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옛날의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주 최근의 일도 아닙니다. 때는 숲 속에서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늘어나 열매를 줍는 동물들보다 농사를 짓는 동물들이 훌륭하다는 여겨지는 평판이 생겨났고 비버씨가 댐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공터를 크게 늘려 더 많은 동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소리씨는 어째서인지 농사를 짓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가끔 사촌인 비버씨네나 이웃의 곰씨네의 밭에서 도움을 줄 때도 있었지만 한가한 시간에는 강변에 나가서 진흙을 골랐습니다. 아주 이상한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죠.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릇이라고 해도 여러분 집에 있는 그릇들 처럼 편리하고 멋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냥 진흙을 이렇게 저렇게 빚고 말려서 나무 열매 정도 넣어 둘 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오소리씨의 사촌인 비버씨는 그런 오소리씨가 맘에 들지 않았답니다. 손재주가 아까웠던거죠.
며칠을 고민하던 비버씨는 그날도 강가에서 진흙을 모아 가던 오소리씨에게 댐을 만드는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네 취미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우리가 하는 일은 밭과 논을 늘리는 훌륭한 일이야. 오소리씨는 고개를 끄덕이죠. 비버는 오소리씨의 유일한 사촌이었고 훌륭한 비버가 하는 말이니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아직 그릇의 훌륭함을 모르고 있어. 내가 장돌뱅이 개미햝이가 보여준 것 같은 흰 그릇을 만들어내면 알아줄지도 몰라.

오소리씨는 여름 동안 비버가 댐을 만드는 일을 열심히 도왔답니다. 비버의 댐은 나날이 갈수록 크고 튼튼해져갔죠. 해가 화창한 날에는 댐의 위쪽 끝에 햇볕이 하얗게 내리쬐어 오소리와 비버는 그 위에 누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마른 여름이었지만 비버의 댐이 모아둔 물 덕분에 어떤 동물도 목이 마르지 않았죠.

눈을 감고 햇볕을 쬐던 오소리씨는 말했습니다. 비버, 나는 잠시 구릉지대에 다녀오려고 해. 나에게 여름 동안의 삯을 계산해주지 않겠어? 비버씨는 깜짝 놀랐죠 가을이 된다고 해서 댐의 공사가 끝나는건 아니었으니까요. 증축이 끝나면 보수공사가 있고 또 비버씨는 자신의 밭도 일구어야 했으니까요. 구릉지대는 왜 다녀오려는거야? 라고 묻자 오소리씨는 거기 좋은 흙이 있대 그 흙만 있으면 흰 그릇을 잔뜩 만들 수 있다던데. 라고 말했죠. 비버씨는 또 그릇 얘기냐 하고 한숨을 쉬었지만 오소리씨에게 나무 열매를 잔뜩 주었죠.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와. 내년 봄이 되면 새끼 동물들이 늘어날거고 숲에는 공터가 더 필요해.

비버씨는 그렇게 혼자서 오소리씨를 기다렸어요. 겨울은 금방 왔어요. 해가 길어지고 숲의 어떤 넓은 공터에도 겨울의 긴 햇볕과 그림자가 늘어져 동물들은 어떤 계절보다 더 게으르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냈죠. 비버씨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댐의 위를 돌아다녔습니다. 오소리씨와 같이 쉬던 댐의 끝에 다다르면 코를 킁킁 거리며 먼 곳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구릉은 멀고 이미 겨울이 되었으니 겨울이 지나고 오는 게 좋겠군. 비버씨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었습니다. 그 해의 봄은 유독 영원처럼 긴 봄이었지요. 많은 동물들이 새로 태어났죠. 봄이 왔으니 천천히 출발하면 여름에는 도착하겠어. 비버씨는 일을 도와줄 일꾼들을 뽑았어요. 동물들이 찾아와 새끼들이 태어났으니 공터를 더 늘려야 한다고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죠. 오소리가 감독을 해줬으면 편할텐데...

