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대해서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나”라고 칭하도록 하자. 이 글의 배경 시기는 초여름이다.


할머니를 화장하러 왔다. 화장터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관과 가족들로 가득차 있고 화장은 답답할 정도로 오래 걸린다. 섬뜩할 정도로 젊은 여자의 사진을 든 사람들이 방금 화장터를 떠났다. 나는 화장터 안내 모니터에 뜬 그 이름을 기억해두려다가 일주일도 안되서 그 이름을 잊어버릴 것을 깨닫는다. 세 글자에서 네 글자를 입력하도록 되어 있는 이름 칸을 꽉채우고도 이름을 다 적지 못 한 외국인의 이름도 본다.

나는 옆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는 사촌동생에게 말을 건다.
재미있는거 없니? 재미있는거 없어. 뭐라도 하고 싶은 말은 없니? 하고 싶은 말 없는데.
그제서야 이 사촌동생이 스물 다섯살인걸 떠올린다. 스물 다섯살은 지루하고 따분하다. 스물 다섯살보다 지루한 것은 스물 네 살이고 스물 네 살보다 따분한 것은 스물 세살이다.
너 태어나서 이제까지 뭔가 꾸준히 한거 없니? 화제를 약간 돌려본다. 따분한 스물 다섯살인 사촌동생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한다. 살아있기를 꾸준히 했지. 나는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괜찮은 농담인데 특히 할머니를 화장하러 와서 하기에 아주 적절해. 하고 평한다. 사촌동생은 그 생각까진 못했는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답한다. 할머니는 91년이나 살아있기를 꾸준히 하셨지.
그래 그렇고 말고. 나는 꾸준히 살아있기를 그만둔 할머니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장례식장을 갈 때는 항상 게으름을 부린다. 입관에 맞춰서 장례식장에 가겠다고 연락하고는 정장을 입은 채 회사에 출근했다. 고모가 준비한 상주 정장은 지독하게 못생겨서 다른 친척들과 같이 그런 옷을 입고 한 셋트가 되고 싶지 않았다. 급한 일을 처리 하고 회사를 나왔지만 그게 정말 그렇게 급한 일인지는 나도 의문이었다. 그냥 나는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내 모교 병원의 장례식장이었다. 서울역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회사 사람들에게 조문 답례로 보낼 메일의 문장이었다.

<…9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할머니와 거의 교류를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자상한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성격이 강하고 리더십이 있었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처럼 치매가 오셨고 매년 점점 작아져 가셨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시긴 하였지만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엔 얼굴을 뵙지도 못했습니다. 어차피 저를 보아도 제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병원의 장례식장은 내가 잘 알고 있는 곳이다. 외할머니 중 한 분의 장례를 여기서 치뤘다. 그게 아니더라도 학교 앞을 내가 모를리가 없었다. 길을 잃을리도 없으면서 병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장례식에 가기 싫은 것은 둘째치고 나와 성이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장소에 갈 생각을 하니까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초여름의 햇볕에 정장 자켓 목 부분으로 땀이 스며들었다. 후회는 되었지만 펑퍼짐한 디자인의 싸구려 원단의 정장과는 다르게 일부러 맞춘 것처럼 잘 맞는 정장을 입으면 친척들과 다른 사람처럼 구별되어 보일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라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입관시간에 살짝 어긋나게 도착한 나는 유리창 밖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한 무리의 친척들이 입관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속으로 할아버지는 안 오셨네요. 라고 중얼거렸다 내 농담에 관대했던 할아버지가 들었으면 자기 부인의 입관 중이라도 빙글빙글 웃으셨을 것이다. 유리창 너머의 친척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나와 뒷 모습이 닮았고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입관 절차가 끝날 때 쯤에 바로 손 아래의 사촌 동생이 나를 발견했다. 고모는 나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할머니께 인사해, 라고 말하며 내 손을 끌어 관을 만지게 했다. 관은 작았다.

이야 멍청한 뚱보 자식들, 하고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사촌동생들을 하나하나 엉덩이를 발로 차주었다. 내 친가는 여자가 귀한 집안이고 나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막내는 아직 스물다섯살이니까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다. 최근 10킬로이상 살이 빠진데다 원래부터 친가를 통틀어 제일 키가 큰 나는 최근에 살이 빠진 사람 특유의 가학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는 자세로 사촌동생들을 마음 껏 괴롭혔다.

내가 친가 모임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내 연락처를 가진 친척들은 몇 명 없었고 평생 나를 몇 번 보지 못한 사촌 동생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 중 누구보다 친가의 자손처럼 생기고 그 사람들답게 말하는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매주 얼굴을 보는 사람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나는 어색함 없이 사람들과 농담을 하고 인사를 했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았다. 그건 그 모든 사람들이 내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깔깔 웃고 적당한 농담을 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서 인사 했다.

아버지는 나를 멀리서 부르더니 옆에 앉으라고 하더니, 안부나 인사도 없이 살을 좀 더 빼는게 좋지 않겠니 라고 말을 했다. 나는 저항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몇 년만에 만나서 처음 하는 얘기가 살을 빼라는거에요? 아버지는 - 예전과 다르게 날카롭지않고 본인 주장으로는 몹시 둥글둥글해졌다는 - 아니 건강이 걱정되니까 그렇지. 라고 말했다. 다소 짜증이 났었던 나는 아버지의 근황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아버지 외손자는 봤어요? 누나 아들이요.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원래의 모습을 살짝 보여주며 - 말투에 빈정거림이 섞였다는 뜻이다 -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몇 번 우리 동네로 온다고 말을 하더니 한 번도 안 와서 아직 못 봤다. 아버지와 길게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전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가 쪽 친척인 칠촌고모는 내가 인사를 하기 전에 먼저 내 옆에 와서 잘 지냈냐고 동남 방언으로 물어보았다. 장례식 내내 울기는 커녕 우는 척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 때만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모는요! 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고모의 두 딸은 대학을 졸업한지가 오래라며 이번 장례식에 둘 다 데리고 왔다. 둘 다 왜 건축을 전공한거죠? 라고 묻자 우리 집안 사람들은 한 반 절 정도는 건축 전공이야 니가 문과인게 진짜 특이한거지 라고 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친손자들은 다 멍청해서 다들 전공도 별로고 직업도 별론데요. 할머니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라고 하니 칠촌고모는 아이구 빈소에서 못하는 말이 없다 하고 내 볼을 꼬집었다.

