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째 몹시 아프다. 여행기를 쓰면서 여행을 다닌 시기 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은 생각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생일날을 독감 3일째와 맞으면서 겨우 집에서 기어나와 우유와 롤케익, 군고구마를 샀다. 불쌍한 초등학생의 구호식품 같네 싶어서 롯데리아에 들러서 버거도 두개 샀지만 하나를 다 먹지 못했다. 목이 너무 아프다.
이번 여행을 하는 내내 말이 넘쳐 흘러서 고통스러웠다. 내뱉지 못한 말들은 원형으로 서로의 꼬리를 물며 커다란 그림을 그렸고 나는 내가 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12월 14일 도쿄 주교좌의 마리아 대성당의 뒷자리에 앉아있다 깨달았다. 고독보다 불행한 것은 쓰여지지 못한 글이다. 나는 계속해서 쓸 생각이다.
이 글을 쓰면서 들은 것은 Orihusay - Eternal Slumber 이다. 많은 시부야계가 솟아 올랐다 사라졌고 누자베스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설이 되었다. 이제 누자베스는 거의 시부야의 전통민요 같은게 되어서 티셔츠까지 파는 그런 아티스트가 되었는데. 과연 그를 따라갈 아티스트가 있을까? 모르겠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의 스타일을 따라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유튜브 로우파이채널에나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음악이다. 너무 가혹한 평가라고? 설마…
…
내가 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아메카지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는 얘기까지 했고 그들에게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패션으로 피의 복수를 한다면 역시 엄청난 패션력과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서 24년 전국 고교 패션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그 정도의 스토리가 필요하겠지?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복수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다.
바로 전의 글에 썼던가, 내가 결정적으로 잘못 생각한 것 중에 하나가 러닝용 도구를 너무 많이 챙겼다는 것인데. 비싼 돈을 들여서 킹사이즈 베드 룸을 고른 주제에(심지어 혼자 쓴다) 러닝용 셔츠를 매일 밤마다 대충 물 빨래를 해서 걸어두면 된다는 생각을 안 했다. 대체로 러닝용 의류들은 세척이 장난 아니게 쉬운데 못생김을 댓가로 이런 무시무시한 힘을 얻은걸까? 하여간 러닝용 티셔츠를 4세트나 챙겼는데 실제로 쓴 건 러닝용 셔츠+바지+바람막이 뿐이었다. 바람막이야 애초에 세탁을 하는 의류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황궁런을 한 첫날 11시에 방에 들어와 왠지 심술궂은 기분이 들어 땀내가 나는 셔츠를 뜨거운 물로 촥촥 씻어서 걸어놓았더니…다음날 아침 깔끔하게 말라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옷을 입고 러닝을 했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동행이 있었다면 꽤나 민폐여서 할 수 없는 방법이겠지만 정작 나 본인은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 아니라서 전혀 상관없었다. 그래서 3세트나 되는 러닝용 의류는 전혀 쓰지도 못하고…그냥 자리만 차지했다.
이렇게나 캐리어에 공간이 남을거면 최대한 유니클로가 아닌 옷을 입고 여행에 올 걸 하는 무의미한 생각을 하면서도, 네 여러분 여행의 사실상 첫날이었던 금요일에도 아메카지를 시도했습니다.
<아메카지 1트, 우에노의 아메요코>
그야말로 10년 만에 우에노 근처의 아메요코 시장을 가서 유명한 아메카지 편집 스토어들을 돌아다닌건데. 나는 사실 아메요코에 그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시끄러운 술집이랑 노점 있는 곳이 아닌가 정도로 이제까지 생각해왔고. 우연히 지나치다가 한 번 들른 후로는 올 생각도 안한 곳이었다.
아무리 날티를 내봤자 묘하게 단정한 느낌의 아르켓 헌팅 자켓에 아르켓 진즈를 입은 저는 도대체 어떤 멋쟁이들을 만나게 될 까 두근두근 거리면서 아메요코 시장을 향했습니다만. 과거의 나를 찬양하라. 예전에 내가 기억했던 대로 그냥 시끄럽고 노점이 많은 곳이 맞았다. 지나가는 옷가게 마저도 AI로 각종 고양이들과 트럼프 대통령을 디자인한 프린트 셔츠들을 잔뜩 진열해놓은 곳이나 있었을 뿐. 그 외엔 지나치게 털옷이거나 지나치게 가죽옷인 가게들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5분을 넘게 걸어서 그나마 유명한 ㅎ점포에 도착했을 때는 기대가 거의 없었으나, 역시 유명한 곳은 달랐다. 꽤 괜찮아 보이는 거친 자켓과 클래식한 디자인의 청바지들. 그리고 너무 유명한 나머지 현금을 잔뜩 이고 지고 온 한국인, 중국인 하여간 여러나라의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관광객놈들아.