그 영원 같던 봄은 아주 길게, 그리고 빠르게 사라졌고 금세 여름이 되었어요. 그 해 여름엔 비가 많이 오지도 적게 오지도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열심히 일했죠. 이제 비버와 오소리 둘이서 만들던 시절보다 댐은 훨씬 훌륭해지고 튼튼해졌어요. 다른 숲의 동물들이 기웃거리며 찾아와 댐을 구경했죠.
곰은 나무등걸에 앉아 바람을 쐬다 비버씨 네 댐은 우리 숲의 자랑이야 고마워 라고 감사를 표합니다. 비버씨는 머리를 긁적였어요. 오소리가 있었으면 더 좋은 댐을 만들수 있었을거야. 이런건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 가을이 되었어요. 이제 올때가 되었어 하지만 너무 늦군 오소리. 공사 현장에서 밥을 먹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비버씨는 고개를 들어서 사방을 보았죠. 하지만 이웃집의 너구리씨나 여우씨인 경우가 많았죠. 곰씨는 커다래서 아무리 몰라도 곰씨를 오소리씨로 착각할 일은 없었어요. 비버씨는 좀 퉁명스러워졌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군. 이라는 말이 비버씨의 말버릇이 되었습니다. 동물들은 때때로 그게 자기들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서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또 가을이 지났습니다. 겨울도 또 지나갔죠. 그 해 겨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버씨의 말버릇은 변함이 없었지만 동물들은 그가 누굴 기다리는지 잘 몰랐어요. 숲의 시간은 빨리 지나가니까 몇몇 젊은 동물들은 오소리씨가 누군지도 몰랐죠. 그런 젊은 동물들이 보기에 비버씨는 숲에서 제일 훌륭한 동물이었고, 무서운 동물이었죠.

또 한 번의 봄이 지나고 그리고 어느날 여름.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날. 비버가 댐의 꼭대기에서 저 멀리 숲의 저쪽을 보고 있던 날. 오소리씨가 돌아왔어요. 흰 흙을 잔뜩 지고 그리고, 아기 오소리를 데리고 있었어요. 열매처럼 작고 아름다운 아이였죠.
오소리씨가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사촌인 비버씨였습니다. 비버씨 내 딸이야.
비버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군. 그래서 늦은거냐. 하고 생각을 했죠.
오소리씨가 원래 살던 동굴을 청소하는 동안 오소리씨의 작은 아이를 풀숲에 눕혀놓고 비버씨는 묵묵히 나무 뿌리를 갉으며 중얼 거렸죠. 이제 돌아왔으니 내 일을 도와줄수 있겠지

하지만 오소리씨는 돌아오고서도 비버씨를 돕지 않았어요. 그 댐은 이제 너와 내가 만들던 댐이 아냐 아주 훌륭해졌어. 하고 말하고 오소리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릇을 빚었고 딸을 키웠죠. 오소리씨는 정말 좋은 엄마였어요.비버씨는 댐의 높은 곳에서 나무를 갉다가 오소리씨가 딸과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버씨는 이제 더 이상 너무 늦는군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주 과묵해졌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오소리씨가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나 겨울이 가기 전의 어느 날, 오소리씨는 숲속의 동물들을 모아서 이제까지 만들어온 자기의 그릇을 보여주었답니다. 사촌인 비버씨, 친했던 곰씨, 이야기꾼 여우씨 등 많은 동물들이 모였죠. 정말 많은 그릇이 있었죠 나무 열매를 올려놓는 접시와 항아리. 빗살무니와 발바닥무늬 그릇. 오소리씨는 자랑스럽게 자기 그릇들을 소개했죠. 마음껏 가져가세요. 곡식을 넣는데도 쓸수 있을거에요. 이제까지 숲속에서는 곡식을 그냥 동굴에 쌓아뒀었거든요. 이제는 동굴 바닥에 두다 물에 젖는 일도 없을 거에요. 초대된 동물들은 오소리씨의 그릇을 구경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죠. 과연, 이런걸 하고 있었구나. 다들 웃는 얼굴로 오소리씨를 칭찬하고 오소리씨의 딸에게 너희 엄마는 아주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 하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죠.