한참 손님을 맞다가 문득 저 쪽을 쳐다보니 아버지가 작은 아이 하나를 안아서 무릎 위에 앉혀보고 있었다. 뒤늦게 장례식장에 온 누나의 아들이었다. 무릎 위에 앉거나 소리를 지르며 뛰는 것 정도 할 만한 그 아이는. 얼굴이 하얗고 친척 중 누가 말한 것처럼 누나보다 나를 좀 더 많이 닮았다. 아이는 몇 번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직 말을 하지 못했고 나는 아이에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례를 하는 내내 장례식장에 당신이 오는 상상을 했다. 바싹 말라서 상복을 입고 있는 나를 보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생각했다. 밤이 깊도록 당신은 오지 않았기에 차가 끊기기 직전에야 자리를 나선 나는 혼자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심야 버스에서 내 옆에 앉은 여자아이는 술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 버스가 흔들리자 벌떡 잠에서 깨어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입을 막은 손 옆으로는 거품처럼 토가 흘러나왔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철야를 하기 위해 준비했던 봉지와 수건, 흰 티셔츠를 아이에게 건네 주었다. 아이는 소중하게 안은 프라이탁 가방 위로 토를 흘리다가 내가 준 봉지에 쏟아내듯 술을 토해내고는 내 티셔츠로 입가와 손을 닦았다. 어제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내 가방에 이런게 있을리가 없었겠지, 그리고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 사람 옆에 내가 없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발인하는 날 아침, 고인이 원한 불교예식에 맞게. 아니 이게 정말 불교 예식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평생 다녔던 절의 주지스님은 한참 불경을 외우고 몇차례 씩이나 사람들에게 절을 시키고 나서는 고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명씩 차례대로 인사를 드리라고 말했다. 배례랑은 상관이 없는 그냥 한없이 개인적인 작별인사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훌쩍거리고 슬퍼하는 동안 나는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몹시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교도지만 정말 고인이 원했다면 절 정도야 몇번이라도 해줄 수 있었다만 이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고인에게 하고 싶은 얘길 하라고? 나는 도망치려 들었지만 금세 잡혀들어와 작별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할 말이 없는데 말이다. 빈소에 들어가 영전 앞에 서니 더욱 더 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9년이 지났다. 그 뒤로 모든 걸 놓은 사람처럼 점점 작아지고 쪼그라들어서 내가 알던 할머니의 일부분인 것처럼 보이던 그 노인과 나는 몇년 째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심술궂은 말투도, 번쩍거리던 눈빛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자식이든 손주든 가만두지 않았던 그 성질머리도 없었다. 영정 사진은 할머니가 쪼그라들지 않았던 좀 더 생생하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사진이다. 할머니에 대해서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몇 개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 하나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순서를 기다려 작별 인사를 나는 빈소를 빠져나와 순간의 변덕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들으셨겠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곧 발인을 할 거고요. 마지막으로 하실 얘기가 있으시면 전해드릴게요. 어머니는 머뭇거렸다. 할머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뭐라고 할 말이 없구나.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끊을게요. 어머니는 전화를 끊는 나에게 급하게 뭐라고 말했다. 사랑한다 어쩌고 하는 얘기였던 것 같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바쁘다. 이제부터 말 그대로 관을 들어야 한다. 화장터에도 가야한다. 화장이 끝난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의 유골함을 모셔야 할 곳에도 가야하고 어떤 친척들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어떤 친척들에게는 작별의 인사를 해야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나면 혼자 집에 가서 누워야 한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 할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집에는 돌아가야한다. 어른이 된 손자는 이런 걸 다 해내는 법이다. 회사에 가면 조문에 대한 감사 메일을 써야지. 뭐라고 써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번 조모상에 따스한 마음과 위로 나누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장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말로 하기에 부족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할머니와 저는 똑같은 개띠입니다. 제가 사리 분간을 못하던 시절, 할머니는 당신과 제가 개띠라고 가르쳐주셨는데. 저는 “할머니가 개띠면 저는 강아지띠죠.”라고 어린아이치고도 좀 바보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너무 좋아하셔서, (저야 질색팔색하였지만) 제가 스무살이 훨씬 넘어서도 친구들과 친척 분들에게 종종 이야기하곤 하셨습니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봉안함을 들고 할머니를 모시다가, 제가 할머니 평생 효도라고는 그렇게 딱 두 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진심어린 배려와 위로가 매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에 보답 할 수 있도록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소식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5년 ㅇ월ㅇ일, ㅇㅇㅇ배상>



25년 8월의 글이다.

유카르(아이누어: юкар, 일본어: ユーカラ) 아이누인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서사시. 방언에 따라 투이탁(туитак), 우에페르케(уэпэркэ)라고도 불린다.
주로 신에 다한 이야기인 카무이 유카르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 아이누 유카르로 나뉜다. 홋카이도의 자연현상이나 생태를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려는 것들이 많다.

모르는 사람과 커피를 마셨다. 20분 남짓 커피를 마시고 프랑스 작가들에 대한 쓸데없는 얘길 했다. 키가 크고 깊은 눈을 한 그 모르는 사람은 카메라에 내가 찍힌 사진을 보여줬다. 파란 모자를 쓴 안경 쓴 사람이 프레임의 끝에 걸려있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뭔가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과 헤어져서 1시간 쯤 걸었을 때야 비로소 그 사람이 보여준 내 사진을 달라고 하는 걸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깨달은 이유는 홋카이도에는 왜 오신 거에요? 라는 그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그 질문에 대해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는데 그 때, 되찾고 싶은게 있어서요. 같은 바보 같은 대답은 하지 말 걸 그랬다.

