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가 지났다.
피트니스에서 트레드밀에 올라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평소라면 안 볼 여행 프로그램을 봤다.
노인들이 타이완의 과일 가게에서 망고와 석가 같은 과일들을 먹고 있었다.
트레드밀의 TV는 그닥 선명하지 않지만, 입가에서 물이 떨어지고 과일향이 사방에 퍼지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밤의 마트에 가서 망고를 샀다.
노랗고 둥글 넓적하게 온순한 작은 망고를 몇개 샀다. 망고는 공화국의 사람 값처럼 쌌다.
나는 망고를 자르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운데에 대충 칼을 넣고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었다.
망고는 달콤하고 시었다. 과육은 생각보다 얇았다.
나는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나는 뭐가 먹고 싶다거나 하는 걸로 떼를 쓰는 아이는 아니었다.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였지.할아버지가 해줬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언제 쯤이었을까 옛날 중국에 뭐시기 라는 이름의 남자가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가난한지, 부자인지 다른 가족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병에 걸린 늙은 어머니가 있었다.
새도 날지 못할 만큼 눈이 내리는 겨울, 쇠약해진 어머니는 남자에게 딸기가 먹고 싶구나. 하고 말을 한다.
노인의 투정이었을까 열이 머리에 까지 미쳐 제대로 생각을 못했던 탓일까. 한 겨울에 딸기라니.
하지만 쇠약해진 나머지 딸기가 나오는 봄까지 버틸수 없어 보이는 어머니에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을 하고 물러나온 남자는. 채비를 갖추고 산으로 떠난다.
강을 건너고, 숲을 가로지르고, 갖은 고생을 하며 연못 근처의 공터에 다다른 남자는
거기서 빨갛게 익어 얼지도 않은 딸기를 발견해 소중히 품고 돌아와 노인에게 먹인다.
그래서요, 할아버지 딸기를 먹여서 어떻게 되었어요?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되다니, 그냥 딸기를 먹였다는 이야기야.
병이 낫거나 그러진 않고요?
아니 도대체 뭐하는 병이길래 한참을 앓던 사람이 딸기를 먹는다고 낫는다더냐.
- 그냥, 딸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 딸기를 가져와 먹인게지.
그게 뭐에요, 별로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너한테는 아직 이야기가 어려웠구나.
할아버지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에 틀렸다고 하는 법도 없으셨다.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 손자가 하는 말 들어보시오 이 아이가 이렇게 똑똑하다오.
내가 기억하는 한, 할아버지가 놀라서 호통을 치신 것은 5살쯤 되던 내가 선풍기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 였다.
아이고 이놈. 하고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매어주셨다. 그게 다였다. 아이고 이놈.
할아버지는 16년 3월, 금요일의 어느 밤에 돌아가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아프셨는지, 해로 세어도 한참이었다.
보통 사람은 돌아가시고도 남은 뇌수술을 받은지 십년도 넘었지만
이렇게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걸 믿지 않은 것은 나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건했던 할아버지를 무너트린 건 노쇠였는지 우울이었는지.
가끔식 건강하고 힘이 강했던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일부로 보였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금방 다시 건강해질 거라고 믿은 것은 나 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눈이 망가지고 귀가 안 들리고 머리 한 쪽이 움푹 패였어도.
건강이 점점 나빠져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였다.
할애비는, 위가 찢어졌단다.
전보다 더 작아진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길을 가다가 쓰러지고 말았지. 사람들이 꼼짝없이 죽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일어는 났단다.
할아버지는 커다랬는데 건강한 땀내가 나고 성큼성큼 걸어다니셨는데
할아버지가 떼어냈다는 몸의 일부가 얼마나 컸던지 할아버지는 조그맣게 되셨다.
할애비랑 점심이나 먹자구나. 시간 있느냐?
할아버지랑 저는 제 평생만큼 시간이 있어요. 아시잖아요.
이야기하다가 가끔 혼자 잠드시는 것도 괜찮아요.
할머니 몰래 술드시겠다고 제 핑계 대시는 것도 괜찮아요.
걸음이 엄청나게 느려지신 것도 괜찮아요.
할아버지 다 괜찮아요. 내가 서투르고 느리게 걸을 때 할아버지가 거기에 있었잖아요.
친구들이 말이다. 이제는 죽어도 장례에 참석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루는 친한 친구 놈이 죽었는데도 코배기도 안 비추길래,
아이 이놈아 내가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데도 이렇게 식장엘 다녀왔는데 너는 뭐하는거냐? 하고 했더니
이보게 자네는 그래도 아파트 단지 밖에 나갈수나 있지. 하더라고
이것이 할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마지막 농담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다.
망고가 맛있고 더 달수록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의 뭐시기 라는 남자가 바로 이런 마음이었겠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아주 잠시라도 맛있는 것을 먹이려는 마음.
어머니, 먹어보세요 딸기에요. 입술이 말라붙어 터지고 죽도 못 삼키시는데도 딸기는 드시고 싶어하셨잖아요.
그리고 이것이 호흡기를 차시기 전에 할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대화이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순간 까지 의식이 또렷하셨다.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나 호흡기를 차셔서 말씀을 못하시고 그렇다 아니다 라는 의사 표현만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의지가 강한 분이셨다. 내가 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아마 끝까지 이겨내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셨던게 틀림없다.
할아버지, 고모가 전화해서 깜짝 놀랐잖아요. 이게 뭐에요
그렇게 됐다.
어울리지도 않게 누워서 뭐하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얘야, 할애비가 많이 어려울 것 같구나.
왜 자꾸 이상한 소리 하세요. 할머니랑 고모가 겁먹잖아요.
-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잖아요.
그래 그렇구나. 많이들 겁을 먹었겠구나.
어서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불고기랑 평양 냉면 먹으러 가요.
...요새 할애비는 불고기도 평양냉면도 별로구나.
그럼 뭐가 먹고 싶으세요?
글쎄다. 요새 먹고 싶은게 뭐였냐면.
나는 할아버지가 무엇이 먹고 싶으셨는지 끝까지 듣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일 못 오면 모레 올게요.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나는 개처럼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게 내가 사람이라는 증거라도 되는 듯이 울었다.
나에게 그 마음은 사랑이었다. 재처럼 희미하고 지워지지도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16년 4월 비오는 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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