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나는 러닝 코스라도 찾아볼까 싶어서 가벼운 차림으로 집 근처 산책을 나갔다. 내가 사는 곳은 수도권의 공업 도시로 넓은 산업 연구 단지와 그 기반 시설로 몇천 단위의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라 어디를 돌아다녀도 길게 달릴 만한 곳은 없었다.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도 주변은 그래도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3킬로미터 정도의 직선 루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후보지를 몇 군데 선정하고 나가보았던 것인데. 이내 나는 길 주변을 까맣게 채운 까마귀들에 질려서, 아니 겁먹고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까마귀들의 겨울 도래지가 된 것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겨울철 이 지역을 찾아와 산과 들에서 겨울을 지내던 까마귀가 도심지나 국도로 모여든 것은 정말 최근의 일로, 이 도시의 배경지였던 전답과 야지가 차례차례 개발되어 아파트가 된 탓에 밤에 안전하게 보낼 곳이 없어진 까마귀 떼들이 나머지 도심지로 몰려든 것이다. 송전선들이 집중되는 교통의 요지일수록 (전깃줄이 많아) 말 그대로 까맣게 까마귀로 가득해서 저녁 나절이 되면 히치콕도 질릴 정도의 까마귀떼가 몰려들고, 땅에는 일부러 뿌려도 어려울 정도로 하얗게 새똥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도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파트 단지와 회사로 이어지는 좁은 루트만 반복해서 돌아다니고 있어서 이 정도로 심각한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전깃줄에 매달려 있는 까마귀 떼를 보고 거의 질려 도망을 갔고. 나 말고도 다른 행인들이 파랗게 질려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까마귀라고 하면 반포지효라든가 오비이락이라든가. 여러가지 관련된 사자 성어도 많지만 무수하게 몰려있는 까마귀들에 대해서 표현한 문장은 찾기가 어렵다. 지금 그나마 생각이 나는 수도 많은 까마귀에 대한 문장으로는 ‘三千世界の鴉を殺し、主と添寝がしてみたい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고, 서방님과 늦잠을 자고싶구나)’ 라는 일본의 도도이츠 (都々逸、남녀들 사이의 사랑을 노래하던 속곡)가 있다. 이는 출처가 정확하지 않으나 19세기 일본 양이지사였던 다카스키 신사쿠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해석하면 까마귀가 우는 아침이 되면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실테니, 삼천세계 즉 사바세계의 까마귀를 모두 죽여 아침이 오지 않게해 당신과 함께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구나...라는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유명한데. 하여간 여성의 깊은 애정과 그 깊은 애정을 실현하는 방식의 과격함으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왜 하필 까마귀이냐 하면, 사실 까마귀는 아침에 우는 새로 유명해서지만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사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결성 때문에 저 위의 도도이츠에서 한 발짝 더 나간 해석도 있는데.
고전 라쿠고로 유명한 산마이키쇼三枚起請라는 이야기의 베리에이션 중 하나로. 대략 내용을 설명하자면 남자손님과 쉽게 결혼 약속을 하는 기녀를 둘러싸고 그 기녀가 손님 중 세명과 결혼 약속을 한 걸 알게 된 남자들의 호들갑을 떠는 것이 이 라쿠고의 주요 스토리인데 앞 부분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다 빼고 까마귀에 대한 것만 설명하자면.
마지막 부분 드디어 기녀가 신의가 없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며 ‘너같은 신의가 없는 사람들 때문에 (계약과 신의를 담당하는) 우에노 신사의 까마귀가 한 번에 세마리씩 떨어져 죽는 것이다!’라고 말하자 기녀는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세상의 까마귀를 모두 죽이고 싶은데요?’ ‘아니 까마귀를 죽여서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럼 느긋하게, 아침잠을 자보게요’ 라고 대답하고 라쿠고는 끝이난다.
아까 위에서 설명했던 유명한 도도이츠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비틀어서 남자가 다 뭐냐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느긋한 아침잠이다 라는 기세 좋은 대답으로 끝내는 셈이다.
근본적으로 이 라쿠고에서 나오는 키쇼라는 것이 기녀가 기녀에서 은퇴했을 때 누군가에게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문서, 요는 키쇼를 세 장이나 썼다고 못난 남자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세 장을 쓰든 네 장을 쓰든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종이 한 장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근성이 마음에 안든디. 나는 원본의 도도이츠보다 이 라쿠고에서의 주인공이 하는 저 마지막 대사를 몹시 좋아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까마귀는 억울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인간인데 우에노의 까마귀들이 떨어져 죽어야 하는가. 게다가 인간이 늦잠 좀 자겠다고 (까마귀가 좀 시끄럽기로서니) 그걸 다 죽이겠다고 하다니. 삼천세계이든 우에노든 까마귀가 떼죽음을 당하는 것은 둘 다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까마귀의 서식지에 아파트를 잔뜩 지어버리니 도심지로 까마귀들이 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 분연히 주먹을 쥐고 역시 까마귀는 나쁘지 않다 보통은 인간이 나쁘다. 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지만 국도변 보도를 완전히 하얗게 물들인 까마귀 똥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걸 물로 청소 하고 있는 자영업자 분들을 보면 아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고 인간에게도 나름의 억울한 부분이 있어! 하는 생각이 들고 최대한 까마귀가 없는 도로로만 다녀야겠다고 결심한다.
어느 날 나는 오늘에야 말로 새로운 루트를 찾아볼까 싶어서 잘 가지 않는 길로 가보다가 국도 곁 야지가 그대로 드러나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와 쓰레기들만 가득한 구석의 어느 국도 변에서 연석과 트럭 사이에 까마귀 두 마리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주변을 찾아보았고 그 두마리 주변엔 하얗게 똥이 떨어져 있었지만 어디에도 까마귀 떼는 보이지 않았다.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무슨 연유에 떨어져 죽은 것이리라. 묻어주기라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땅이라도 팔 것이 있나 야지를 둘러보는데, 분명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까마귀가 아니 까마귀 떼가 야지 근처 나무 근처 어두운 곳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나는 쓰러진 까마귀를, 그리고 저 멀리의 까마귀 떼를 번갈아가며 보다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저 땅에 떨어진 까마귀는 어떤 이유로, 땅에 떨어지고 만 것 일까. 누가 어떤 인간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떨어진 것인가. 나는 급하게 자리를 비우고. 까마귀들은 이번만은 봐주겠다는 듯이 나를 보고만 있었다.
20년 12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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