그런데 그 때 오소리씨의 초대에 제일 먼저 나타나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던 비버씨가 갑자기 일어나 퉁명스럽게 소리쳤습니다. 말도 안돼 이런건 게으름뱅이의 취미일 뿐이야.
오소리씨는 당황해서 비버를 쳐다보았습니다. 비버 무슨 일이야.
우리가 매년 만들어내는 곡식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작은 그릇에 곡식을 채운다는거지? 나무 열매나 몇개씩 따먹고 배를 주리던 시절에나 어울리는 재주야. 우리가 털이 없어 앞발이 부드러운 인간도 아니고 이런 흙투성이 물건이 필요할리가 없잖아.
비버씨는 다른 동물들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시간 낭비 했군. 성실한 숲속 동물들의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너는 어떻게 된거 아냐? 이런 걸 만들 시간에 댐에 나와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줄테니까. 동굴을 나가버리는 비버씨의 뒤를 웅성거리면서도 많은 동물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오소리씨는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은 오소리씨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연중에 농사를 짓는 동물이 훌륭해. 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비버씨는 댐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 중에 제일 훌륭했어요. 오소리씨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비버는 훌륭해 똑똑해 잘났어. 나는 상대도 안되지. 하지만 나는 그릇을 만들고 싶어. 
오소리씨는 낮에는 열매를 줍고 밤에는 그릇을 만들었어요. 동굴 가득 그릇이 쌓여갔어요. 가끔 개미핥기 장돌뱅이가 와서 그릇을 사주기도 했어요. 숲에서 만든것치고 훌륭해. 근데 여기선 아무도 안 쓰는거야?
충분히 훌륭하지 않아서 그래. 하고 오소리씨는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소리씨는 자기가 훌륭한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비버씨가 자길 인정해주지 않는거라고 생각했어요. 딸이 자라 스스로 땅을 파고 열매를 따올 수 있게 되자 오소리씨는 더욱 많은 시간을 그릇을 만드는데 쏟았습니다. 비버씨가 더 훌륭해 지는 동안 말이죠 결국 주변 숲 전체를 통틀어서도 제일 근면하고 훌륭한 동물이 되었죠.

오소리씨가 흰 흙을 가지러 구릉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황야의 문턱에서 쓰러졌을때도 비버씨는 댐을 짓고 있었죠. 소식을 들은 오소리씨의 딸이 오소리씨의 뼈를 오소리씨가 마지막으로 만든 그릇에 담아돌아왔죠.
뚜껑이 있는 항아리였어요 아주 특이한 작품이었죠. 그리고 작은 오소리씨는 이제 오소리씨와 완전히 똑같이 닮아 꼭 오소리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비버씨는 바쁜 일과 중에 부러 동굴에 찾아와 작은 오소리씨에게 말했어요. 알다시피 너희 엄마와 나는 사촌이다. 하지만 너희 엄마는 훌륭한 손재주를 썩혔어. 더 건실한 일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야.
작은 오소리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비버씨는 앞발을 핥다가 말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너의 친척이다 일자리가 필요하면 언제라도 찾아와라. 하지만 작은 오소리씨는 비버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대신 그 많던 그릇을 숲 속의 동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죠. 나눠주고 남은 것들은 모두 팔렸습니다.
장돌뱅이가 와서 며칠에 걸쳐서 실고 갔죠. 남은 것은 엄마 오소리씨의 뼈가 든 뚜껑이 달린 항아리 뿐이었어요. 작은 오소리씨는 그릇을 만들진 않았어요. 하지만 댐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미도 독수리도 느티나무도 알듯이 그 해 정말로 큰 홍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손을 쓸수 없었죠. 비가 열흘 밤낮 동안 내렸어요. 해가 지나 더 크고 훌륭해졌던 비버씨의 댐이...결국엔 무너졌죠. 곡식 창고가 물이 잠겼어요. 숲의 반이, 아니 숲의 전부가 물에 잠겼죠 아무 것도 젖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파종을 위해 남겨놓은 것들도 모두 물이 묻어 썩기 시작했어요. 동물들은 아직 젖지 않은 나무 위에 올라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닷새가 지난 후였죠.

강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댐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개척한 공터는 대부분 다시 물에 잠겼고 숲은 아주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죠. 적어도 동물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모든 동물들. 살아남은 동물들이 겨우 해가 난 숲의 공터에 모였어요. 먹을수 있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파종할 씨앗에 물이 찬게 문제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습니다.

내가...인간 마을에 가서 씨앗을 구해오겠다. 곰씨가 입을 열자 모두 반대합니다. 여우씨가 말합니다. 무모한 짓 하지마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라. 털이 없어서 우릴 질투해 가죽을 벗기려고 드는 놈들이라고.
비버씨는 가슴이 타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다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인간 마을에 가야하는건 나야. 내 댐이 무너져서 이렇게 된거야. 내가 꼭 씨앗을 구해오겠어. 아직도 숲의 가장 훌륭한 동물이었던 비버씨가 그렇게 얘기하자 동물들은 모두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 망설였습니다.

