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라는데, 도착하고 나흘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큰 비를 봤다.
싱가폴의 창이 공항으로 택시를 잡으러 나갈 때 부터 바람이 불고 하늘이 어두워 지더니 택시를 타자 차창에 뭔가 쏟아지는 소리가 나며 비가 부딪혀온다. 걸어다니는 모든 것의 무릎을 꿇리고 서 있는 것 모든 것들의 고개를 숙일 만큼의 비다. 시야가 어두워져서 보이지 않을 정도다. 휴가를 내고 나와 함께 태국에 가는 형과 매일 매일 맛없는 파스타 만들기 기록을 갱신하고 있던 나는 촌스러운 북반구인 답게 쏟아지는 비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본다. 

싱가폴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그건 산업적으로는 해운운송의 중심국가라는 뜻이고, 관광객에게는 싱가폴을 기점으로 하면 어느 나라도 싸고 가고 쉽다는 뜻이다. 북쪽으로는 육로로(!)말레이시아에 갈 수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배타고 금방. 태국이든 필리핀이든 저가 항공(Budget airline)을 타면 싸고 쉽게 갈 수 있다.
4박 5일의 짧은 여정에, 체류지는 방콕으로 한정했다. 여행지에서 혼자서도 잘 노는 형인지라 내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계획이 있는 것 같은 얼굴로 결연히 태국 지도를 펼쳐본다.(형이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것은 호텔에 가자마자 밝혀진다.)
문명 국가 싱가폴도 이렇게 더운데 관광국인 태국은 얼마나 더울까. 눈물이 났다. 마음에 땀이 났다.

싱가폴은 세련되었다. 아마 적도 부근의 어떤 나라보다도 세련되었을 것이다. 관광객을 보아도 외국인을 보아도 그들은 관심이 없고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진 공항과 쇼핑몰은 친절하다기 보다 예의바르게 사람들을 맞는다. 하지만 세련됨을 가장한 그들의 무표정은 일본에서 느낀다는 서양인들의 섬뜩함 이상일 것이다.

대국 중국의 마지막 꼬리로서 적도에 다다른 싱가폴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정책상으로도 관광객들이 필요 할 것이다. 볼모로서, 면세 혜택과 화려한 소비문화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도시국가.

매일같이 싱가폴을 입에 올리고, 브로슈어와 광고에는 싱가폴과 머라이온의 상징이 끝없이 등장한다. 유교적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에 두었음에도 자유무역에 선두에 선 싱가폴은 모순된 나라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에도 쏟아지는 비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 나라가 어울리는 땅이 있다면 그건 분명 강철의 침엽수와 거울같은 호수가 있는 겨울의 땅일 것이다.

여름 나라라는 이름은 아름답고 어설프며 더럽고 친절한 불교의 나라 태국에 좀 더 어울리는 것이리라.

문득, 수영이의 큰 딸이 생각났다. 싱가폴에서 태어나 싱가폴에서 자라난 3살 짜리 꼬마. 큰 이마와 선연한 눈매를 가지고 태어난 그 아이의 속을 알 수 없는 머리는 비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어렸을 때 내가 했던 것처럼 이마에 달라 붙은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창가에 머릴 대고는 놀라움과 아련함으로 비를 바라보고 있을까.중국어와 한국어, 영어로 사고하는 그 아이는. 싱가폴을 고향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비를 볼 때 마다 느끼는 이 아련함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28일 밤 태국에 도착하다. 방콕의 스완나품 공항은 아름답지도 편리하지도 않았고 싱가폴보다 높은 기온의 방콕의 밤 바람은 뜨겁다. 하지만 한국이 아님에도 태국은 편안하다. 사방이 이방인이며 이방인들은 모두 미소를 짓는다. 현지인들 또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나는 이 친절함을 거부하기 위해 고독을 몸에 두르고, 밤을 걷는다.
그리고 한 번 더 그 작은 여자아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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