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하는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외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난 날. 

커다란 키에 양복과 목도리, 지팡이를 한 외할아버지는 턱을 굳히고 주변을 쳐다보았다. 


두번째로 만난 날 누워있던 어머니는 아버지, 아이들을 봐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눈썹을 찌푸리셨던 걸로 기억한다. 

외할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쳐다보고 장갑을 벗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에게는 총명하고 씩씩하구나. 

나에게는... 너는 새끼여우 같구나. 라고 하셨다. 새끼여우. 

누나는 그날 외할아버지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서 네 기억이 잘못된거라고 말했다.




17년 1월 5일은 외조부의 3주기이다.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항상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탄다고 하셨지만 

오늘 외할아버지를 만난다면 그 누구보다 수다쟁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몇 번이나 외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려고 했지만 3주기가 다 된 지금까지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겠다. 


입 밖에 내지 않은 사실들이라도 그것이 잊혀지진 않듯이 감정이나 기억들이 스러지지 않고 신발 속의 모래처럼 남겨져 있듯이. 

나는 이 마음이 완전히 가시는 일 없이 그대로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원히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사람은 이미 가버렸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감정이 남기고 간 것들이 계속해서 움직여간다.


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2015년 9월 나는 교토에 여행을 갔었다. 

그 당시 나온 아이폰을 사러 간거였고 교토에 갔던 것은 일종의 벽에 도배할 때 쓰는 덧붙임 종이 같은 거였는데. 

생각보다 예약한 아이폰을 빨리 구매 할 수 있어서 오사카에서 교토에 도착하자 오후 한 가운데 쯤이었다.


내가 왜 굳이 니죠 성을 가려고 했는지, 교토역에서 내리자 별로 고민도 없이 캐리어를 질질 끌며 니죠 성에 갔다.


처음 가는 곳이었는데도 니죠 성에 가자 익숙하게 여기가 어떤 곳인지가 떠올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헤이안쿄의 궁궐이었던 니죠 성은, 그 후로 계속된 증축과 개축을 겪었으며 니죠의 어전과 그 정원은 우아하다. 

병사들을 막기 위해 축조된 벽과 해자, 그리고 연못들. 총을 쏠 수 있는 각도를 생각하여 꺾여진 길들.

끊임없이 니죠 성에 대한 것들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성을 관람하는 것이 다 끝나고 성 앞의 벤치에 앉자.

나는 그제서야 나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외할아버지였다.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일본의 정경을 사랑하셨기에 분기에 한 번은 일본에 다녀오셨다.

자주 어떤 곳이 아름다운지를 설명하셨다. 즐거운 듯이 예전의 일들을 얘기해주셨다.

크게 앓으셔서 더 이상 해외를 가지 못하게 되시고 나서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일본 출장에 다녀올 때 마다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먹거리들을 사서 보내드렸다.


할아버지가 조금 나으시면 제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에 며칠 다녀올게요.

어머니나 이모가 같이 가면 오히려 불편해 하실테니까. 어떠세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마음에 안드는게 있을 때면 그러시던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는 먼 곳을 쳐다보셨다.


니죠 성에서 가라스의 길을 건너 로쿠도인으로 가는 사거리. 나는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이제야 왔네요. 이제야 이해했어요. 


아사쿠사의 뒷길, 아카사카의 가게, 우에노의 꽃, 히로시마의 해변, 니죠의 정원

가모가와의 강변. 반팔의 소년이던 외할아버지가 앉아 책을 읽던 곳.



나는 외할아버지가 얘기했던 정경을 근거로 4개 정도 후보지를 구글 맵에서 찾아냈다.

물이 흐르다 느려지고, 굽이 치고. 다리가 멀리 보이며 기온의 한참 남쪽. 강변으로 내려가는 경삿길.

밤이 되면 금방 까맣게 되었지만, 경삿길 부근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해가 질 때 까지-하고 말씀하셨다.

오래 찾을 것도 없었다. 북쪽에서 부터 차례대로 후보지를 가보다 세번째 쯤 나는 여기가 외할아버지가 있던 곳이란 걸 알았다.

반팔의 소년이 밤이 올 때 까지 산시로를 읽다가 일어서던 곳. 이제는 찻길이 생겨서 조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모가와의 강변에서 조용히, 서른도 넘었으면서 새끼 여우처럼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뭐라도 해라. 돈을 벌어. 버러지처럼 살지 말아라. TV를 트시더니- 봐라 저기 자막 나오는 거

보험쟁이든 외판원이든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것이 아니냐. 제 밥값을 못하면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어.