그 때 풀 숲에서 작은 오소리씨가 나타났습니다. 뚜껑달린 항아리를 안은채로 작은 오소리씨도 물에 휩쓸렸었는지 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로 말했습니다. 씨앗을 구하러 가실 필요 없어요. 비가 오기 전에 제가 준비해둔게 있어요.작은 오소리씨는 뚜껑을 열어, 비버씨 앞의 겨우 마르기 시작한 땅에 항아리 살짝 기울입니다.
너..어머니의 뼈를...하고 놀란 비버씨 앞에 떨어진건

씨앗들이었습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숲에 비가 심상치 않게 오자 어머니 대신 씨앗을 넣어둔 것 입니다. 오소리씨의 뼈는 비에 씻겨 나갔지만 타타탁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젖지 않은 씨앗들이 공터에 떨어집니다.

작은 오소리씨는 분명 어머니도 이걸 바라셨을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버씨는, 비버씨는 가만히 씨앗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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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글은 단 한 줄의 진실도 없음을 사전에 공지드리는바 참조 바랍니다.

올해 2월 페낭에 갔었다. 그렇게 안가려고 갖은 수를 다 썼는데 소용이 없었다.
공항에 가니 거래선 구매가 차를 타고 마중을 나와있었다. “로컬 음식점 가려는데 괜찮아?” 괜찮아 나는 로컬을 아주 좋아해. “로컬을 좋아하면 중국어를 좀 배우지 그래” 아냐 정정할게 나는 역시 글로벌이 좋아 맥도날드 스타벅스는 내 인생의 길잡이지. 구매는 희미하게 웃었다.
작은 도시라던 페낭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우리는 정말 길가의 가게에 들어가 중국음식을 먹고 농담을 몇개 하고 음식 사진을 찍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점심 식사 시간을 조금 넘겼지만 구매는 “늦어도 돼, 너랑 먹고 간다고 했어. 내 보스가 그 대신 너 돌아가기 전에 꼭 인사해야하니까 말 없이 출국하지 말라더라”하고 말했다.
몇개인가 미팅을 하고 비행기 시간에 쫓겨 나가며 나는 구매에게 인사를 했다. K 다음에 또 봐, 5월? 4월? 그 쯤에 또 올게. 구매는 양산을 썼는데도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또 봐”라고 말했다.

커서가 깜빡인다. 사람의 숨소리보다 빠르다. 심장이 뛰는 속도보단 느리다.
나는 메일을 쓴다. 친애하는 K, 당신의 퇴직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작년에 당신이 건강 상의 이유로 잠시 휴직하고 복귀 하셨을 때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퇴직하게 되실 줄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쓴 문장을 다시 읽고, 잠시 생각하고 물을 마시고 다시 메일을 쓴다. 모든 말을 지우고 이렇게 쓴다.
‘친애하는 K, 우리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당신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매 담당자이고 그 회사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저의 파트너였습니다. 당신의 오랜 기간 도움과 서비스에 감사하고 당신이 퇴직 후에도 언제든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진심을 담아’ 나는 메일을 읽고 또 읽는다.

아직 나이가 젊어 내 누나 정도의 나이인 K는 4년 동안 나의 카운터 파트너였다. K는 암 말기로 더 이상 처치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퇴직을 한다고 한다. 그는 퇴직한다고 했던 날보다 4일을 더 출근했지만 나의 메일엔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고 보니 꼭 공중에 돌을 던지는 것 같은 짓을 했다 싶었다. 어떤 곡선도 허공에 남는 일은 없고 다만 말도 하지 못하는 돌만 땅에 떨어진다. 돌을 던진 사람조차 어디론가 가버리면 남는 것은 땅에 떨어진 물질 뿐이다.

