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러니까 무려 두달을 기다려서 애플워치가 왔다. 10월 중순 쯤의 내 메모를 슬쩍 들여다보면 “연휴 중 변덕으로 웨어러블 기기를 하나 샀다. 하나도 필요 없는 비싼 전자 제품을 또 산 것이다.”라고 써있는데, 아 맙소사 변덕으로 산 애플워치를 이렇게 오래 기다려서 받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 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하루에 한 번은 꼭 애플 공식 홈페이지에 들러서 로그인을 했고. 자기 구매 내역을 확인하려면 꼭 두 번 로그인을 해야하게 만든 애플 홈페이지의 구조에 치를 떨었다.

마스크를 재빨리 내려서 페이스 아이디로 로그인을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할 동안 내 기대치는 최고조에 이르렀고 두근두근 하는 마음에 구매내역을 확인하면. 항상 내 애플워치는 <준비 중>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대실망쇼에 목숨이 좀 줄었을 지도 모른다. 분명 내분비계 어딘가에 악영향을 미쳤을거라고.

그래서 매일매일 이걸 어느 시점에서 취소 하는게 가장 현명한 행동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가장 현명한 것은 이걸 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만...

그런거 있지 않나. 정말 필요한거냐 아니면 갖고 싶었던 거냐 하고 물어보면 별로 할 말은 없다. 양 쪽 다 아니기 때문이다. 변명조차 할 수 없다. 몇 년 간 사야지 사야지 하다가 결국 산 거지만 이걸 가지고 도대체 뭘 하지 싶다. 역시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이게 만드는 애플의 마케팅 팀의 승리겠지. 이걸로 뭘 해야할지도 모르면서 사게 만들다니.

순순히 사실을 얘기하자면 카드 결제를 하고 난 다음, 배송 예정일을 봤을 때도 주문일로부터 6~8주가 나왔다. 방망이 깎는 노인에게 8인 식탁을 부탁해도 저것보단 빨리 도착 할 것 같았지만 당시 나는 거꾸로 좀 안심이 됐다. 그 동안 좀 갖고 싶은 생각이 없으면 구매를 취소해도 될 것이고, 8주는 충동구매를 반성하고 스스로 뺨을 두대 정도 때린 다음 카드 결제를 취소한 후 안심하기 까지 충분한 시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숨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는 이번이 웨어러블 기기를 산 처음이 아니다. 그것고 굉장한 돈 낭비였는데.
순토의 카일라쉬라는 모델로 발매 당시 120만원 쯤. 정확히는 웨어러블이 아니라 아웃도어용으로 유명한 메이커에서 스마트폰 연동도 되는 모델을 발매한 것인데. 코퍼 모델의 간지에 반한 데다가, “특정한 위치를 입력하면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그곳까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먼지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 불명의 기능에 마음을 빼앗겨 그만 사고 말았다. 너무 인문계스러운 프로모션 포인트 아닌가요. 내가 어디에 있든 네가 있는 위치를 등록해 두면 너와 나의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있어...하고...

네 물론 거의 쓰지 않았고 방 찬장에 그대로 있습니다. 처음엔 여행 갈 때 마다 차고 나갔는데, 생각해보면 제가 여행을 가는게 무슨 오지도 아니고...그냥 일본이나 하여간 아시아 어딘가라서 딱히 방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물론 툼레이더 리부트 작에선 고대 히미코국의 유적이라면서 일본의 오지가 나오지만 제 말을 믿으세요 일본에 그런 오지는 없습니다. 식생도 우리나라랑 거의 같아서 방향을 몰라도 휘휘 동서남북 한 번 돌아보면 방향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 같죠? 제가 홋카이도를 몇번이나 갔다고 생각하시는거에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시계를 차고 다니는 습관이 없는 사람이 이틀에 한 번은 충전해줘야 하는. 그리고 기능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과 이동루트를 트랙킹해주는 것 밖에 없는 물건을 차고 다닐리가 없었다...(물론 다른 기능도 자잘하게 많았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쓰는 건 그 정도였습니다)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플워치를 산 건 실수구만 싶긴 한데. 심지어 내가 샀다는 얘길 뒤늦게 듣고 구매버튼을 누른 친구가 나보다 3주 먼저 애플워치를 받았다. 3주 먼저 라기 보다 그 친구는 그냥 일주일 동안 배송이 빠른 다른 쇼핑몰을 쳐다보고 있다가 재고가 뜬 걸 보고 바로 주문을 했고 그 다음날 애플워치를 받았다. 100% 재생 알루미늄이라는 이유로 조금 장난감 느낌이 나는 블루 컬러를 산 나와는 다르게 친구는 스테인레스를 샀다. 과연...싶을 정도로 예쁘고 깔끔한 디자인이었으며. 나는 지금이야 말로 구매를 취소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과 아 억울해 진짜 이거 올 때 까지 기다린다!!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취소를 정말로 누르려던 날, DHL의 배송 번호가 떴다. 그러고도 약 7일간 추적 루트에 아무것도 뜨지 않아. DHL마저 나를 속이려는 건가 (저는 일 관련으로 DHL에 관해서는 무분별한 신뢰를 주고 있습니다)하고 화가 날 때 쯤에, 갑자기 회사로 DHL트럭이 찾아와 시계를 받았습니다. 어...감사합니다.

유용하냐고요? 어...일단 이제와서 이런 얘기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나는 시간 감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기차타고 다닐때 익힌 능력인데 대체적으로 지금 몇시 몇분인지를 가늠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원래부터 시계가 거의 필요 없습니다. 몇분이 지났는지도 대충 안다고요. 그래서 시계 페이스는 정보값이 제일 적은 사람 얼굴을 그래피티로 해둔 것을 하고있습니다. 귀여워요 누르면 조금씩 변한다는 점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쓰는 기능은 운동기록 기능과 아침에 깨워주는 알람 기능. 그리고 아이폰이 어디있는지 모를 때 커다란 소리를 내서 알려주는 기능 정도입니다. 후회하고 있느냐 하면 아니 뭐 어차피 산거고 귀엽고 해서 딱히 싫진 않습니다.

어쨌든 제 워치는 6세대에 파란색 알루미늄. 파란색 솔라루프를 하고 있습니다. 제 손목에 차면 정말 쪼끄마하답니다.

사람이란 원래 변덕스럽고 뭔가 실수를 하는 존재니까요. 실수를 함으로서 뭔가 고민도 해보고 수습도 해보면서 성장하는게 아닐까 한다니까요. 그래서 이번 애플워치 구매도 긍정적으로...잠깐만 어떻게든 그럴듯 하게 수습을 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20년 12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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