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외할아버지의 성묘를 가지 않았다. 안장을 할 때도 가지 않았으니 한 번도 가지 않은거다.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지난주의 일요일 너무 피곤하고 괴로워서 이유없는 변덕으로 음력 7월 15일 중원절이 언제인지 꼽아보니 바로 그날이었다. 과연, 성묘를 가기에 적절한 시기구나 싶어서 성묘를 가기로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대전의 현충원에 계시다. 외가의 선산이 조치원에 있는 걸 생각하면 크게 다를 건 없다. 지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차를 타면 금세 갈 수 있는 곳이니 크게 준비 할 것도 없이 기차표만 예매해두고 온천이 되는 숙소가 있으면 하루 정도 자고 올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 외엔 대전에 사는 지인이 오는 김에 한 번 보자고 하여 저녁 기차로 예약 시간을 바꾼 정도이다. (결국 지인은 다른 일정이 생겨서 만나지 못했다.)

기차를 타기만 하면 대전은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다만 기차역까지 가는 것이 항상 문제라서 나는 기차를 타는 날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기차표값에 택시비를 슬쩍 끼워넣는 기적의 논리로 돈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가까운 대전이라면 그런 논리이고 먼 부산이라면, 그래 먼 부산이라면 기차값이 비싸서 택시비 정도야 거기에 더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만 그런 식의 기적의 계산법을 가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들하지 않는가 오늘은 평소보다 좀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치킨 시켜먹어도 되겠어. 체육 필기 시험을 잘 봤으니 내일 한국사 시험은 좀 조져도 되겠지. 이런거 말이다.

햇볕이 너무 강해지기 전에 성묘를 마치고 싶어서 대전에 도착하고 보니 8시도 되지 않았다. 오기 전에 가는 루트는 대충 보았지만 가장 편한 버스를 타고 가는 건 내키지가 않아서 굳이 대전1호선을 타고 현충원 앞에 가기로 했다. 술이랑 꽃 정도는 역에서 먼저 사가는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꽃에까지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기(택시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잖아)에 현충원 역 앞에 뭔가가 있겠지 하고 물도 휴지도 없이 대전역 성심당에서 산 빵을 씹으며 전철을 탔다. (빵은 샀다 그렇다.)

그리고 현충원 역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대학교 앞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당황해서 현충원 역 주변을 잠시 돌았는데. 편의점 마저 없었다. 여러분도 영원한 고향처럼 머릿속에 한국의 시골이 한 두개 쯤 있을텐데 읍내도 되지 못할, 그 정도 시골이었다. 쓸데없이 국도 옆의 나무들이 우거져있었다.

셔틀버스를 타려고 줄 서 있는 것 같은 대학생들이 보였지만 그들에게 딱히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 현충원에 보훈매장이 있으니까…라는 좀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단 현충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현충원까지는 대략 3~4km로 보였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셔틀버스나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혼자 있을 때 평소보다 훨씬 이상한 판단을 한다. 그냥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다리가 남들보다 좀 튼튼한 편이고 걷는 것도 싫어하지 않아서 역 두세개 정도 거리는 그냥 걸어서 가는데 8월의 뜨거운 태양을 생각하면, 전혀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날 말리지 않았을까. 그건 내가 친구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진 않기 때문이다. 혹시 동무들이 많은 인싸 자식들은 인생의 이런 변곡점마다 시시적절한 조언과 말림을 받으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걸까? 몹시 억울하다.

현충원을 들어가고도 외할아버지의 묘소는 현충원 북쪽에 있어서 말도 안되게 긴 언덕을 걸어가야 했는데. 솔직히 얘기하겠다 보훈처 홈페이지에 들어가 외할아버지 묘소 위치를 확인할 때 부터 그냥 걸어가려고 생각하고 갔다. 편도로만 5km가 넘었지만. 내가 믿는건 (고작) 처서를 지나 좀 선선해지는 날씨였다.

그래도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다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길을 지나 의외로 멀지 않은 길가에 꽃집을 찾아서 너무 기뻐서 들어갔다. 조화들만 잔뜩 있어서 당황하여 가게 주인 분을 불렀더니 생화인 국화도 있다기에 그걸 한다발 샀다.
어째서인지 10송이 단위로 팔고 있었는데. 왠지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 몇 뭉치를 더 사려다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어서 관두고 나서려는데 가게 주인 분이 소주와 컵을 챙겨주시더니, 고인께 한 잔 따라드리세요 라고 하셔서 얼떨결에 받았다.

