스로를 너무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적당한 농담을 해서 괜찮은 사람을 연기한다. 너의 주치의는 - 어느 덧 10년 가까이 너를 진료해준 사람 - 웃으면서 4개월 후에 보자고 한다. 성공이다. 이 사람은 네 상태가 좋으면 다음 내원시기를 뒤로 미룬다. 그러면서 너무 그렇게 극단적으로 살지는 말고요. 하고 덧붙인다. 그건 네가 하루에 천칼로리씩 태우면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도 잘 아는 이야기이다. 여자친구들에게 자주 듣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너는 왜 1이랑 10밖에 없는 사람 같아? 너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칭찬을 들은 사람처럼 크게 입을 벌리고 웃는다. 그게 칭찬이 아니란걸 알기 때문이다.

약국에는 역시 노인들이 많다. 너는 약국 안의 사람의 수를 센다. 약 하나가 나오고 다음 사람이 약을 받는 시간을 세보고는 내가 얼마나 기다려야할까를 계산해본다. 의식해서 하는 거라기 보다, 모든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30분을 넘게 기다려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너는 살짝 실망한다. 그리고 내심 달리 할 일도 없으면서 뭘 실망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가져온 책을 편다.

넌 알고 있을까. 너는 요즘 위태로울 정도로 책을 많이 읽는다. 밖의 모든 것에 관심을 끄고 싶다는 듯이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책을 읽는다. 걸어다닐 때도 책을 읽고 자리에 앉아있을 수만 있다면 책을 읽는다. 억지로 책에서 고개를 돌려서 유튜브를 보고 스마트폰을 쥐고 뉴스를 듣는다. 세상 어딘가에 연결이 되어있지 않으면 사람은 살수 없다는 것을 너는 안다. 그러면서도 그걸 외면하고 싶어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너는 억지로 먹고 억지로 웃고 억지로 잔다. 자고 일어나면 달리기를 하고. 회사를 나간다. 그리고 남는 시간 전부를, 책을 읽는데 쓴다. 그것이 요즘 너의 작은 비밀이다.

삼십분은 금방이다. 처방전과 영수증을 찍어 보험회사에 보내며. 너는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밝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약국을 나간다. 친구들은 너의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 낯선 사람에게 가장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다. 그것은 네가 싫어하는 너의 아버지와 같은 습성이다. 아버지는 가까운 사람에게 잔혹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처럼 되는 것은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너는 자기가 했던 가혹한 행동들과 말을 떠올린다.


날씨가 좋은 평일이지만 네가 해야할 일은 없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해야할 일들은 전부 다 해두었기 때문이다. 1시도 되지 않아 모든 할 일을 마치니 이제 해야할 것이 없어진 너는 서점을 갈지 미술관을 갈지 고민이다. 누군가를 만날 약속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는 방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 같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면 된다. 대체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정말로 그리운 사람들이다.
아침에 지나왔던 덕수궁 길은 정말 예뻤지. 너는 적당히 시원하고 공기가 맑은 평일의 오후가 아쉬워서 경희궁과 숭정전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본다. 점심시간은 슬슬 끝나갈 텐데 주변의 직장인들이 무리를 지어서 산책하고 있다. 평소보다 나무의 색은 더 진하고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는 스프링쿨러마저 신나보인다. 목요일이면 노동절이고 그 뒤로 연휴가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좋아보인다. 어쩌다가 직장으로 잡혀 와서 월급을 벌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네 얼굴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물론 너는 오늘 출근을 한게 아니기 때문에 파란색의 볼캡에 진청색의 워크자켓, 진한 색의 진을 입어서 별로 직장인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표정이 그럴거라고 말해볼 뿐이다.

경희궁을 한바퀴 돌고 나니. 너는 또 서점에도 가고 미술관에도 가기로 한다. 덕수궁 미술관에도 보고 싶은 전시가 있었지만 현대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전시는 주말에는 자못 붐벼 지금이 아니면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왜 할일을 가득 만들어내서 일정을 꽉채우고 싶어할까. 여유롭게 밥이라도 먹으면 좋을텐데 너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왜 밥을 먹지 않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너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한다면 도대체 왜 잘 읽지도 않는 과월호 스켑틱을 또 샀는지를 먼저 물어보는게 낫겠지.
너는 책을 산 돈은 네 돈이 아니라 나라에서 주기라도 한 것처럼 책을 사댄다. 안 그래도 그랬던 것을 요즘에는 더욱 고삐가 풀린 것처럼 사댄다.

