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우리 집에는 집을 끊임없이 어지럽히는 키 188에 몸무게 92짜리 유인원이 하나 있고, 그를 저지하거나 그의 뒷처리를 하기엔 너무나 무기력한 A형의 30대 남자가 하나 있다.

거실에는 책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쌓이고 있다. 한 달에 10만원 어치만 사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한달에 30만원 어치 정도 사고 있다. 간단히 계산해보자, 대충 일주일에 소설이나 에세이면 세네권. 좀 집중해야 하는 책이면 1.5권 정도 읽으니까. 내가 한달에 읽을 수 있는 책은 대략 가벼운 책 15권 혹은 무거운 책 6권이다. 가격으로 계산해보면 가벼운책 12만5천원 어치 혹은 무거운 책 18만원 어치 정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이런 속도로 가다간 매달 10만원 어치 이상의 책 무덤이 생긴다. 1년이면 120만원, 가벼운 책으로 100권 무거운책으로 40권이다.

내 주요 생활 공간은 거실이다. 거실의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운동도 거실에서 한다. 그래서 어지러지는 것도 거실이다. 어느날 내가 하는 집안 일 중에서 제일 무의미한게 뭘까 생각하다가 거실의 의자에 입고 난 바지를 쌓아두고 한 꺼번에 세탁하기 시작했다. 또 어느날 빨래를 다 하고 개는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빨래를 개지 않은 채로 소파 옆에 쌓아두다 한 꺼번에 개기 시작했다. 내 거실에는 신라의 왕릉처러 책의 무덤 바지의 무덤 빨래의 무덤이 있다. 

설거지가 싫다. 바닥을 청소하는게 귀찮다. 그러나 위생에 문제가 생기는 건 싫어서 매번 요리를 할 때 마다 세면대를 씻고 억지로 다이슨과 물걸레를 꺼낸다. 목욕 할 때 마다 스프레이를 칙칙 뿌리고 스윽스윽 솔로 여기저기 문지르고 욕조물로 휙휙 청소를 한다. 그럴 때 마다 집에 누가 놀러오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 이상 깨끗하게 집을 유지 하는 건 어려울거야 하는 생각을 한다. 특히 저 책의 무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추석 전 맞이를 위해 냉장고를 청소 했다. 종량제 봉투 두개에 남은 식자재를 눌러 담았다. 무화과가 반이상 썩어서 눈물이 나왔다. 인간이 미안하다. 다시는 사 먹지 않을게. 하고 우르르 쏟아 담았다. 종량제 봉투가 다 떨어졌다. 오늘은 분리 수거를 하고 종량제 봉투도 사야지. 페트병과 상자를 안고 분리수거를 하러 간다.

내가 이 아파트에 이사온지 6개월이 넘었다. 그 동안 대략 28가구의 사람들 73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 동에 40가구가 살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좋은 성적은 아니다. 출근하는 시간도 퇴근하는 시간도 좀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자주 부딪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대체적으로 중학생 이하의 자식들이 있는 가족이다. 젊은 부부들도 있고 손자를 봐주는 노부부도 있다. 외국인도 두 가구가 있다. 내가 이사 온 후 이사를 가고 온 집은 3가구, 6개월 동안 3가구라니. 이론적으로 모든 가구가 전세라면 한달에 두 가구 정도는 항상 이사를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다. 대부분 이 오래된 아파트에서 자가로 살고 있는 걸까? 외국인은 분명히 전세일텐데, 나 말고 전세가 세 가구? 나는 너무 자세한 걸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의 대체적인 인상만 남기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종량제 봉투까지 담아서 버리니 역시 봉투를 사러 가야겠다. 사실 오늘은 감기로 연차를 썼다. 오늘이 아니면 이번주 내내 아플 수 있는 날이 없다. 나는 다음주 추석 연휴에 이어서 쓴 휴가도 취소하려고 생각 중이다. 여름 휴가를 결국 안 쓰게 되었다. 어차피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고 집에서 책이나 읽었을게 틀림없다.

바닥청소에 대해서 생각하자. 지금은 먼지를 대충 털고 다이슨으로 바닥을 청소하고(여기까지 몹시 스무스하고 쾌적하다) 물걸레로 바닥을 민다. 쾌적한 부분인 진공청소기 돌리기 까지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 바닥을 닦지 않는다면 앞의 두 공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물걸레로 바닥을 미는게 싫다. 싫은 걸 정당화 하기 위해 물걸레 청소기를 검색해본다. 시집가기 전엔 안 살래요. 하고 속으로 다짐하고 쇼핑몰을 닫는다. 어차피 시집은 무리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사는게 좋지 않을까. 

정리 하겠다던 책 방과 옷 방은 하나도 진척이 없이 그대로 지저분한 채로 있다. 컴퓨터 위엔 연습장을 북 뜯어서 휘갈겨 적은 유서가 있는 것도 그대로 이고, 이 박스에 있는 건 다 버릴거야 하고 마음 먹은 책 상자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져간다. 곧 내 힘으로 혼자서는 집 밖으로 옮기지 못하게 될텐데 어쩌지. 책 상자가 무거워지는 것보다 마음이 더 무겁다.

동네 마트에 가보니 종량제 봉투를 꾸러미로 팔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신다. 아 그러면 낱개로 스무 장만 주세요. 라고 말하니까 얘기를 못알아들으셨네 아저씨 하는 표정으로 저희가 그렇게 봉투를 많이 안 갖다놔요. 다섯 장만 드릴게요. 하고 다섯 장을 준다. 나는 그럼 종량제 봉투를 어디서 사죠? 라고 말했더니 앞으로 여기 와서 쇼핑하면서 매번 종량제 봉투로 봉투 해가면 되시죠. 하고 말한다. 나는 환하게 소리없이 웃고 포카리 스웨트와 우유와 종량제 봉투 다섯 장을 받아서 마트를 나간다. 이 정도 웃음이면 누구라도 아들이나 남동생이나 대학시절의 남자친구를 떠올릴 그런 웃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자평했다.

집에 가면 쓸데없는 단문을 쓰고, 우유를 마시고 또 드보르작이나 듣다가 운동을 하고 자야지. 꼭 동전을 주머니에 가득 넣은 아이처럼 집으로 갔다.

누구도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않고 있는 사람이란걸 모를 정도로. 밝고 명랑하게 걸어갔다.


18년 9월 17일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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