작년 A형이 죽었던 월요일의 아침, 나는 A형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몇달이 지난 후에야 그가 내가 전화를 건 걸 알았었는지가 신경쓰였지만 나는 그의 사망시간도 모른다. 멍청한 행사가 있어서 장례식에조차 갈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 전의 금요일 퇴근하는 A형과 같이 있었던 것은 나다. 나는 퇴근하려는 그를 붙잡고 업무 협의를 하고 형의 자리에서 메일을 보내고 담배를 피러 간다는 뒷꽁무니에 인사를 했다. 우리가 친한 사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정말 띄엄띄엄 했고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일 얘기만 했을 뿐이다.

아니 결혼을 했다고? 하고 놀라하자 “너도 참 대단하다 2년이나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결혼했는지도 몰랐냐”라고 누군가 면박을 줬다. 내가 A형에게 아 저 솔직히 결혼하신지 몰랐었어요 라고 하자 그는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가 나와 이야기 할 때 몇 번이나 웃었더라 뭘 좋아했더라 무슨 이야기를 했지. 가족의 이야기를 했던가. 아니 내가 A형과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가 뭐였지. “다다음주 쯤에 H수석 올라오면 치맥 좀 하지”라고 했었나. 뭐였지.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치맥하자고.

메신져 앱에 A형의 이름으로 새로운 친구 추천이 떴다. 모르는 얼굴이다. 나는 아직도 A형의 번호를 지우지 않았기 때문에 형의 번호를 받은 사람이 추천에 뜬 것이다. 프로필을 보니 환하게 웃고 있는 개구쟁이 소년이다. 스마트폰을 산 것이 신이 났는지 친구들의 사진을 많이도 올렸다. 그 프로필을 삭제하려다 그대로 멈춰서서 생각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죽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의 가족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형은 아이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사진 속의 개구쟁이가 형의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리도 없지만 형이 모습을 바꿔서 어딘가에 계속 살아있는게 아닐까 사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그 프로필을 지우고 전화번호를 지웠다.

여름, 친구들과 커피를 사러 단지를 가로질러 가는데 멀리 하얗게 햇볕이 비치는 곳에 A형이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가는 걸 보았다. 나는 어이- A책임-하고 그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흰 셔츠를 반팔로 접어 입은 그는 손으로 햇볕을 막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가 A형을 기억해야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다.

구매 K의 후임 L은 좀 서툰사람이라 나에게 전화를 하는 걸 어려워하고, 메일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채로 똑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보내온다. 나는 꼼꼼하지도 살갑지도 않아서 L과 업무 호흡은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고집을 부리며 뭔가를 해달라고 연락을 해왔기에 전화를 하면서 아웃룩을 뒤져 K가 보낸 메일을 찾았다. 이건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네 선임인 K랑 나랑 어떻게 협의 했었는지 메일 히스토리를 줄게. 혹시 나한테 전화연락하는게 부담되면 나만 넣어서 메일 보내도 괜찮아. 네 보스랑 내가 너보다 일 더 오래 했어. L은 어색하게 웃는다. K는 성격은 조용했는데 진짜 좀 까르르 웃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다음주에 다시 연락할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과연 다음주에 연락을 할까. 모르겠다.

나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나의 손자가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많아져서는 나를 추억하는 꿈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 이미 죽어 공기와 먼지가 되어있을 내가 살아있는 것에, 내가 그렇게나 사랑한 나의 아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한참을 앉아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피할 수 없는 끝에 대한 위로란 것은 이렇게 허망하고 갸냘픈 것이다.

나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참고 공중의 나는 새를 보살피는 우리의 신을 생각한다. 우리의 신은 지금 어디에 날아오르는 새를 보살피느라 우리를 안아주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그냥 허공에 그려진 곡선일뿐이고, 움직임과 상승 그리고 추락일 뿐이어서 신이 우리를 바라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허공에 선을 긋는다. 언제까지 손을 들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19년 4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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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는 어느날 죽어 무당벌레가 되었다. 무당벌레는 산 속의 개울에 빠져 물고기가 되었다. 

토모가 원래부터 무당벌레였던 것은 아니다. 


토모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로 이루어진 가족의 아이였다. 멍청하고 착한 토모. 

사람들은 토모를 사랑하기보다 불쌍히 여겼다. 흔히 자기 보다 약한자에게 베풀어지는 그런 "호의"는 짜증이 섞이기 마련이라 

토모는 눈치를 보는데 익숙했다. 


하지만 토모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말을 잘 하지 않았지만 입을 열면 너무나 재미있는 농담을 했다. 

