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이 있는 법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을 보려고 노력했다. 이마에 주름이 질만큼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하얗게 보이는 곳을 넘어가려고 했다. 하고자 하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도들에 어떤 의미라도 있었을까, 나는 항상 무례하고 서툴렀다. 사람들의 눈을 마주보는게 두려웠다. 모든 시도들은 실패했다. 그런 시도들이 남긴 단 하나의 유산은 지금의 나 자신 뿐이었다. 나는, 나를 위한 유일한 역사가이다. 모든 계절이 지나가면 나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부산 출장 세번 째 날, 출장을 위한 모든 일정은 어제 끝났다. 회의록도 당일에 써서 보냈고 팔로업 사항도 모두 정리해두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하지 못할 것을 넘기고 아무 것도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훌륭한 회사원의 첫걸음이다. 이제 그런 내용으로 보고서를 쓰면 된다. 월요일에는 출근이다. 지금은 토요일이다. 출장을 가기 전에 부산에서 하루 더 있겠다고 말해두었다. 어차피 출장은 끝났고, 하루는 부산에 있고 싶었다.

새벽에는 비가 내렸다. 아스팔트가 젖어있었다. 이상하리만치 파란 색의 아침이다. 침대 옆에 메이크어룸 버튼을 눌러두고 9시쯤 호텔을 나와서 서면을 돌아다녔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도 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부산이 처음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다. 세 번쯤. 네 번쯤. 하여튼

아주 어릴 때, 다섯살이나 여섯살 때 쯤일 것이다. 겨우 걸어다녔고 너무 많이 먹고 토하던 시절이었다. 아마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였던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형님을 만나러 가는 걸 따라왔었다. 이상하리만치 일방통행로가 많고 백화점 주변은 길이 너무나 막혀서 운전사로 따라온 아버지는 종일 짜증을 내셨다. 나이 대 치고는 키가 컸던 할아버지는 당신보다도 키가 크고 훤칠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잘 생긴) 노인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악수를 청했다. 후에 그 분이 몇 남지 않은 친척 중 한 명이며, 할아버지의 친형제가 아닌 사촌형인 것을 알았다. 너희 할아버지는 자기 친동생은 모르는 척 평생 연락도 안하더니 사촌 형한테는 뭐 저렇게 극진하대니 하고 할머니가 수군대시는 걸 한참 후에야 들었다. 이제는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백화점 주변을 대충 돌아다니다가 눈에 익은 것 같은 거리의 사진을 찍었다. 어릴 때 처음으로 왔었던 곳이 서면이 아니었을까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기억에 맞는 곳이 있을까가 궁금했던 것 같다. 20년도 더 된 예전 일인데 그럴리가 있을까. 골목 안에 들어가 눈에 보이는 스타벅스로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맙소사 서면에는 스타벅스가 엄청나게 많았다.
부산은 맛있는 커피가 많아요. 스타벅스 같은데 갈 필요가 없어요. 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서울에 오고서야 스타벅스에 왔어요. 제가 서울에서 커피를 마셔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아세요? 하지만 나는 어떤게 맛있는 커피인지 잘 모른다. 서른살이 훨씬 넘고서야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커피를 하루에 세 잔씩 마시기 시작한 건 2년 전 부터이다. 나는 카페보다 태권도 학원과 공장이 더 많은 곳에서 자랐다. 어떤 커피가 맛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오랜 만에 머그컵에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올 때 아무래도 이 스타벅스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익숙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보니 그 점포는 내가 일년 내내 먹고 싶어했던 손칼국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있는 스타벅스였다. 칼국수 집으로 가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걸어왔던 것 같다. 동서남북에 소문 난 길치인 나는 저녁 때 칼국수를 먹고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아침에 왔던 스타벅스가 있었을 때,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이 정도로 길을 모를 수가 있나 하고 반성한 다음 이윽고 아 이럴거면...아침에 그냥 칼국수나 먹을 걸 하고 생각했다. 나는 칼국수 좋아하니까 하루에 두 번 정도 먹는거야 어렵지 않다.

