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키 선생님께,

 

여름문안인사를 드리고 싶은 날씨입니다.
가본적은 없으나 일본의 여름이 이렇지 않을까 싶게 하늘이 파랗습니다. 선생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이곳은 선생님께서 싱가폴의 호텔에서 일하고 계실 때와 많이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북극이 그렇듯이 적도 부근의 나라는 달라지기 힘드니까요. 이렇게 끝없이 지속되는 여름이 있는 나라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여름이 지속되는 한 아마 이 곳은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계시던 그 때 그 대로의 풍경을 저도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겁니다.

선생님, 얼마 전 저는 지하철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여학생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 봤을 리는 없겠지만 보란 듯이 한국어 교재 프린트를 제 앞에서 들고 공부하는 모습에 저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수도는_입니다. 라느니. 저의 이름은_입니다. 라느니. 간단한 한국어 회화와 한국단어들이 있는 교재가 매우 귀여웠습니다. 어쩌면 제가 한국인이란 걸 알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이 곳 사람의 말로는 제가 같은 동양인이라고 해도 굉장히 달라 보인다고 합니다. 키가 크고 하얗기 때문에 중국인으로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말이라도 걸어봐야 했을까요. 어쩌면 열심히 하라고 응원이라도 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이대 앞을 걸어 갈 때 아무리 두꺼운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다녀도 일본인인걸 모두 알아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려나요.

 

선생님은 일본어를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시나요.

귀엽다는 생각을 하시나요? 어쩌면 이 곳은 일본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시게 되시나요.

저는 항상 세상 어느 곳이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건방지게 외국이라곤 다녀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rpg에서 세계 어느 곳을 가도 결국 마을은 똑같은 텍스처를 사용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곳이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어떤 부분에선 제 생각이 맞긴 했지만 제 생각이 틀리기도 한 듯합니다. 싱가폴의 번화가인 타운홀과 오차드 로드 일대를 걸어다니니 완전히 다르고도 비슷한 한국의 번화가가 생각나더군요. 세계적으로 확산된 자본주의의 구동방식에 알맞게 진화했지만 지역에 따라 다른 팔과 날개를 지닌 짐승들처럼 똑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도쿄, 서울, 싱가폴동아시아의 한 형제들.


선생님, 싱가폴 또한 한국의 여느 곳이나 다를 바 없는 땅이었지만, 동시에 이 곳은 한국이 아니었습니다. 제 주장이 맞다면 전 싱가폴에서도 한국에 있을 때와 똑같이 행동하고 외로움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아야 했는데, 전 왠지 참혹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차라리 제가 완전히 흰 피부에 금발머리를 한 외국인이었다면 이 참혹한 기분을 이그조틱이라느니 하면서 웃으며 넘겼을텐데 나와 비슷하고도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 곳에서 입안에 모래가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지도 모르겠군요.
화려한 쇼윈도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소비의 천국에서 저는 아무래도 고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느낀다는 상실’이란게 뭔지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미련이 없어졌다고 생각한 한국 땅을 그리워하고 슬퍼하게 된 것이겠지요.


저는 어쩌면 영영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모든 눈물을 머금은 그 곳으로요.
봄의 꽃과 여름의 밤 가을의 달과 겨울의 공기.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한 저의 고향으로요. 제 몸 하나하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내주었고 또 그것을 모두 거둬갈 제 하나 밖에 없는 고향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정해진 수순이라면, 제가 이 여름 나라의 매일 밤을 오열하면서 보낸다고 해도. 결국은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지겠지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사람의 명운을 움직이는 것이 신도 개인의 의지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영혼이고. 결국 언젠가는 있어야 할 곳에서 고요히 잠들게 된다고 한다면요.

선생님, 이 곳의 밤은 아름답습니다. 바람이 불고 또 바람이 불어옵니다.
하지만 여기에 제 자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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