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삶에서 그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불행해지는 일 뿐이다"
쿳시의 소설을 욕조에서 읽다 웃었다. 뭐라도 들어야지 싶어서 유투브를 틀었는데 드보르작이 나왔다. 신세계에서가 왜 나오는거야 맙소사. 우르르쾅쾅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를 물에 넣었다. 머리 끝까지 따뜻해지고 곧 숨이 막히는 지점이 오겠지.
나는 물 안에 잠긴 사람처럼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요즘엔 혼잣말도 하지 않는다. 머리가 텅 빈 사람 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책을 가득 쌓아놓고 하나하나 읽는 이유는 내 안에 아무 문장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으로라도 채워보려는 노력이다.
집에 산더미 처럼 책이 쌓여져 간다. 또 그럭저럭 지지 않는 속도로 책들이 치워친다. 하지만 글자들은,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말들은 하나도 내 안에 고이지 않고 어딘가로 흘러나간다. 통장에 난 구멍만큼이나 커다란 구멍이 신경 어딘가에 나 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는데 소설 몇 권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모래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내 안으로 글들이 빨려들어가지만 어디로 빨려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사라진다. 나는 그게 어디로 가버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할 말이 없다.
한 때 소설은 나의 육신, 서사는 나 자신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때는 내가 이야기로 만들어진 인간이라고 확신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껍데기처럼 철컹거리고 텅 빈 울림 소리나 내고 있는 요즘은, 역시 인간은 탄소와 물로 이루어져있는거지 하고 생각한다.
옛날의 사람은 대충 사람이 흙과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었나보다. 흙을 모아 모습을 이루고 거기에 호흡을 불어넣으면 불완전 하나마 생육하고 번성하는 무언가가 생겨나다니, 황금시대로다 좋은 시대로다. 지금의 사람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오랜 기간의 사회화와 재정적인 노력, 공동체의 지원과 부모의 여러가지 뭐시기 등. 신품의 인간이 아닌 나는 내 몸을 구성하는데에 이야기가 조금쯤은 섞여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렇게 변명해 보라지.
내가 뭘 했더라. 회사의 일이 아닌 것들은 집중을 해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해낼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제는 마켓 컬리로 실리콘 얼음틀을 주문했다. 공룡이나 바다생물들 모양 대로 얼음을 얼릴 수 있다. 나는 커다란 컵에 고래 얼음을 넣어 마시고 싶다는 이유로 얼음틀을 사서 고래와 돌고래와 거북이와 하여튼 이것저것을 얼렸다. 커다란 컵에 넣고 물을 넣어봤는데 생각만큼 예쁘진 않았지만 지금 고래 얼음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먹고 있다. 만족하고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얼마 전엔 아는 사람을 닮은 사람을 봤다. 얼마나 닮았냐고 묻는다면, 15%정도 닮았다. 나는 그 15% 정도 닮은 그 사람이 신기해서 커피를 한 잔 다 마시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쳐다봤다. 동행한 과장님이 아는 사람이에요? 뭐 그렇게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세요. 이래서 생판 남입니다. 혹시 고소 당할 여지가 있을까요? 하고 물어봤다.
이런 일이 있었다. 누군가 아구찜 보다 맛있는걸 드세요. 라고 말했는데 오늘 아구찜을 시켜먹었다. 평소에 시켜먹는 곳과 다른 곳이었다. 달고 짰다. 아구찜 다시는 먹지 말아야지 하고 몇 번째로 다짐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일이 있었다. 자격증 하나 따두려는게 있어서 추석 때는 그걸 공부해야지 생각했는데 그만 그게 수강생 부족으로 폐강이 되었다. 꼼짝 없이 추석때 아무 것도 안하게 생겼다.
이런 일이 있었다. 도미노에서 나온 파인애플 피자, 큰 판 시켜서 두 조각 먹고 나머지 얼려놨더니 정말 잘 먹고 있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토요일 아침으로 남은 6조각을 다 먹었다.
그래, 이런 일이 있었고 또 뭐가 있었지. 잘 모르겠다. 내가 또 무슨 할 말이 있었지. 나는 왜 어디도 걸어다니고 싶지 않은 거지. 어제 새로 나온 게임을 하다가 미술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부분을 플레이 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나 미술관이랑 박물관을 좋아했다니 참 웃기는군. 하고 플레이스테이션을 끄고 잠을 자러 갔다. 그래 이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쓴 어떤 말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니다. 단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상실이나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정말로 무엇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건조기에 돌린 침대보를 안고 나오는데,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얼굴을 파묻고 잠시 숨을 멈춰보았다. 이것이 오늘의 유일한 좋은 일이었다.
18년 9월의 16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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