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종일 썼던 글을 지우고는 오늘은 어떤 글도 쓰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오후엔 가까운 유니클로에 가서 구제불능처럼 러닝용 쇼츠팬츠와 자외선차단 파커를 샀다. 어찌된 걸까 분명히 출근용 옷을 좀 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장바구니에 옷을 넣어서 덜렁덜렁 걸어가는데 아주 좋은 바람이 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단지 시원하고 맑은, 아주 좋은 바람말이다. 아침에 10킬로미터를 뛰어주지 않았으면 또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겠지. 나는 대신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했다. 햇볕조차 너무 좋은 오후 3시였다.
회사의 시큐리티를 담당하는 업체에는 눈에 띄는 여성 분이 있다. 나보다 80살 정도는 어릴 듯한 미인 분인데. 회사 동료와 지나가다가 그 분이 나에게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걸 보고 회사 동료가 깜짝 놀라서 아는 사이에요? 라고 묻기에. 어 서로 이름 정도는 알죠 라고 했더니 도대체 어떻게 한거냐고 계속 물어보았다. 귀찮아서 사실 저희 어머니입니다. 라고 둘러댔다. 실은 그냥 왔다갔다 하면서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인사를 했더니 언제부터인가 서로 인사를 하게 되었을 뿐이다. 사원증을 서로 패용하고 있으니 이름 정도는 서로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분은 사원증에 걸린 얼굴과 그걸 걸고 있는 사람을 비교하는게 일인 사람이니까.
요는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인사를 하면 상대도 나를 우호적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편의점 직원이나 단골 바리스타 직원이 퇴사 전 인사를 해주는 경우가 많다. 카페는 얼굴을 금세 익히게 되는데, 매일 아침 일찍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카페에서 콜드브루를 주문하던 시절 카페의 바리스타는 내가 커피를 주문하면 숫자를 열까지 세기도 전에 내주곤 했다. 열 보다 늦어질 때는 오직 커피에 낙서를 하실 때 뿐이었다.(가끔 토끼나 고양이 같은 그림을 그려주셨다.)
내 친구들은 내가 그럴 때 마다, 낯선 사람들에게 제일 친절하다고 그렇게 친절하게 구는 걸 볼 때 마다 기분이 나쁘다고 말한다. 친구들의 말이 맞다. 나도 내가 사교적이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단지 굳이 비사회적인 특성을 티를 내며 살 필요가 있을까.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면 좋잖아. 그게 뭐가 어때서 라고 친구들에게 말하며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면 친구들은 더 불쾌해한다.
이런 얘기들은 별 거 아닌 것들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픈 구석이 있다. 나는 뭐가 잘못된 인간인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소중한 사람을 더 소중히 여겼어야 하는게 아닌가.
…
오늘은 5월 18일이다. 날씨가 아주 좋은 늦 봄 또는 초여름이다. 그리고 7월이 되면 여자친구와 헤어진지 1년이 된다.
사이가 나빠진 것은 5월 부터였기 때문에 사실은 이제 슬슬 1년이 되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우리집의 창가에서 초여름의 나무들을 배경으로 여자친구가 버스를 타러 가는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일요일의 오후였는데 그날 따라 일찍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 날은 배웅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1년 동안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그날 배웅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지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 글은 해답편의 해답이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솔직하게 말하는게 너무 힘들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를 위해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걸 아는데 1년 가까이 걸렸다는게 맞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워 한다는 것은 나름의 순화된 표현이다. 헤어지는 과정은 별로였고, 헤어진 뒤에 벌어진 일들도 엉망이었지만 인정하기로 하자. 나는 변함없이 그 사람을 사랑한다.
내 인생에 어떤 사람보다도 그 사람을 깊숙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있는 온갖 수를 다 써가면서 그 사람을 잊어보려고 했지만 (약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사귄다거나. 홧김에 약혼한다거나 그런 건 하지 못했다. 사실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일 것 같은데) 그러지 못했다. 모두 다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작년의 5월부터 7월 까지 몇개월 동안 그 사람을 관찰하며 그 사람의 마음이 떠나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항상 그 사람에게 약속한 것처럼 그 사람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나와 헤어진 후로 연락을 해오지 않는다. 그것은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자못 어른스럽게 잘난척을 한다. 떠난 사람을 생각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라든가 어른은 짝사랑은 하지 않는다거나. 하여간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얘기를 수없이 해놓고 이제 드디어 솔직하게 말한다. 나의 노력이나 힘으로는 그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도 없었다.
실은 최근의 나는 몇개의 계절을 보내면서(그리고 미친놈처럼 책을 읽고 러닝을 하면서) 꽤 성공적으로 그 사람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겨울이 지난 어느날 부터는 더욱 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괴로웠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지워버렸던 원래의 해답편에 써두었던 것을 인용해보겠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멀어지면서. 그 사랑하는 것이 가진 속성이 세계 전부로 퍼져가는거야. 나는 내 애정의 원형을 돌려받을 수 없기에 그 속성들에 집착하지. 어떤 뒷모습, 비슷한 이름, 이빨의 모양, 목소리의 고저, 말투, 표정, 걷는 방법 같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아무 의미도 없는 것. 단지 내가 사랑한 것이 가지고 있던 그 속성들은 부숴진 세상의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속성들을 발견할 때 마다 내 애정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거야.
그리고 거기에 내 감정이 있다는 착각을 하지. 그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은 한 때 하나였던 세계의 파편일 뿐인데. 365분의 1의 파편. 아무 의미도 없는 단편적인 조각들…”
요지는, 세상의 어떤 것을 보아도 거기서 그 사람의 일부를 보기 때문에 괴롭다는 얘길 문과 특유의 뱅뱅 돌려말하기. 아니 앵간한 문과도 이 정도로 돌려말하진 않겠지 하여간 내 특유의 뱅뱅 돌려말하기로 써둔 것이다. 나는 매일밤 그 사람의 꿈을 꿨고 매일 그 사람의 생각을 하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속성들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에 꼭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산산히 분해되어 세상의 모든 것에 깃든 것처럼 느껴졌다. 이 고통은 그 사람이 부재하기 때문에, 점점 내 머릿 속에서 그 사람이 잊혀져가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만 치유되는 종류의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그 고통을 계속해서 어떤 다른 방식으로 우회하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의 부재와 더불어, 나는 그 사람을 잊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잊지 않으려는 내면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지겨워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에 와 두부 한모를 먹고 한 숨 잔 다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마 또 어느날의 변덕으로 이 글을 그대로 블로그에서 지울 지도 모른다. 알게 뭐야 내 블로그인데)
나는 그냥 그 사람을 좀 처럼 잊을 수 없다는 것과 그 사람이 내 일부에 스며들어 있어서 내가 아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걸 자의로는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한다.
나의 실패에 대한 겸허한 인정과 더불어서. 그대로 시간이 어떻게 가고 그와 함께 내가 어떻게 되어갈지를 지켜보기로 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어쩌면 이렇게 살다가 어느날 으악 하고 죽을 수도 있는 법이다. 아니면 어느날 어떤 여자아이를 만나고 뭐지 얘 엄청 웃기네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단지,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스러지고 내 영혼의 빛이 어떻게 바래어가는지 그 시간을 견뎌보도록 하기로 한다.
그렇게 하기로 하자.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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