나는 돈이 있다는 티를 내려고 비싼 자켓을 들춰보기도 하며 열심히 구경을 했지만. 돈 있는 티는 중국인들을 당해낼수가 없었던게 도대체 왜 청바지 똑같은 디자인을 4장 씩 사는거지? 왠지 기가 죽은 나는 옆에 있는 그 가게의 분점에 가서 친절한 응대와 상담을 받았으나. 원래 목적했었던 브랜드는 없었고 웨어하우스 진의 한정판이라고 주장하는 바지를 판촉하려고 하셔서 (비쌌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예쁘기는 예뻤기 때문이다.
<유니클로 1트, 긴자의 유니클로>
촌스럽다고 하지 마라. 내가 도쿄에 제일 많이 가던 시기에는 긴자의 유니클로 플래그십 스토어가 제일 간지나는 유니클로였다. 현재 도쿄에 살고 있는 선배의 말로는 그 건물 디자인이 너무 이상한 관계로 미어터지는 관광객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 물건이 그리 많지 않다고. 그러면서 추천해 준 것이 유락쵸의 유니클로였는데. 그 곳의 이름은 도쿄 유니클로이고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안 그래도 선배와 저녁을 할 약속이 있었는데. 나에게 면세 셔틀을 시키는게 주 목적이었던 선배가 유니클로 가실래요? 살거 없어요? 살거 있죠? 아 여기 유니클로가 딱인데. 하면서 나를 마구 충동질 하였으나. 기억하라 유니클로와 동키호테는 사람이 갈 곳이 못 된다. 어찌저찌 일본여행을 가면 한 번은 가게 되지만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다. 나도 그래서 주로 갔던 곳은 단층으로 되어 있었던 아키하바라 유니클로였다. 그런 조그만 곳에는 관광객들이 덜 몰린다. 도대체 왜 그럴까 너희들은 크다고 뭐 너희가 옷을 백점씩 사는 것도 아닐텐데 말야.
사려고 했던 것은 정확히 정해져 있던게 유니클로U에서 나왔던 롤업백이었는데. 실은 한국에서 발매되자마자 뭐지 이거 하고 클릭해서 기계적으로 샀습니다. 사놓고 보니 너무 좋아서 왜 이런 좋은 가방이 나온거지 하고 당혹스러워서 보니 다들 사고 싶어서 난리가 난 아이템이었다.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싸고 후루룩 펴면 수납력이 아주 좋아서 한국에서 메인 가방으로 쓰고 있다. 근데 그걸 다른 색으로 하나 더 사고 싶다는게. 나의 요즘 이상한 습성. 뭔가 하나를 샀는데 아주 좋아 -> 그럼 하나를 더 사면 더 좋겠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논리인데 하여간 옷장에 똑같은 옷이 자꾸 늘어난다. 그런데 그 롤업백의 마지막 재고가 제가 일본에 도착하기 이틀 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도쿄에만 없는걸까? 하여간 일본 유니클로의 시스템에서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겨울엔 코트만 입는다는 나의 정책을 무시하고 하이브리드 어쩌고 한 파카 코트와 한국에서 품절이지만 딱히 살 생각은 없었던 셔츠를 샀다. 같이 줄 선 중국인들이 30점씩 사는데 나 혼자서 1점을 사는 것은 좀 바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면세품 계산의 줄이 엄청나게 길고 그 계산 속도도 느려서 5점 정도는 사야 그 줄 서는 시간이 보상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여간 유니클로의 큰 규모 매장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뭐 패스트 리테일에서 공짜로 옷을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막 바닥에 앉아서 뭔가 계산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가족들이 태그를 이뤄서 한 명은 줄을 서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옷을 주워오고 그러는데.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는데도 줄을 서야 했다. 그것도 꽤 긴 줄이어서 나는 너무 후회가 되어(이것이 첫번째 후회가 아니었다.) 그냥 집(호텔)로 가버릴까 유니클로 따위 없어도 되지 않나? 유니클로가 우리나라에 한 짓을 생각하자 막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2층은 더욱 난장판이었다. 묘하게 무신사 티가 나는 옷을 입은 청년들이 앞다투어 지나갔고 각 나라 사람들이 각 나라의 말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 이것이 지옥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입장을 한 이상 시간을 최대한 들이지 않고 뭔가 사긴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코트와 셔츠를 산 것이다.
나는 딱 2점을 들고 계산대에 줄을 섰으면서 너무 후회가 들어서(이것이 마지막 후회가 아니었다.) 그냥 이걸 버리고 집(호텔)에 갈까 아니면 그냥 옆에 진열대에 놓인 목도리라도 쓸어담을까 하고 있었는데. 내 바로 앞에 서있던 마른 남자가 딱 1점. 파커 베스트만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아 그래 세상엔 저런 지혜로운 사람이 있구나 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다 이러고 참고 있었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길고 긴 기다림이 필요 없이 그냥 면세가 아닌 줄을 서서 옷을 계산하고 가면 될 것을. 그 사람은 딱 한 점 파커 베스트를 들고 현금으로 깔끔하게 계산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내 차례가 되어 여권을 제시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인과도 같은 모습에 질려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성난 러시아인(내 뒷 차례)의 호통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여권을 꺼냈다. 도대체 뭐였을까 그 사람.