한국에 돌아오니 곧 장마가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벽은 여름이 시작하기 전 겁을 내던 것만큼은 덥지 않았고 비는 땅이나 겨우 적실 정도로만 내렸다. 우산 살의 간격이 좁고 크기가 작은 우산을 받쳐들고 퇴근을 하다가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지도의 공백이나 기억의 구멍을 볼 때 처럼 나는 멍하게 그 공간을 쳐다보고 거기에 무엇이 있었을 거란 걸 추측할 뿐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날 꿈에 눈썹이 붙고 굵은 곱슬머리를 한 장사아치가 탁상 위에 여러개의 안경을 늘어놓고 그 중에 하나를 골라 가지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반짝이는 안경을 만지다가 그런데 내 안경은 어디갔지? 내가 쓰고 있던 안경 말야. 라고 물었다. 곱슬머리의 장사아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을 피했다. 나는 뻔뻔스러운 그 얼굴을 보며 내 안경을 되돌려달라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 안경을 두는 곳에 가보니 내 안경은 그대로 있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안경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쓰는 것은 여행기라고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자연현상에 대해서 내가 그럴 듯 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유카르, 나만의 아이누유카르라고 하겠다.
나는 내가 이걸 왜 쓰는지도 이해할 수 없고, 단지 내가 메모처럼 남긴 손 글씨에 이 세가지에 대해서 글을 써야한다고 적었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순서도 진실 여부도 아무 의미가 없다.

<<물의 교회>>
“…동쪽에서 신이 내려왔다. 아오다모 나뭇가지 위에 멈췄다. 바위산 쪽에 그 강한 날개짓 소리를 느꼈다…” 사라시나 겐조, <아이누 신화>, 2000. 중 올빼미 신의 노래

물의 교회chapel on the water라는 이름은 아이러니하다. 굳이 번역을 한다면 물 위의 예배당이라고 번역해야 할텐데 종교의식을 위한 모임 장소인 채플이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비싼 리조트 중 한 곳의 숙박객들에게만 -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개된다. 그걸 보면 이 곳은 일본 고급 호텔 특유의 웨딩채플인 것을 알 수 있다. - 공개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애초에 채플이란 가난한 자와 망토를 나눠입었다는 성 마르티노의 일화 때문에 채플(작은 망토와 어원이 같다)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종교시설이란 모든 사람을 위한 장소다, 라고 사무 노동자 주제에 유사 프롤레타리아적인 투덜거림을 가슴에 간직하고 리조트에 온 이유는. 열에 일곱 정도의 비율로 안도 타다오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인 이 교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씁쓸하다. 나는 딱히 취미도 없으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건축에 집착할 생각인지. 결국 삿포로에서 특급 기차로도 3시간 가량 떨어진 스키 리조트에, 굳이 할 일 도 없는 초여름에 오고야 말았다.

일본에 도착한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외국인- 동물이 포함된 액티비티는 일본 체류 10일이 지나야 가능하다고 한다. - 에 가족도 동반하지 않은 혼자 - 리조트의 액티비티들은 기본 1팀 4인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혼자 1팀을 구성하게 되면 팀이 부담해야하는 수수료를 혼자 내야한다 - 스키철도 아닌 스키 리조트에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초부터 아무 것도 없었다.
리조트가 자랑하는 수많은 비성수기 액티비티들 조차도 대체로 단란한 가족 단위로 설계된 것들이라 독신 남성에게는 권하기가 곤란 한 것들이다. 뭘 어쩌겠는가. 물의 교회에 갔다가. 러닝을 하고, 또 물의 교회에 가고. 다시 러닝을 해야지 하고 농담처럼 생각했는데. 나는 정말로 그렇게 2박 3일을 보냈다.

그렇게 처음 물의 교회를 참관한 것은 밤이었다. 체류한 3일 내내 비가 내리고 그치길 반복했고, 첫 날 밤에도 비는 내렸다. 야간 참관엔 사람이 무시무시하게 많았다. 다들 어떻게든 이 멋진 건축물과 이 멋진 건축물에 있는 자신의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고, 혼자 온 독신 남성에 의욕도 그리 많지 않은 나는 그런 사람들의 프레임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 어떤 각도로 사진을 찍어도 프레임에 너무 많은 사람이 찍힐 정도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회로 들어왔다. 알고보니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리조트에서 줄 까지 세우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물의 교회에 딸려있는 연못에 비가 오는 광경은 아름다웠지만, 리조트 스탭이 갑자기 멋진 걸 보여주겠다는 듯이 물의 교회 전면의 창을 오픈 했을 때는 실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한 꺼번에 카메라를 열어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나도 견디지 못하고 카메라를 켰다. 디즈니랜드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디즈니랜드랑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결국 첫날은 인파를 견디지 못하고 금세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가(딱히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의 교회의 아침 참관시간을 기다려 들어갔다. 홋카이도의 여름 아침은 이르다, 산의 아침은 더욱 이르다. 밤의 참관에 비해 사람은 반의 반의 반도 없었다. 아침 참관은 몇 년 전에 새로 생긴 참관 가능 시간이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사람들이 안다 모른다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아침이기 때문에 사람이 없는거였다. 밤보다는 여유롭게 나는 연못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도문을 외웠다.  조용한 연못 너머의 숲에서 새 소리가 들렸다.