국도 변에는 법 같은 걸로 정해둔 것처럼 골프용품 전문점과 오토바이 가게들이 있고. 집 가까운데 있으면 한 번 쯤 갔을 법한(한 번 만 갔을 법한) 무슨 톳으로 만든 음식이 메인 요리인 가게들이 있었다. 이런 가게들만 있어야 한다고 조례로 정한걸까? 분명 나의 홈타운 부천에도 도심을 벗어나 과수원이 있거나 국도로 좀 벗어난 곳으로 가면 저런 곳이 나온다. 무엇을 숨기랴 내가 살던 근처에는 수목원이 있었는데 그 수목원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곳에는 몇층짜리 낚시용품 전문점이 있었다.
도시구조이론이나 지대이론 등 (바제스니 뭐니 하는 것들 말이다)에 의하면 이런 전문점은 굉장히 넓은 범위의 시장을 커버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편의점은 반경 일킬로미터 이내의 손님들이 주로 이용하지만 이런 취미류의 전문점은 수요가 적기 때문에 수십킬로미터의 반경을 커버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돼 이런 가게가 겨우 수십킬로미터의 반경을 커버한다고? 내가 본 것이 대전의 유일한 오토바이 배터리 전문점이란 말이지. 남한에 유일한 곳이 아니고?

3킬로미터 이상을 걷자 슬슬 즐거워지기 시작했는데. 머릿 속으로 처음에 뭐라고 인사를 하지 하는 생각을 계속 했다. 할아버지 저에요. 할아버님 인사드립니다. 할로 구독자 여러분. 등등 하여간. 나는 외할아버지의 생전에는 항상 외할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어리광을 부린 적은 없다. 외손자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그런 노인이 아니었다.

아무 날도 아니었는데 현충원 주차장은 7부 이상 차있는 것 같았다. 보훈매장의 물품 가격은 합리적이었는데, 생화는 거의 없었고 조화가 대부분이었다. 뒤에가서 알게 된거였지만 각 묘지에 꽂혀있었던 꽃들은 다 조화로. 유족들이 꽂아두는거였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자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조화를 꽂아두고 명절마다 바꾸는 거였다. 나는 부러 생화를 찾은건데, 내가 바친 국화가 시들었다면 누군가 그걸 버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소주를 받았지만, 아무래도 좀 그렇지? 싶어서 법주를 샀다. 외할아버지가 술을 좋아했던가. 할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할머니가 질색을 했는데 외할아버지는 모르겠다. 마셔도 취할 때 까지 마시지 않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다.

현충원은 좋은 곳이었다. 조용했고 나무가 모두 커다랬다. 청소년 고양이를 하나 찾아 사진을 찍었는데 싫은 표정도 없이 날 쳐다보며 야옹이라고 말해줬다. 나도 야옹이라고 대답해줬다. 땀에 젖을때 까지 걸어서 외할아버지의 묘비를 찾았다. 묘비 사이를 지나가면서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성묘를 좀 하려고요. 하고 굽실굽실 거리면서 지나갔다. 아무래도 그렇게 말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이다.

저 멀리 산이 보이고 까막까치 우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석 앞에 서서 우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비한 인사도 다 까먹고 죄송해요 울어서 죄송해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소연하는 것도, 자기 앞에서 우는 것도 싫어한 사람이다. 그래도 눈물이 나는 걸 어쩌겠는가.

술을 바치고 물을 부어 비석을 깨끗하게 닦고, 사진을 찍어서 이모에게 보냈다. 잘 계시네요 아직 누워계세요.
외할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햇볕을 받고 있으니. 그제서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게 실감이 났다. 그냥 외할아버지랑 싸우고 10년 쯤 안 본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사랑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운거였다. 녹색의 산이란 저렇게 아름다운거였다. 벽처럼 둘러쌓인 산들이 숨도 쉬지 않고 서있었다. 내가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자 대신 벌레들의 날개 소리와 까마귀의 긴 울음 소리가 들렸다.