나는 평양 사람의 손자이다. 내가 먹는 칼국수는 일생 닭국물로 만든 칼국수였다. 할머니는 닭육수로 국물을 내고 고명은 호박과 손에 닿는 야채 되는대로, 닭가슴살을 북북 찢어서 면 위에 올려놓고 아범이랑 와서 칼국수 먹어라 하고 우리를 불렀다. 할아버지와 나는 둘 다 냉면은 물론 국수에도 아무 것도 넣지 않는다. 맛은 슴슴하고 고기향은 강한 칼국수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린이에겐 너무 강한 향이었다 나는 가끔 칼국수를 먹지 않고 투정을 부렸다. 할아버지와 외출을 하면 더 맛이 약한 서울식 고기국물 국수를 사주실 때도 있었다. 어떠니 입맛에 맞니. 하고 할아버지는 어린 누나와 내 표정을 살피곤 하셨다. 이십대에 월남 한 후 계속 서울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의 입맛은 서울사람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니 할머니에겐 비밀이다. 할머니는 항상 뭔가를 만들고 이게 이북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이야 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었을 때 외조부가 바지락 칼국수 먹어볼까 하고 같이 들어간 강원도 옹심이 가게에서 처음으로 바지락 칼국수를 먹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건 칼국수가 아니에요 외조부님 하고 말하기에는 너무 맛이 있었다. 그 뒤로 들깨 칼국수를 먹었을 때는 나참 이게 어떻게 칼국수야 하고 사리를 시켜먹었다.

저에게 칼국수는 서러운 음식입니다. 아십니까? 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가 말하기로 그는 어른이 되도록 멸치국물 칼국수만 먹어봤다고 한다. 닭육수의 칼국수만을 먹어본 어린 시절의 나처럼 그는 다른 국물 칼국수가 있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해서 칼국수란 곧 멸치 국물로 만든 음식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처음으로 맞은 서울의 겨울이 너무 춥고 늦은 밤 퇴근하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어릴 때 먹던 칼국수가 먹고 싶어졌다고 한다. 가까운 가게에 들렀더니 나온 것이 닭국물로 만든 진하고 면이 탱글하지 않아 전분이 물컹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는 너무 서러워서 닭국물 칼국수를 먹으면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안 먹지는 않고요? 네 너무 배가 고팠으니까요. 그 뒤로 그에게 칼국수는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그와 부산에 갔을 때 나를 데리고 온 곳이 서면의 칼국수 집이었다.

혼자 서면 시장에 들어가 가게를 찾았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줄을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장님 칼국수 한 명이요, 하고 말하고 기둥에 붙은 거울 앞 자리에 앉았다. 멸치 국물에 쑥갓, 고추가루를 풀어서 국물을 저었다. 면발을 들고 삼킨다. 다 먹는데에는 오분도 걸리지 않는 나의 세상 없이 가장 서러운 멸치국물 칼국수.

두번째 날의 밤, 외국인들과 함께 해운대의 포장마차에서 회를 먹었다. 개불과 성게가 신선했다. 해물라면이 너무 맛있다며 온 것이지만 해물라면이 나올 때 까지 가야할 길이 멀었고 나는 안주로 나온 오이와 귤을 까먹었다. 저 쪽 검은 해변에 휴대용 앰프를 놓고 음악을 틀어둔 사람이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때때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기가 틀어둔 노래를 따라불렀다. 하나 같이 내가 모르는 노래들이었다. 분명 “나같은 죄인 살리신”같은 찬송가는 아니었다. 뭐라고 한 마디 할 법 한데 미국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그 쪽을 보는 듯 하더니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바다를 보고싶었는데 조명 하나 없는 까만 밤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어가 튀어나와 해변으로 걸어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부산 사람들은 바다에선 수박을 먹지 않아. 라고 어린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왜요? 문어들이 수박을 너무 좋아하거든. 그래서 과일가게에 수박을 가져다 두면 문어가 밤 중에 걸어와서 수박을 훔쳐가. 내가 고등학교 때 자갈치 시장에 처음 왔던 날 문어가 수박을 훔치는 것을 봤어. 사람 머리통만한 커다란 수박을 문어가 휙 하고 덮치더니 데굴데굴 굴러서 어디로 가더라고.