물의 교회는 특이한 위치에 있다. 리조트 안에는 통채로 레스토랑 건물로 쓰이는 건물이 있고, 그 건물의 1층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물의 교회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온다. 레스토랑 건물의 1층, 2층 창가 위치에서는 물의 교회의 후면부를 바라 볼 수 있다. 나는 그곳에 밥을 먹다가 결혼 예식을 위해 가는 커플을 보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외에 물의 교회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숲을 직접 한 바퀴 돌아본 봐, 최소한 바지가 엉망으로 젖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물의 교회로 갈 수 없다.
물의 교회는 숲과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연못, 그리고 그 연못에 접한 노출콘트리트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에 접근 할 때는 아까 얘기했던 오솔길을 따라 회색의 벽을 지나쳐 입구로 들어가면 된다. 입구로 들어갔을 때 보이는 것은 교회 건물의 정면, 그리고 연못. 그 연못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흰색의 십자가이다. 사람들이 물의 교회 건물을 가장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은 회색의 벽 입구로 들어갈 때 바로 그 순간 뿐이다.
연못의 둘레를 따라 걸어가면 교회 건물로 들어 갈 수 있는데. 교회 건물 위에는 십자가가 겹치듯이 솟아 있고 - 물론 비는 막아주지 않는다. - 반나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예배당이다. 예배당은 작다. 50명, 노력하면 80명 정도도 가능할 지 모르겠다. (영 별로로 보이는) 오르간과 성서, 그리고 프로젝터 정도는 있다. 특이한 것은 설교자를 위한 자리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 일반적인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어서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정말 어떤 종교적 신념도 없는 사람이다. 굳이 따지자면 선사상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이런 곳에서는 기도를 하기 적절하진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나도 몇 번이고 러닝을 반복했다. 숲 길을 달리고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혼잣말을 계속했다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혹은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날 밤의 물의 교회는 가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나는 이미 물의 교회에 대해서 아무 것도 기대하는 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삼일째는 또 다시 산에 올랐다. 그리고 밥을 먹으며 물의 교회를 바라보다가 결심이 들어서 한 번 더 물의 교회에 들어갔다. 이번 참관에도 사람은 없었다. 나는 뭘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단지 자리에 앉아서 숲의 소리를 들었다.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30분 정도는 충분히 앉아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지도 스마트폰을 켜지도 않았다. 이미 아침부터 산에 오른 나는 전도자 같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왕국이 돌아오길 그러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단지 앞을 바라보았다.

아주 우연히. 앞서서 온 팀들이 교회를 떠나고 마지막 입장 시간에 맞춰서 다음 팀들이 교회로 걸어오고 있을 때 아주 짧은 5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교회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앉아있을 때가 있었다. 5분 보단 더 길었을지도, 아니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 때 산을 스치는 바람이 연못을 쓸어올리며 공중으로 솟아 올랐고. 그 커다랗고 밀도 높은 바람에 물결이 생겨나 연못의 바깥 쪽에서 내가 앉아있는 교회 건물 쪽으로 밀려들어왔다. 모든 숲이 한 꺼번에 말하는 것처럼, 폭풍이 먼 곳에서 불려나올 때 그러는 것처럼 나무가 한 꺼번에 서로 쓸려가며 흔들렸다. 소음이, 바람이 찢겨가는 소리와 돌과 모래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등장 하는 소리처럼 모든게 한 번에 시끄러워졌다 조용해졌다.

그리고 교회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산지 이른 아침의 어두운 하늘 저 편, 아무 것도 없는 공중을 쳐다보고는. 거기 무언가가 멀리서 날아와 숲의 꼭대기에 바람과 함께 내려 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진 않았지만 굳이 모습을 상상한다면 커다란 새. 영혼으로 만들어져 빛처럼 검고, 사람처럼 울고 사람같은 표정을 하니 그 모습이 불길하나 내가 몹시 사랑하는 그런 새 말이다. 그 새가 오랜 시간을 기다려 나를 만나기 위해 산과 산으로 이어진 바람 길을 타고 비와 함께 이곳까지 날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는 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시끄러운 말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교회에 혼자 있는게 아니었다.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를 나섰다. 그리고 새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어느새 사라져서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리조트에서 해야할 일을 전부 해치운 나는 그날 오전 일찍 리조트를 떠났다. 비는 금세 그쳐 내가 리조트를 떠날 때 쯤이면 완전히 맑은 날씨가 되어 있었다.


<<축제의 밤>>

“…나는 시코츠 호수에 사는 한 마리 여우이다. 인간마을에 뭔가 근심거리가 일어나면, 그것을 몰래 알려주고, 힘든일이 생기면 우는 소리로서 어디에서 재앙이 오는지 주의를 주어서, 노인은 그것에 따라 신에게 가호를 바라고 재앙을 피했다…” 사라시나 겐조, <아이누 신화>, 2000. 중 누키베츠 마을의 카무이 유카르

이번 삿포로 체류는 또 삿포로의 소란부시 축제와 일정이 겹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이 3번째로 일정이 겹치는건데.  작년에는 8월에 축제가 있었던 걸 보니 주최 측에서는 한국 정부, 혹은 내 인스타그램을 통해 출국일정을 확인하는 것 같다.

삿포로에 도착한 첫날 호텔 앞 나카지마 공원 공지에서 소년 소녀들이 소란부시를 연습하고 있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그나마 여유가 있던 첫날 쇼핑이나 했던 나는 삿포로에서의 체류 일정을 완전히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지방 축제는 대체로 대단하지만 삿포로의 메인 축제 중 하나이기도 한 소란부시 축제는 더 대단하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많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소란부시 동호회 여러분들이 공원에서, 길가에서, 공터에서 춤을 추고 있어서 삿포로 중심가는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니었다.