두서없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길래 남은 술들을 외할아버지 무덤 근처에 있는 다른 무덤들에 바치고 절을 드렸다. 바로 옆자리에는 외할아버지와 사관학교 동기인 유명한 분이 누워계셨는데 술을 더욱 가득 따라서 드렸다. 이모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돈 문제로 외할아버지가 그 분을 고소하셨다고 한다. 아니 죄송합니다. 어느 쪽에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또 올게요. 라고 하고 절을 두 번 더 했다. 다시 눈물이 나서 머리를 들을 수가 없었는데. 외할아버지 말투와 외할아버지 목소리로 그래 또 와라. 라는 말을 들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외할아버지 목소리를 하나도 잊지 않았다.

수분과 전해질 부족으로 죽겠다 싶어서 보훈매장에서 산 파워에이드를 꿀꺽꿀꺽 삼켰다. 내려가는 길도 너무 길었다. 현충원역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꽃집에 전화해서 저 아까 생화 산 사람인데요 소주를 주셨는데 생각해보니 값을 치르지 않았어요 계좌번호로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라고 물어보니 조문을 가는 분들에게 그렇게 한 병 씩 드려왔다고 한다. 감사하다고 번창하시라고 인사를 드리고 끊었다. 사실 그거 안 썼는데 말이지.

정말로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현충원을 나와 대전역으로 가는 버스를 비틀거리면서 탔다.

중원절이란 말은 도교용어로 같은 날을 불교에서는 우란분재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ullambana에서 나왔다고 한다. 굳이 해석하자면 똑바로 매달려있다는 말이 전화되어서 생긴, 거꾸로 매달려있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하나인 목건련은 신통제일이라 칭송되었고 마하목건련, 목련존자 등의 이름으로 칭송받았던 뛰어난 제자였다.
우란분경과 목련경에 따르면 그런 그가 어느날 천안통으로 지옥을 바라보자 생전에 많은 악업을 지은 어머니가 죽어서 아귀도에 떨어져 굶주림의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하늘을 날고 용왕을 조복시키는 마하목갈라나도 지옥에 떨어진 부모를 구할 수는 없었기에 스승에게 방도를 물었고 승려들에게 5가지의 과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죄업을 씻고자 하였다. 죄는 선업으로만 대속 할 수 있는걸까.

그것이 우란분재의 유래로 알려진 이야기이고, 거꾸로 매달려있다는 것은 아귀도에 떨어진 목건련의 어머니를 의미한다.

그 후 멀지 않은 시기에 일어난 일로 보이나 목건련은 반대교파들의 시비에 쫓기다 결국 스승인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멸에 든다. 전설에서는 그가 일찍 죽음에 이른 것이 전생에서 부모를 죽인 대죄인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의 선업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교의 중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행사이다. 인간의 죄를 계량하는 천관들이 일년에 세 번 그 죄를 가늠하는 날 중 하나가 중원절이고, 도교에서는 그날 음식을 차려놓고 부모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죽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말하자면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가끔 생각했다. 산자들이 우리를 생각하는만큼 죽은자들도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그들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지. 애처로울 정도로 어리석은 생각이나. 내가 아닌 누군가도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버스를 탄지 얼마 안되어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회사의 후배가 대전 갈 일 있으면 말해줘요 성심당 부탁 좀 합시다. 라고 말한게 생각나서 까먹었으면 모를까 해주겠다고 말까지 해놓고…싶어서 후배에게 연락을 하니. 마침 주말약속이 모두 깨져서 놀고 있던 후배가 1초도 안되어서는 대답을 하고 케익을 부탁했다. 운도 좋은 녀석이네 안 그래도 오후에 약속이 통채로 사라져서 할 일도 없었는데 해주마 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점심엔 맛있는거 드세요 태평소국밥이라든가…라고 후배가 말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가 오룡역(그 가게의 본점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역이다)에 도착하기 직전이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느껴서 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과연, 육사시미와 내장탕 모두 거기까지 와서 먹는 후회가 하나도 없는 맛이었다.

후배가 부탁한 케익을 사서 카페에 앉아 이모와 메세지를 주고받는데. 이모는 흰 국화가 할아버지가 조문을 하러 갈 때면 항상 사서 가던 꽃이라고 말했다. 단지 한 번에 세 송이만 사셨다고. 그 이상은 사치인 것 같다 라고 하셨다고 했다. 다음에는 더 큰 국화 꽃다발을 사서 갈 생각이다. 근데 노인네가 날 더 이상 어쩌겠는가.

꿈에나 나와서 잔소리나 좀 하겠지.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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