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서 형은 딱 두 사람 밖에 없다. 두 명 다 이모의 아들들로서 여기서 나오는 형이란 작은 사촌형 쪽을 의미한다.
이 형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하루 종일이라도 얘기 할 수 있다. 내 최초의 기억에도 형은 있었고 내 가장 최근의 기억에도 형은 있었으며 내 여름의 기억에도 겨울의 기억에도 형이 있다. 핸드폰의 단축번호는 7번이고(엄지손가락으로 누르기에 제일 편한 번호다.) 내 여자친구들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은 형이다. 여자친구가 없어질 때 마다 형은 나를 데리고 여행을 가거나 데이트 연습을 했고 서로의 엉덩이를 발로차며 이래서는 안된다고 반성을 하곤 한다.

어쨌든 젊었을 때의 외할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형은,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왠만한 파는 음식 정도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미적인 재능이 뛰어나 가끔 놀랄 정도의 그림을 그리곤 하고. 책을 엄청 읽는다. 외가쪽의 특징인 괴팍하고 배타적인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상냥해서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노인에게 공손하다. 요는, 직업이나 학벌/배경 같은 것을 제외해도 어떤 여성들에게는 사정없이 어필할 수 있는 실로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형 남자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사촌동생인 내 입장에선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불완전한 창조물일 따름이지만, 형이랑 같이 있으면 나도 즐겁게 놀 수 있기 때문에 



나.
겨울양복 한벌, 여름양복한벌, 겨울양복여름양복의 엑스트라 트라우저 한 벌 씩, 맞춤 셔츠 6장(한장은 보너스)

 

형.
겨울양복 한벌, 여름양복한벌, 여름양복의 엑스트라 트라우저, 맞춤셔츠2장

 

아무 생각없이 가게에 들어선 관광객에게 이 정도 물건을 팔아치우니 누가 그를 장사꾼 오브 장사꾼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도를 깨치고 어리석은 관광객들을 주무르니. 그의 무자비한 상술에 대해서 여기 적어본다.

 

 

곧 입사 하게 되니 양복을 사거라. 하는 소릴 많이 들었다. 어머니는 계속 양복을 사라고 재촉하셨지만 그닥 몸에 와 닿지도 않았고 비싼 물건을 살 때는 오래 고민하는 스타일이라서 다 무시하고 그냥 살고 있었다. 하지만 방콕이 물건이 싸다는 이모의 부추김에 방콕 시내를 구경하는 중에 몇 번 씩 양복점에 들러서 가격을 알아보곤 했다.

 

그러다 운명의 장소, 한국여행사도 있다는 카오산 거리에 이르렀을 때 일은 터지고 만다. 이제 태국에서 영어를 쓰는데 주저함이 없어진 나는 카오산 거리 곳곳에 있는 양복점에 들어가 까다로운 양복구매자인척 하면서 캐시미어 몇 퍼센트 라느니 재봉선이 어떻다느니 투덜거릴수도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여유. 철없는 일본인인척도 하고 철없는 한국인인척도 하면서(태국 사람들은 일본/한국의 구별을 거의 못한다.) 마음껏 현지의 재봉사들을 농락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다 대부분 5천바트 선에서 (17만5천원이다. 맞춤양복 한 벌 가격이...) 해결된다는 걸 알고 한 벌 정도 맞춰볼까 싶어서 카오산 거리 입구에 있는 KIng's international tailor에 시험삼아 들어갔을때.

아 여긴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야했다.

보통 카오산 로드의 대부분의 가게가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데 단 입구의 뉴 보스턴과 킹즈 인터내셔널만이 호객을 하지 않는다. 킹즈 인터내셔널은 입구에 인도인 한 명이 의자에 앉아 나른하게 쉬고 있을 뿐이다.(후에 이 사람은 파파 짐의 노예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좋은 사람인 것 같긴 한데 너무 게이스럽다. 옷 입을 때 뚫어져라 쳐다본다)

여기서 돌아갔으면 좋을 것을...가게에 들어가니 수염투성이의 인도인 할아버지가 앉아있다. "뭘 도와드릴까 친구여."이런다(물론 영어다) 그럼 그 순간 웬만큼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사람 뭔가 다르다. 가격이나 알아보자 하며 실실 웃으며 들어왔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더니 연습장에 엄청난 악필로 가격을 제시해버린다. 어디서 왔냐를 물어보더니 싱가폴, 한국 정도의 키워드가 나오자 마자 뭔가 그에 관련된 고객리스트를 쏟아낸다.(가게 천장에 세계 곳곳에서 온 고객들의 사용후기가 붙어있다 ㅋㅋㅋ아욱 ㅋㅋㅋ)

그는 뭘 사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이 만큼 샀다. 네가 이만큼 산다면 난 이렇게 해주고 싶다. 옵션은 이거랑 이거다. 라고 제시한 후 고민하고 있다가 옵션에 대해 물어보면 (물론 산다고는 아직 말 안했다.) 스무스하게 다음 절차로 넘어가버린다. 어느새 사는게 되어버렸다.

보통 가게에 가게 되면 난 너무 예의바르게 굴거나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장사치들이 당황해 과도하게 친절하게 군다. 하지만 파파짐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나는 왕, 이라는 태도로 한가하게 앉아서 잘 알아보라. 하지만 여기서 한다면 난 이런걸 해준다. 이러면서 일을 후다닥 진행해 버린다.

연애로 친다면 어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부모님 상견례. 이런 느낌이다. 자기야 그냥 밥먹는거라고 했지? 이러고 갔더니 여자친구 아버지가 장인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이르지 않냐고 호통을 치시고 어머니는 여보 그러지 마세요 호호 이러더니 식장은 아는 곳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격이다.

 

형은 정신을 못차리고 으헤헤 파파 짐 이러고 있고. 그나마 정신줄을 꼭 붙잡고 있었던 나는 파파 짐이 얼굴 색이랑 옷감을 대봐야한다며 모자를 벗겨버리자 (아무리 봐도 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벗긴거다. 제기랄...)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해서 굽실굽실. 파파짐의 관대한 처우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되었다.

이런 전문가 장사치와 교섭 할 때 내 전략은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가 먼저 무너지게 만드는 건데, 안 통한다. 어설픈 지식이야 20년이 넘게 재봉사 일을 하고 있는 파파 짐에겐 통하지 않는다. 3살짜리 애 팔 꺾어놓듯이 파파짐은 실크로 양복 안감 까지 신청해버리고 말았다. 우리 예산이 얼만큼인지 알기라도 하듯이. 예산의 거의 꼭대기 까지 우릴 밀어넣었다.(이건 형이 내가 내년에 입사한다느니 하는 소릴 해서 그런것도 있다 딴 가게에선 말도 거의 안하면서 파파짐에겐 어느 학교 나왔는지도 털어놓을 기세였다)

 

치수를 재고 카드로 가격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서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 속은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이 파파짐의 무자비한 상술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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