삿포로 체류 둘째 날은 축제의 메인 일정이기도 했다. 새벽에 강변 러닝을 끝마치고(새벽4시부터 뛰었는데 그 때 이미 춤을 연습하는 소년소녀들이 있었다 아이고 애기들아) 딱히 할 게 없어서 미술관에 갔다가, 바로 근처에 있던 오도리 공원을 포함 삿포로 시내를 가로질러 가며 춤도 구경하고 밥도 먹으려고 했던 건 … 결국 너무 안일한 계획이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삿포로의 여러 축제 중에서도 여름 축제라고 하면 바로 이 소란부시 축제. 오도리 공원을 포함해 삿포로의 메인 스트리트가 사람으로 가득했다. 급하게 연어박물관이니 하수도박물관이니 하는 장소는 어떨까요 하고 트위터에 의견을 물어봤지만 그거야 웃기려고 가는 것이고 그런데를 급하게 간다고 해서 즐거울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몇년 전 홋카이도 다른 곳에서 연어 박물관을 간 적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게 연어 생태관 어쩌고 하는 이름의 장소가 한 두군데가 아니다)

결국 둘 째 날 한 것은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걸어다녔을 뿐이다. 인파에 치어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안고 간 홋카이도 대학마저 대학 자체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그 넓은 캠퍼스 부지의 메인스트리트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을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홋카이도 대학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넓고 (삿포로 캠퍼스는 18제곱킬로미터가 조금 안된다. 마포구보다 조금 작다는 뜻이다…)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마이클 잭슨이 삿포로를 방문하는 날 정도 외엔 일어날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스즈키노와 삿포로 역 앞과 오도리 공원을 인파로 가득채우고도, 홋카이도 대학마저 할일 없는 사람들로 가득채울 정도로 삿포로는 거대한 도시였다. 애초에 내가 얕본 것은 삿포로 시민들이었다.

홋카이도 대학에서도 도망 나와서 하루 종일 도대체 뭘 한거지 하고, 회사원 스러운 반성을 하며 사람으로 가득찬 오도리를 건너. 스즈키노를 가로지르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구글 지도를 열어보니 여기가 2016년 처음으로 소란부시 축제를 봤던 날. 스즈키노에서 징기스칸을 배불리 먹고 가게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던 바로 그 골목이었다.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서 잠시 서서 구경을 하려는데, 잠시만 하려고 하던 것이 좀처럼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마을 단위의 사람들이 아이와 어른이 모여 춤을 추고, 학교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뽐낸다. 깃발을 흔들고 옷자락을 폈다. 지치고 힘들어서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잠시 서서 구경이나 하려던 나는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래의 글은 내가 2016년 10월 10일에 쓴, 16년 6월의 삿포로 여행기 마지막 부분이다.

“…박수를 치고, 다시 춤을 추고. 앉아있다가 일어서고. 여느 꿈처럼 싸구려 전깃불과 스포트 라이트가 사방에 걸려있는데 사람들은 동작을 맞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모두가 자기 멋대로 노래를 부른다…나는 춤을 추지 못하고 공원의 구석에서 낯선 사람들의 춤을 추며 눈물이 가득 고여 밤이 희뿌옇게 사라져가는 것을. 내 마음이 가라 앉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꿈 속에서 춤을 춘다. 가장 멋지게 누가 봐도 감탄할 정도로 춤을 추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나는 춤을 추어야했다. 왜냐하면 내가 울고 있는 사이에 모두들 저렇게 즐겁게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것이 내가 6월의 홋카이도에서 깨달은 마지막의 것. 소음에서 걸어나와 춤을 추겠다는 것. 나의 나라로 돌아가, 당신에게 같이 춤을 추지 않겠냐고 권하는 것. 다시 한 번 더.”

나는 어떠한 6월이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고 느꼈다. 그 때와 똑같이 반쯤 부숴지고 너덜너덜해진 채로 홋카이도에 도착해서, 이동하는 곳마다 글을 쓰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그리고 다시 삿포로에 도착해서 사람들의 축제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 어떤 내가 피할 수 없는 계절적 순환처럼 생각되었다.

축제의 밤은 축제의 밤이고, 춤을 추는 사람은 모두가 변함없이 춤을 추고 있으며. 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해서 헤맨다. 해는 이미 져서 거리에 매어둔 등불이 반짝이는데 너는 혼자 우두커니 서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쳐다보기만 하는구나. 춤을 출 생각은 하지 않고. 춤을 출 생각은 하지 않고.

이 여행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가 지난 번 홋카이도에서 겪었던 일들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내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그 목적이리라.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나는 축제의 행렬 앞에서 박수를 쳤다. 박수를 치지 않으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의 기도>>

“…이봐요 젊은이 부드러운 살갗이 뒤덮인 언덕 어루만지며 덩굴 숲 해쳐서 계곡의 낮은 곳으로 내려와 줘요…” 사라시나 겐조, <아이누 신화>, 2000. 중 파우치 카무이의 노래

조지프 캠벨의 명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오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가 생각 했을 때 가장 많이 일어날 법 한 오독은 모든 신화와 전설들이 궁극적으로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이 세계가 실은 어떤 한 사람의 머릿 속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오독이다. 그도 그럴 듯이 조지프 캠벨은 이 재미있는 책의 에필로그에 이르러 이런 멋진 문장을 쓴다.

“…세계는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무함마드여, 내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조지프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민음사,467p

그러나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폐색적인 결론이 아니라, 모든 비의와 종교가 하강하여 어떤 신비도 없어진 현대 사회에서도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좀 더 나은 - 혹은 도덕적인 -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 이라고 생각한다. 더 간단하게 얘기해보자면, 이 책을 여기까지 읽었으니 이 책에 실린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착하게 살도록 하자- 정도가 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 사람들의 오독에 대해서 얘기해놓고 나만은 오독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이야기들은 당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인 한, 당신은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이다. 하지만 당신의 바깥- 당신이 관측하지 않는, 그리고 관측 할 일도 없는 곳 -에도 세상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벌어진 일들이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라고 해도 사실 그건 세상이 탄생한 이래로 끝없이 반복된 일들이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일어났을 뿐이다.
여기엔 장점도 있다. 당신은 글로 씌여지고 노래로 불리워진 그 이야기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당신이 보지 않은 곳은 새까만 공백이 아니다 단지 당신은 오래 전에 발명된 무언가를 다시 한 번 발견해 나갈 뿐이다.)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대대로 남겨진 이야기들이야 말로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증거라고 주장 할 생각이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어떤 이야기도 남겨지고 이어져 당신에까지 전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당신은 내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 마음 속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이 글을 읽고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가라앉히길 바라기 때문이다.

