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너는 웃을지도 모른다.

19년에 나온 뱀파이어 윅켄드의 신보를 듣고 있다. 오늘 오전에 그렇게 까지 급하지도 않은 업무 전화를 하다가 버스를 놓쳤다. 버스를 하나쯤 놓쳐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업무전화가 길었으니 사실은 세개 쯤 놓친 셈 이었고 그래 결국 비행기도 놓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만원 정도만을 물고 비행기를 바꿨지만, 본인의 바보 같음에 몹시 시무룩해져서는 항공사의 라운지로 기어들어가 책을 읽었다.

그러니까, 국적기의 라운지는 처음이었다. 전에 해외 출장 중에 국내선을 이용해야 했을 때 일정이 뜨자 동행한 회사 사람이 따라오라며 라운지를 데리고 갔을 때가 있긴 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항에 넘쳐나는 것이 있다면, 눈치 없고 불평이 많은 사람들과 불편하고 별로인 의자가 아닌가. 그런걸 일부러 더 좁은 공간에 모아둔 곳이 있고 또 거기에서 굳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하지만 티켓을 새로 끊어준 직원 분께서 시간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라고 하며 친절하게 지도까지 그려서 주는데 달리 안 갈 이유도 없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오늘 이러한 사태가 일어날 복선이었는지 얼마 전 항공사의 등급이 하나 올라갔고 덕분에 쓰지 않으면 언젠가 없어질 라운지 사용권이 있었다. 라운지에 입장하며 라운지 사용권이 없으면 여길 돈을 쓰고 사용하는 건가, 하는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처음 들어가본 국적기 항공사 라운지의 의자는 공항의 의자보다는 나은 수준이라서 쿠션이라는 것이 있었다. 요즘 공항의 의자들은 100이면 90은 쿠션처럼 생겨먹은 구조물을 의자에 붙여놓고 앉는 사람의 엉덩이를 공격하기에 바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기개 있는 젊은이를 본 노인처럼 좀 흐뭇해지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무려 4시간이나 여기에 이러고 있어야 하잖아.

컵라면에도 볶음밥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서 찬장에서 맥주조끼를 꺼내, 탄산수를 벌컥벌컥 담아 꿀꺽꿀꺽 마셨다.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공식적으로 비행 중이라 연락도 되지 않을 상황에서 굳이 일을 해야하나. 나는 실은 어제도 10시가 넘어 퇴근했고 매주 지엄한 국법을 어기고 50시간에서 60시간씩을 일하고 있다. 출장을 가느라 오늘 내일 모레 3일은 그나마 하루 8시간 일한 것으로 체크가 될텐데 거기에 더 일을 하라고? 아니 심지어 오늘 오전 내내 일했잖아 일하느라 비행기도 늦어서 내 돈으로 차액냈잖아. 다시 한 번, 나는 탄산수를 담아 꿀꺽꿀꺽 마셨다. 그거 말고는 터져나오는 심술보를 달랠 길이 없었다.

가져온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집에서 반쯤 읽은 책인데 중간에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하면 다 읽지 못할게 될 것 같아 가져온 것이라 금세 다 읽고 말았다. 좋은 독서였다. 글을 안 쓰게 된 이후로 글을 읽는 시간이 늘었다. 좋은 책을 머릿 속에 넣고 그걸 곱씹는 것은 항상 좋은 경험이다. 하지만 어쩌나 지금은 시간을 보내는게 목적인 걸. 방금 다 읽은 책을 바로 한 번 더 읽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는다. 가져온 다른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읽은게 데이터와 세계의 진보에 대한 책이었는데 그 다음 책이 스티븐 킹의 단편집이라니. 균형있는 독서도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맥주 조끼에 탄산수를 담아 꿀꺽꿀꺽 마시는 것 뿐 일까.

나는 뒤늦게 아이패드와 넷플릭스를 떠올리고 벌떡 일어난다. 지난 번 비행 때 넷플릭스 동영상 몇개를 저장 해 둔 것도 떠올랐다. 의기양양하게 넷플릭스를 펴서 저장한 동영상을 보았다. 넷플릭스로 저장한 동영상에 만기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에러 메시지의 내용은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저장해주세요”였다. 그래 아무렴 상관없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 있으니까. 하고 넷플릭스를 살펴본다.
그러고보니 요즘 입에 넷플릭스 볼거 없다는 말 달고 살지 않았었나. 주의 깊게 보고 다시 한 번 보았지만 그래 진짜로 넷플릭스에 볼 게 없었다. 굳이 비행기 안에서 볼만 한 것도 없었다. 미련을 버렸다. 이놈의 넷플릭스 내가 서비스 해지하고 만다. 하고 이를 갈았다.

이럴 거면 그냥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침 백팩에 랩탑을 넣어두었으니까, 그냥 열어서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사외접속시스템에 들어가 미뤄두었던 레포트 하나랑 메일 몇개 회신만 하면 되지 않을까. 백팩이 유혹적으로 열려있다. 그냥 손을 들이밀기만 하면 랩탑이 거기 있고... 하는 순간 거래선에서 전화가 왔다. 받기 싫다. 짜증난다. 아니 도대체 왜 이걸 받아야지. 왜 일을 해야하지 하는 생각에 또 맥주 조끼에 탄산수를 담아 왔다.

사실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별로 없으니까. 그러니까 하고 생각한다, 그래 이제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 너는 웃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뭔가를 하고 있으니까, 가끔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 하지 않아서 이런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한다.
나는 라운지의 소파에, 아니 그냥 쿠션이 붙은 1인용 의자에 기다랗게 기대 눈을 감고 노래를 듣는다. 나에게 남은 것이 글을 쓰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하지 말아줘. 글 같은 건 안 써도 되잖아. 차라리 그림을 그릴게. 지나가는 뚱뚱한 코카서스인을 그리는 건 어때?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림을 그리진 않는다.

그래 이럴거면 차라리 뭔가 쓰자 하고, 아이패드를 꺼내 정말로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이제 금방 비행기를 타야하는 시간이 되지만. 그래 이제 금방 시간이 다 될테지만. 지금은 글을 쓴다.

19년 5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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