6시간이나 술을 먹고 절어서는 침대에 누워서 야경을 보았다. 27층이나 되는 높은 방에 있었지만 북쪽으로 향한 방의 창에서는 서면의 시내 풍경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다가 보고 싶은데, 하고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고모, 저 어릴 때 부산 몇 번 왔었잖아요. 혹시 고모네 집 서면이었어요? 아니 동래구 명륜동. 이상하다 전에 백화점 쪽으로 해서 갔던거 기억하는데... 맞아 집 앞에 롯데 백화점 있었어. 그랬구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출장의 첫 번째 날, 부산역에 왔다. 거래선의 손님은 늦잠을 자서 늦었고 나는 감기에 걸려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부산에서 제일 공기가 나쁠 부산 역 앞이 우리 동네 주택가보다 공기가 좋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콜록 댔다.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데 뒤에서 엄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습게도 나는 반쯤 고개를 돌려서 그 쪽을 쳐다보려고 했다. 나는 엄마라고 불릴 만 한 짓은 하나도 안 했는데 말이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대로 대합실을 가로질러 밑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어디서 택시를 타야 내가 가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아무 곳으로든 나와서 택시를 탔다.
감기에 걸려서 그 날은 종일 아팠다. 약을 최대한 강하게 조제 받아서 밥을 먹을 때 마다 여섯개씩 약을 삼켜야 했다. 부산은 어떠세요?라고 묻기에 부산 하나도 안 추운데요 이렇게 겨울에 안 추워서야 어디 쓰겠어요 하고 콜록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하나도 신뢰성이 없었지 않았을까.

마지막 날 올라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커피를 마시러 광안리를 들렀다. 카페 거리의 반 쯤은 공사 중이었다. 남은 반 쯤은 폐업 중이거나 문을 열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 공사 중인 거리를 따라 해변을 오른 쪽에 두고 걸었다. 공사차량이 길을 막고 물을 뿌려대고 있었지만, 아직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그 곳에 바다가 고스란히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바다.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를 찾다가 전에 한 번 가 보았던 3층의 가게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운이 좋게 창가에 앉아있던 손님이 나가던 중이라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을 수 있었다. 커다란 창에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카페는 전과 다름없이 햇볕이 가득하게 들어왔다. 밖을 바라보니 다리와 바다와 해변이 보였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착각이 들었다.

부산 바다를 쳐다보던 어린 내가 테트라포트를 보며, 아빠 저건 뭐에요? 라고 묻자. 아버지는 저건 고래의 뼈야 라고 대답했다. 햇빛 아래에서 하얗게 빛을 받은 테트라포트는 정말로 고래의 뼈처럼 보였다. 정말 오래도록 나는 사람들이 고래를 죽여 그 뼈를 바다에 쌓아둔다고 생각했다. 내가 친구에게 그 얘기를 하자 친구는 아 그러신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에요, 고등학교때 까지 그렇게 믿었어. 하고 말했다.

이제 곧 부산을 떠날 시간이 된다. 몇 달 동안 부산에 오고 싶어지면 기차 표를 찾아보았다. 얼마 전 집에서 더욱 가까운 곳에 기차 역이 생겨 나는 부산을 꽤 쉽게 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좀처럼 올 수가 없었다. 당신도 이해 할 것이다. 시간이 깊어질 수록 확인 하는 것들이 두려워지는 기억들도 있는 법이다. 그건 뭐였을까 싶었던 누군가의 감정, 정말로 그게 고래의 뼈였을까 싶은 돌로 만들어진 테트라포트들. 칼국수나 커피의 맛 그리고 바다의 모습들. 하얗고 파랗게 부서지는 저 먼 수평선들을 보는 것들 말이다. 했어야 하지만 할 수 없었던 말들처럼 나에겐 그런 것들이 잔뜩 있다. 단 한 명 뿐인 친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은 말들과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와, 눈치채지 못한 마음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자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주기를 하지 못한 말들은 하지 못한 말들을 돌보는 신 앞에 모여 숲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우리들이 하지 못한 말들을 장사 지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반건시와 감말랭이를 사서 기차에 탄다. 부산을 떠나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기차 안에서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어떻게 될까 하고 궁금해 한다. 내뱉어진 말들은 사라지긴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해낸 이론은 내뱉어진 말들은 서로에게 쌓여 우리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결국 우리는 서로가 한 말의 지층이며 쌓아올려진 단어들이다.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낸 것은 당신이 한 말들이다. 나는 당신의 일부이고 당신이 한 말들은 나에게 기록되어 하얀 뼈처럼 쌓아올려진다. 당신의 말은 고스란히 나에게 담겨져 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한 역사가이고, 모든 계절이 지나가고 서로를 기억할 것은 우리 뿐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쓰는 것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9년 1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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