도야호를 갈 때는 항상 삿포로에서 버스를 탄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삿포로에서 도야호로 갈 때는 오른 쪽 자리에, 도야호에서 삿포로로 돌아갈 때는 왼쪽 자리에 앉는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앉는다. 그리고 한숨자고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고 그제서야 내가 산이 잘 보이는 쪽으로 앉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버스의 창에 이마를 대고 산을 바라본다. 사다리 꼴 모양의 산은 6월의 여름 볕에도 불구하고 그 꼭대기부터 중턱까지 흰 빛이 보인다. 아직 눈이 녹을 정도로 덥지는 않은 건지. 나는 한 번도 저 산의 눈이 녹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산의 이름은 요테이이고 다이세츠잔 연봉들처럼 다른 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고 평원에 혼자 솟아 올라와있어서 더 외롭고 웅장해보인다. 창에 이마를 너무 오래 대고 있던 나는 나는 멀미를 하면서도 지치지도 않고 산을 바라본다. 도야호에서도 요테이 산을 바라 볼 수 있지만 굳이 버스에서 요테이 산을 바라보는 이유는 …하하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저 산이 보이는 곳에 있는 한 그 산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을 뿐이다.

삿포로에서 도야호 까지 버스로 가면 2시간이 좀 더 걸린다. 가는 길 대부분은 산 길이고 터널이나 고갯길을 지날 때도 있지만 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해도 좋다. 중간 지점 쯤 있는 휴게소에서는 저 멀리 산이 보인다. 여기만큼 산이 잘 보이는 곳이 없을꺼야 하는 생각에 무리해서 사진을 찍어보지만. 산은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온다.

산 근처에는 스키장이, 호텔을 겸한 아케이드가. 그리고 과수원과 목장들이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요테이 산이 가진 압도적인 존재감과 신령함은 녹색처럼 선명하다. 나는 요테이 산 뿐만 아니라 토카치의 평원에서 다이세츠잔 연봉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비에이의 언덕 위에서, 후라노의 농장 사이 샛길에서, 그리고 다이세츠잔 중 하나에 올라가 비를 맞으며 산을 쳐다보았다.

다이세츠잔의 연봉 또한 거대하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그 산을 보는 순간. 대대로 이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이 산들을 향해 기도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신의 존재를 매일 매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을까. 전승에 따른 선악관과 신이 주는 행운과 불행.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별했던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저 산을 넘어간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나는 산을 보며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다고 해도 산의 모습은 쉬이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푸르고, 검고 그리고 희다. 꼭 사람의 마음처럼.

그래서 나는 당신이 여기에 있었으면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내 옆에 있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단지 눈을 감고 산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6월의 중순, 여느해보다도 서늘하고 더위가 오지 않은 여름이 되었다. 아직까지 창을 열면 바람이 시원하다.

나는 글을 쓰려다가 홋카이도를 돌아오는 날에 산 헤드폰을 쓰고 소파에 기대 아주 잠시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자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아주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무엇인지도 모를 그게 나에게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말 그것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슬픔과 고통, 혹은 낡고 빛이 바랜 여우의 그림자라고 해도 말이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유카르이다.


25년 6월의 글이다.


그러고보니 도시마다 인기 있는 플레이리스트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거 알고 계십니까? 애플 뮤직 같은 곳에서는 도시 별 핫 플레이 리스트를 공유 하는데 혹시 스포티파이는 더 자세하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홋카이도의 플레이 리스트라고 한다면 나약한 동아시아의 음악 같은건 아니고 컨츄리 음악입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한 70-80년대의 컨츄리 음악이 홋카이도에 딱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실은 이번 6월 여행 중 홋카이도에서 제일 많이 들은 음악은 소란부시라는 민속 춤 공연과 관련된 어레인지 곡들이었습니다. 민속춤? 네 홋카이도 지역의 풍어를 기원하는 전통 춤 같은 것이었는데 몇 번의 공중파에서의 대히트로 어느새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 쓴 홋카이도 여행기 중 하나에도 소란부시 축제에 대해서 자세히 쓴 적이 있는데. 인연도 인연이겠거니와 우연이 겹쳐서 올해의 축제가 제가 삿포로에 있는 기간 중 정확하게 겹쳤습니다. 고생도 좀 있었지만, 몇 년 전에 신상에 일이 있는 상태에서 홋카이도에 왔을 때 야밤의 소란부시 춤을 구경했었던 것처럼 올해도 스즈키노의 사거리에 서서 소란부시를 구경했습니다.


(8) <Don’t you want me baby?> Mandy smith, <Summer of the mirage> Yoshimasa terui & Orika okachi

나는 대체로 계획적으로 게으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계획을 짜지 않았다. 여행 계획을 짠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고 하루에 반 정도는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을 하고 (하하) 있었기 때문에 계획이랍시고 한 달 전 쯤 호텔만 대충 예약해두고 가기 싫어서 투덜거렸다.

가기 3일 전 쯤에 그나마 러닝코스도 보고 잡지를 찾아서 3,40군데 정도 음식점을 구글맵에 무작정 저장해뒀다. 그걸로 여행 계획은 끝이었다. 진짜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리스트하고 우선순위도 적어두고 괜찮아 보이는 동선까지 정리해둔 12월의 도쿄 여행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나는 정말로 순조롭게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삿포로에서 이틀째인 토요일은 정말 아무 계획도 세워두지 않았는데, 처음 하려고 생각했었던 청바지 사기는 그 전날 해버렸고 부탁받거나 했던 것들도 대체로 다 해버리니까 할 일이 없었다.

아침에 강변을 10킬로미터 쯤 달리면 좋은 생각이 나겠지 하고 일단 달려봤는데 기분만 상쾌해지고 더 건강해졌을 뿐 좋은 생각이 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것이 홋카이도도립 근대 미술관에 가는 거였다. 숙소에서 가까웠기도 했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뭔가 좋은 생각이 나겠지 하는 멍한 생각이었다.