네가 보고 싶었던 전시는 해외 현대조각가의 전시는 아니었지만. 하고 있던 특별전을 피한 적이 없는 너는 바로 티켓을 끊어서 보러 들어간다. 네 취향일리가 없다는 걸 알고있어서 반쯤 웃으려고 들어간 너는 역시나 전시물 전부를 깔깔 거리면서 본다. 전시물과, 전시물을 둘러싸고 있는 관람객들 모두가 너무 웃기다. 그렇게 까지 비웃을 필요는 없이 나름 조형적인 미를 지닌 뛰어난 작품들이었지만 너는 유쾌한 기분으로 전시를 둘러본다. 다른 모든 관람객들과 다르게 혼자서 보러온 거기 때문에 전시를 다 보는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는 또 남들은 잘 보지 않는 다른 특별 전시까지 꼼꼼히 보고는 웃기긴 한데 좀 아쉽다 그치, 라는 생각을 한다.

어릴 때 너는 어딘가에 혼자있어야 할 때 유쾌한 사람의 흉내를 내거나 다른 누군가가 있는 듯한, 그것도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흉내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혼자 있어야 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저 흉내들을 때때로 두개 이상, 어떤 때는 세개 이상을 하기도 했다.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유쾌한 태도로 뭔가 생각을 하는 것처럼 굴었다는 뜻이다.
언젠가는 너에게 그런 흉내를 내지 않아도 그 어떤 사람도 너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 라고 말해줘야 할 텐데 나는 너도 이미 그걸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자기 배역에 빠진 광대처럼 이제는 그 흉내를 그만두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너는 뭐가 진짜인지 이제는 좀처럼 알수 없게 된게 아닐까 싶다.

전시를 다 보고 너는 평소 그랬던 것처럼 기념품 점을 기웃거리고, 다른 미술관에는 없는 이 미술관의 장점인 예술 서점을 들린다. 좁고 손님도 적은 이 서점은 네가 이 미술관을 들를 때 마다의 기쁨이다. 이미 미술관에 들르기 전 대형 서점에서 잡지 몇권을 사서 가방이 무거운데도 오늘도 굳이 들르는 것을 빼먹지 않는다. 불편하게 길고 좁은 형태로 되어 있는 이 서점은 책 진열대 앞에 서있으면 어색하게 다른 손님과 나란히 서있게 된다. 너는 책을 훑어보다 스스로 생각한 농담에 웃겨 비척비척 움직이려다 옆에 서있던 사람에게 부딪힐뻔 한다. 부딪히지 않았는데도 너는 깜짝 놀라서 그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인다. 너는 쑥스러워져서 (살 생각이 없었던) 스티븐 샤피로와 히토 슈타이얼을 하나씩 들어서 계산을 하고 나간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고 바람이 살짝 더 강해졌을 뿐 아직도 그대로 좋은. 고스란히 아름다운 오후였지만. 너는 황급히, 얼굴이 빨개진 채로 뛰쳐나간다.

나는 네가 왜 깜짝 놀랐는지 안다. 너는 책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었던 모르는 사람에게 봐봐 이거 웃기다 라고 보고있던 책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네가 그런 짓을 하려고 했는지도 안다. 거긴 네가 자주 가던 미술관에 딸린 서점이었고 옆에 서있던 낯모르는 사람은 너에게 아주 익숙한 키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키의 사람이 바로 옆에 서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너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이걸 봐. 하고 말을 걸려고 했었다.

그건 그냥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어 라고 너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너는 깜짝 놀라서 이미 미술관을 나와 거의 뛰는듯한 속도로 도망친다.

나무는 흔들리고. 오후가 아직 남아있었는데 말이지.

25년 5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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