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어떤 순간을 머리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에 일어날 일을 기억해내는 일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일어날 일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당신은 어느날 밤 나에게 인사를 하고 급하게 사거리를 건너서 가버린다. 나는 몇 번이나 당신이 길을 건너는 것을 지켜보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신의 뒷 모습을 처음 본 밤의 일이다.

밤은 차갑고 미지근 하다. 공기는 낮게 깔렸고 나는 오늘의 내일에 비가 내릴 것을 안다. 우리는 내일도 만날 것이고 나는 또 똑같은 뒷모습을 보내고 혼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실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날 밤은 내가 당신의 뒷모습을 보는 첫번째 날이다. 나는 내가 신은 나이키의 콧등을 보고 번화가의 진열장을 쳐다본다. 그 때 내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당신이 떠나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척 하고 어서 돌아가 오늘 마저 읽지 못한 책을 더 읽어야지 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

당신은 나에게서 도망치는 것 처럼 가버리고,
나는 당신이 가버리는 장면에서 등을 돌려 그 가버리는 모습을 끝까지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당신이 가버리는 장면에서 등을 돌려 그 가버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쳐다보려고 애쓴다.

혹시 당신이 나를 한 번 더 쳐다보지 않았을까 하고 바란다.
내가 원한다면 나는 당신이 내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당신은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고 나 또한 당신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기억 속의 장면을 삼키기 위해 노래를 떠올린다.

- 해가 반짝이는 날 구름도 말끔하게 사라져버린 공기마저 달콤한 그날.
- 당신 나에게 그 거리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그 거리로 갈 수 있죠?

실제로 그러지 않았음에도 그 장면의 마지막에 노래를 부르는 나를 삽입한다. 꼭 그렇게 하면 시간을 되돌려 길을 건너는 당신에게 내 노래를 들려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나는 술집의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미 술에 얼큰하게 취해 얼굴이 빨개진 나는 안 좋은 버릇으로 먹지도 않을 안주를 뒤적거리며 이것도 저것도 더 시켜볼까 하고 생각한다. 테이블 건넛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상대도 이미 한참 취해서 더 이상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눈치이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들라크루와 그리고 쇼팽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니 이젠 음악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 겨우겨우 회사원이나 하고 있는 제가 예술이 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건 주제넘은 일이지만

이라고 말을 꺼내면서 나는 주제넘게 예술론에 대해서 길고 지루한 의견을 말한다. 사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삶은 콩을 좀 더 시킬까였으면서, 상대의 눈치까지 보며 혹시라도 틀린말을 하게 될까봐 고리타분한 고전 독일의 미학론보다 하나도 나을게 없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칸트의 미학론이었던가 괴테의 미학론이었을까. 학교에서 배운 애매모호한 그리고 이제와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렇게 상대가 내 말에 질려하고도 남았겠지 하고 내심 안심하는 시점까지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상대가 하는 말을 놓친다.

네 뭐라고요? 라고 다시 물어본다. 상대는 약간 풀린 혀로 그럼 님이 생각하는 예술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뭐냐고요? 라고 다시 말해준다. 당황한 나는 너무 바보 같은 말투로 더 바보 같은 대답을 한다.

-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요.

...

녹음 된 파일을 본다. 200X년 X월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녹음 파일은 여러 개이고 젊은 나의 목소리이다. 건방지고 오만하고 자신에 차있으며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서,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어딘가 운동장이나 역의 뒤 구석에서 스스로만 납득 할 수 있는 이론들을 녹음하곤 했다. 때때로 알바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새벽이 흐리게 시작되는 그런 때면 감정에 복받쳐서 더욱 아무 말이나 하곤 했다.

그 중에 하나를 들어본다. 녹음된 상태는 좋지 않고 파일의 시작부분에 차가 다가왔다 멀어지는 소리가 같이 녹음되어 있다. 나는 이 녹음 파일이 어디서, 왜 녹음된 건지 떠올리려고 한다. 목소리는 약간 술에 취한 것 같고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 모든 이야기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불멸이란 결국 죽음에 대한 복선이다. 가장 유명한 불멸자인 아킬레우스가 발뒤꿈치의 약점을 제외하고 무적의 신체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결국 그 약점으로 죽을 것을 의미한다...

