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대해서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나”라고 칭하도록 하자. 이 글의 배경 시기는 초여름이다.
…
할머니를 화장하러 왔다. 화장터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관과 가족들로 가득차 있고 화장은 답답할 정도로 오래 걸린다. 섬뜩할 정도로 젊은 여자의 사진을 든 사람들이 방금 화장터를 떠났다. 나는 화장터 안내 모니터에 뜬 그 이름을 기억해두려다가 일주일도 안되서 그 이름을 잊어버릴 것을 깨닫는다. 세 글자에서 네 글자를 입력하도록 되어 있는 이름 칸을 꽉채우고도 이름을 다 적지 못 한 외국인의 이름도 본다.
나는 옆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는 사촌동생에게 말을 건다.
재미있는거 없니? 재미있는거 없어. 뭐라도 하고 싶은 말은 없니? 하고 싶은 말 없는데.
그제서야 이 사촌동생이 스물 다섯살인걸 떠올린다. 스물 다섯살은 지루하고 따분하다. 스물 다섯살보다 지루한 것은 스물 네 살이고 스물 네 살보다 따분한 것은 스물 세살이다.
너 태어나서 이제까지 뭔가 꾸준히 한거 없니? 화제를 약간 돌려본다. 따분한 스물 다섯살인 사촌동생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한다. 살아있기를 꾸준히 했지. 나는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괜찮은 농담인데 특히 할머니를 화장하러 와서 하기에 아주 적절해. 하고 평한다. 사촌동생은 그 생각까진 못했는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답한다. 할머니는 91년이나 살아있기를 꾸준히 하셨지.
그래 그렇고 말고. 나는 꾸준히 살아있기를 그만둔 할머니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장례식장을 갈 때는 항상 게으름을 부린다. 입관에 맞춰서 장례식장에 가겠다고 연락하고는 정장을 입은 채 회사에 출근했다. 고모가 준비한 상주 정장은 지독하게 못생겨서 다른 친척들과 같이 그런 옷을 입고 한 셋트가 되고 싶지 않았다. 급한 일을 처리 하고 회사를 나왔지만 그게 정말 그렇게 급한 일인지는 나도 의문이었다. 그냥 나는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내 모교 병원의 장례식장이었다. 서울역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회사 사람들에게 조문 답례로 보낼 메일의 문장이었다.
<…9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할머니와 거의 교류를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자상한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성격이 강하고 리더십이 있었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처럼 치매가 오셨고 매년 점점 작아져 가셨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시긴 하였지만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엔 얼굴을 뵙지도 못했습니다. 어차피 저를 보아도 제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병원의 장례식장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곳이다. 외할머니 중 한 분의 장례를 여기서 치뤘다. 그게 아니더라도 학교 앞을 내가 모를리가 없었다. 길을 잃을리도 없으면서 병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장례식에 가기 싫은 것은 둘째치고 나와 성이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장소에 갈 생각을 하니까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초여름의 햇볕에 정장 자켓 목 부분으로 땀이 스며들었다. 후회는 되었지만 펑퍼짐한 디자인의 싸구려 원단의 정장과는 다르게 일부러 맞춘 것처럼 잘 맞는 정장을 입으면 친척들과 다른 사람처럼 구별되어 보일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라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입관시간에 살짝 어긋나게 도착한 나는 유리창 밖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한 무리의 친척들이 입관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속으로 할아버지는 안 오셨네요. 라고 중얼거렸다 내 농담에 관대했던 할아버지가 들었으면 자기 부인의 입관 중이라도 빙글빙글 웃으셨을 것이다. 유리창 너머의 친척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나와 뒷 모습이 닮았고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입관 절차가 끝날 때 쯤에 바로 손 아래의 사촌 동생이 나를 발견했다. 고모는 나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할머니께 인사해, 라고 말하며 내 손을 끌어 관을 만지게 했다. 관은 작았다.
이야 멍청한 뚱보 자식들, 하고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사촌동생들을 하나하나 엉덩이를 발로 차주었다. 내 친가는 여자가 귀한 집안이고 나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막내는 아직 스물다섯살이니까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다. 최근 10킬로이상 살이 빠진데다 원래부터 친가를 통틀어 제일 키가 큰 나는 최근에 살이 빠진 사람 특유의 가학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는 자세로 사촌동생들을 마음 껏 괴롭혔다.
내가 친가 모임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내 연락처를 가진 친척들은 몇 명 없었고 평생 나를 몇 번 보지 못한 사촌 동생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 중 누구보다 친가의 자손처럼 생기고 그 사람들답게 말하는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매주 얼굴을 보는 사람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나는 어색함 없이 사람들과 농담을 하고 인사를 했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았다. 그건 그 모든 사람들이 내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깔깔 웃고 적당한 농담을 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서 인사 했다.