토모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어머니는 토모의 실수를 엄하게 다뤘다. 

토모는 오빠를 사랑했다. 토모와는 다른 똑똑하고 활발한 오빠. 사람들은 오빠를 사랑했다. 


토모의 가족이 원래부터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모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나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자주 때렸고, 가끔 오빠나 토모를 때리는 일도 있었다. 

토모는 아버지가 토모를 던져 팔이 부러졌던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기억해서는 안될 일이었기 때문에 토모는 기억하지 못하는 척 했다. 


어머니는 가끔, 그리고 자주 집을 나가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있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어머니는 가끔 무섭도록 표정이 없어지곤 했다. 아름다운 어머니. 뱀처럼 차가운 어머니. 

울면서 매달리는 토모의 손을 뿌리치고 나가서 한참을 돌아오지 않던 어머니. 


아버지가 어머니가 어디에 갔냐고 물어보면 토모는 장 보러 가신다고 하셨어요. 곧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하고 더듬 거리며 말했다. 

넌 정말 비겁한 거짓말쟁이구나. 하고 아버지가 몇 년 후의 토모에게 말했을때 토모는 오빠를 감싸던 중이었다.

아빠, 오빠가 한거 아니에요. 제가 한 거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그래? 그럼 니가 했다는 증거를 보여봐. 쓰레기통에 버렸다며?

토모는 떨면서 쓰레기통을 뒤졌다. 뒤늦게 돌아온 오빠는 너 뭐하냐?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토모를 비웃으면서 비겁한 거짓말쟁이 새끼...라고 말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토모에게 너와 오빠를 걸고 아빠는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어. 

아빠는 계속 너의 곁에 있을거란다. 라고 약속을 했다. 

그것은 둘 다 거짓말이었다. 그 거짓말이 기뻤던 만큼 토모는 슬펐다. 비겁한 거짓말쟁이야 아버지는.


매일 매일 표정이 사라져가던 어머니는 어느날 토모와 오빠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우리 죽을래? 너희 엄마랑 같이 죽을래?

토모는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토모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토모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오빠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버렸다. 아름다운 얼굴의 어머니는 구멍을 세개 뚫어놓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토모는 무서워서 어머니를 안았다.

어머니 토모와 함께 있어주세요. 제발 저를 떠나지 마세요. 토모는 본인이 한 말을 크게 후회하게 된다.


몇 년 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장식품을 던져 어머니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서 토모는 사람을 부르려 달려나갔다.

아버지가 그 때 한 말을 토모는 기억하고 있다. 너 새끼 꼼짝마 안 그러면 너도 죽여버릴거야. 

토모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날 토모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던 일은 사실이다. 

토모는 수백 번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무엇을 했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곱씹었다. 토모는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느날 어머니의 언니가 집에서 혼자 자고 있던 토모에게 찾아와, 불쌍한 토모. 어쩌니 하고 울었다.

아버지는 그 집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토모는, 솔직히 말한다면 안심했다.


그 뒤로 어머니와 오빠, 토모 셋이 사는 생활이 되었다. 오빠는 꾸준히 인기인이었고 사람들의 눈에 띄이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오빠를 건드리지 못했지만 토모는 약했다. 토모는 흠칫거리는 일이 늘었고 선생님의 말을 듣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들은 잔혹하다. 약자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낸다. 선생님이 토모를 때리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토모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토모가 또 책을 읽어요. 선생님, 토모가요. 토모가요. 

이러오렴 토모, 너는 근본부터 잘못됐어. 

그런가. 나는 근본 부터 잘못 된 걸까?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나는 비겁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따돌림을 받진 않겠지 하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생활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은 잘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단 한 푼의 양육비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오빠와 토모가 본가를 찾아가 좋아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했을 때.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할머니는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해하지 않는 이상 너희도 내 손주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토모는 여전히 토모에요. 울보 토모. 멍청한 토모. 

오빠는 토모를 일으켜세우고 집에 가버렸다. 


토모는 친구가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나가면 토모는 집안일을 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했고 남는 시간엔 책을 보았다. 글을 써서 꽤 큰 대회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았다. 

주말에 뭐했니, 하고 누군가 물어보면 아버지가 쉬는 날이어서 아버지랑 드라이브를 했어. 라고 말했다. 