200X년의 나는 스스로가 아니면 아무도 듣지 않을 녹음 파일에 약 10분에 걸쳐서 결락과 제한이 만들어내는 불멸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이 불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두려워해야한다. 우리가 가진 영혼이 정말 불멸한다면 그 불멸하는 영혼은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후 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불멸성이라는 철학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해야한다.

나는 거기까지 듣고 녹음된 파일을 닫는다.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녹음되어 있는지 기억 해낸다. 나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이 파일을 지울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둘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

여덟? 아홉살때 쯤의 나. 아버지는 서른 다섯 쯤이다. 아버지와 나는 저녁을 먹고 있다. 생선을 먹던 그는 나에게 생선을 먹으면서 열역학의 제 1법칙에 대해서 설명한다.

- 쉽게 말하자면 네가 지금 먹고있는 생선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는 얘기야, 질량 보존의 법칙에서 모든 질량은 형태만 바꿔서 존재한다고 하지...

아버지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만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내가 열역학을 이해하길 기대하며 한참을 설명한다.

- 젓가락으로 생선의 살을 발라내면...이 생선의 살은, 네 안에서 네 몸이 되고 또 에너지가 되어 운동을 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네 몸도 다른 형태로 바뀌어서 다른게 되는거야 어느 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고 순환하게 된다.

- 지금 내가 말한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돼?
하고 아버지는 묻는다.

서른이 넘은 나는 대답한다.
관측하는 우리가 닫힌 계 안에 있으며 우리는 순환하는 것이 아닌 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여 결국은 더 낮은 곳으로 사라진다는거죠.
하지만 아버지는 서른이 넘은 나의 대답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묻는다.

- 이해가 돼? 세상에 어느 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는거야.

아버지를 쳐다보며, 항상 과학보다 신학에 더 관심이 많았던 어린 나는 우물쭈물하다 그럼 우리의 영혼은 나중에 어디로 가요? 하고 묻는다. 불교도인 아버지는 무슨 생각인지

- 우리에겐 전생도 영혼도 없어
라고 대답한다.

...

이 우주는 불멸이 아니기에 약점도 없는 신, 브라흐마의 하루이다.
그의 하루는 길고 긴 계절로 나뉘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의 하루를 계절로 나누고 또 계절로 나눈 찰나와 같은 나눈 짧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라고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이름은 칼리유가이며 우리는 불화와 불만의 아이들이다. 정당한 댓가와 정의는 이 시대와 조금도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당함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고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시대가 불의한 시대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데서 연유한다.
우리는 얼마나 하찮고 고귀한지 마음과 생각을 다하여 우리의 삶과 칼리유가의 시대를 벗어나 신의 하루를 세려고든다.

나는 때때로 그의 하루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주 전체를 하루동안 살아가는 그와 달리, 나는 겨울이 삶의 전부인 것 처럼 살아간다.
나는 겨울에 태어나 첫번째 기억조차 겨울에 대한 것이다. 모든 일들은 겨울에 일어난 일이고 나의 평생은 겨울에 걸쳐있다. 그런 시간 밀도의 차이는 내가 그를 인식하기도 쉽지 않게 만든다. 해를 볼 수 없을 촛불에게 내일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신의 하루는 인간에겐 의문의 덩어리 일 뿐이다.
내가 그에게 질문을 힌다고 가정할때 물어볼 것은 정해져있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보다 질문을 하고 대답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다 가더라도 신의 하루는 지루할 정도로 오래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은 고스란히 신에게 전달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가 우리의 질문에 생각을 하고 대답을 할 때 까지 우리가 기다리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시간을 가늠 해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의 대답이 도착했을 때 나는 연못 안의 얼어붙은 물고기이거나 또는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못한 노래일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겠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

오늘 아침 일어나 긴 바지를 입고 집 밖에 나왔더니 발치에 낙엽이 수도 없이 떨어졌다. 햇볕이 쨍해 모자 위에 후드를 쓰고도 눈이 부시지 않는 그늘로 걸었더니 찬 기운이 안개처럼 깔렸다. 평소보다 아침의 해가 더 낮구나 정말 겨울이 온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해가 반짝이는 날 구름도 말끔하게 사라져버린 공기마저 달콤한 그날.
- 당신 나에게 그 거리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그 거리로 갈 수 있죠?

나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을 떠올린다. 내가 아는 한 나는 손을 내밀었고 당신은 그 손을 잡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손은 서늘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그 감촉과 당신의 체온은 봄날의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나는, 나의 운명은 분명.

20년 11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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