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탑을 껐다. 

사람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사무실을 떠날 때는 의식처럼 정해진 순서대로 행동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든 다른 자리 처럼 지금의 내 자리도 우연히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항상 아주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책상 위의 쓰레기를 모아 버리고. 달력과 노트를 정리한 다음, 나 대신 자리를 지킬 사람 모양의 인형 하나를 올려 둔다. 아무리 정리해도 내 자리는 다른 누구의 자리보다 내 자리처럼 보이지만, 시도를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오늘 저녁 때 가을 비가 내릴 거라고 했는데 비는 아직 오지 않는다. 챙겨온 우산을 서랍에 넣고는 잠근다. 

커다란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노래를 튼다. 가방을 멘 다음. 의자를 넣고 한 번 더 사무실을 둘러본다. 누군가 사무실에 남아있을 때는 인사를 한다. 안녕히계세요. 아무도 사무실에 남아있지 않아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설 때엔. 불을 끈다. 안녕히계세요.

나는 회사의 정문에서 우리집 현관문 앞에 떨어트려 주는거나 다름없는 통근버스 노선이 하나 있지만, 너무 더워 걷기가 곤란 할 때가 아니면 출근 할 때도 퇴근 할 때도 그 버스는 타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왜 걸어서 출퇴근을 해요 라고 물어보기에. 개를 산책시키는 것처럼 스스로를 산책시키는 거에요, 라고 대답했다. 일어나서 잠이 들 때 까지 나는 대체로 계속 혼자지만. 완전히 혼자가 되서 어딘가에서 다른 한 곳으로 걸어가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걸어가는 것이 좋다. 겨울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거라면 더 좋다. 꼭 정신의 메트로놈을 맞추는 것처럼 기분이 좋을 때는 진정하게 해주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기분을 낫게 해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추위를 느끼며 걷고 있노라면 내가 이렇게 걷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인 것 같다.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고 다리가 납처럼 무겁고 숨이 모래처럼 갈라질때 까지 걸어다니고 싶어진다. 나는 애초에 목적을 위해서 뭘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뭘 하고 싶어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음악을 틀고 신발 안에 발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 보고 계단을 내려간다.

요즘은 예전처럼 퇴근이 늦지 않다. 일주일에 70시간을 넘게 일하던 때보다 훨씬 낫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한가하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간에 출근을 해도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면 저녁이 되고,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시간이면 일어나 집에 간다. 일을 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얼마 전 부터는 게임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요 몇 년 전 완전히라고 할 정도로 게임을 하지 않았는데, 그 때는 게임을 하지 않아도 생각해야할 사람들과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제는 생각해야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대신 게임에 대한 생각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과일을 먹어야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괴물이라거나, 그 괴물에게서 (반드시 빼앗기고 말 운명의) 과일들을 지키는 유령들 이라거나 하는 유사 셰익스피어 적인 악몽의 서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규칙을 지닌 작고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게임 안으로 각자의 작은 촉수를 내밀어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 처럼 보인다. 게임 안에서 우리의 의지가 움직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즐거운 유희인 것 처럼 불편하고 이해하기 힘든 규칙에 따라서 (예를 들어, 너는 게임 안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지만 거북이와 정면으로 맞서면 죽고 말아, 혹은 너는 뭐에 부딪혀도 죽지만 네 키보다 높이 점프 할 수 있어) 게임을 플레이 한다.

규칙이 복잡하고 그래픽이 정교해져도, 게임의 법칙은 단 하나 뿐이다. 이해하기 힘든 불합리한 세계에 우리의 의지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때때로 거기서 이야기를 떠올리고 또 우리 스스로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실체가 살고 있는 세상 또한 게임 안의 세계처럼 불합리한 규칙의 세계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는 것. 왜냐하면 게임에서의 죽음과 실패는 현실에는 어떤 영향도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우리가 결코 말하지 않는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는다. 
다시 생각해보자. 걸어 다니고 있지 않을 때는 항상 무언가를 읽고 있기 때문에 내가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문제가 너무 많은 것을 읽어서 라는 걸 내심 깨닫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임을 다시 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소설 또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게임보다 훨씬 안전한 매체이다. 글은 어떤 시대에서도 총칼보다 강한 적이 없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라는 말은 총칼을 가진 권력자들이 엄살을 부리며 하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런게 아니라면 너무 많이 읽어서 지상낙원을 이룩한 곳이 한 군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내가 아는 한 모든 지상 낙원은 아스피린과 밀가루의 부족으로 멸망한지 오래이다.