오픈시간에 맞춰서 근대미술관에 가니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가기 전에도 몰랐고 티켓 줄에 설 때도 몰랐지만 19세기의 우키요에 작가 중 가장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요시카와 쿠니요시의 홋카이도 전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예약까지 하고 온 부지런한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냥 멍한 상태로 가죽점퍼에 까마귀처럼 옷을 입은 키가 큰 대학생 뒤에(어떻게 알았냐면 학생 할인을 받더라) 서서 아니 이거 국뽕 전시(아니 일본이니까 일뽕인가…)아냐 그냥 상설전이나 볼까 하고 투덜거리며 천육백엔이나 하는 티켓을 샀다.

전시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티켓팅하면서 투덜거린 것 치고 너무 즐거웠는데 질과 양 모두 풍부하고 징그럽고 웃겨서 대만족 했다 정도?

무엇보다 티켓을 살 때부터 앞에 서있던 대학생을 관찰하는 것도 꽤 재미있었는데 팜플렛에 연필로 뭔가를 열심히 적으며 집중해서 전시를 보다가도 갑자기 순서를 건너 뛰어서 앞으로 가버리거나 하는 걸 반복했다. 그런데도 순서대로 전시를 보던 나와 계속 동선이 겹쳤는데 키는 힐탑재 기준 나보다 약간 작은 정도로 키가 큰데 소심한지 전시를 보고 있는 한 무리의 시니어들만 보면 앞지르지를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도 깜짝 놀란게 삿포로 시민들 특히 시니어분들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시는거지? 몇무리나 되는 시니어분들이 토론을 하며 전시를 보고 계셨다.

결국 키가 엄청 큰 외국인(크왕!)인 내가 염치불구하고 계속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소리합니다 익스큐즈 어스 하면서 시니어 무리들을 뚫고 앞으로 나가기를 반복했는데. 대학생 분은 그 때 마다 내 뒤를 쫓아왔다. 그렇게 전시를 보는 1시간 내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게 편한 걸 알아버린 것이다.

우타가와 전을 다 보기 전에 나는 대학생 분보다 먼저 나가서 상설전을 보러 갔다. 그것도 너무 재미있었다만 시간이 너무 걸린 것 같다. 상설전을 다 보고 카페에서 30분 동안 커피를 마시고 왜 아직도 밥 시간이 아니지 하고 투덜더리면서 뮤지엄샵(너무 좋아한다)을 갔더니 거기에 아까의 대학생 분이 물건을 고르다가 눈이 마주쳐서는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왜 인사를 했냐고 물어보니 저도 모르게요 라고 말하며 웃었다.


(9) <Tears dry tonight> CYRIL, <Wouldn’t change a thing> Kyile Minogue

삿포로 시내에서 들려온 곡이다. 뭘 하고 있었는지 말하기도 민망한게 메인 도로들을 전부 점령하고 있는 축제인파를 피해서 그냥 눈 앞에 보이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파스타를 먹거나 했다. 소란부시 축제에 대해서는 따로 쓸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10) <Peter Gunn Theme> the blues brothers

70년대와 80년대 SNL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코미디언 존 벨루시와 댄 애크로이드가 결성한 2인조 밴드 브루스 브라더스는 뚱뚱보와 말라깽이 조합의 제법 코미디 듀오의 스탠다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애초에 이름도 브룩스 브라더스를 뒤튼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전업 가수들 못지 않아서 결국 빌보드 200에서 1위를 하기에 이르렀는데…블루스와 코미디를 결합한 공연이던 그들의 흥겨움이 장점이 되었고. 아레사 프랭클린이나 레이 찰스 같은 당대 최고 아니 미국대중 음악 역사를 통틀어서도 전설인 인물들과 협업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특징적인 것은 검은 페도라에 검은 수트 그리고 검은 선글라스로 두 콤비는 어떤 유쾌한 공연을 해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영화(아니 SNL캐릭터로 무려 영화를 찍었다는게 그들의 인기를 보여주는 거긴 한데)에서도 마찬가지로 저는 어느날 그 영화를 공중파의 명화 극장 방송에서 보았습니다. SNL이 뭔지로 모를 나이였던 저야 저 사람들이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기에 맥락 있는 유머들은 하나도 이해를 못했지만 엄청나게 재미있어서 언젠가 2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고 합니다. 아 그 시절엔 코미디 영화는 시리즈화 되는 게 할리우드의 룰이었거든요. 물론 속편이 나오긴 하지만 1편이 1980년도에 나온 것에 비해서 1998년에 나왔으니 18년이나 걸린거죠. 블루스 브라더스의 키가 작은 쪽이자 진짜 천재였던 존 벨루시가 33살의 젊은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것이 주된 이유였겠죠. 1편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한 번 보시는 걸 권합니다. 아니 뭐 블루스 브라더스 얘길 한바닥을 했네. 제가 좋아하는 영화라서 그렇습니다.

나카지마 공원 근처에는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 그런 곳으로 삿포로의 중심가에서는 묘하게 벗어나 있어서 손님의 90%는 그 동네 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나카지마 공원 근처라고 해도 7분 가량을 걸어야 한다. 게다가 파는 것은 700엔 가량의 콜드 샌드위치거나 그보다는 살짝 비싼 핫 샌드위치인데 굳이 거길 샌드위치를 먹으러 가야 하는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우연히도 그 샌드위치 가게의 반경…한 2킬로미터 이내에 있다면. 그리고 밥을 먹어야 한다면 충분히 갈 이유가 된다. 사장 내외는 유쾌하며 더하고 덜 것 없는 깔끔한 접객 태도를 보여주며. 가게 내부는 경영자들의 유머감각을 반영해서 깨끗하고 과하지 않은 유머가 있다. (예를 들어서 흑판에 대놓고 빅토리아 케네픽의 책을 인용해 EAT or we both starve 라고 써둔게 웃기다) 그런 가게라 그런지 브루스 브라더스의 OST를 틀어놓아도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하여튼 그런 좋은 가게인데 샌드위치는 어떠냐고? 우리 이모는 이런 샌드위치를 미국맛이라고 좀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빵은 유럽 샌드위치처럼 두껍지 않고 얇지만 안에 들어간 햄은 짜고 감칠맛이 난다.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영화가 재미있었을 때의 기분처럼 씹을 수록 맛이 난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좋아할 맛이다. 다름 아닌 제가 좋아하는 맛이기 때문에 그 가게가 다음에 갈 때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게의 이름은 HASAMIYA라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블루스 브라더스의 곡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아레사 플랭클린이 부른 <think>인데 아니 블루스 브라더스가 이 곡에서 뭘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춤 같은걸 추나.

