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사진관 집 아들. 사진을 찍는 걸로 돈을 번 적도 있지만, 최근 충격적이게도 아마추어에게 "사진 정말 못찍으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닥 틀린 얘기도 아닌지라 겸허하게 자신의 형편없는 촬영실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카메라를 갖게 된 것은 8년만이다. 군대에 가기 전 원래 아버지의 카메라였던 니콘과 렌즈를 돌려드리고 사진을 이제 다시는 안 찍어도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게 8년 전인 거다. 그 동안 두 명의 대통령이 있었고(세명의 대통령이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몇 명의 여자친구가 있었고 대학 2년생이었던 나는 2년차의 회사원이 되었지만. 카메라는 한 개도 없었다.
카메라가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진을 다시 찍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온 후론 주기적으로 카메라 뽐뿌에 시달렸다. 올림푸스 Pen에서부터 시작했고(실은 내 책상엔 지금도 오리지널 Pen이 있다. 바로 그 필카 말이다.) 소니의 Nex나 알파 시리즈 같은 거. 때로는 회사에서 나오는 등외품 카메라를 사고 싶어져서 마우스 훨만 주륵주륵 굴리곤 했다. 옆자리의 과장님에게 말한다. 저 또 카메라 뽐뿌왔어요. 사지 그러냐. 아니 잠시만 버텨내면 됩니다. 이렇게 2년을 버텼다. 그런데 문득 Pen이 싸게 팔길래, 다른 것도 아니고 몇십년 째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Pen이길래 사버렸다. 5분만에 고르고 2분만에 결재하고 1분만에 후회했다. 왜 샀지 왜 샀지 그러면서.
회사로 배송지를 잡은 것도 그래서일까. 왜 안오징. 주말인데 왜 안오징.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게 싫었나보다. 카메라를 기다리는 것도 가지고 노는 것도 싫었나보다. 주말 내내 친구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뒹굴거리면서 곧 도착할 카메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사실 잘 보지 않았다. 일도 바빴거고요. 카메라가 도착했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얼른 택배 상자에서 메뉴얼만 빼서 가방에 집어넣고는 상자채로 봉인했다. 파트장이 다가오더니 왜 하이브리드로 샀냐. 똑딱이는 싫어서요. 데쎄랄은 부담스러워요 고르는데 세달 사는데 한달 걸릴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더니 잘했네. 이러고선 한참 상자를 본다. 삼성꺼 좋잖아. 옆자리 과장이 손사레를 친다. 무슨 소리에요 소니가 나아요 하이브리드는. 합치면 나이가 여든이 다되는 양반 둘이서 하이브리드로는 뭐가 좋은지로 싸우기 시작한다.

집에서 상자를 뜯었다. 하얗다. 응 내가 하얀거 샀지. 싶어서 배터리를 충전시킨다. 메모리를 꽂는다. 그랬더니 할게 없어서 만지작만지작 스트랩을 묶는다. 한참이 지나도 충전은 될 기미가 안 보인다. 잠시 꽂았다고 충전이 되면 더 이상한게 아닐까. 모르겠다. 왜 충전이 안될까. 메뉴얼은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예전엔 셔터 스피드랑 조리개만 대충 계산해서 노출 맞추면 됐었는데. 포커싱은 렌즈를 만지작거려서 헀는데. 뭐야 이건. 잔다.

이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배터리를 꽂는다. 켜보니 켜진다. 날짜를 맞춰보니 맞춰진다. 최소한 시계할만큼은 되는거지? 생각했다. 렌즈를 끼워보니 예쁘다. 흔들흔들 흔들어보고 메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간지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싶어서 카메라를 이곳 저곳에 겨눈다. 카메라를 잡은 손이 낯설다. 이젠 차라리 요리를 더 잘할거다. 프레스코화를 그려보라고 해도 이렇게 당황하지 않을텐데

찰칵, 하고 카메라가 돌아간다. 오른손에 잡히는 렌즈가 낯설지만. 친하게 지내자. 라고 말을 걸었다. 

카메라도 뭔가 대답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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