저는 토모 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떠났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오빠와 토모를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나는 그걸 믿으니까.


소풍을 가서는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서 혼자 있었다. 돈을 쓸수가 없었다. 집은 가난해지고 있었다. 내가 아끼지 않으면 안돼. 

돈이 없다고 생각해서 문제집을 사본 적이 없었다. 교과서만 읽었다. 선생님이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어느날 방과 후에 선생님이 토모를 불렀을 때 토모는 또 작문 대회에 나가라시는 걸까. 하고 얼마 전에 쓴 에세이를 들고 교무실로 갔다.

교무실에는 담임 선생님 혼자셨다. 토모, 너 특수고에 진학할 생각 있니? 토모는 멍청했지만 항상 공부를 잘 했다. 

무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외우는 것도 곧잘 했다.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지 않았지만 가끔 친구들이 풀고 난 뒤의 문제집을 고등학생인 오빠가 가져다 주면 그걸 보고 공부를 했다. 

발음기호를 읽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를 읽지 못했지만 고등학교의 독해 문제도 어렵지 않게 풀수 있었다. 

사전을 살 돈이 없어서 토모의 사전에는 외삼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토모는 두근거렸다. 네 선생님. 저 가고 싶어요.


선생님은 웃었다.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 몇 명이랑 특수고 진학 수업을 운영하고 있거든 거기 들어오면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선생님한테 직접 수업도 받을 수 있단다. 

너한테 전혀 손해 보는 이야기가 아니야. 어머니에게 얘기해주지 않을래? 수업료가 비싸긴 해.

선생님이 말한 숫자는 토모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숫자였다.

선생님, 저희 집은 그럴 돈이 없어요.

그럴 돈이 없다고? 너의 오빠 ㅇㅇㅇ지? 걔 옆 학교에서 엄청나게 유명하고 ㅇㅇㅇㅇ고등학교 가지 않았나? 그런 애네 집이 돈이 없다고?

그랬다. 토모의 오빠는 지역에서도 유명한 인기인이었다. 화려했고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있었다. 

공부도 잘해서 지역 명문고를 가는데 큰 힘을 들이지도 않았다. 토모는 ㅇㅇㅇ의 동생이라고 불리울 때가 더 많았다. 

너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하니. 오늘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내일 다시 보자.

토모는 집에 가도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토모에게 네가 집의 가장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집이 너무 가난해졌다고, 집에는 큰 빚이 있고 우리 세 식구는 뿔뿔히 흩어져야 할 것 같다고.

토모, 네가 해야해.


선생님이 토모를 부른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토모는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희 집 가난해서 안되요.

갑자기 어금니가 부숴지는 느낌이 왔다. 주먹이었다. 하나가 가고 다른 하나가 왔다. 너 나 무시하냐?

토모가 쓰러지자. 오른 쪽 귀를 누군가의 발이 걷어찼다.

누가 좀, 토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선생님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듯이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학교 뒷편으로 나와 물을 마셨다. 귀에서 나던 피는 집까지 걸리는 40분 동안, 멈추질 않았다.

토모는 울지 않는 척을 하려고 노래를 불렀다. 쥐가 한 마리, 쥐가 두마리, 쥐가 세마리, 쥐가 네마리. 하는 노래였다.

반 친구 하나가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토모는 그게 아주 재미있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그 이후로 토모를 매일 불렀다. 일기를 쓰게했다. 거짓말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라며, 매일 노트 한페이지에 걸쳐 토모의 생활을 쓰게했다.

네가 그렇게 가난하다면 한 번 얼마나 가난 한지를 한 번 써봐, 니 거짓말도 지칠 때가 있겠지.


토모의 성적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답안지를 80%만 작성했기 때문이다. 

영재반의 뒷자리에서 토모는 매일의 일기를 적고, 영재반이 끝나면 담임에게 검사를 맡았다.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따귀를 맞고 울면서 빌기 시작할때 쯤 거짓말쟁이라고 쓰여진 노트를 받은 후 

집으로 갔다. 


오늘 저는 복지 재단에서 받아온 쌀을 햇볕에 말리고 쌀 벌레를 골라냈습니다. 

오빠는 쌀 벌레가 나온 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끔 같이 벌레를 골라주기도 하지만 그건 저의 일 입니다.