<아메카지 4트, 에비스의 W와 J>
여러분에게 하나하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계속해서 도쿄 도내의 유명 아메카지 매장을 찾아다니면서 아메카지를 테스트해보았다. 예를 들자면 2트쯤 되었던게 마루노우치 스트리트의 빔즈 플러스 매장으로, 일단 바버를 말도 안되는 가격에 팔고 있는 것에 좀 질린데다가 어떤 사이즈로 입어도 팔이 짧아서 아메카지가 맞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일본에서 사는 옷들은 대부분 팔 길이가 맞지 않는다. 내가 팔이 약간 긴 편이긴 하지만 애초에 일본에서 유니클로 옷만 죽어라고 사는 이유가 팔길이가 맞는 옷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슬램덩크의 등장인물들은 평소에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얘네는 나이키 갸쿠소 마저도 팔이 짧은데 혹시 겨울에도 반팔만 입고 다니는 걸까. 오기가 좀 들어서 마루노우치에 그럴 듯한 옷 가게는 다 들어가봤는데 대체로 몸통은 엄청나게 좁고 팔은 지나치게 짧았다. 여행 중에 입은 것은 아르켓에서 나온 헌팅 자켓인데 나에겐 좀 커서 팔을 접어서 입고 다닌다. 이 정도 천 크기면 일본 기준 엠사이즈 옷은 세벌도 만들겠다 싶다.
시부야에서 몇 군데 돌아다닌 구제 스토어도 비슷비슷했다. 친구가 시부야에 살고 있어서 어쩔수 없이 간 시부야지만 최대한 즐겨보려는 마음으로 구제 스토어를 돌아봤는데. 닌텐도 스토어에 갔을 때의 10분의 1만큼도 신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분 저는 키가 188에 90킬로그램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저처럼 너무 과하게 크지 않다면 충분히 시부야의 패션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엘든링의 알렉산더 티와 괴혼의 왕자님 후드티가 사이즈 스몰 밖에 없다고 했을 땐 정말로 화가 났다. 바가지란 걸 알면서도 사겠다는데 왜 팔지 않는가?
하여간 여행 전에 보아뒀던 유명 청바지 브랜드 웨어하우스와 제라도를 가려고 굳이 역 하나 거리인 에비스까지 갔는데. 원래 웨어하우스 청바지를 사고 싶었던 터라 웨어하우스를 갔는데 점원의 대응이 정말 별로였다. 시착을 하려고 내가 들고 있는 청바지를 갑자기 들고 가버리지 않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일본어를 써서 그런가 영어도 내가 너희보다 잘할텐데 하는 일본에 올 때 마다 수십번씩 하는 의문이 또 머릿 속에 떠올랐는데. 실제로 내 친구 중에 하나는 일본어를 꽤 잘하는데도 일본 여행에서는 절대로 일본어로 말하지 않는다. 친절한 일본인이라는 이미지는 결국 권력관계에 충실한 일본사회의 왜곡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꽤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고 별로 기대하지 않고 다른 브랜드인 제라도에 갔다.
제라도는 비교적 한가한지 점원들 끼리 재미있게 놀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엄청나게 친절했다. 홈페이지에서 봐두었던 자켓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서 살 뻔 했는데. 이제까지 어떤 아메카지 매장에서도 얘기하지 않았던 면세처리 얘길 먼저 하면서 외국인이시면 이 가격에 살 수 있어요 하고 가르쳐주었다.
묘하게 감동한 나는 가까운 카페에 가서 팬케잌을 먹으면서 1시간 정도 고민한 다음, 웨어하우스에서 홀대 당한거에 열받아서 사는거 아닌가 하며 잘 생각해보다 제라도에 가서 34천엔 짜리 청바지를 샀다. 지금 잘 사시는거에요 얼마 전에 가격이 내렸거든요 라는 그럴듯한 손님 접대용 코멘트에 대해서 반감도 들지 않았고 또 올게요 하고 인사를 했다. 아니 자켓은 진짜 못 사겠더라고요 그거 정가면 10만엔이던데. 그거 사면 나는 파산이야. 파산은 둘째 치고 유니클로에서 파커 자켓 사서 공간도 없어…
이상이 이번 여행에서 나의 아메카지를 둘러싼 모험의 결과이다.
34천엔짜리 청바지 한 벌
피의 복수 실패.
이상.
24년 12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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