아버지는 나를 멀리서 부르더니 옆에 앉으라고 하더니, 안부나 인사도 없이 살을 좀 더 빼는게 좋지 않겠니 라고 말을 했다. 나는 저항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몇 년만에 만나서 처음 하는 얘기가 살을 빼라는거에요? 아버지는 - 예전과 다르게 날카롭지않고 본인 주장으로는 몹시 둥글둥글해졌다는 - 아니 건강이 걱정되니까 그렇지. 라고 말했다. 다소 짜증이 났었던 나는 아버지의 근황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아버지 외손자는 봤어요? 누나 아들이요.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원래의 모습을 살짝 보여주며 - 말투에 빈정거림이 섞였다는 뜻이다 -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몇 번 우리 동네로 온다고 말을 하더니 한 번도 안 와서 아직 못 봤다. 아버지와 길게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전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가 쪽 친척인 칠촌고모는 내가 인사를 하기 전에 먼저 내 옆에 와서 잘 지냈냐고 동남 방언으로 물어보았다. 장례식 내내 울기는 커녕 우는 척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 때만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모는요! 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고모의 두 딸은 대학을 졸업한지가 오래라며 이번 장례식에 둘 다 데리고 왔다. 둘 다 왜 건축을 전공한거죠? 라고 묻자 우리 집안 사람들은 한 반 절 정도는 건축 전공이야 니가 문과인게 진짜 특이한거지 라고 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친손자들은 다 멍청해서 다들 전공도 별로고 직업도 별론데요. 할머니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라고 하니 칠촌고모는 아이구 빈소에서 못하는 말이 없다 하고 내 볼을 꼬집었다.
한참 손님을 맞다가 문득 저 쪽을 쳐다보니 아버지가 작은 아이 하나를 안아서 무릎 위에 앉혀보고 있었다. 뒤늦게 장례식장에 온 누나의 아들이었다. 무릎 위에 앉거나 소리를 지르며 뛰는 것 정도 할 만한 그 아이는. 얼굴이 하얗고 친척 중 누가 말한 것처럼 누나보다 나를 좀 더 많이 닮았다. 아이는 몇 번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직 말을 하지 못했고 나는 아이에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례를 하는 내내 장례식장에 당신이 오는 상상을 했다. 바싹 말라서 상복을 입고 있는 나를 보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생각했다. 밤이 깊도록 당신은 오지 않았기에 차가 끊기기 직전에야 자리를 나선 나는 혼자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심야 버스에서 내 옆에 앉은 여자아이는 술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 버스가 흔들리자 벌떡 잠에서 깨어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입을 막은 손 옆으로는 거품처럼 토가 흘러나왔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철야를 하기 위해 준비했던 봉지와 수건, 흰 티셔츠를 아이에게 건네 주었다. 아이는 소중하게 안은 프라이탁 가방 위로 토를 흘리다가 내가 준 봉지에 쏟아내듯 술을 토해내고는 내 티셔츠로 입가와 손을 닦았다. 어제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내 가방에 이런게 있을리가 없었겠지, 그리고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 사람 옆에 내가 없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발인하는 날 아침, 고인이 원한 불교예식에 맞게. 아니 이게 정말 불교 예식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평생 다녔던 절의 주지스님은 한참 불경을 외우고 몇차례 씩이나 사람들에게 절을 시키고 나서는 고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명씩 차례대로 인사를 드리라고 말했다. 배례랑은 상관이 없는 그냥 한없이 개인적인 작별인사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훌쩍거리고 슬퍼하는 동안 나는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몹시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교도지만 정말 고인이 원했다면 절 정도야 몇번이라도 해줄 수 있었다만 이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고인에게 하고 싶은 얘길 하라고? 나는 도망치려 들었지만 금세 잡혀들어와 작별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할 말이 없는데 말이다. 빈소에 들어가 영전 앞에 서니 더욱 더 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9년이 지났다. 그 뒤로 모든 걸 놓은 사람처럼 점점 작아지고 쪼그라들어서 내가 알던 할머니의 일부분인 것처럼 보이던 그 노인과 나는 몇년 째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심술궂은 말투도, 번쩍거리던 눈빛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자식이든 손주든 가만두지 않았던 그 성질머리도 없었다. 영정 사진은 할머니가 쪼그라들지 않았던 좀 더 생생하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사진이다. 할머니에 대해서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 하나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순서를 기다려 작별 인사를 나는 빈소를 빠져나와 순간의 변덕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들으셨겠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곧 발인을 할 거고요. 마지막으로 하실 얘기가 있으시면 전해드릴게요. 어머니는 머뭇거렸다. 할머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뭐라고 할 말이 없구나.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끊을게요. 어머니는 전화를 끊는 나에게 급하게 뭐라고 말했다. 사랑한다 어쩌고 하는 얘기였던 것 같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바쁘다. 이제부터 말 그대로 관을 들어야 한다. 화장터에도 가야한다. 화장이 끝난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의 유골함을 모셔야 할 곳에도 가야하고 어떤 친척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어떤 친척들에게는 작별의 인사를 해야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나면 혼자 집에 가서 누워야 한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 할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집에는 돌아가야한다. 어른이 된 손자는 이런 걸 다 해내는 법이다. 회사에 가면 조문에 대한 감사 메일을 써야지. 뭐라고 써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번 조모상에 따스한 마음과 위로 나누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장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말로 하기에 부족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할머니와 저는 똑같은 개띠입니다. 제가 사리 분간을 못하던 시절, 할머니는 당신과 제가 개띠라고 가르쳐주셨는데. 저는 “할머니가 개띠면 저는 강아지띠죠.”라고 어린아이치고도 좀 바보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너무 좋아하셔서, (저야 질색팔색하였지만) 제가 스무살이 훨씬 넘어서도 친구들과 친척 분들에게 종종 이야기하곤 하셨습니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봉안함을 들고 할머니를 모시다가, 제가 할머니 평생 효도라고는 그렇게 딱 두 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진심어린 배려와 위로가 매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에 보답 할 수 있도록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소식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5년 ㅇ월ㅇ일, ㅇㅇㅇ배상>
25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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