오늘 저는 라면과 참기름을 공짜로 받으러 줄을 섰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저와 사진을 찍고 저에게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라면을 빼앗아 갈까봐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 라면을 뜯어보니 양념도 들어있지 않은 라면이었습니다. 


너는 거짓말쟁이야. 언제까지 이러는 줄 보자. 회식 중에 돌아온 선생님은 교무실에 혼자 기다리고 있던 토모를 보고 질렸다는 듯이 내뱉었다.

시뻘건 얼굴로 팔을 걷어붙였다. 이리 와, 하고 손가락으로 토모를 불렀다.


매일 매일 노래를 불렀다. 쥐가 한 마리, 쥐가 두마리, 쥐가 세마리. 집으로 가는 길에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네 달이 넘어갔을 때 토모는 저 사람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토모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특수 고등학교가 아닌 성적이 높은 일반 공립고등학교였다. 

너 성적도 개판인데 거기 써서 되겠니? 요즘 반에서 몇등하더라? 15등?

담임은 이죽거리며 토모의 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입학 시험 날 토모는 평소와는 다르게 모든 답안지를 작성했다. 

입학성적은 반에서 3등이었다. 전교에서 정확히 33등이었다.


토모의 키는 금방 커졌다. 마르고 길고 하얀 토모. 표정이 없는 토모. 언제나 제대로 씻지 않은 머리에 낡은 교복의 토모. 

참고서도 제대로 가지고 다니지 않고 수업시간이면 항상 밖을 쳐다보는 토모. 

공립학교에 들어간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이었다. 

그 학교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모두가 가난하고 모두가 공부를 잘하는 학교. 

토모는 별종 취급을 받았지만 학교의 일원이 되는 것은 허락받았다. 

3년 내내 토모가 반에서 30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며서도 모의 고사만은 10등 안에 드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기가 안 좋은 시기였다.

 집이 좋지 않으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그런 아이들이 많았으니까. 입을 다물려면 얼마든지 다물수 있었다.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 동그라미를 쳤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중요해서 3년 내내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토모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4년을 견디기로 마음 먹는다. 십년. 

감옥에 들어간 큰 도둑처럼 혼자서 살아갈 힘을 얻을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린 아이가 아무 것도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토모는 다짐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성적으로 조용한 대학교에 가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서. 

아무에게도 맞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고, 손벌리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어린아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목표, 생존이 토모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꿈이었다.


토모의 마음은 오래 전에 죽었다. 

토모는 웃지 않았다. 

토모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도 모른채 집에 오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나는 괜찮아 잘 하고 있어. 그것이 마음이 죽은 증거라는 것을 토모는 몰랐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대학교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사립대학교였다.

등록금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몇년이나 지나서 만난 조부모에게 토모는 고개를 숙였다. 

조부모는 집에 걸려있던 오랜 빚을 변제해주고 토모의 등록금을 내주었다. 

오빠의 등록금과 학자금을 대주기 시작했기 때문에 토모의 등록금을 대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빠는 조부모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토모는 일주일에 세 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어머니가 토모에게 왜 아르바이트를 하니? 뭐 사고 싶은거라도 있니? 하고 물어봤을때 토모는 되물었다.

어머니, 저희 집 가난했던거 아니었어요?

아니, 우리가 왜 가난해?

어머니, 저희 집 빚 있다면서요.

아니, 그건 너희 아버지 빚이고. 우리집 안 가난해.

어머니가...저희 가난하다고 했잖아요. 빚이 많고 곧 집은 빼앗기고 저는 본가에서 커야 할 거라고. 네가 잘 하지 않으면 우리 집은 망한다고...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그만큼 힘들었었으니까.

토모 안에서 뭔가가 무너졌다. 토모는 정말 맞아도 싼 거짓말쟁이였던 것이다. 

토모는 누군가에게서 용돈을 받으면 모아서 양념과 소금 같은 것을 사 찬장을 채워넣곤 했었다. 

갖고 싶은 책이 있으면 하루 종일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책을 조금씩 읽었다. 토모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6군데의 서점이 있었다. 

주말 이틀을 꼬박 돌면 소설 한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하던게 가난 놀이였구나.

토모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등록금을 스스로 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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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피의 책이다..
어디를 펼치든 모두 붉다.

<피의 책>, 클라이브 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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