높지 않은 건물인, 사실은 원래 공장이었던 사무실을 나와서 조금 걸어가면 커다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가 나온다. 사거리는 멋지게 뻗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운이 좋으면 해가 지는 시간에 퇴근을 해 엄청난 색으로 물들인 하늘을 보면서 퇴근 할 수도 있다. 매일 매일 같은 곳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 회사 부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고. 무엇보다 항상 같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못한다면 그런 활동도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에서 초기에 올린 사진을 보니 무려 2011년의 사진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갈 수록 내가 사진을 찍는 폰이 바뀌어서 요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록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들은 묘하게 선명하고 밝아졌다. 나는 그게 꼭 기억의 은유처럼 느껴져서 불쾌해지고 말았다. 자연적으로 열화되지 않은 이미지가 아니라 앞으로 발전해나가며 선명해지는 이미지라니, 언젠가는 인스타그램의 이미지가 현실의 해상도를 따라 잡을 지도 모른다고 늙은이 같은 걱정을 한다.

사거리를 지나갈 때는 어째서인지 잠시 멈춰서서 왼쪽의 커다란 건물을 흘끗 보고는 헤드폰의 볼륨을 올린다. 이제는 이유도 기억나지 않고 그냥 버릇이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듣는 것은 좋은 버릇이 되지 못한다. 듣는 음악은 대중이 없지만, 항상 가장 큰 소리로 항상 가장 빠르게 걸어 거리를 지나간다. 어떤 시간에 지나가든 간에 사거리에서 이어지는 그 길에는 사람이 있다. 모두 후회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사람 처럼 걸어간다.

문득 내 출근길과 퇴근길의 루트가 달라지는 지점이 이 지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출근 길엔 좀 더 왼 쪽의 커다란 건물에 가까이 그 바로 앞을 걸어 작은 공원 앞을 지나가는데, 퇴근 할 때는 커다란 건물에서 약간 빗겨가 사거리의 중앙부를 가로지른 중앙대로를 따라 걸어간다. 무슨 이유 일까 생각해 보려다 스스로의 행동에 하나하나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서 그만둔다. 사람은 대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제대로 이해받기 힘든 법이다.

어쨌거나 사거리와 중앙대로는 항상 엄청난 바람이 분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상 우리 회사가 있는 곳은 거대한 공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바람을 막아줄만한 것은 거의 없고 커다란 빌딩이 연달아 서있어서 자연스럽게 바람이 강해진다. 가끔 내가 걸어가는 곳이 경기도 어딘가의 도시인지 아니면 지구 구석 어딘가의 황야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나는 바람이 강하게 불 수록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언젠가 토요일 급하게 출근을 하며, 벼락이 치는 것을 보았다. 아파트를 가로 지르고 언덕을 올라 내려가는데 회사가 있는 단지 저 쪽에 벼락이 치고 있었다. 태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벼락이 치는 곳으로 계속 걸어가며 그 장면을 혼자 보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꼭 태초의 산에 변덕스러운 신이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위험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홀린 광신도처럼 계속 걸어갔다.

새삼스럽게 세어보니 벌써 10년 가까이 이 회사에 있었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으나 나는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이 똑같이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사는 곳이 달라져도 어디에서 일해도 나는 퇴근길에는 항상 한참을 걸어야 만족을 했다. 전철이 너무 가깝다면 전 역에서 내려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고 헀다.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걸어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너무나 많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나는 내가 시간 그 자체로 되는 것처럼 굴었다. 똑딱 거리는 시계처럼, 나무 위에 달려 있는 광신도의 시체처럼, 변하지 않고 도달 할 수 없는 어떤 시점처럼 행동했다. 꼭 영원히 거기에 존재할 계절처럼 살았다.

나는 누군가의 옆 모습을 떠올린다. 정신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바쇼의 마지막 시를 떠올린다. 방랑에 병들어/꿈은 마른들판을/헤매인다. 최초의 시는 기도였으며 모든 시는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이다. 스산한 기분에 사거리에 서서 한 마디 입 밖에 내어보려고 하지만, 한 마디 조차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인생이 꼭 누군가의 자리 건넛편으로 보는 재미없는 영화인 것 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멀리 길 건너에 보이는 사람들과 흘끗 보이는 모르는 사람의 집안 풍경은 우스꽝스럽게 따스해 보인다. 나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의 밤 길을 혼자 걸으면, 항상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이리저리 이지러지고 망가져도 겨울의 기온이 나를 다시 한 번 나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오로지 나 였으며 앞으로도 나 외에 다른 것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겨울이고, 내가 입으로 뱉는 것마다 추위, 머리 속에 있는 것은 바람 뿐이다. 나무가 쓸려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방을 고쳐매고, 어깨를 둥글게 구부리고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밤처럼 쏟아지는 것은 비이다. 노랗게 붉은 나뭇잎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차가운 돌바닥을 밟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하늘이 거기에 있는지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어서 물에 젖은 안경을 손으로 훔쳐가며 그대로 걸었다. 
며칠 전 아침 똑같은 길을 거꾸로 올라가다가 가로수 옆에 기대듯 피어있는 작은 꽃을 하나 보았다. 처음 그 꽃을 보았을 때는 무심결에 지나쳤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그 꽃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비는 계속해서 쏟아지고 나는 그 꽃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별이 멸망 할 때 까지 서쪽으로 계속해서 가는 것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들이 당신들의 의지를 우리를 통해 구현하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한참을 멈춰있다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19년 11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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