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번 여행 동안 한 번도 혼자 였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기분 상 그렇다는거지, 사실은 완전히 혼자였다. 밥도 혼자/잠도 혼자/기차도 혼자 탔다.

자세히 얘기해보자면, 비도 혼자 맞고 길도 혼자 헤맸고 산도 혼자 탔다. 이 여행기의 뒷 부분에 끝없이 나오겠지만 내 이번 홋카이도 여행의 반 이상은 길을 잃어서 외진 오지를 미친듯한 속도로 주파하거나 비가 오는 거리를 헤매거나 기차를 놓치는 일로 가득해서 여행을 누군가와 같이 시작했어도 여행이 끝날 때 쯤엔 외톨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믿어도 좋다. 나도 몇번이나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는 외딴 곳의 의자에 앉아서 왜 이런 결정을 했지? 하고 몇번이나 본인의 멍청함을 곱씹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인생 그것은 외로움.


어쨌든 혼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여행 중 내내 Anna Kendrick의 노래를 들었다.

2. 데이터 로밍을 해 갔기 때문에 친구들과 내내 메시지 앱을 주고 받았으며, 맛있는 걸 먹을 때 마다 SNS에 올렸다.

3. 작은 오리 인형과 여행 내내 같이 있었다.


그래 3번 이유 때문이다. 키 189에 서른이 넘은 나는 여행 내내 신 치토세 공항에서 산 작고 보드러운 오리인형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 아이디어는 별로 특이한 게 아니었다. 혼자 여행을 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도 아무도 없는 풍경, 기껏해야 접사. 또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셀카 정도 밖에 나올게 없었다. 그렇다면 사진을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하기 위해 포인트를 부여하기 위해 장난감이나 인형을 가지고 다니다 풍경에 조금씩 끼워두는게 재미있는 사진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친구에게 "동물 인형을 가지고 다니려고 해"라고 말하자, 친구가 몹시 불쌍하다는 듯이 "그래 혼자 여행다니면 외롭잖아"라고 동정해주었지만. 아니 원래 그런 목적 아니거든요. 정말로 사진을 잘 찍어보려고 그런 겁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건 서있거나 네발로 움직이는 모습의 곰 조각, 혹은 티라노스러운 공룡 같은 거였다. 

왜냐하면 멋지게 서있는 모습이어야지 위치 고정 같은 것에 신경쓰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석양을 배경으로 포효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정말 멋있겠지 하고 생각도 했다.

일단 이름을 Curtis라고 짓고 The world destroyer라는 별명까지 지어두었다. 

설정은 인간의 지구 지배에 저항하는 사나운 포식자로서 사사건건 인류가 만든 구조물들을 파괴하려 드는 걸로 정하기 까지 했다.그렇다 여기서 그냥 사진을 찍으려고 동물인형을 가지고 다닌다는 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미 폭주하기 시작한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문제는 여행 일정에 쫓기다 보니 한국에서 적당한 "커티스"의 후보를 찾지 못했고 신치토세 공항에 가면 곰 모양 조각상 정도야 얼마든지 있겠지 하고 좀 안일한 기분으로 여행을 떠났다. 물론 당연한 흐름으로 신치토세 공항에는 제가 원하는 곰이나 공룡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이상에 제일 가까웠던 것은 엄청나게 무거운 나무로 만든 곰 조각상이었는데 일본 추리 소설에서 구두쇠 숙부의 머리를 때리는데 주로 등장할 것 같은 단단한 제품이었다.


결국 아동을 위한 장난감 가게를 전전하게 되었는데, 고양이나 말 인형, 곰 인형, 개구리 등 여러가지 인형이 있었지만 결국 고른 것은 야마네 공방이라는 곳에서 만든 오리(실은 오리가 아니라 원앙의 새끼였다 맙소사)인형이었다. 아주 복슬복슬하고 귀여운 새끼오리들이 같은 바구니에 모여서 있었다. 손으로 만들어서 얼굴이 다 각각인 오리들 중에서 제일 통통하고, 제일 예쁘고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혼자서는 똑바로 서지 못하는 바보같은 오리가 "커티스"가 되었다.

혼자서는 똑바로 서지도 못하다니, 그래서 이 오리 인형은 처음의 목적이랑은 전혀 다른 그냥 "길동무"가 되었다.


물론 사진을 찍을 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진짜 오리처럼 갈색이었기 때문에 위장이 엄청나서 조금만 수풀에 넣어놔도 보이지 않기 일쑤였고 바람이라도 불면 데굴데굴 굴러서 어디론가 사라질 뻔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내 책상에 앉혀놓고 내 모니터를 쳐다보는 자세로 올려뒀는데 어느새 책상에 코를 박고 자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집중을 못하다니 얘, 아무래도 서울대는 못 가겠어요.


하지만 커티스를 주머니에 넣고 여행을 다녀서 다행이었다.

내 손안에 쏙 들어오는 보들보들한 이 오리는 주머니에 넣어두면 얼굴만 빼꼼 하고 내밀고 나를 쳐다보았다.

출국 때 면세점에서 산 향수(Creed의 Silver mountain water)를 매일 뿌려서 엄청나게 좋은 향기가 났다.

테이블에 커티스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으면 반은 미친 사람처럼 쳐다봤지만 반은 귀엽다며 같이 사진 찍게 해달라고 졸랐다.

길을 헤매다 문득 괴로워졌을 때 커티스를 무릎에 올려놓고 노래를 들었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사람은 이렇게 어리석은 생물이라서 살아있지도 않은 것을 사랑하고야 만다.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부드러운 감촉으로 주머니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지만 나의 홋카이도 여행은 커티스가 있어서 조금 더 즐거운 것이 되었다. 밥을 먹을 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버스 창가에 기대어두고 아무도 듣지 않은 내 콧노래를 듣고 같이 자전거를 탔다.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떻게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나는 작은 오리 인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길을 헤매는 사람에게야 말로 달콤함이 필요한 것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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