(11) <Scherzo No.4 en mi Majeur, OP 54> Anne Quefflelec

낙원은 글의 소재가 될 수 없어도 쇠락한 낙원은 글의 소재가 된다. 이 리조트에 처음으로 왔던 때를 기억한다. 뭐가 그렇게 싫었는지 여행 내내 미친 사람처럼 숙소를 계속 바꿨고. 매일 2-3시간을 이동하며 도시에서 도시로 움직였다. 비오는 날에도 걸었고 해가 떠있어도 걸었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갔고 아무도 타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서 하루에 4번 있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여행의 거의 마지막 쯤에 도착한 것이 이 리조트였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이미 이 지역은 쇠락과 회복을 반복하며 정체라고 해야할지 복구라고 해야할지 명확하게 말하기 힘든 그런 상태를 지속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진으로 주변의 농촌과 주택가가 큰 피해를 입고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숫자로 말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이곳은 내가 그 때 까지 본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온천 리조트였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나는 디즈니 랜드라도 온 것 처럼 리조트의 탕을 바꿔가며 목욕을 했다. 그리고 밤에는 불꽃놀이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아쉬워하면서 리조트를 떠나는 걸 반복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걸까. 이번에 이곳을 방문한 것은 4번째 쯤 된다. 몇 년 전 리노베이션을 한다는 홈페이지 공지를 보았다 뭔가가 바뀌어 있겠지 하고 기대했던 것 같다. 좀 다른게 있다면 이전에는 적당한 엔트리 레벨의 룸 플랜으로 왔다면 이번에는 미친 사람처럼 제일 비싼 플랜 중 하나로 왔다. 그래놓고 계속 아 왜 이렇게 비싸지 하고 투덜댔다. 기대를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 일 것이다. 이번 홋카이도 여행 전체에 대해서 놀랍도록 아무 기대도 없었지만 이 리조트에서 쉬는 것만은 기대했다. 매일매일 온천을 하고 10킬로미터씩 뛰고, 라운지에 앉아서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했다.(이걸 쓰는 것도 라운지에서이다. 나는 체크 아웃 후 삿포로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리조트에는 예전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았다. 비성수기인 6월이라고 해도 미어터질 것 같이 붐비던 식사 장소도, 온천에도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2박 이상의 연박을 하는 손님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다들 삿포로에서 출발해 4시에 도착한 후 다음날 10시면 리조트를 떠났다. 어쩌면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이 곳의 비용이 너무 비싸졌고, 비슷한 규모의 리조트들이 새로 몇개나 생겼기 때문에 손님들이 다른 곳으로 나눠진 걸까?

하지만 호수를 도는 유람선에도 산책로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온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그런 곳인게 탄로난 것일까 하고 심술궂은 생각을 한다. 새로운 리조트들이 몇 개 생겨난 만큼 쇠락하여 소멸해가던 호수 근처의 거리들은 예전과 다르게 편의점과 마트가 생겼지만, 이미 배경이 되는 주택가는 소멸해있던 터라 새로운 주택가가 생겨나지는 않은 것 같다. 가게들은 대다수 문을 열지 않았다. 성수기면 다시 여는 걸까, 아니면 완전히 문을 닫은걸까.

혼자 보는 불꽃놀이는 지독하게 재미없었다. 맥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불꽃놀이 배가 호수를 횡단하기도 전에 창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다. 해가 뜰 때 쯤, 이 온천이 자랑하는 옥상의 노천 온천에 가보았을 때. 분명 청소를 끝낸 뒤일 노천 온천 위에 벌레들이 떠있는 걸 보고 쓰게 웃었다. 아니 방 안에 이미 자쿠지가 있는데 여긴 또 왜 와서 이런 걸 보고있는거지. 옥상으로 가는 문에는 얄궂게도 6월 초순부터 벌레들의 대규모 발생이 있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나는 뭘 기대한거지 어떤 맛있는 조식도 이틀을 연속으로 먹으면 질리기 마련인데.

나는 여기의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라운지에는 400몇 년 수령의 나무(어딘가 신사의 신목이었다고 한다. 진짜 무엄한 짓을 하는구나)가 죽으면서 그걸 일부 테이블로 만든 것이 있다. 거기 엎드려서 생각을 해보니 생각이 잘 된다. 나는 너무 고집이 쎄고 좋아하는 것이 하나 생기면 그걸 질릴 때 까지(잘 질리지도 않으면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죠 400년 수령의 신목님?

가끔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어떠냐.
그렇군요 영험하시네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라운지에서는 지겹도록 쇼팽을, 그도 아니면 슈베르트를 튼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질릴 정도였다.(로비에선 바흐를 틀어놓는다. 보통은 반대 아냐?)

(12) <the razors edge> AC/DC, <Can’t happen here> rainbow

리조트에서 삿포로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는 작고, 무릎이나 펼만한 그런 곳이었다. 주로 라이더들이 즐기는 곳인듯 한데 휴게소 밖의 화장실은 고장나서 안의 작은 화장실을 써야했다. 뭐라도 하나 사줘야지 싶어서 가게를 들러봤지만 음료도 자판기나 있어서 구미 하나를 사서 계산을 하려는데 The razors edge가 나왔다. 에이씨디씨네요 라고 말하니까 그 때 까지 너무 과하게 친절하던 (90년대 락가수 머리를 한) 사장님은 아주 흉폭하게 씨익하고 웃으셨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글이 25년6월의 홋카이도 여행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아주 적절한 글인 것 같다.


25년 6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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