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다.

보통 너무 커다란 것을 보면 무서워 지기 마련인데(예를 들자면 미군부대에서 시킬수 있는 점보 사이즈 버거와 밀크 쉐이크, 슈퍼모델, 너무 큰 레포트 뭉치..) 나무는 아무리 커도 사람을 무섭게 만들지 않는 몇 안되는 물건이다.

싱가폴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많다. 길가에, 공원에, 그리고 도심에 아무렇지도 않게 수십년 수령의 커다란 나무들이 서있다. 남쪽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한 걸까? 아니다. 최소한 내가 본 방콕의 시내는 그렇지 않았다. 위도상으로 방콕이 살짝 북쪽이긴 하지만 거의 같은 기후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싱가폴은 훨씬 푸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싱가폴의 나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수종이다. 수십년전 아프리카에서 나무들을 사와 자기들의 땅에 심은 싱가폴 행정부는 나무에 번호를 붙이고 세심하게 그들을 관리한다. 이 섬뜩해보이기 까지 하는 싱가폴의 섬세한 국가정책은 싱가폴의 힘과 이 작은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모두 간접적으로 알수 있게 해준다.

싱가폴은 흔히들 유교적 사회주의라고들 한다. 농담처럼 현재 존재하는 단 세 개의 사회주의 국가를 일본, 싱가폴, 북한이라고 하는데, 싱가폴은 단 한 사람의 구상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정신적으론 영국인이자 싱가폴의 국가적 멘토인 '리콴유'는 오랜 시간에 걸쳐 싱가폴을 정교한 예술 제품처럼 만들어냈다. 물론 싱가폴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명성이나 국제적인 위상을 생각하면 이 적도 부근의 도시국가가 단 2세대 정도(65년 공화국 설립)에 만들어졌다는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물론 그가 싱가폴을 독재 하에 운영하고 있으며 수상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맡김으로서 세습체제로 영구적인 권력자의 위치까지 노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국가들 또한 독재정부 하에 운영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 지역에서 싱가폴의 경우가 그리 특별하다고 볼 순 없으며 오히려 같은 독재 정부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자본 이동과 탄탄한 해운 산업 기반으로 일본과 홍콩에 버금가는 아시아 자본의 상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의 독재가 매우 특별한 것이란걸 반증한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자본을 싱가폴로 결집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것이다. 혼란 속에 빠져 있던 1960년대의 동남아시아는 많은 자원과 인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재나 군부의 통치 속에서 효율적으로 통제 할 수 없었고 행정적인 통치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국민들은 교육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낮아 치안도 불안했다.

그러나 일찌기 영국의 식민지이자 일본의 식민지였던 싱가폴은 일단 공화국으로서 기능하게 되자 사회주의 기조 하에 강력한 행정력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모든 독재국가는 강력한 행정력을 가질 수 밖에 없지만) 안정적인 국가환경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다. 일단, 강력한 벌금과 국민통제를 통해 치안 등에서 외국에 신뢰받을 수 있게 되자 안그래도 해운에 있어서 중심지였던 싱가폴의 항구들은 치안이 불안정한 주변의 항구로 가는 배들을 모두 끌어들일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안정적인 치안과 효율적인 해운이라는 메리트는 주변의 화교자본을 끌어들이면서 싱가폴의 빠른 성장을 견인해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보이는 싱가폴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싱가폴 정부의 사회주의적인 특성때문이다.
싱가폴 도심을 다니다 보면 뜬금없이 녹지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새로운 쇼핑센터(한국과는 전혀 다른 규모와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가 어디선가 계속 지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으로 가장 번화한 상점가인 오차드 로드에서 조차 새로운 쇼핑센터가 생겨나고 중심지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클락키에 5년전에만 해도 없던 레스토랑 가가 생겨나있다. 그건 싱가폴의 모든 토지가 실질적으로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99년, 999년 기준으로 국가를 사용자에게 빌려주며 이런 정책은 국가가 지대를 통해 자기의 배만 불린다고 비판을 듣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도시국가로서 부동산이 폭증할 가능성이 있는 싱가폴의 땅값을 안정시키며 낮은 수준으로 유지함과 동시에 국가가 전체적이고도 효율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해서 언제라도 도심지역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서의 건축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하자면 영등포에 새로 생긴 타임스퀘어는 경방백화점의 자리에 생겨난 것으로 과연 우리나라의 그런  번화가 자리에 더 이상 대규모의 쇼핑몰이 생겨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한 서민아파트를 가장 중요한 지구인 지하철 부근에 건설함으로서 월 20만원 이하의 집세만으로도 서민들이 자기 집을 가질 수 있게 관리. 싱가폴의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유교적인 서민주의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건 다민족 국가인 싱가폴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싱가폴은 불안정한 국가이다. 독재로 인한 강력한 행정과 결집되어 있는 국제적 자본, 사회주의 기조를 통해 이룩한 서민정책에도 불구하고 싱가폴의 위치는 불안하다. 전술한바와 같이 다민족국가에 외국인 노동자(한국 교민 2만, 일본 교민 7만..싱가폴 전체 인구가 430만 정도지만 실질적으로 300만 정도만 싱가폴 국민이라고 한다.)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싱가폴은 군사적으로 강력한 대국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낀 모래성과 같다. 싱가폴 자체적으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역사가 짧아 충성도가 낮고 소속감이 거의 없는 싱가폴의 국민들은 국가 산업 특성상 자유화 되어 있는 자본의 이동을 등에 업고 언제든지 싱가폴을 떠날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나무에 번호를 붙이듯이 통제해 온 싱가폴의 국민들이 국가적 위기에서 자신들의 자본을 희생해가며 싱가폴에 충성하리라 생각하기 힘들다. 민주주의 체계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쓸려나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바로 국가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자각에 의해서 였던 것이다.

1923년생인 리콴유에게 남은 시간이 길다고 보긴 힘들다. 얼기 설기 만들어져 강력한 행정력과 사회주의 기조 아래 완성된 이 나라가 언제까지 유지 될 수 있을지는 알수 없다. 싱가폴이 가진 강력한 자본은 사실 싱가폴이 가진 무기이자 주변 국가들이 싱가폴을 노리게 만드는 먹음직스러운 과실이다. 이 작은 나라가 작은 지방이 되는데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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