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4시, 아니 새벽 5시쯤 자기 시작해서 8시에 일어났다. 별로 하고 싶은게 없어서 책을 정리 하다가 이제 갈 일이 없어진 여행 예약을 취소 하고는 8월 말 까지 무료 취소인 이 예약은 그 때 가서 취소 할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가 더 바보 같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지금 쓰는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12시가 될 때 까지 책을 읽고 있다가 오늘은 만물이 생동하는 주말이니까 분리 수거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꾸러미에 플라스틱 병과 콜라 캔을 잔뜩 넣고 분리 수거장으로 내려갔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니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 쪽 구석에 보라색티에 마스크로 입을 가린 말라깽이 아이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엘레베이터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굉장히 놀라고 동요하여 서로 눈이 마주친 말라깽이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인사를 하는 것도 못 본 척 하고 밖으로 나가 천천히 분리 수거를 했다. 초등학생? 중학생 정도 되었으려나. 주눅이 든 아이 특유의 표정에 얼굴은 어둡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분리수거장은 그늘 아래에 있었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항상 쓰레기통 주변에서 서성이는 까치도 나무 위 그늘 안 보이는 곳에서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가지 위에 앉아있었다. 나무 그늘 벗어난 곳의 아스팔트는 지옥처럼 뜨거웠다. 바로 오늘의 일이니까 감히 현재형을 써서 말할 수 있다. 숨을 쉬기가 싫을 정도로 덥다.
돌아오는 길에 본 말라깽이 아이는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누군가와 통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워서 탈진 하고 있는 아이 특유의 나른해진 표정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목이 마른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쉽게 눈치 챈다. 여자친구들이 대체로 바싹 말라 물도 안 마시는 사람들이었던 탓이 크다.
집에 올라와 화장실에서 보니 아랫 잇몸 중 하나에 피가 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놀라서 입술을 깨물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피는 검고 멍울져있었다.
해야할 빨래가 있고. 집안일이 있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아직도 있다. 이걸 다 치우는데는 얼마나 걸리려나 빽다방에 가서 아샷추라도 사와야지 싶었다. 지갑을 가지고 나가는 길에 냉장고의 펩시제로 한 캔을 꺼내 가지고 나갔다. 아이가 있으면 줘야지 목이 말라보였으니까. 아이가 없으면 그걸로 다행이다 쿨팩이라고 생각하고 목 뒤에 대고 카페에 가야지.
저기요, 하고 캔을 내밀자 아이는 아주 순순히 캔을 받았다. 말도 안되게 더운데 이미 한 시간 이상 앉아있었던 것 같다. 너무 더울텐데 이거라도 드세요. 하고 말했다. 아이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목이 갈라져서 제대로 말을 못하고 겨우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아파트 통로인데도 후덥지근하다.
나는 걸어서 10분, 15분 정도 되는 카페까지 걸어가며 생각한다. 내가 돌아갈 때도 아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하지. 스마트폰 배터리는 있는 것 같은데 부모가 어디 멀리에서 오고 있는건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하는데. 어디에서 봤더라. 콜라에 카페인이 들어있는데 초등학생이면 마시면 안되는거 아닌가.
아샷추를 샀다. 그것도 큰 사이즈로. 그리고 그걸 들고 평소의 반도 안되는 속도로 느릿하게 걸어간다. 아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하지. 곧 1시가 되고 2시가 되면 더 더워질텐데 어떻게 하지.
언덕 등성이를 올라가는 나무 계단에서 나는 속으로 애타게 기도한다. 제발 다른데로 가게 해주세요. 걔가 기다리는게 누구이든 이 더운 날에 걔를 그만 기다리게 하게 해주세요.
계단에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니 다행히 콜라는 마시기로 한 것 같았다.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보니 가끔 동네에서 보이던 중학생인 것을 알았다. 우리 동은 아니다. 우리 동 같은 라인에 친구가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이면 항상 아파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 전혀 눈치채지도 못했고 그냥 말라깽이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저기, 12시부터 앉아계시지 않았나요? 더운거 괜찮으세요? 아이는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좀 두서없이 대답한다. 아 친구가 1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자고 있었데여 지금 일어났다고 해서 2시에 만나기로 했어여. 아이는 얼굴에 난 여드름을 가리는 버릇이 있는지 얼굴을 가리며 웃는다. 아 친구라는게 그 못생긴 남자 아이 얘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네. 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요리를 하려고 아샷추를 한 모금 마시고 손을 씻다가 마음을 바꿔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하나 꺼내 1층으로 내려가서 아이에게 주었다. 콜라 하나 마시는 정도로 열기가 가셨을리가 없을거고.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흔히 그러듯이 배려 하나 없이 더 기다리게 할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그 뭐냐. 친구가 2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면 그냥 집으로 가세요. 아이는 문자로 따지면 ㅎㅎㅎ정도 될 듯한 웃음 소리를 내며 차가운 탄산수를 받았다. 다시 엘베를 타려고 올라가는데 소리가 너무 크게 나지 않게 조심히 잡아서 탄산수 뚜껑을 여는 소리가 났다.
지금은 고기를 재워두고. 빨래가 돌아가길 기다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은 글을 쓰는 사이 2시 20분 쯤 되었고 지금쯤 말라깽이 아이는 다른 말라깽이 친구를 만나서 원래 하려던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왜 아까 그렇게 놀랐냐고 하면.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흘낏 그 아이를 보는데 내 아이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나는 결혼을 한 적도 없고, 딸이든 아들이든 자식이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나는 그 새처럼 마른 아이를 잘못 보고 깜짝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잇몸에 고여있는 피를 닦아내자 입술에서 난 피가 다시 이빨에 맺혔다.
이상하지 애초에 나한테 아이가 있지도 않았는데 왜 입술을 이렇게 아프게 깨문거지. 하고 또 다시 생각한다.
2024년 7월 28일 너무 더워서 정신이 이상해버릴 것 같은 날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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