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모두 다 그런 것처럼, 나에게도 "나의 나무"가 있다.

"나의 나무"가 무엇인지 설명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로서는 나의 나무가 없는 사람을 상상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긴 하겠다. 예를 들어 아직 나의 나무가 있어본 적이 없는...그러니까 한 3살 쯤 된 사람. 아니면 다른 별의 지적 생명체가 지구 문명의 멸망 후 인류 문명의 서버들을 어렵게 돌려서 내 글을 읽고 있다거나. 해독에 수고하셨지만 다른 별의 사람이여 이 글에 뭔가 유용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뒤로 가기를 눌러 어딘가에 있는 알콜스왑으로 물건 이리저리 닦아보기 포스팅이나 읽어보십쇼.

짧게 설명하자면, 내가 말하는 "나의 나무"는 살아가다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나무를 뜻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유명한 에세이집 <'나의 나무' 아래서>에는 소년 겐자부로가 몹시 사랑하여 자주 그 아래에 앉고, 마음이 외롭거나 할 때 위안을 받았던 커다란 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 중에 안 그런게 있는가 싶겠지만) 우습고도 슬픈, 무력한 소년시절을 쓴 이 에세이에서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이라는 가혹하고 잔인한 시대에서 아니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했던 그의 ”나의 나무“에서 나즈막한 기도나 오래된 이야기에게서 얻는 그런 위로를 받습니다. 훌륭한 책이랍니다. 아동 대상의 에세이지만 그의 다른 소설들 보다 나은거 아냐 싶을 정도니까.

아주 어릴 적에 내가 가졌던 "나의 나무"는 관목처럼 키가 작은 단풍나무였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 뜰에 심어진 관상용의 나무이다. 크게 자라지도 굵고 단단하게 자라지도 못한채 자라버린 나무였다. 원래 그럴 태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그 나무를 볼 때는 내가 너무 작았는데도 다른 나무보다 눈에 띄게 작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십 몇년이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는데 오래된 단지인 만큼 단지의 나무들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어떤 나무들은 5층 짜리 작은 아파트의 건물 높이 만큼이나 자라났지만. 그 단풍나무만은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 그 이유는 (아니 정말 그 이유에서 였을까)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그 나무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괴롭혀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 책을 읽지 않는다면 단지의 뜰, 아니면 주변의 야산을 쏘다녔는데. 무당벌레나 꿀벌을 수십마리씩 산채로 모으거나 개미들 위에 과자를 뿌려 개미들이 그걸 옮기는걸 구경하는데 영원같은 시간을 썼지만 그것이 지겨워지면 대체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아마 다른 나무는 내가 오르기엔 너무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그 나무에 매달렸을 것이다. 나무로서는 정말 곤란했을게 틀림없는데 어딘가에서 나무는 가지만으로 생식이 가능하다는 걸 읽고는(그건 아마 접붙이기에 대한 이야기였을텐데) 그래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단풍 나무의 싱싱한 가지를 몇개 부러트려서는 그 근처에 심고 물을 주고 그랬었다. 아니 못되쳐먹은 꼬마였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내가 점점 커지는 동안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쉬운 나무타기 상대가 된 그 작은 단풍나무는 결국 어른이 되어 무슨 교목처럼 키가 커진 나보다 작아지게 되었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렇게 된건 역시 내가 중학생이 되도록 그 나무에 매달려 지냈기 때문 일 것이다. 부드럽고 탄력있게 휘는 그 가지에 나는 더 커지고도 가끔 매달려보곤 했는데 부러질까 두려워 체중을 실을 수는 없어도. 어두운 밤 집에 돌아오는 길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되는 양 양팔로 가지를 잡고는 대롱대롱 매달려 마음이 내킬 때 까지 있곤 했다. 전세계의 소년소녀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역시나 그 작은 나무를 사랑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재건축으로 사라졌다. 나무들은 잘리거나 파내어졌다. 13동 앞에 서있던 커다란 백목련이나 6동 뒤로 줄지어 서있던 포플러는 아마 파내어져 팔렸을 것이다. 단단하고 곧은 훌륭한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작은 단풍나무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너무 매달려 커지지 못한 단풍은 그냥 잘려졌을 까 아니면 어느 좀 마음 착한 인부의 손에 파내어져 여느 부지의 정원 구석진 곳에 심어졌을까? 운이 나쁘자면 또 어디 학교의 운동장 같은 곳에 심어져 원숭이 같은 인간놈들을 세명씩 네명씩 매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단풍나무 생각을 하며 한번 알아볼까 싶다가도 자기 땅 한평 없는 월급쟁이가 나무의 행방을 알아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금세 그만둔다.

나무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다. 나무가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쓰다듬어 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그 등치에 기대거나 그늘 아래 앉는 것 뿐인데 나무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니. 인간은 정말 제멋대로가 아닌가. 우리가 나무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나무들이 우리를 구분이나 할 수 있으려나, 우리가 나무에 울분을 터트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그 아래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나무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싶다. 그저 바람소리에 맞춰 그 가지를 흔들고 나뭇잎 부서지는 그 소리와 함께 그늘을 내려 볕을 가리기나 할 뿐이지.
말하자면 나의 나무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다.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서 우리는 그저 서있을 뿐인 나무를, 그 그늘과 단단한 침묵을 사랑하고 마는 것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나의 나무란 대체 그런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듯이 나의 나무를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을 나의 나무를 그리워하듯이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 내가 좋아했던 나무는 단과대 옆에 서있었다. 7층에 있는 학생회실을 나와 창가에 서면 보이는 커다란 나무로. 여느 건물 3층 4층 까지는 닿을 듯한 여름이 되면 가지를 사방으로 뻗는 나무이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과 풍성하게 매달린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려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어느 봄 학교에 처음 들어가 혼자 어슬렁거리다 문과대 창을 통해 나무를 보고는 한눈에 그 나무가 마음에 들어 매일매일 혹은 기회가 날 때 마다 창가에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질리는 일은 없었다. 복학을 하고 돌아왔을 때도 처음 한 것도, 졸업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것도 7층에 올라가 그 나무를 바라본 것이었다. 나의 학교 생활은 멍청하고 한심한 일화들과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읽은 책들, 그리고 변하지 않고 철이 되면 바람에 흔들려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번 겨울 볼일이 있어 학교에 돌아가 보니 그 나무는 있던 자리 그대로 있었으나 커다란 가지 대부분이 잘려져 있었다. 눈이 내렸지만 어떤 눈송이도 나뭇가지에 매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또 7층에 올라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가 내던 소리를 떠올렸다. 항상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23년 2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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