할애비는... 할애비는 늙었어. 외손자가 제 몫을 할 때 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을 자신이 없어.
너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돼. 뭐라도 해라 뭐라도 제발.

혹은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큰 손자를 자주 그리워하셨다.

서울대 병원에 큰 병환으로 입원하고 계실때 병실을 지키다 이모와 교대하는 나에게 들리란 듯이 외손자는 어쩔수 없군. 이라고 중얼거리셨다.

친손주들은 영화에 음악을 공부하는데 그건 뭐라도 제대로 하는거에요 이모? 네가 참아. 너한테 투정부리시는거야 알면서.

외할아버지가 첫번째 쓰러지셨던 날. 나는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로 차를 돌려서 댁으로 갔다. 외할아버지는 낭패해하셨다. 

일어설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어. 걷지 못하는 짐승은 죽는거다.

이모와 외삼촌과 어머니와 내가 외할아버지의 옆에 있었다.

할애비는...이제 다 틀린 것 같다.

괜찮을겁니다. 외할아버님. 이라고 말하자 외할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외할아버지 댁에 있을 때의 내 자리 - 외할아버지의 애장서들을 모아둔 책장 옆 -에 서서 나는 외할아버지을 보았다. 

그래요? 외손자니까요?

일주일 후 두번째 쓰러지셨고 ICU에 들어가셨다.

1월 4일은 토요일이었지만 나는 회사일이 있어서 하루 종일 다른 곳에 있었다.

팀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장례 지원을 하는 일이었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외할아버지 많이 아프셔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일원동에서 흑석동의 병원 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
그리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 

나는 강남역에서 멈춰섰다. 외할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가실 분이 아냐. 그렇다고 해도 기다려주실거야. 

한시간이 넘게 강남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은 아무 나쁜일도 일어나지 않을걸 믿는다는 듯

(외할아버지가 나를 버리고 먼저 갈 일이 없을 거라는 듯이)

ICU의 면회시간이 끝날때 쯤, 병원에 도착했다.

어머니, 할아버지는요? 응 괜찮아 많이 나아지셨어 하고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내일 일요일이니까 내일 면회시간에 올게요. 응 그래 고마워.

어머니와 나는 병원 주차장에서 한참을 그냥 앉아있었다. 너무 늦게와서 죄송해요. 아니야, 회사일 하고 있었잖아.


1월 5일. 나는 버스를 타고 종로에 도착했다.

아이패드 케이스를 사고. 커피를 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딴 짓을 하고도 어쩔수 없이 외할아버지가 누워 계신 병원에 왔다. 

혜화동의 병원으로 정오 쯤에 옮겨지셨다. 나는 이모가 울면서 건 전화에 잠에서 깨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나는 세 명의 친손자와 네 명의 외손자 중 하나였다.

당신이 가장 사랑한 친손자는 외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서울의 집을 물려받았고 

외할아버지의 책장들을 물려받고 싶었던 나는 친척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던 나는 이제 이걸로 됐어요. 

하고 한 마디를 하고 식장을 나가 집으로 갔다. 

나는 당신의 시신도 묫자리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려주실거죠 외할아버지. 제가 갈 때 까지요. 

제가 할아버지를 뵈러 갈 때 까지 그대로 있어주실거죠?


입으로 내지 않은 진실이라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내가 왜 외조부 댁 바로 옆의 대학에 갔는지, 의미없이 특차로 그 과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할 사람이 물어보지 않았다.

네가 대학에 들어갔으니 이제 한 달에 한 번 할애비와 점심을 먹자구나. 괜찮겠느냐.

네 외할아버님. 

하지만 제가 왜 이 학교에 갔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물어보시지 않으시네요. 당신은 몇년 후에 저에게 미안하다고 하십니다. 

뭐가 미안하세요. 하나도 안 미안해요. 할아버지 저한테 미안한거 하나도 없어요. 안 미안해 할아버지 그런 말 하지마.

 
입으로 내지 않은 감정이라고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야 말로 내 어린시절을 지켜준 내 진짜 아버지이며 당신이야 말로 내 이상의 "신사"라고. 

결국 나의 마음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 가끔 외할아버지의 책장에 대한 꿈을 꾼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란 것이 시간이나 공간 같은 보통은 넘어서지 못하는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억이나 감정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데 그것이 찌꺼기가 아니라 어떤 씨앗이 혹은 복수의 평면에 작용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몹시도 후회하는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대해 몹시도 부정적이다. 가모가와의 강변은 여우를 묻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16년 12월 30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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