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언젠가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다 떨어질텐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점점 과거로 돌아가서 내 마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일들을 다 꺼내어 글로 쓰고, 전해야 할 말은 모두 전하고 전하지 못할 말들은 다 삼키면. 그리고 그 뒤에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1990년대 가장 더웠던 여름을 말한다면 94-95년의 여름을 빼놓고 말 할 수 없다.
동북아시아의 폭염은 정말 최악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라서 베이징은 건국이래 최악의 폭염을 기록했다고 하고 한국에서도 가뭄일수와 더위 양 쪽에서 20세기 최고.
전국의 폭염일수가 29.4일. 2018년이 되기 전까지 어떤 여름도 94년보다 덥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공교롭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기억하라고 하면 기억이 나지만 94년-95년에는 내 인생에 대체로 아무 일이 없었던 시기였다. 단수가 자주 되었기 때문에 물통을 들고 물차를 기다려서 물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어디 오지에 사셨나요? 아닙니다. 나는 경기도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도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뭄이 발생하면 물차가 나가는 걸로 알고 있다. 다만 경기도가 다른 지방에 비해서 수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요즘의 경기도민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광경일지도 모르겠다. 집에 들통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물통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제 집에 들통을 가져다 두지 않는다.
예전엔 집에 항상 있었지만 이제는 집에 잘 두지 않는 걸 얘기해보자면 랜턴과 양초이다.
그렇게 전력 사정이 안 좋았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 시절에는 선풍기도 잘 안트는 집이 많았는데도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한 여름이 되면 전기가 끊기곤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화를 내지도 않았고 어어 정전이네 하면서 능숙하게 양초를 꺼내서 집을 밝혔다.
그 당시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한 용어는 “열대야”였는데 밤이 되어도 덥다고? 그럴 수가 있나 놀랍구나 20세기 이러면서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래서 20세기 피플들은 열대야를 이겨내기 위해 에어컨을 사거나 선풍기를 틀었는가? 그렇지 않다. 20세기 피플들은 그냥 밤이 되면 집 밖에 나와서 누워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겠지만 그 당시에는 도시도 커뮤니티가 아직 살아있었고, 아파트 단지도 비슷한 시기에 이사온 구성이 비슷한 집들이 모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들 집에서 은박지처럼 반짝거리는 거나 진짜 대나무로 만든 돗자리(어휴 정말 간지템이로군요)를 들고 나와서 식구들끼리 누워있었다.
재미있는 체험으로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정상가족들을 구성하여 커뮤니티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충분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친)누나와 단 둘이서 집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 둘이 할 수 있는 건 창문을 활짝 열고는 양초도 끈 채로 어두컴컴한 집에서 애써 잠을 청하는 것 밖에 없었다.
조금 더 커서 태풍이 오던 날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나는 혼자였다. (왜 혼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전거를 있는 힘껏 밟아 집에 돌아온 나는 태풍을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구구단을 배우기 전에 이미 혼자서 밥을 해먹을 줄 알아서 당황하지도 않았다.
정전 중이라 건전지가 끝나면 랜턴의 불도 꺼지기 때문에 랜턴을 켜지 않았다. 전등 스위치는 모두 꺼둔채다.
아직 비바람이 오진 않았지만 창을 꼭 잠그고 선풍기가 켜지길 기대하며 미풍에 버튼을 눌러두었다. 그냥 서늘한 창문에 이마를 대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번개가 치고 천둥 소리가 올 때 까지의 숫자를 세면서 태풍이 얼마나 가까이에 왔는지 셌다. 세찬 빗소리가 들리고 뒤에서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선풍기가 켜졌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찍은 사진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 어릴 적의 기억은 군데군데 결락되어 있다.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몇년도에 뭘 했어 라고 물어본다면 어어 뭐였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오랫 동안 “올해”라고 인식했던 건 95년이었다. 머리 속에서 95년이 지나는 걸 거부하듯이 올해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하면 95년이 떠올랐다.
아주 오랜 후에 그 이유를 스스로 깨달았는데. 그 때 쯤에는 더 이상 95년을 올해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또 다른 해를 올해로 여기고 있다. 그런걸 보면 나는 뭔가를 배우는게 그리 빠르진 않은 것 같다.
매년을 기억하는 건 대체로 그 해에 읽었던 책들이다. 이 무슨 대책 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나는 92년의 7월을 내가 광화문 교보문고에 처음 갔었던 해로 기억한다.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에 감동했는데
아버지는 딱 한권을 고르렴 이라고 불가능한 숙제를 내게 주었다. 지금의 나라면 무슨 책을 골랐을까. 나는 꿈 속에서는 대체로 책이 많은 곳에 있다.
교보문고였던 적도 있고 모교의 중앙도서관일 때도 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의 작은 도서대여점도 자주 나오는 곳이다. 나는 꼭 영원처럼 그렇게 책 사이에 있고 싶어한다.
92년 7월의 내가 고른 것은 그 해 발매 된 스트리트 파이터2의 공략본이었다.
왜? 뭐 대단한 책을 골랐을거라고 생각했는가. 그 책은 올컬러에 멋진 일러스트가 가득했다. 오타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냥 일본에서 나온 책을 불법 복제하여 대충 번역해서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몹시 실망한 눈치였지만 본인이 한 권만 고르라고 했기 때문에 의외로 군말 없이 책을 사줬다.
그러고는 충무김밥을 사줬는데. 요즘에야 충무김밥이 창렬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아버지에게는 20대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어서. 누나와 내가 맛이 없다고 하자 몹시 분개해했다.
그리고는 그 해 겨울 누나와 나를 정말 충무에 데려가 충무김밥을 사주었다. 그 때도 맛이 없어서 누나와 나는 같이 나온 오징어순대만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한 성격에 머리가 너무 좋은 아버지라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나는 정말 길고, 웃긴 이야기를 여럿 할 수 있다.
애초에 자식이란 그런 존재이다. 자기 부모에 대해서는 그게 분노이든 슬픔이든 끝도 없이 길게 얘기 할 수 있는, 우리는 그들 인생이 가장 가혹한 목격자이다.
하지만 책의 이야기를 하자. 나는 그 공략본을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보았다. 비유가 아니다 정말 너덜너덜해지고 찢어질때 까지 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책도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보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내 지적 능력에 대해서 오해를 했는지 어느날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 교재를 사와서 나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또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정말 그만두자.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0세기이다.
방학은 좋았다. 책을 마음 껏 읽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결국 매년을 어떤 책을 읽었는지로 기억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94년만큼은 아니었지만 혹독하게 더웠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수학에 재능이 없다는 것이 판명이 난 나는 더 이상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해 방학은 통채로 내 것이었다.
아무 할 일도 없던 나는 모비딕을 읽었다. 모비딕을 읽다가 어느 토요일 오후 공영방송에서 해준 모비딕의 영화판은 인상적이었다.
장면은 어둡고, 화면은 붉고 사람들은 땀을 흘리면서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대사를 했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땀 범벅이 되어서 선풍기 앞에 앉아 아아아 어어어 하고 소리를 내었다.
변성기가 되지 않았던 내 목소리가 선풍기의 진동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선장님 고래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해보았다.
나는 아직도 종종 모비딕을 읽으면서 뺨에 닿았던 대나무 돗자리의 감촉을 떠올린다. 너무 더웠고. 나는 책을 읽는 것 외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죽음보다 더 외로운 여름이었다.
24년 8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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