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현재, 싱가폴에는 빨간은행과 파란은행의 내전 중이다.

모든 ATM
은 빨간은행..즉 화교은행과 파란은행즉 대화은행 두가지 종류로 이루어져 있으며. 필연적으로 모든 싱가폴인들은 저 두 은행 중 하나의 추종자로서 다른은행의 ATM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테러하고, 그 은행들의 크레딧 카드를 모아 집을 장식하거나. 응 그런 일은 없다. 미안하다.

두 은행은 어딜 가나 쌍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ATM도 항상 동수로 설치되어 있다. 씨티은행같은 글로벌해보이지만 소수세력은 발을 붙이지 못한다.(정말로 돈을 뽑으려면 시티홀에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 기묘한 붉은 색과 푸른 색의 조화는 뭔가 문화적인 특이현상을 관찰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한다. 어쨌든 한국인이 보기에 ATM에 말도 안되게 길게 줄을 선 싱가폴인들은, 어쩐지 외국인으로선 알 수 없는 종교의 신도들이라는 느낌을 준단 말이다. 그것은 ATM이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서나 부족하기 때문일까?
씨티홀 주변의 시티은행에 갔는데 거기도 ATM이 고작 4. 각 은행의 신도들은 서로를 향해 불신과 경계의 눈초리를 날리며 질서정연하게 돈을 인출해간다. 빨간은행과 파란은행 모두 자비로운 지배자는 아닌 듯. 씨씨티홀 ATM하나만 더 설치해도 좋지 않을까. 아니다 외국의 종교적인 문화에 너무 신경을 쓰면 지는거다.
한국에는 동네 슈퍼에 한 개가 있고 조금만 번화해도 6개에서 4개 정도가 갖춰져 있는걸 생각하면, 그건 싱가폴에선 독신에 가까운 무서운 행위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소중한 싱가폴 달러를 인출한다. 나는 빨간은행의 신도도 파란은행의 신도도 아니지만, 씨티은행의 신성한 ATM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신에게로 가는 단 하나의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신의 사도 ATM은 입을 벌리고 신의 은혜를 내뿜으시는데, 이 돈이 원래 내가 저축했던 돈이라는 은혜도 모르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오오 신이시여. 나의 영혼을 현찰로 채우시사. 

 

이 빨간 은행, 파란 은행 얘길 해준 것은 내 오랜 친구인 여자아이(파란은행의 독실한 신자이심). 이젠 딸 둘의 엄마로 어쩌다보니 은근슬쩍 26일 오후에 만나게 되었다.

158번 버스를 타고 Aljunied역에 도착하고 녹색선 지하철을 타고 붉은선 Bukit Batuk역에서 내려 77번 버스를 타고서야 도착했다. 고생스러웠지만 보람은 있었다. 작은 딸은 유모차에 태우고 큰 딸은 손을 잡고 나타나서는 배시시 웃는데 예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나보다 한 살 어리면서도 두 아이의 엄마라는게 기묘한 느낌을 준다. 2001년부터 알았던가. 내게 이젠 거의 없는 오래된 지인이다. 어찌어찌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내 외국에 가서 까지 만날 정도가 되었다.

 

새침떼기 큰 아이와 기가 쏀 둘째. 어디선가 본 듯한 두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자기도 그닥 잘 걷는 것도 아니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동생이 넘어질까 손을 꼭 잡고 놓치 않는다. 낯선 아저씨가 유모차를 끌자 동생을 데려갈까 무서웠는지 유모차를 쥐고 유모차에 질질 끌려가듯 따라간다. 엄마가 동생에게 밥을 먹이자 혼자 카스텔라를 먹고 있다가 콧노래를 부른다. 콧노래를 부르는걸 낯선 아저씨에게 들키자 자기도 모르게 새침떼기짓을 못하고 배시시 웃어버린다.
동생 손을 꼭 잡은 모습이 너무 뭉클해서 오래도록 마냥 쳐다만 보았다.

너는 앞으로 커서 빨간은행의 신도가 될지 파란은행의 신도가 될지 모르겠지만.
동생을 언제까지나 사랑해줘야한다.

바보같은 글에 어떻게든 훈훈한 결론을 내려는 내 노력이 가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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